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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현재의 세계가 100년 전의 그 모습과 꼭 빼닮아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무언가 큰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불안감, 옅어져 가는 미래에 대한 확신. 평화를 수호하겠노라고 공언해왔던 이들에 대한 신뢰는 물론 그 실력마저도 의심스러워지고, 그만큼 인내심을 발휘할 만한 마음의 여유도 고갈되었다. 그리고 1914년, 거의 100여 년간 이어져 왔던 질서가 폐기되었다.


물론 혼자만의 괜한 생각이겠다. 재미는 없더라도 가급적 경박하게 책장을 펼쳐야 할 텐데, 매일 뉴스를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진 로덴베리가 <스타 트렉>에서 꿈꾸었던 세상, 적어도 사람들끼리 서로의 생존을 위협하지는 말자는, 그런 세상도 아마 쉽사리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전략과 전술을 요구받고, 어느 새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승리자와 패배자로 나누는 구분법도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밀덕도 아닌 주제에 급기야는 <전쟁론>에 손을 대었다.


적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적의 전투력을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죽이든 부상을 입히든, 다른 방법으로 파괴하든 철저하게 파괴하든 적이 싸움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만 파괴하든 상관없다. 따라서 전투의 모든 특별한 목적을 제외하면 완전하든 부분적이든 적의 파괴를 모든 전투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김만수 옮김, <전쟁론 제1권>, '제4편 전투 - 제2장 전투 일반', 갈무리, p.379


<전쟁론 Vom Kriege>은 <자본론>처럼 1권만 탈고되고 2, 3권은 미완, 그리고 아예 흔적도 확인할 수 없는 그 이후의 기획들로 남겨진 덕에 겨우겨우 읽으면서도 감히 제대로 읽었노라고 확신하기가 어려운 책이다. 다만 거의 본문 전체를 해설하다시피 한 옮긴이의 친절함 덕에(특히나 1권의 경우엔 거의 매 문단. 2권에서 내가 좀 오버했다는 듯 겸연쩍어하는 모습도 확인 가능) 정신줄을 놓고 똑같은 문장만 300번씩 읽는 사태까지는 다행스럽게도 가지 않는다. 분량도 거의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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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 1780 ~ 1831>


암튼 앞선 인용에서도 느끼셨겠지만, <전쟁론>의 어조는 냉정함을 넘어 냉담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전우여~ 그런 건 당연히 없고, 승리의 달콤함을 예찬하지도 않는다. 12세에 참전하여 프랑스 혁명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의 전 과정에 종군했던, 정말로 해봐서 아는 분의 생각을 대충 요약하자면, '전쟁, 뭐 어쩔 수 없다면 해야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게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건지는 알고 해야 할 거임. 정의? 대의명분? 숭고? 논리? 과학? 씨바, 입으로야 못할 게 없지. 실전에서 군장 메고 뛰면서도 그런 말이 나올지 내 두고 보겠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30~40파운드의 짐을 짊어지고 날씨와 길이 어떤 상태인지도 따지지 않고 며칠 동안 행군하느라고 무거운 발을 힘겹게 옮기는 병사, 건강과 목숨을 끊임없이 위험에 내맡기는데 그 대가로 말라버린 빵이나마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병사, 몇 천 명의 이러한 병사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흔드는 것이 있을까? 사람들은 전쟁에 이러한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는 알면서도 그것이 병사들의 의지와 힘을 얼마나 심하게 꺾는지 그리고 단지 그러한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 <전쟁론 제2권>, '제5편 전투력 - 제14장 식량조달', p.143


글타. 침대는 과학이 아니라 사람이 잠을 자기 위한 물건인 것처럼, 전쟁은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이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원대한 목표가 있더라도, 장맛비나 폭염, 폭설을 헤치고 행군한 병사들을 갈구기만 한다고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이 먹힐 리가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승리가 약속하는 장밋빛 미래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어찌 보면 그러한 환상을 졸라게 까는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간이 하는 것이기에 전쟁에는 결과에 앞서 엄청난 대가부터 요구될뿐더러, 수많은 실수와 판단착오는 물론, 욕심이 얽히고설키기도 한다.


