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8. 25. 월요일
벨테브레
1.
아침을 대체로 거르던 날들이 있었다. 오후 6시쯤 저녁을 먹고 나면 점심을 먹게 되는 다음날 저까지 18시간가량의 긴 인터벌이 생기는 라이프 스타일. 혼자 사는 주제에 야식을 찾아 먹는다는 것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라 술자리가 없으면 그대로 잠들기 일쑤. 덕분에 체중은 지금보다 8kg쯤 덜 나갔던 것 같다. 숨쉬기 외에는 거의 운동을 하지 않았으니 그게 꼭 건강한 습관이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무렵에 일거리가 생겨 끼니때를 놓치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비자발적 단식을 하게 된 것. 지나고 보니 별 일은 아니었는데(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은 난다. 그런데 밥 굶어가며 했던 일이라기엔 너무 쪽팔려서 패스!) 24시간 단식의 고통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40일씩 단식하는 분 앞에서 고작 하루의 굶주림을 논한다는 건 심히 부끄럽지만 본능이란 건 그렇게 나약하다.
2.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통과시킨 자신의 측근비리에 대한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물과 쌀뜨물(곰국 또는 아침 햇살이었을 거라는 설이 있다.)만 마시는 단식투쟁'에 돌입하였다가 국회에서 특검법을 재의결함에 따라 열흘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나라를 구하겠습니다.'라는 비장한 현수막에 비해 그리 비장해 보이지 않았던 최병렬의 비주얼과 차떼기당이 감히 민주투사 코스프레를 하느냐는 냉소적인 시선이 겹쳐 단식은 웃음거리로 전락했고 수많은 패러디물을 양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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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정계 퇴출 및 자택연금의 2단 콤보를 당한 김영삼은, 간디에 관한 책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단식을 결심한다. D데이는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이었다. 미리 식사량을 조절해가며 준비했지만 50대 중반으로 적지 않은 나이였던 김영삼에게 물과 소금만으로 계속한 단식은 만만치 않은 미션이었고, 가신들 중에서도 '간디의 단식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과 외경의 정신을 갖고 있는 영국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바윗돌에 달걀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하고 일방적인 희생이 될 수 있다' (박정태, '김영삼의 사람들' 제2권 인용)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인적인 23일간의 단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단식을 결행한 것은, 군사정권의 언론통제로 국민들이 자신의 자택연금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단식을 비중 있게 보도한 외신들과 달리, 국내 언론은 이 소식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과 '또한 이순자 여사는'으로 시작하는 땡전 뉴스는 물론이거니와 신문에도 '반달곰 밀렵 사건' 같은 초특급 이슈(!)들로 인해 퇴물정치인 김영삼의 단식 소식 따위는 들어갈 곳이 없었던 것. 다만 단식이 진행됨에 따라 가십난에 '최근의 정세 흐름' '국내 정치관심사' '정치현안' 등의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있었고, 좀 더 진도를 나간 곳은 '모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배경지식 없이 이걸 이해하는 건 청와대의 발표만으로 박근혜의 7시간을 재구성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김영삼의 단식소식을 알리려는 측근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이들은 유인물을 만든 뒤 대학가, 각종 행사장, 빌딩 우편함, 전철, 시내버스 등에 뿌리는 한편 새벽녘에 집집이 돌며 던져 넣었다. 그러나 당국이 모든 인쇄소에 '김영삼'의 이름이 나오는 유인물을 일체 복사해주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배포과정에서 연행돼 구류를 살기도 하는 등(박정태, '김영삼의 사람들' 제2권 인용) 트위터와 카카오톡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고난을 겪었다.
결국 김영삼은 단식 8일 만에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되었고, 병원 측의 중단요청에도 이후 보름 동안 단식을 계속한다. 훗날 단식 중인 김영삼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보름달 빵을 처묵처묵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는 도시 전설이 돌기도 했으나, 서울대병원의 검사 결과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을 계속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하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장기간 단식했던 사람이 죽이나 미음이 아니라 보름달빵 같은 부담스런 음식을 섭취하는 건 어려운 일 같다.
