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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30.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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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국제정치학적으로 정의하자면,


‘일본의 충격적인 데뷔’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노래 좀 부르는 연습생인 줄 알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가요계 원로 가수를 꺾을 정도의 신예 가수가 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후속곡이었다. 이미 조선을 확보했다고 하지만, 조선을 확보한다고 해서 일본이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클럽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입장권’ 정도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한국 땅에서 나올 수 있는 자원의 양이란 건 한계가 있지 않은가? 속된 말로 먹을 게 별로 없었다.


이는 이후의 일본 외교행보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한일합방 직후 일본은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기 시작한다. 바로 1911년에 있었던, ‘미일통상항해조약’이다.


1895년에 있었던 삼국간섭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조약, 가쓰라 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조약으로 세련되게 조선을 획득했고,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열강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일본의 과거가 문제였다.


일본은 1853년 6월 3일에 있었던 흑선(黒船)내항 이후에 개국했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이 때부터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제국주의에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실 식민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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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개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흑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때 맺은 조약이 문제가 됐다. 1차로 맺은 미일화친조약(米日和親条約)은 일본 측에게도 크게 나쁠 것이 없었지만, 1858년에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米日修好通商条約)은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제국주의 일본에게는 지우고 싶은 과거였다. 일본이 미국과 맺은 미일화친조약을 기본으로 해 조선과 조일무역규칙을 체결한 것만 봐도 얼마나 불평등한 조약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개항과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조일무역규칙은 일본의 흑선 내항과 미국과의 미일화친조약과 미일수호조약을 그대로 답습한, 전형적인 식민지 개항 방법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이 미국에게 당한 방식을 그대로 이용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불평등한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이후 미일통상항해조약의 체결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미일통상항해조약도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당시 일본 외교가의 최고 관심사는 막부 말 이후로 맺어진 불평등한 국제조약을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때 등장한 것이 풍운아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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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할 것 같이 생긴 고무라 주타로


고무라는 청나라의 대리공사를 시작으로, 외무차관, 주미, 주러 공사로 활약했고, 1900년 의화단 사건의 사후 처리에도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1차 가쓰라 내각 때는 외무대신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작품으로 유명한 것이 ‘영일동맹’이다. 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러일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는 영일동맹의 체결 후 러시아와의 전쟁 상황 속에서 전시외교의 최선봉에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 뛰어다녔고, 실제로 그의 활약은 일본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의 냉정한 상황판단 능력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러일 전쟁의 종전협상(포츠머스 조약 당시 고무라 주타로에게 전권이 주어졌다)을 위해 도쿄역을 떠날 때 5,000여명의 일본 국민들이 그를 성대히 환송했다. 이 때 주타로는,


“내가 다시 돌아올 때는 이 상황과는 정반대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러시아와의 협상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고무라 주타로가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막말 이래로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해소였다.


일본이 힘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지만, 이제 제국주의 열강클럽에 당당히 입성한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1911년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폐기한다.  당시 일본 면제품의 대미 수출이 활성화 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한 미국의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당시 주일 미국대사관의 관측이다), 그 동안의 분위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일본은 완벽히 과거를 세탁하고, 당당한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합류한다.



수면 아래 웅크리고 있던 파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언덕 위의 구름>을 얘기하며, 러일전쟁 시기의 ‘낙관주의’를 언급한 적 있다. 맞는 말이다. 러일 전쟁 직후까지의 일본은 낙관주의의 시대이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시기였다. 비록 국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지옥’이었지만, 일본 국민에겐 일치단결해서 거국적으로 매달릴 ‘목표’가 있었다. 청일전쟁 직전에 일본은 청나라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삼국간섭 다음에는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일본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문제는 러시아를 쓰러뜨리고 나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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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깨기...?

(영화 '엽문'의 한 장면)


“다음 싸울 적은 누구인가?”