실제로 1792년부터 1815년까지의 전쟁이 꼭 프랑스 vs 반프랑스의 구도였던 것만도 아니었다. 처음에야 혁명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왕정국가들 사이의 충돌이었으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대 프랑스 연합군이 연전연패하며 사실상 와해되고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양상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전형적인 패권 다툼으로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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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유럽 각국 사이에서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사내정치를 방불케 하는 눈치작전이 시작된 건 당연한 노릇. 클라우제비츠의 고향 프로이센의 경우에도 프랑스를 양아치라고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하노버의 영유권을 두고 영국과 사이가 나빠진 때를 틈타 '내가 그거 뺏어서 너님에게 주겠음'이라고 약속한 대인배 나폴레옹 사마에게 급호감을 보인다. 만약 그 약속이 지켜졌더라면 프로이센도 좋고, 나님도 이리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 좋았겠지.


하지만 나폴레옹은 끈덕지게 들러붙는 영국과의 화해를 원하게 되고, 프로이센과의 약속은 파기. 역시 미개한 것들은 안된다며 부심 쩌는 귀족분들께서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이제 함 슬슬 붙어볼까 하던 찰나, 1806년 프랑스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군대? 우리에게도 그렁 게 있었덩가?' 할 정도로 영혼까지 탈탈 털려버린다. 이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클라우제비츠는 땅도 빼앗기고 돈도 빼앗기고 멘붕에 빠져 거의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린 고국의 군대에서 탈영해서는 러시아의 군대에 합류, 이후 대 불 동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클라우제비츠는 이 오랜 전쟁을 통해 수많은 모순을 접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이제 좀 그만 싸우고 싶은데' 그러다가도 금세 '저 十새가!'라며 갈팡질팡한 태도를 보였고, 영국은 '오빠 한 번 믿어봐♪'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냥 하는 말이었는데 그걸 믿으셨어요?'라며 정색하기가 일쑤였다. 프로이센의 경우에는 '저넘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라더니 떡고물에 잠시 혹했다가, '역시 저넘은 안 돼'라며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면서도 정작 준비에서는 허술하기만 했다.


특히나 틸지트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어찌나 심한 굴욕을 당했는지, 나폴레옹에게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기 위해 주전파를 대표했던 루이제 왕비의 밀덕 지식과 미모...까지 동원해야 했다. 효과는 전혀 없었다고. 하지만 프로이센 뭇 남성들의 피를 끓게는 하였으니.


어쨌든 그래서 클라우제비츠가 얻은 교훈은 결국 전쟁은 인간이 한다는 것이었다. 군 개혁을 주도하다 주류에게 밉보인 탓에 탈영 경력이 꼬투리가 되어 사실상 나폴레옹 전쟁 이후 경력이 단절되었고, 어차피 할 일도 없던 차에 그는 실전이 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전쟁과 얼마나 다른지를 <전쟁론>으로 정리해두기로 한다. (전혀 다른 듯 비슷한 듯 마르크스와 은근 비교되는 면이 많다. 헤겔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그렇고, 젊을 때는 행동력 갑이다가 할 일이 없어지니 연구모드로 전환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책은 끈 떨어졌을 때 써야 제맛.)


공동체(민족 전체)의 전쟁, 특히 문명민족의 전쟁은 언제나 정치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고 오로지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일어난다. 따라서 전쟁은 정치적인 행위다. … 첫째, 전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도구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때만 모든 전쟁사와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전쟁사에 관한 방대한 양의 책에 대한 이해가 열리게 된다. 둘째, 바로 이 견해는 전쟁의 동기와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전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 <전쟁론 제1권>, '제1편 전쟁의 본질 - 제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p.76-80


(따라서) 전쟁은 기술이나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영역에 속한다. 전쟁은 커다란 이해관계의 충돌이며 그 충돌은 피를 흘려야 해결이 된다. 전쟁은 이 점에서만 다른 충돌과 구별된다. 전쟁은 그 어떤 다른 기술보다 장사와 잘 비교할 수 있다. 장사도 인간의 이해관계나 활동의 충돌이다. 그런데 장사와 훨씬 더 가까운 건 정치이며 정치는 더 큰 규모에서 이루어지는 장사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치는 전쟁을 일으키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생명체의 특징이 태아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전쟁의 윤곽은 이미 정치에 숨겨진 채로 존재한다.


