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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31. 금요일

메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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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의 세월, 그는 아마도 샤롯데를 버렸을 테지


스물한 살의 청년이 1940년 무작정 일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날, 막막하지만 희소한 가능성을 품고 야망의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면 그는 울산근처에서 소, 돼지 품종이나 개량하며 지냈겠지. 10형제의 대가족 장남이며 적당히 먹고는 사는 중농의 자식이니까.


농업학교를 졸업해 종축장 기사로 취직한 스물하나의 이 청년은 농사일이 적성에 맞지도 않았고 앞날도 답답했어. 거기다 집에 가면 아홉 명의 동생이 와르르. 밥은 그럭저럭 먹고 산다 해도 폼 나는 미래를 맞이하기엔 애초에 글렀을 환경이지. 고생한 적 없었을 이 대가족의 장남은 일본으로 갈 결심을 하고 곧장 일본 종축장을 둘러본다며 현해탄을 건너. 그 길로 우유배달, 신문배달을 하며 고된 고학의 길로 들어가지.


한국엔 아이를 가진 첫 부인이 있었어. 부인을 두고 떠난 비정한 야망의 길. 첫 부인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이 ‘샤롯데’를 애타게 갈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세 번째 결혼을 보면 그냥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을 갈망하는 걸 수도...



성공을 위해 일본인이 되어


와세다 이학부 졸업. 연도로 봐선 편입을 했지 싶은데, 어쨌든 그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에 졸업을 했어. 일본이 패망의 늪에 젖어들 시기지. 이때 어찌어찌 동경에서 사귄 지인인 하나미쯔(花光)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그가 군수용 선반기계에 사용할 기름을 제조하는 데 투자를 해. (이학부 나오면 이런 거 혼자 막 만드나?) 군수산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이 청년에겐 불운, 우리나라에겐 당연한 귀결이랄까. 미군의 폭격으로 일본엔 공장만 세웠다 하면 개박살이 났어. (나이스 어택) 결국 해방할 때까지 이 청년의 잔고는 마이너스 5만 엔. 하나미쯔에겐 빚만 지고 있던 상태였어. 그대로 귀국하자니 9명의 동생한테 면목도 없고, 한국은 더 박살 나 있었으니까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없었지. 뭐, 외통수였나 봐.


해서 기름을 만들던 시설을 이용하여 생필품을 만들기 시작했어. 전후 일본에선 비누 한 장 제대로 된 것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해. 전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여러 만화나 문학작품들을 보면, 그 때 일본은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나 6.25로 박살난 때보다 더 엉망이었던 것 같아. 우리나라 덕에 빠르게 일어서긴 했지만 악몽의 시절 5년을 보냈다고 하더라고. 누리고 살던 이가 해야할 롤백은 더 힘들었겠지.


여하튼 생필품의 고갈시대에 이 청년이 만들어낸 세탁비누, 세수비누, 세제 등은 아주 유용한 존재여서 재고 따윈 쌓일 틈이 없이 팔려나가고, 1년 만에 빚도 털 정도였다고 해.


이렇게 단박에 갈망하던 ‘부자’가 된 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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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이름은 신격호, 아니 시게미쯔 다케오(重光武雄)


무거운 빛을 내는 강려크한 수컷... 그냥 직역해봤어. 한국인임을 감추고 (당연히 돈도 잘 버는데 감추기도 했겠지)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롯데그룹의 창업자 신격호’의 더 익숙한 이름이지.
 
여기서 ‘시게미쯔(重光)’는 그냥 지은 성은 아니고, 이 무렵 신격호가 한국에 처자를 둔 채로 중혼을 해. 일본 내의 기업을 일구기 위한 정략적 결혼이었을지 아니면 새로운 여인에게 매료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이러니하게 그가 데릴사위처럼 들어간 집안은 시게미쯔 마모루(重光葵)의 집안이야. 시게미쯔 마모루는 일본이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할 때, 항복문서에 조인하며 사인한 펜을 남기지 않겠다며, 미군이 준비한 필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펜을 들고 가 사인하고 온 것으로 유명하지.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을 맞아 다리를 잃기도 했어. (이후 10kg 짜리 의족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을 맞을 당시엔 주중 공사였고 해방시점에선 외무대신을 지냈어. A급 전범임에도 한국전 덕분에 가석방되어 이후 정계 막후의 실력자로 살아가. 신격호는 그런 시게미쯔 마모루의 그의 질녀와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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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문서에 사인하는 시게미쯔 마모루


처가의 음덕으로 사업하기에 좋았던 건지 창씨개명도 ‘시게미쯔’로 한 걸 보면 어지간히 신세진듯 해. 집안의 잘나가는 기둥이 기개가 있는 한국인에게 다리를 빼앗기고, 다시 한 명의 재기 넘치는 한국인이 가문의 이름에 빛을 내다니. 참 아이러니한 시게미쯔 집안이야.