단식 중인 김용건김영삼, '국가를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며 단식중단을 설득 중인 조연김수환 추기경
단식 23일째, 14kg이나 빠진 김영삼은 병실에 누운 채로 단식 중단 기자회견을 가진다.
"국민 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하여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했던 몸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으로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그 고통과 고난의 맨 앞에 설 것이며,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당시에도 단식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들은 있었나 보다. '김영삼의 사람들'에 나오는 어느 정치인의 증언.
"단식 18일째에 종로2가 맥주 홀에서 지인들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누군가 '김영삼이 단식하다 굶어 죽어야 이 나라가 민주화된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그 소리에 속이 끓어오르는 거예요. '이 악당 같은 놈, 지금 죽네사네 하는데 네가 한 끼라도 굶어보았으면 이해하겠다. 김영삼이 죽고 김대중이 그 대가로 대통령을 하면 된다는 얘기냐'고 내가 마구 고함쳤지요."
그렇게 놓고 보면 김영삼의 단식은 허망한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식 자체로 얻은 건 김영삼의 연금해제와 다이어트 말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대다수 국민은 누가 단식을 했는지도 모른 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단식을 통해 민주인사들이 결집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발족하였으며 마침내 6.29선언과 헌법 개정을 이끌어 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김영삼의 행적이 썩 아름답지 않았음은 우리가 모두 아는 바와 같다.
23일의 단식 -> 민추협 발족을 이뤄낸 김용건김영삼이 연금해제 후 자택 스멜을 음미하는 중.
그 흑역사의 정점을 찍은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이 여당에 합류한 1990년, 정국은 218석을 가진 슈퍼여당 민주자유당과 달랑 70석의 평화민주당으로 비대칭적인 양당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개헌선을 넘은 여당은 내각제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었고 곧장 실시할 듯하던 지방자치제 또한 어영부영 미루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민간인을 불법사찰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소수 야당을 이끌고 있던 김대중은 '지자제 전면 실시' '내각제 포기' '정치 사찰 중단 및 군의 정치적 중립화' '민생 문제 해결' 등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이에 비록 몸은 여당에 있지만 7년 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굶으면 죽는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김영삼이 김대중을 방문하여, 요구사항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김대중은 13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고 이듬해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는 등 성과 또한 없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내각제도 없었던 일로 되었으니...
김대중 전대통령의 무기한 단식
김대중의 단식은 초거대 여당에 맞선 미니 야당도,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죽기 살기로 투쟁하면 요구사항을 관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130:158로도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운운하는 패배주의 돋는 어느 나라 야당에 들려주고 싶은 대목. 투쟁도 아니고 투쟁이 아닌 것도 아닌 그들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면 밥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4.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라 1995년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비자금 사건을 빌미로 12.12, 5.18에 대한 재수사를 지시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격분한 전두환은 '실제로 존재했던 5공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것이냐'며 반발했고 급기야 단식투쟁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옥중단식은 김영삼보다 더 긴 28일이나 지속하였고 경찰병원에 후송된 뒤에도 계속되어 끝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등 나름 치열하게 이루어졌으나, 병원에서 먹은 쌀뜨물로 인해 식중독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다는 웃지 못할 뒷이야기. 물론 비장했던 퍼포먼스에 비해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전두환은 끝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2년가량 옥살이를 하게 된다.
웃음거리가 될지언정 주목을 받게 마련인 유명정치인들에 비해 일반인들의 단식은 정말 무관심 그 자체. 그럼에도 목숨 걸고 단식까지 해야만 하는 일반인들의 비장한 심정에 경중이야 있겠느냐마는, 고 박관현 열사의 사연은 정말 안타깝고 짠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5.