- '제2편 전쟁이론 - 제3장 전쟁술 또는 전쟁학', p.219-220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크게 현실전쟁과 절대전쟁으로 구분 짓는다. 현실전쟁은 말 그대로 실제로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실전을 의미하고, 절대전쟁은 관념이나 이상, 혹은 이론으로서의 전쟁, 그러니까 일종의 사고실험 내지는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론>의 논리는 이 두 가지의 전쟁이 다르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과 실제는 다르다는 정도로 이해하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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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상황판단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점이다. 군장에 발이 달려서 제가 알아서 걸어가지도 않을뿐더러, 행군이 화창한 날에 배불리 마음 내키는 대로 마실 나서듯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실전에는 피가 요구되고, 땅을 판다고 무기나 식량이 짠~하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선 체력을 회복할 만한 휴식시간과 보급로를 확보해야 하며, 이를 위해 예비병력과 보급에 들어가는 자원이나 재정 확보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절대전쟁에서는 이런 현실적 어려움이 과소평가될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의 이상과 현실 간의 차이에 대해 대략 두 가지 측면으로 고찰해나간다. 첫 번째는 앞서도 말했듯 전쟁은 인간에 의해 결정되는 정치적 행위라는 것, 두 번째는 전쟁은 인간에 의해 실행되는 군사적 행위라는 것, 그리고 이 중에서도 특히나 첫 번째를 전쟁의 본질로 강조한다. 왜냐하면 전쟁을 하기 위해선 우선 전쟁을 하기로 마음부터 먹어야 하니까.


인간의 활동 중에서 전쟁만큼 그렇게 끊임없이 그리고 그렇게 광범위하게 우연과 관련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전쟁에는 우연과 함께 운명과 행운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 정신은 친숙한 대상이 모두 자신을 떠난 것 같은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들어서야 할 때가 있다. 이 경우에 정신은 이성과 함께 철학적 탐구와 논리적 추론이라는 좁은 길을 헤치고 나가는 대신에 차라리 상상력을 품은 채 우연과 행운의 영역에 머문다. 정신은 철학적 탐구와 논리적 추론의 초라한 필연성 대신에 풍부한 가능성에 빠져든다. 여기서 감격을 받으면 용기는 고무되며, 그래서 용감한 수영선수가 급류에 뛰어드는 것처럼 정신은 모험과 위험에 뛰어든다. … 이론은 인간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하며 용기와 대담성, 심지어 무모함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술은 살아 있는 전투력이나 정신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성과 확실성에 결코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어디에나 우연이 들어설 여지는 남아 있다.


-  <전쟁론 제1권>, '제1편 전쟁의 본질 - 제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p.73-75


고집은 이성의 결함이 아니다. 고집은 더 나은 신념에 대한 혐오를 가리킨다. 이 혐오를 이성, 즉 통찰력의 탓으로 돌리는 건 모순이다. 고집은 감성의 결함이다.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 즉 다른 사람의 이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단지 특별한 종류의 이기심 때문이다. 이기심은 오직 자신의 정신활동만으로 자신과 타인을 지배하는 데서 얻는 만족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위에 둔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면 일종의 허영심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허영심은 겉치레로 충분하지만, 고집은 사실에 대한 만족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제1편 전쟁의 본질 - 제3장 전쟁천재', p.136


전쟁을 하는 데 얼마만큼의 수단을 갖추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아군과 적군 모두의 측면에서 전쟁의 정치적인 목적을 고려해야 한다. 즉 적군과 아군의 힘과 상황을 살펴보아야 하고 적국의 정부와 인민의 성격 및 능력을 아군의 그러한 측면과 함께 살펴보아야 하며 적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정치적인 관계는 물론 전쟁이 이러한 관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 <전쟁론 제3권>, '제8편 전쟁계획 - 제3장 B. 전쟁의 목적과 노력의 수준', 135-136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건 너무나 유명해서 많이들 아실 듯싶다. 실제로 <전쟁론>은 이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다. 뭔가 어려워 보이지만 쉽게 말하자면, 전쟁은 사서 하는 고생이라는 거다. 전쟁은 인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행위이다. 누구도 원하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은 이해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무언가를 원해서 혹은 그런 넘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쟁해서 무조건 이길 수 있다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이기고 싶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은 현실에는 없다. 의지를 불태우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지 드립만으로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정복도 그리 어려운 게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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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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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결과를 장담하는 건 사기라고 본다. 승리는 당연한 거고 전쟁은 단지 그 과정에 불과하다는 믿음은 실행의 어려움을 도외시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전쟁을 도박으로 비유하는데, 좀 쎄게 말하자면 정신줄을 놓지 않고서는 전쟁에다 금빛을 칠할 수 없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은 미래라는 잭팟을 위해 현재를 거는 행위이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혹은 '우리는 이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길 거니까'라는 식의 도취는, 뭐 기세를 올리기엔 좋을 수도 있겠지만, 도박으로 돈을 따서 호강시켜주겠다는 도박중독자의 약속처럼 허무맹랑한 환상에 불과하다.