껌, 승자의 표식 - 승자의 표식을 베껴 승자가 되다


1945년 9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의 군사력이 일본 내에 주둔하지. ‘치욕스럽다’거나 ‘황망하다’거나 하는 식자들의 호들갑은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사용되었고, 일반 대중은 강려크한 승자의 우아한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지. 강력한 승자에게 복종해 그 강력함을 배워 후손에게 남기려는 일본만의 생존방식은 이 때부터 점화됐다고 생각해.


모든 것을 따라하고 배워 흉내 내어 물건을 만드려는 시도, 그리고 강자의 것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 일본인처럼 살아가며 일본에서 성공하고자 한 다케오도 마찬가지였어. 그들의 상징을 운명처럼 다음 제품에 탑재해. 


가장 잘 팔리던 기호품인 ‘껌’에 대한 애타는 수요로, 상인들은 생필품을 척척 만들어내는 젊고 야망 가득한 다케오에게 ‘껌’을 만들 것을 종용해. 성공을 더 빠르고 길게 가져가고 싶었던 다케오에겐 이런 수요는 웰컴이었지.
 

한 사람의 약제사와 제면기를 가지고 기존의 솥을 사용해서 껌을 만들어내. 당시 허접하게 흉내 내던 다른 제품과 달리 제법 진짜다웠던 이 껌의 제조 이후, “제발 잠 좀 제대로 자고 싶다”라고 술회할 만큼 대박이 터져 돈을 쓸어 담기 시작했어. 미국이라는 승자들의 포켓에 늘 들어있던, 거만함의 되새김질을 하게 만드는 마법의 아이템인 ‘껌’. 배가 고파도 껌을 씹다보면 뭔가 그득 먹은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통에 이 껌의 인기는 이후에도 쭈욱 이어져.


돈이 쌓이고 쌓이니 법인체를 만들어. 그 법인체의 이름은 다케오가 이공학부시절 전공과목보다 더 심취한 적이 있고, 소설가의 꿈을 가졌던 시절에 좋아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주인공인 샤롯데의 이름에서 따왔어. 샤롯데가 롯데가 된 거지. 회사의 이름으로 그리운 첫사랑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서, 향수병과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되새기려고 한 게 아닌가 싶지만 역시나 이런 건 내 상상일 뿐이야.


다케오의 야망이 더 커진 일화가 있어. 다케오는 베껴다 썼던 원조집인 ‘리글리(W.T. Wrigley)’를 잡고 싶었던 거야. 그쪽도 어차피 비누업자에서 스타트한 건 매한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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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 리글리의 수많은 껌들.

스키틀즈도 리글리 제품이었다니!


어느 시장이나 1등을 제끼지 못하면 미래는 없고, 내수의 유통체제를 더 빠르게 이용할 수 있는 국내업자가 수입업체를 이길 방법들을 고안하기가 더 쉬우니까. 하지만 일본 내 유통을 잡기 위해 유통회사를 따로 보유한 이 거대 괴물원조기업을 이기려면 어지간한 수단으론 힘겨웠지.


여기서 다케오가 성명절기를 개봉하는 거지. 바로 신진 고수의 숨겨왔던 필살기인 ‘베낄 수 있는건 다 베껴라(복사신공)’이야.


장난감을 복사: 풍선껌을 만들 때 비누방울 거품기를 복사
형태와 사회이슈를 복사: 강화조약 체결기념-강화 껌, 크리스마스 껌, 설날 껌, 주사위 껌 등


이 복사신공을 바탕으로 순발력 있는 상품라인을 유지했던 롯데는 수백에 달하던 껌 시장에서 점차 선두가 되어간다고. 너무 잘나간 나머지 과로로 순직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요즘도 그렇듯 “보상은 했지?” 대응으로 직원들 마음을 식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군.


각종 판촉활동과 복사신공 때문에 1950년대의 롯데는 기업인이기보단 장사꾼이란 이미지로 통했어.
 


불황일 때 광고를 더해라. (쇼를 해라 쇼를!!)