고 박관현 열사의 생전모습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은 광주시민들과 대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다가, 소위 5.17 계엄령 전국 확대조치로 수배자가 되며 광주를 떠나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광주에 없던 사이, 군홧발이 광주를 짓밟았다. 2년간 서울과 여수 등지에서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며 피신 중이던 그는 1982년 4월 5일 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라는 죄명과 오랜 도피 생활에 따른 괘씸죄 등으로 박관현에 대한 처우는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그는 5ㆍ18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 개선을 주장하며 40일간의 옥중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날 학생들과 온 시민들이 5·17조치에 항거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웠던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학생들의 부름을 받은 총학생회장으로서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죽어간 영령들에게, 또 죄 없이 끌려가 고문을 겪은 선배 · 동료 ·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총학생회장으로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역사와 민족 앞에 진실을 말할까 합니다... 언젠가 역사는 이 정권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 시민들이, 아니 항쟁의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시민들과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구천으로 떠나가 아직도 너무 원통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내 동포, 내 형제들의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분명히 우리는 정확한 심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네이버 카페 '평화유랑단'에 올린 똥창아 님의 글 '5.18과 전남대학교' http://cafe.naver.com/singlegirls/483 에서 인용)
1심 최후 진술에서 드러나듯 박관현은 광주에서 숨진 이들에 대한 엄청난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단식은 살려고 하는 여느 단식과 달리 정말로 죽음을 불사하고 이뤄진 단식이었고, 젊은 나이였지만 오랜 도피생활과 고문 후유증, 그리고 마음고생 등이 겹치며 쇠약해진 박관현의 몸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1982년 10월 12일, 박관현은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6.
박관현이 죽은 지 32년이 지났다. 나름대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이들도 대체로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박관현의 재심청구는 항소심 계속 중 사망하여 '공소기각'되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능;;;)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습이 박관현이 단식투쟁을 벌이던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유가족이 단식투쟁을 하는데도 제대로 단식하는 거 맞느냐는 냉소를 보내는 정치인. 사고 당일 도대체 뭘 했는지 알려줄 수는 없지만, 유가족만큼은 바빠서 못 만난다는 대통령. 중국인 관광객들은 자유롭게 지나다녀도 이 나라 국민은 막고 보는 청와대. 지리멸렬한 과정 끝에 되지도 않는 결과물을 받아놓고는 유가족을 설득한답시고 더 이상의 재협상은 없으니 받아들일 테면 받아들이라는 식의 막무가내식 배짱을 튕기는 야당. 그리고 이 기회에 한 몫 잡아보려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의 사람들.
김영삼의 말마따나 사람은 굶으면 죽는다. 상당수의 단식이 '쇼'로 보이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자식의 죽음 앞에서 '쇼'를 할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쇼라고 해도 40일쯤 되면 목숨을 걸고 하는 게 분명한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 그렇게 어려운가?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이 얼마나 대단하기로 사람의 목숨과 바꾸려 하는가. 피해자가 가해자를 수사하는 것은 문명국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는 지난주에 내란죄의 피해자인 '대한민국'이 가해자(?) 이석기 일당을 수사하고 재판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국가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더라도 수사기관에 대한 공무집행방해 사건은 대부분 피해자인 경찰관이나 검찰 공무원들이 직접 수사를 진행하게 마련이며, 재판에 대한 불만으로 판사에게 석궁을 들고 갔던 김명호 교수는 피해자와 한 패거리(?)인 판사들이 모여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며 엄단할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가운데 재판을 받아야 했다. 공연음란 혐의가 기정사실화 된 어느 지검장에 대한 사표 수리가 좀만 늦어졌다면 가해자가 자신을 스스로 수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일어났을 테니, 2014년의 대한민국이 문명국가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허나 어쩌겠는가.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밥 한 끼 굶지 못하는 비겁한 네티즌으로서, 부끄럽지만 유민 아빠 김영오 씨에게 간곡히 부탁드린다. 제발 살아달라고. 살아서 진실을 밝혀내자고. 못된 여당과 못난 야당, 찌질한 국민들을 넘어서 그래도 역사는 전진한다는 것을 믿고 진실과 함께 가자고. 그때까지 모질게 살아남는 것만이 하늘나라에 있는 유민이와 친구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일이라고 외람된 말씀을 드리며, 이제는 부디 단식을 멈추고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유민 아빠가 40일 동안 초인적인 단식을 통해 얻고자 한 오직 한 가지의 목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그렇게라도 돌아가신 294분과 아직도 찾지 못한 10분의 넋을 위로할 수 있기를!
벨테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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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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