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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30. 화요일

슈르나










현재 우리의 상황과는 큰 관련이 없는, 먼 곳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물론 세계화 시대이니 돌고 돌아 우리와도 관련이 있기야 하겠지만 딱히 현재까지는 국제 뉴스에 자주 나오는 것 외엔 별 관련성은 없다. 따라서 이 글은 국제 시사 상식을 탐구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 탐구의 끝에서는 아마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알흠다훈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기만을 바란다. 아니면 이걸 왜 해.


탐구의 대상은, '이슬람 국가'로 지칭되고 있는 영문 두 글자, IS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의미로도 쓰여온 단어이지만 요즘 사용되고 있는 IS는 Islamic State의 약자로, 국가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신생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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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국기다.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격렬히 부정하기에 어떤 상징도 없이 흑백에 글씨 쓰고 끝.


신생국가라 하면 남수단이나 동티모르처럼 당연스럽게도 무장투쟁을 안 할 수가 없다. 국가 설립과 존속에 필요한 영토 및 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걸 이미 갖고 있는 주변국에게 받아내야 하고, 그런 걸 순수히 내줄 국가는 없으니까 말이다. IS의 무장투쟁은 지금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무장투쟁의 대상은 어마무지하게 멋지다.


전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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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란 말고도 이런 책을 보고 있는지... '이슬람에 의한 세계정복'이 국가 목표다. 진짜다.


국호에 이슬람이 들어가기 때문에, IS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슬람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IS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설립했으니 이런 극단주의가 왜 등장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자면... 이슬람교를 성립시킨 사도 무함마드 때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슬람교의 최초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변해갔는지를 알면, 현재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초기 이슬람 역사는 꽤 재밌는 이야기다. 막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하 드라마다.


그러니까 시간부터 되감아보자. 아랍권 인명에 둔감할 독자들을 위하여 중요한 등장인물의 이름은 굵게 표시해둘 테니 집중하여 기억해두시라. 역사 상식 타임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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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이전에, 이슬람이 뭔지부터 알아보자규.


비-이슬람 지역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는 특히 이슬람교의 인지도가 매우 낮다. 신도 수도 적고, 일단 한국은 불교와 기독교(카톨릭 포함)의 세력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행위 덕택에 다른 홍보 효과가 다 씹어먹혀버린 탓도 있다. 그래도 사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의 창시자라는 것은 대부분 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식으로 종교를 만들었는지 모를 뿐.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 보니, 뉴스에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이 어쩌니 해도 머리 위엔 물음표만 뜬다. 사실 이 '시아파 vs 수니파'만 이해해도 정치적인 의미의 이슬람은 거의 다 이해한 거다. 이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돌아가야 하는 시작점은, 사도 무함마드의 죽음이다.


무함마드는 부족국가와 도시국가들이 투닥투닥하며 살던 중동의 중세 어느 날, 아랍 족의 쿠라이쉬 부족 중 하심 가문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이 하심 씨족은 지금도 존속하는 가문이다. 현재 요르단의 왕가거든.


미남인 아버지를 닮아 존잘이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요절하고 숙부 손에서 자라며 빈부격차 쩌는 메카의 가난뱅이로 자란다. 가난해서 문자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언어 능력 자체는 뛰어나서 말과 시에 능했다.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도 무함마드의 구술로 정리된 것인데, 그 문학성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쿠란에 이르러서 아랍어가 하나의 언어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랍어 공부가 중급 이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쿠란을 공부해야 할 정도다.


아무튼 무함마드는 가난을 못 벗어나고 조무래기 무역상으로 살면서 결혼을 못하고 있다가, 존잘에 달변이어서인지 돈 많은 과부와의 결혼에 성공하여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스무 살 차이 나는 누님이었지만 부부 관계는 열라 돈독했다고. (안 그럴 이유 있나... 남편은 잘생긴 연하남이고 아내는 경제권을 쥐고 있으니...)