미국인에게 배웠을까? 광고학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1950년대에 다케오는 이미 ‘불황일 때 광고를 꺾으면 소비자의 소비 심리는 더 위축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그의 경영행적을 본다면 그런 마인드로 무장된 것 같아. 불황이 심해서 원가절감을 하라고 지시할 때도 ‘광고만은 제외’가 불문율이었다고 하고, 각종 광고 전략과 POP물의 활용, 이벤트와 축제까지 판촉활동에 연계시킨 것을 볼 때 이공학 쪽이 아닌 광고 쪽 인재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해.


재료가 이슈타는 것을 이용해 클로로필(엽록소)이 넣은 그린껌이랄지, 미국영화의 유행을 타서 만든 카우보이 껌이라든지, 복사신공을 바탕으로 판촉하기에 좋은 각종 상품으로 시장을 제압했어. 그리고 마침내 일본의 TV 방송국 개국에 맞춰 ‘미스 롯데 선발대회’를 개최하지. 이는 브랜드 인지율과 호감도를 대폭 상승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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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흥했던 미스 롯데

사진은 1981년 미스 롯데 출신인 안문숙 씨


내 생각엔 ‘젊은 날 여차저차 헤어진 첫사랑은 이미 시집가서 희망이 없을 테니 내가 뽑아 재현하겠다’ 뭐 이런 마음으로 시작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일본 사람들의 ○○퀸, ○○여왕을 뽑기 좋아하는 특성을 잘 이용한 것 같기도 해.


여하튼 그 하나의 기획으로 개국 이후 수년 간 미스 롯데는 화제의 중심에서 회사 브랜드 가치를 재고하게 만드는 메인이 돼. 선발된 미녀로 뽕을 뽑을 때까지 판촉행위를 했는데, 멋지게 입힌 뒤 오픈카에 태워 긴자나 신주쿠에서 뺑뺑이를 돌린 모양이야. 역시 돈을 허투루 안 쓰는 롯데의 스타일, 참 독해.


그렇게 일본 내에서 당당히 1인자의 자리에 오른 롯데는 이제 끝판왕 ‘하리스’를 꺾기 위한 준비를 해. 역시나 복사신공의 근원기술인 해체조사를 통해 하리스의 제품분석을 하는데, 이 짓거리는 의미가 없었어. ‘천연치클’ 때문이었지. 일본 내에 수입이 금지된 천연치클을 넣을 방법이 없는데 천연치클이 들어있는 하리스 제품을 어떻게 누르겠어. 한손으로 권투하기랑 다를 게 없지.


결국 천연치클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분야에서 돌려치기로 천연치클을 구했어. 원료유용이란 범죄행위를 했다지만, 품질로는 처음으로 수입제품인 하리스에 맞설 수 있는 껌 ‘바브민트’를 출시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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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롯데가 국내에서 보여준 기술을 또 발휘해. 유통망과 저가를 바탕으로 한 사은행사, 가격할인, 얹어주기, 유통망에게 이익을 더 주고 상대 제품의 유통망을 느리게 만들기 등의 전법 말이지. 덕분에 하리스는 슬슬 저물어갔어. 일본 국가차원에서도 자국기업 제품을 은근히 밀어줬거든.


국가에 호응하듯 롯데는 자위대 파일럿을 위한 껌을 개발해. 여기에 다시 일본 정부가 맞장구를 쳐줘. 당시 일본의 국격을 향상하고 국내 기업제품의 우수함을 알려 국가 자존심을 드높이는데 사용된 이벤트인 ‘남극탐험대’에 롯데 껌을 채용하지. 롯데는 이렇게 일본을 대표하는 껌의 대명사로 완벽하게 자리매김을 하는 거야.


일본인로서 성공을 거둔 것이지. 시게미쯔 다케오. 오쯔카레사마~!!



심할 여유 따위 없는


신격호는, 감정이 말라버렸다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말을 몹시 더듬었다고 해. 칭찬이나 대화에 매우 인색해서 “잘했다”가 최고의 칭찬이고, 웃는 모습을 1년에 한두 번 이상 보기 어렵대. 한국에 돌아온 이후 고향의 행사엔 빠지지 않고 스폰서 역할을 하며 직접 참석한다고 해. 그의 고향은 울산공단의 공업용수를 위한 댐 때문에 수몰지구가 된 마을이라 더더욱 고향 사람들과의 유대가 크다고.