청일전쟁을 통해 아시아 최강이라는 목표를 달성했고, 러일전쟁을 통해 삼국간섭의 원한을 씻었고, 제국주의 열강클럽에도 가입했다. 덤으로 숙원이었던 조선을 확보할 수 있었고, 막말 이래로 일본을 옮아 맸던 불평등조약도 해결했다. 이제 일본은 당당한 제국이 됐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본은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진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의 나라였지만, 육군이 다스리는 일본과 해군이 다스리는 일본으로 나눠졌다. 유신이래로 수면 아래에... 아니, 대놓고 불편했던 육군과 해군의 관계가 이제는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이야기를 메이지 유신 시절로 되돌려 보자. 일본의 육군은 조슈번(長州藩)의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조직한 기병대였다. 반면 일본 해군은 사츠마번(薩摩藩)의 수군이 주축이다. 이들은 앙숙 그 자체였다. 막말 혼란기에 조슈와 사츠마가 손을 잡으면 도쿠가와 막부를 뒤엎을 수도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들에 대한 견제는 했지만 이들이 손을 잡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만큼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앙숙이 된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넘어가겠다.


이 두 앙숙을 손잡게 만든 이가 바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치고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1위에 꼽힌 사카모토 료마. 만약 료마가 없었다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이전에 내전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이후 세이난 전쟁과 같은 내전이 있었긴 하지만 아예 메이지 신정부가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료마에 의해 삿초동맹(薩長同盟. 사츠마와 조슈의 동맹)이 성립됐고, 이를 바탕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몰아낼 수 있었다.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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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물러나고 메이지 천황이 통치권을 쥐었다.


당시 료마는 신정부의 내각까지 설계한 뒤 권력의 뒤로 물러난다. 1853년 6월 3일에 있었던 흑선(黒船)의 내항부터였다. 대정봉환이 있고 한 달 후에 료마는 암살당하고, 사츠마와 조슈의 사이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그리고 터진 것이 메이지 6년의 정변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중심의 정한파(征韓派.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가 들고 일어났지만, 조슈에게 진압당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정한파들은 몇 번의 난을 일으켰고, 최후에는 세이난 전쟁(西南戦争)까지 일으키지만 모두 진압당한다. 결국 육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한 조슈 출신 인사들이 정권을 장악했고, 썩어도 준치라고 사츠마는 해군을 장악한다.


일본 군벌(軍閥)의 시작이었다. 이후 일본 육군은 다시 황도파(천황 친정을 원하는)와 통제파(내각에 의한 통제)로 나뉘어졌고, 해군은 다시 조약파(연합국과의 조약을 우선시 하는 파로, 그 조약은 ‘워싱턴 군축조약’을 말한다)와 함대파(조약파에 반대하는)로 나뉘어졌다. 나중에 가면 육군은 대본영과 관동군 사이에 갈등부터 시작해 보병과와 기갑병과 사이에도 갈등이 생긴다, 해군은 연합함대 군령부와 함대파 사이의 갈등을 시작으로 조약파와 함대파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는 등 완전한 ‘콩가루’ 집안이 된다.


이런 육군과 해군의 갈등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한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쓰게 된다. 비슷한 성능과 교리를 가진 무기라면 같이 사용하는 게 보급이나 규모의 경제면에서 효율적이겠지만, 해군과 육군은 따로 개발한다. 사소하게는 총이나 기관포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항공모함과 잠수함까지 따로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육군이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개발한 걸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우리나라 해병대가고수하는 ‘순검(巡檢. 준켄)’이란 단어가 일본 해군과 육군의 알력다툼 끝에 나온 말이란 사실을 알면 쓴웃음이 나올 것이다. 원래 일본 육군은 점호(點呼. 덴고)라는 말을 썼는데, 육군이 쓰는 말을 쓰지 않겠다며 나온 말이 '순검'이었다.


조슈번과 사츠마번의 향기가 났던 군벌성립 초창기에는 그나마 서로간의 인맥이 있었지만, 육군과 해군이 각각의 학교를 만들면서부터는 아예 일면식 조차 없어진다. 생각해 보면 일본은 전쟁국가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끊임없이 전쟁 속에서 살아야했다. 일본 최후의 내전이라 할 수 있는 세이난 전쟁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까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굵직굵직한 전쟁 속에서 살았던 게 일본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을 기획하고 수행한 이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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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대학


내게 만약 단 하나의 단체를 지목하라면, ‘일본 육군대학’을 지목하겠다. 1890년대부터 1945년까지 숨 가쁘게 이어져 온 ‘일본 전쟁의 역사’의 산 증인이자 주인공이 바로 일본 육군대학이다. 1883년 육군대학의 창설부터 1945년 육군대학의 마지막 기수가 졸업할 때까지 배출한 인원은 겨우 3,485명이었다. 이해가 안 가겠지만 일본의 근대사를 확인하면,


“이런 미친놈들...”