원래 명상도 좋아하고 종교적인 무함마드는 가난을 벗어나 인생 좀 펴게 되자, 원래 오덕질하던 분야인 종교 탐구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메카 교외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을 창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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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 존잘 형님의 세계구급 성인 등극이다.


물론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창시자라 하지 않는다. 모세가 신의 말씀을 받아 유대교를 만들었으나 시간이 지나 왜곡되었고, 이를 예수가 바로잡아 기독교를 만들었으나 역시나 시간이 지나 왜곡되었으니, 무함마드가 이를 다시 바로잡았다는 것이 이슬람의 설명이다. 따라서 이슬람은 모세, 예수, 무함마드 모두를 3대 짱짱 사도로 보고 별로 적대하지 않는다. 다만 요즘 이슬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루빨리 신께서 무함마드 다음의 사도를 내려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마지막 신의 사도라고 못 박아놨다. 즉, 이슬람이 진리의 종교 그 마지막 버전이라는 것.


어쨌든 무함마드는 40대에 각성 후, 메카에서 이슬람 포교를 시작한다. 당연히 기존 세력의 핍박을 받았고, 더해서 자기네 씨족에게서도 핍박을 받았다. 결국 아내의 재산도 날아가고, 파산의 영향으로 인해 고령의 아내가 죽더니, 이틀 뒤엔 빽 역할을 해주던 숙부도 사망했다. 보호막을 죄다 잃은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기고, 이때를 기점으로 이슬람교가 교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헤지라'라고 부르며 이슬람 기원 원년으로 여긴다. 서기 622년 9월 20일이다.


헤지라 당시, 반 무함마드 세력은 무함마드가 도망가기 전에 죽이기 위해 암살팀을 급파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늘 무함마드보다 더 자주 다루게 될 인물이 등장한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일명 알리. 현재 아랍어권에서 남자 이름으로 졸라 많이 쓰이는 그 알리를 이름으로 하시는 분이다. 이 글에서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올 것이며, 현대 이슬람의 비극의 기원이자 아이콘이다.


무함마드가 가장 먼저 포교할 대상은 당연히 가족이었는데, 대부분이 여자였고 남자는 알리가 최초였으니 최초의 무슬림이다.('무슬림'은 남성형이고 '무슬리마'는 여성형이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인데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형제와 같았고, 아랍 관습상 이런 관계의 남자 친족들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양자 취급을 받는다. 알리 역시 무함마드의 양자 위치였다. 게다가 무함마드의 딸과도 결혼해 사위도 되었으니, 친족 중에서는 무함마드의 최측근이 된 거다.


이 알리가 무함마드의 침대에 무함마드 대신 누워있었다. 이 페이크에 속은 암살팀은 무함마드가 아직 메카를 빠져나가지 않은 줄 알고서 집으로 쳐들어갔다가, 알리를 발견하고서야 낚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시간 무함마드는 분루를 삼키며 메디나로 가고 있었고, 알리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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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통칭 알리. 존잘은 집안 내력인가.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옮겨갔다가 세력을 키워 메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슬람 종교 공동체, 통칭 '움마'는 신정국가 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메카와 메디나에서 이슬람에 감화되어(혹은 협박으로) 귀의한 귀족들도 무함마드의 조력자가 되었다. 헤지라 당시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사촌/양자/사위인 알리도 무함마드 진영의 핵심이었다. 특히 알리는 전장의 지휘관으로도 유능했다. 그리고 이들은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하는 신정국가를 통치하는 실제 정치세력이 되었고, 서서히 아라비아 반도 전체로 뻗어나갔다.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은 중세 중동에서 매우 진보적인 종교였다. 형이상학적 교리는 둘째 치고, 사회에 적용될 형이하학적 교리부터 혁명적이었다. 빈부 격차를 줄이도록 하는 평등 사상이 반영된 율법부터 시작해서, 여권을 신장하는 제도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부다처제가 그런 율법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슬람 이전의 중동에선 매우 원시적인 형태의 일부다처제가 횡행했다. 약탈을 하든 거래를 하든 연애를 하든 일단 여자를 끌어오면 끝이었으니 곧 '결혼에서는 남자의 권력과 힘이 정의'인 셈이었다. 무함마드는 이 풍습에 대해 조까를 날려주면서 쿠란에 의해 일부다처제를 이렇게 제한했다.