그런 사람이 1등이 된 이후에도 경쟁기업을 처절하게 압박하는 광고전 만큼은 꽉 움켜쥐고 진두지휘를 했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방일할 땐 광고모델을 만들어 브랜드 가치를 확고히 하기도 했지. 중요한 때엔 큰돈을 건 이벤트를 벌여 소비자의 눈과 입이 다른 제품에 쏠리기 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 즈음 한국인인 게 들통 나서 경쟁기업과 뒤늦게 슬슬 힘을 빼려는 국가기관과의 마찰이 시작된 상황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시장을 움켜줬다지. 매출액의 10% 정도를 광고에 사용했다니... 수익이 아닌 매출의 10%를. 뭐, 극성이라고 해야 하나?



한 때 일본을 정복했던 '스즈미야 하루히'와 콜라보레이션 한 롯데의 껌 광고


일본의 롯데가 이렇게 큰 거야. 그리고 신격호는 부와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20년 전에 잘 됐던 사업들을 한국에서 시행하지. 당시는 일본이 늘 20년 씩 앞서있었으니까. 이번엔 한국인이라서 더 빠르고 쉽게 추진하며 말이야.


단 한 번도 일본 여권을 사용하지 않고 대한민국 여권만을 사용해 왔음을 늘 강조한다고 하지. 강조한 만큼 강조할 이유가 있었다고도 하고.


일본에서 했던 것을 똑같이 적용한 탓에 일본인과 20년쯤 차이로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코미디도 조금 있어. 쳔연치클 껌은 애초부터 판 게 아니라 적절히 팔아먹다가 꽤 나중에 팔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초콜릿은 저질의 식물성 유지를 사용했지. 이것 때문에 작년에 좀 시끄러웠잖아. 이젠 코코넛 버터를 제대로 쓰나 모르겠네.


일본에서처럼 연구개발은 별로 하지 않지. 유통망을 쥐고 미투전략(시장에서 성공한 제품을 모방하여 편승효과를 노림)을 잘 펼치기로 유명하고 유통망 갖고 장난질도 많이 하는 기업으로 악명이 높달까? 메로나 짝퉁 ‘멜로니아’를 만들고 누가바 짝퉁 ‘누크바’를 만드는. 맛없기로 소문난 ‘롯데 초코파이’를 아직도 놓지 못하는 아둔함도 갖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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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넌...


난 롯데 제품을 소비하지 않아. 가짜를 만드는 곳의 제품을 소비해줄 만큼 너그럽지 않아서. 아직도 껌은 미제만 먹는다고. (공짜라면 한국 껌도 먹긴 하지만) 롯데가 하리스를 넘어서는 껌을 만들었다면 샀을 텐데, 포장부터 맛까지 하리스를 베끼는 건 너무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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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후레쉬 민트’ 같지? 밑엔 ‘쥬시 후레쉬’네.
예전엔 더 대놓고 베꼈는데 요즘은 좀 다르겠지.


이런 롯데를 전혀 사랑하지 않지만 딱 하나 대단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 조강지처와 일본의 유력한 집안에 걸어둔 두 번째 부인에 이어, 노년기에 세 번째 결혼을 시도한 그 욕망을 대단하다고 생각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이상향의 여인을 발견한 걸까? 남자야 남자. 보기 드문 욕망의 소유자라고.


37살의 나이 차이. 큰 딸과 아들보다 어린 여인을 취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신격호’가 된 남자. 이 남자가 만들어가는 롯데는 일본의 것과 같지만 더욱 거대하고 방대하며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지. 덕분에 롯데그룹은 최근 10년 간 가장 성장을 많이 한 재벌이 되었어.


조금 이상한 건 한국의 롯데 총수자리에 다른 사람을 영입하는데, 그 사람이 1950년대 6.25때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지점장으로 있었던 유창순 씨야.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젊은 한국인 기업가를 어여삐 여겨 대출을 몰래 해줬네 마네 하는 루머가 돌았어. 유창순 씨 체제가 십수 년이 갈 정도로 두 사람 사이 인연은 두터웠다고 할 수 있겠지.



공역(共域)의 미아, 분리된 자아로 부유하다


한국과 일본의 완벽하게 분리된 체제, 기업 분위기도 상이하고 국가 시스템도 다른 나라에서 경영자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감수해야 할 게 있었어. 완벽하게 일본 사람처럼 적응해야 했던 대가로 양쪽의 비난을 받기도 하고, 일본 처의 아들에게 후계를 넘겨주어 롯데가 한국 기업인지 일본 기업인지 비난을 받게 하기도 했지.