전투력은 이미 주어진 현재 상황에 의해 제한받는다. 변수는 또 무지하게 많아서, 상대의 상황과 여타 주변의 동향, 전장의 분위기, 질병 등은 물론, 정치인의 정신상태부터 지휘관의 능력과 품성, 심지어는 병사 16489, 민간인 250832가 가지는 한 때의 기분마저도 전쟁에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이겼다고 해서 끝도 아니다. 실례로 당시 유럽 각국에서 급격히 호소력을 얻어갔던 민족주의는 나폴레옹 스스로 부채질해댔으면서도 예상할 수 없었던 변수였고, 만만했던 스페인을 덥석 하고 물었다가 이후 스페인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암울한 상황에 부딕치게 된다. 이때의 풍경은 영화 <고야의 유령>으로도 대략 엿보실 수 있겠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전쟁과 평화>는 너무 빡세니까(20년째 위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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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야의 유령>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기건 지건 어떤 식으로든 전쟁의 책임은 회피할 수 없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정치적으로 결정되고, 정치적으로 진행되며, 정치적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어느 전문가가 어둠 속에 묻힌 문제를 밝히는 데 반평생을 바친다면 그는 아마 짧은 시간에 그 문제에 익숙해지려는 사람보다 더 앞서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그 문제를 처음부터 새로 정리하거나 오랫동안 연구하지 않고 이미 정리되고 밝혀진 상태에서 그 문제를 만나게 하기 위해 이론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론은 미래의 지휘관의 정신을 길러 주거나 스스로 자기교육을 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하지만 그를 전쟁터까지 따라가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현명한 교육자는 청소년의 정신 발달을 지도하고 도와주지만 한평생 청소년의 손에 끈을 묶어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과 같다.


- <전쟁론 제1권>, '제2편 전쟁이론 - 제2장 전쟁이론', p.203


우리는 다만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강력한 기습, 재빠른 행군, 끊임없는 활동 등이 어떠한 희생도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풍부한 광산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오만한 이론을 거부하려고 할 따름이다. 그러한 광산을 개발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최고지휘관의 태만이다. 사람들은 전쟁 광산의 전리품을 금은 광산의 노획물과 같다고 보며, 채굴된 생산물만 보고 그것을 채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들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 <전쟁론 제2권>, '제5편 전투력 - 제12장 계속(행군)', p.110


어떤 이유로든 도박에 손을 댔다면 판돈을 어떻게 거느냐가 문제. <전쟁론>은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전투를 준비하는 데에 요구되는 전략적 요소부터, 전투력의 투입과 관리, 공격과 수비 시의 특수상황 등에 이르기까지, 실행하는 데에 있어 고려해야 할 점들이 상당히 세세하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는 구체적인 실행방법보다는 그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로 자신의 이론에 제한을 건다. 왜냐하면 실전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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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은 미녀


그는 이론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태도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완벽한 인간도 없고 완벽한 전쟁도 없는데, 완벽한 이론이 존재할 리가 만무하다. 이론은 병사 개개인이 겪어야 하는 물리적·심적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할뿐더러, 상대는 물론이고 아군도 꼭 이론대로만 움직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이고, 따라서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적용에서는 전적으로 전장의 상황에 따른 유연함을 필요하다.