1. 수십 명씩 안 됨. 상한선 4명.

2. 결혼할 때 남편이 지불하는 지참금은 아내의 친정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온전히 아내 것. 남편도 친정도 손 못 대.

3. 아내들 각자와의 섹스? 아내들에게 분배할 가정의 부? 남편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완전히, 기계적으로, 동등하게.

4. 아내들이 가정 문제로 고발하면 남편은 얄짤없이 벌받음.

5. 아내들만이 아니라 딸에게도, 그러니까 여성 모두에게 상속권 있음.

6. 2번 때문에 돈 나가고 3번 때문에 정력 딸리고 4번 때문에 살 떨리지? 그러니까 되도록 하지 마.


대강 이런 식이다. 그래서 실제로 소수 상류층이 아니면 일부다처제는 상당히 사라졌다고 한다. 반면 무함마드는 첫 아내 생전에는 아내와만 생활하다가 아내 사후, 일부다처제의 세계로 넘어갔는데 4명이 아니라 총 12명의 처를 두었다. 쿠란에는 4명이라고 되어있다면서 이게 뭔가 싶지만, 이는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이거나 갈 곳 없는 과부들에 대한 보호형 복지 차원이었다. 게다가 첫 아내 이후 사실상 유일하게 사랑하여 결혼한 아내는 제3부인인 아이샤였지만, 무함마드 자신은 율법을 지켜 12명의 아내 모두와 공평한 성생활과 사랑을 유지했다고 한다. 사도가 되려면 이 정도로 절륜해야 한다.


이슬람을 통치하던 사도 무함마드는 632년에, 아들도 후계자 지명도 없이 사망했다. 애처 아이샤의 무릎을 벤 상태에서 서거했고... 후계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물론 사도 무함마드의 후계자라 해서 2대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도의 대는 무함마드에서 끊기고, 새로운 통치자의 명칭은 '칼리파'('칼리프'는 영어식 명칭이다.)였다. 김일성 사후, 북카니스탄이 '주석' 직위는 김일성에게만 가능하다며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칭한 것을 생각해보자. 물론 이슬람을 북카니스탄에 비교하면 이슬람에 대한 모욕이지만.


이 칼리파, 영문으로는 칼리프인 군주명은 이슬람교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군주명이다. 그만큼 유서 깊은 명칭이며, 후일 등장하는 군주명 '술탄'의 경우에도 술탄이 칼리파를 겸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칼리파에 의한 임명 절차가 있을 정도다. 술탄이 정치적 군주로 황제/왕/대공으로 번역 가능하다면 칼리파는 정치와 종교 양쪽의 군주로, 교황+황제 혹은 왕의 의미가 된다. 신의 대리자인 사도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리파는 술탄처럼 여러 군주가 동시에 칭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바로 그런 무게감 있는 직위의 최초가 될, 초대 칼리파로 유력한 이름 중 하나는 알리였다. 아들이 없는 무함마드의 양자+사위였던 관계에다가, 무함마드 자신도 "여러분이 나를 신앙의 수호자로 여긴다면, 알리도 그렇게 여겨주시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알리의 경쟁자가 하나 있었다. 무함마드의 양쪽 팔 중 한 명이었던 아부 바크르. 그리고 아부 바크르가 알리 대신 1대 칼리파로 선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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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잘까진 아닌, 아부 바크르 할아버지.


알리만큼 가까운 혈연은 아니어도 아부 바크르 역시 무함마드와 먼 친척이었다. 상당히 부유하고 유능한 무역상이었는데, 이 남자가 이슬람 귀의 후엔 이 부와 자신의 능력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일단 초기 이슬람을 떠받친 인재들 중 상당수가 아부 바크르에 의해 등용되었다. 이후 2대, 3대 칼리파가 모두 아부 바크르가 이슬람에 귀의시킨 사람들이고, 후일 페르시아를 박살낸 장수, 이집트를 떡실신시킨 사람도 모두 아부 바크르표 인재였다. 게다가 자신의 딸 아이샤를 무함마드의 아내 중 하나로 보내 사도의 장인이기도 했다.