2세 체제로 넘어간 이후 일본 쪽은 축소된 느낌이고 한국 쪽이 거대해진 상황인데, 부인만 3명에 자녀가 여러 명인 탓에 후계구도가 퀴즈가 된 상태야. 뭐, 그래서 형제의 난도 생겼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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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싸우면 이 난리가 납니다

(출처- 한겨레)


장수는 좋은 일이지만 93세에 못 볼 꼴을 본 것은 축복은 아닐 거야. 다만 치매가 있는 모양이니 어쩌면 슬프지 않을 수도 있겠지.


맘 놓고 웃어보지 못한 부자. 한일 양쪽 나라의 부패와 국가 조직의 여러 곪은 상처를 이용했고, 이용당했을 시대의 사람. 철저히 두 사람으로 존재한 탓에 어느 한 쪽의 사랑을 온전히 받거나 주지 못했던 아쉬운 인생. 재벌로서는 입지전적 위치에 섰지만, 존경받지 못하는 부를 쌓은 탓에 그 얼굴이 슬픈 건지 화난 건지 알 수가 없지. 원래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니 더더욱.


만들어진 욕망과 인연으로 롯데를 키워온 그가 그렇게도 집착한 ‘샤롯데’는 세 번째 인연에서 충족된 것이었는지 이후론 별다른 소식이 없어.


롯데를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건 아마도 당시 가장 높았던 빌딩인 롯데호텔일거야. 한때 가장 높았던 롯데호텔의 스카이라운지를 기억하거든. 아이스크림이 참 맛 좋았지. 뭐든 가장 높게 만들고 싶었던 게 분명해.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롯데의 염원은 한 층 한 층 높이를 해가는 중이지.


흥미진진한 형제의 난이 벌어지고 있는 바벨탑의 막장 드라마는 한일 두 나라 중간 어디 공역에서 헤매는 야망 가득했던 93세의 신격호 혹은 시게미쯔 다케오의 시선이 저물어가는 황혼의 끝자락에서 난투박투를 벌이며 만들어지는 모양이야.


롯데의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형제기업인 농심의 제품도 소비하지 않는 내가 평소 관심 없던 롯데를 바라본 것은 그 막장 드라마의 역할이겠지만, 어쨌든 치열한 격동의 시대 자신의 성을 두 나라에 온전히 쌓은 이 공역의 유령일지, 마신일지 모를 노인의 시선에 보이는 드라마가 짧기를 기대해. 누구나에게 공평한 것은 오직 하나잖어. ‘죽음’ 그 앞에 있을 기나긴 막장 시나리오를 바랄 정도의 억하심정은 없어서 말이야.


상상하기조차 힘든 거대한 기업을 빵 조각 다투듯 하는 두 어린애의 싸움이 모쪼록 빨리 정리되길 바라. 노인의 눈빛에 시큰한 설움이 담기지 않을 그런 오후가 얼른 다가오길 바라고.


그가 떠난 후의 롯데는 과연 한국의 대표적인 유통그룹인 것일까? 아니면 윤봉길 의사가 마저 치우지 못한 전범찌꺼기 시게미쯔의 화려한, 그러나 티 나지 않는 진공일까?


<재벌25시>에선 신격호를 두 나라를 오가는 영원한 에뜨랑제로 정리하며 마무리를 짓고 있어. 근데 난 공역의 밍, 부유하는 망령으로 표현하고 있지. 아마 활동기의 사업가를 바라보는 시선과 황혼기의 사업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겠지.


두 나라를 다 품기엔 어렵겠단 생각이 들어. 돌아갈 고향도 댐 안에 잠겨있을 테니 뭔가 안타깝지. 난 창업자들에겐 관대한 편이라 마찬가지로 공역의 미아인 신격호 씨에게도 호감이 있어. 아마도 광고를 공부한 사람들은 조금 그런 마음이 강할 거야. 각종 판촉전, POP물, 이벤트의 활용에 있어서 롯데는 하나의 교과서와도 같은 기업이니까. 그 기발함과 활동성에 경의를. 두 나라를 동시에 채운 것이 있다면 광고의 기발함과 활동성이 남긴 결과물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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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롯데를 꿈꾸며 쫒은 남자. 자신의 마지막 샤롯데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시간이 한 조각 쯤 있기를. 모든 의혹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건너온 남자에겐 그쯤 기원해 주는 거는 인정이겠지.
 



* 참고서적
<재벌25시> 조선일보 경제부 저 / 동광출판사 / 1982년 판.

* 참고기사
"신격호, 윤봉길 도시락 폭탄에 당한 시게미쓰 가문과 결혼하다" / CBS노컷뉴스 / 임기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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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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