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메이지 유신 직후, 구체제(막부시절 다이묘를 비롯한 구세력) 인사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혹은 재탈환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였지만, 메이지 신정부의 군사력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은 눈을 돌려 ‘정치’라는 새로운 권력을 찾기에 이른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자유 민권을 내세워 의회를 장악하려고 했다. 만약 군 통수권이 의회에 있다면(지금의 시선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지만), 군을 장악한 의회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일본 군부는 군의 통수권을 의회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시키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이때 눈에 들어 온 것이 천황이었고, 천황에게 군 통수권을 준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의 군정권(평시에 군대의 인사나 보급·행정을 살핌)과 군령권(전시에 군대에 명령을 내림)이 이원화된다.


이때 등장한 것이 참모본부였다. 원래는 육군성 내의 일개 국이었으나, 독립하여 천황 직속의 참모본부가 된다. 이 덕분에 천황은 육군성이나 육군대신, 해군대신의 도움 없이도 직접 군대를 장악할 수 있으며, 이 참모본부가 근현대 일본의 모든 전쟁을 좌지우지한다. (‘대본영’은 일본군 전체를 지배하는 전시 천황 직속의 통수기관이었는데, 대부분이 참모본부에 속해있는 조직이었다. 즉, 실질적인 일본의 전쟁 수행기관이 참모본부란 뜻이다)


육군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절대로 참모본부, 육군성, 교육총감부에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이 참모본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군대학을 졸업해야 했다. 육대(陸大)에는 육군사관학교 졸업자로 근무 2년 이상, 30세 미만의 중위·대위만 입학할 수 있었는데, 보통 육군사관학교 졸업자 중 상위 20%만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 시험이 어려웠다.


교육 기간은 통상 보병·기병이 3년, 포병·공병은 2년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이들의 관할이다. 일본 육군 내의 모든 학교가 교육총감부의 관할 아래에 있었지만, 육군대학교는 참모본부 직할의 교육 기관으로 졸업생의 인사도 참모본부가 관여했다. 다시 말해 참모본부가 파벌을 만드는 텃밭이었다는 것이다. 천황을 옆에 끼고 전쟁을 획책하던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직접 키워 인력을 보충했다.


문제는 당시 일본군 내에서 차지하는 육대의 위상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육군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참모본부, 육군성, 교육총감부와 같은 요직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육군대학 졸업자는 모든 육군 장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실질적인 혜택(보직이나 승진)도 대단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명예도 대단했다. 육대 졸업생에게는 국화와 별을 본뜬 졸업생 휘장이 수여되었는데, 이게 바로 텐보센조(天保銭組)다(막말의 화폐인 ‘천문통보’와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다). 문제는 이 휘장을 달지 못하는 장교는 육대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의미여서 ‘무텐(無天)’이라 불리며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쇼와 11년인 1936년에 휘장 착용이 금지됐지만, 육대의 위상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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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군토구미(軍刀組. 군도조)다. 육대 졸업자 중 성적 상위 6명은 천황에게 은사의 군도를 하사 받았는데, 이들이 일본 육군의 주요 보직을 독점한다.


이 육군대학 출신들이 일본을 어떻게 망쳤는지는 2차 대전 종전 후 벌어진 전범 재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A급 전범 28명 중 대부분이 육군대학 출신이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64년간의 일본 육군대학의 역사는 일본 전쟁의 역사이자, 일본을 망가뜨린 역사이기도 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시와라 간지, 천황의 명령을 사칭해 전쟁포로를 죽였던 쓰지 마사노보, 그리고 조선 독립의 1등 공신인 도조 히데키가 육대가 키워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고 보니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였던 도조 히데노리 중장도 육대 1기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니, 부자 동문끼리 일본을 사이좋게 망가뜨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육군대신의 권한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국가에서 군령권은 대통령에게 있는 문민통제이고, 군인은 국가방위에만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육군대신이 반대를 하면 내각회의 결정을 할 수 없고, 육군이 대신을 천거하지 않으면 내각을 조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현역장군만이 대신을 한다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가 민주화 기운이 물씬 풍기는 다이쇼 2년(1913년)에는 현역이 아닌 예비역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다시 전쟁의 기운이 넘쳐나던 쇼와 11년(1936년)에 다시 현역만이 육군대신은 할 수 있게 바뀐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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