<전쟁론>에서는 포병과 기병, 보병 간의 이상적인 비율이라든지, 기하학적 병력배치(쉬운 예로 무협지의 팔괘진)처럼 어설픈 과학적 접근들을 그야말로 졸라게 씹는 부분도 있는데, 특히나 개인적으로 전쟁이라고 하면 으레 '기습이옵니다! 뭬야?' 혹은 '야습이옵니다! 뭬야?' 수준의 인식만 갖고 있었던지라, 기습이나 야습과 같은 변칙적인 전략이 그다지 실전에서는 별무신통이지 못하리라는 내용에서 가히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암튼, <탁피디의 여행수다> 덕에 친숙해진 이름, 훔볼트 형제나 헤겔 등이 활동하며 본격 이성의 승리를 선포하던 시대에, 손꼽히는 전략가로 평가받는 클라우제비츠가 과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있는 듯싶다.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이 딱 이때 나왔던 작품이라는 걸 기억해두시고, 대략 가상 인터뷰를 가장해보자면,



Q: 한국을 아시나요?


A: ….


Q: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죠?


A: 경험을 쌓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함.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운이 따라야지.


Q: 뭔가 특별한 노하우 같은 건?


A: 그런 거 없음. 직접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함.


Q: 그래도 뭔가 조언이라도?


A: 책에 쓰여 있다고 너무 믿지 말고 실전을 통해 배워야 할 거임. 그렇다고 이론은 쌩까고 자신의 경험만 믿는 것도 곤란하고. 이렇게만 하면 된다는 이론은 개뻥이고, 해봐서 안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오만에 불과함. 경직된 사고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


강행군에 의한 속도전과 화력 우위 확보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나폴레옹의 전략도, 드넓은 평원에서 정면대결을 피해 다녔던 러시아와 험난한 산악지형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스페인에는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조직력과 규율이 만병통치약도 아니었고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소모전의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병사들을 자신의 야심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만 여겼던 나폴레옹(과 그의 장군들)은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병력을 보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몰락했지. 경제가 아작난 건 덤.


(여기에 언급한) 모든 수단은 단지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는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양쪽 군대의 무력함을 전제로 한다. 이 영역을 넘으면 더 높은 법칙이 지배하며, 그곳은 전혀 다른 현상의 세계다. 최고지휘관은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안전하다는 착각으로 좁은 영역을 절대적인 곳으로 본 채 그 안에서만 움직여서는 결코 안 된다. 그는 여기에 쓰는 수단을 결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유일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스스로 그 수단의 불충분함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면 그 수단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 <전쟁론 제3권>, '제6편 방어 - 제30장 계속(전쟁터의 방어), 결전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의 전쟁터의 방어', p.481-482


전쟁에는 전쟁 자체의 문법은 있지만 전쟁 자체의 논리는 없다. … 전쟁과 함께 정치적인 관점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전쟁이 오로지 적대감 때문에 사느냐 죽느냐 하는 싸움이 될 때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의 모습은 앞에서 보여준 것처럼 정치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을 낳은 것은 정치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관점이 군사적인 관점에 종속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정치는 이성이고 전쟁은 단순한 도구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따라서 군사적인 관점이 정치적인 관점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 전쟁은 반드시 정치의 성격을 지녀야 하며 정치의 척도로 재야한다.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는 일은 그 주요 윤곽을 볼 때 정치 그 자체다. 이때의 정치는 펜 대신에 칼을 들지만 정치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


- '제8편 전쟁계획 - 제6장 B.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 p.172-182


전쟁은 피곤한 거다. 가능성을 확인하는 행위라기보다는 한계를 확인하는 행위이며, 치러야 할 대가와 불확실한 결과야말로 전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쟁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이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은 왜 해결책이 될 수 없는가를 숙고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나폴레옹 같은 넘이 또 나오지 않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도중에 이야기가 끝이 나는데, 거의 20세기의 세계대전과 총력전을 예견하는 듯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다만 그 주역이 자신의 조국이라는 게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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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지 늑대인지, 아군인지 적인지 몰라 몰라 아직 나는 몰라


전쟁으로 정치를 극복할 수가 없다. 전쟁은 인간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도록 강요하지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는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생각만큼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전쟁이란 정치의 실패를 드러내는 정치적 수단일지도 모른다. 전략은 숫자로 인간을 감추고, 전술은 성과로 인간을 감춘다. 개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간과될 때 전쟁은 오로지 파괴로만 향하게 된다.

오늘의 결론. 도박은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 따려는 순간 너님은 이미 잃고 있다. 등등.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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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나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