무함마드 사후 메카 일파와 메디나 일파가 각각 다른 지도자를 지지하며 분열하려 하자 인망 높은 원로인 아부 바크르가 이를 수습하고서는, 단 한 명만을 선출하는 선거 상황을 만들어버린다. 이 선거에서 아부 바크르가 지지한 사람은 자신과 함께 무함마드의 양팔 역할을 했던 우마르였지만, 우마르는 역으로 아부 바크르를 지지해버렸고 그대로 초대 칼리파가 되어버렸다. 나름 상당한 지지세력을 갖고 있던 알리가 소외되어버린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분열, 그 씨앗이 처음 출현한다. 사도 무함마드와의 관계로 보나, 속한 혈족으로 보나, 그 자신의 능력으로 보나, 알리는 분명히 유력한 칼리파 후보였다. 알리의 단점이라면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젊다는 것, 그래서 커리어가 상대적으로 짧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세습에 익숙한 중세 중동에서 갑자기 선거 제도가 등장하더니, 그 제도를 제안한 사람이 덜컥 당선되어 버렸다. 알리파에서 보기엔 불합리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갈등 상황은 험악해져서 유혈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알리 자신의 결단에 의해 갈등은 잠재워졌다. 이슬람은 이제 초기 단계였고, 창시자가 사망하자마자 분열한다면 그들이 신앙하는 진리는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대승적 차원의 판단이었다. (물론 완전히 해소된 갈등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사는 알리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줬다. 아부 바크르는 고령이었기에 그 치세가 2년 정도뿐이었으나 이후 진행될 정복 전쟁의 기반은 죄다 아부 바크르가 입안해뒀다. 칼리파 자신 또한 '봉급제'(!!!)로 일했고 이 시기에는 이슬람 귀의 전에 갖고 있던 재산의 마지막까지 노예 해방에 써버렸다. 그의 검소함은 거의 병적이었고 자애로운 성품 이미지도 있어서 이슬람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쿠란의 왜곡을 막기 위해 경전 정비를 시작한 것도 아부 바크르다. 그리고 아부 바크르가 2년간 정비한 국력은 2대 칼리파에 와서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그 2대 칼리파는... 안타깝게도 또 알리가 아니었다. 이번엔 아부 바크르의 동료였던 우마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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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슬람을 박해했으나 결국 감화되어 무함마드의 한쪽 팔이 된, 우마르 선생.


우마르 자신은 칼리파 후보가 된 것에 당황했다고 전해진다. 전임자인 아부 바크르가 추천하긴 했지만, 우마르는 원래 전쟁터에 어울리는 호전성의 유닛이었다. 역사에서 법칙을 읽어낼 정도가 되면 이런 사람이 '정비 끝 팽창 시작' 시기에 딱 맞는 군주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불안한 대안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알리에게 향하는 순간... 알리가 우마르를 추천한다.


알리는 2년 전, 초대 칼리파 선출 당시에 있었던 위험한 갈등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초창기인 이슬람이 절대로 피해야 하는 것이 분열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아직 젊은 자신이 칼리파가 된다면 비록 자신의 지지 세력이 많긴 하지만 분열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대승적 결단을 또 다시(!) 내린 것이다. 결국 전임자 아부 바크르와 경쟁자 알리의 추천을 받은 우마르가 2대 칼리파로 선출이 된다.


우마르는 아군에게도 두려움을 받는 자신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애롭고 검소했던 전임자 아부 바크르의 행적을 그대로 따르며 이미지 쇄신을 꾀했고, 이건 성공했다. '그래도 너무 검소해서 가난뱅이로 보이면 칼리파의 품위가 살지 않는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최소한의 재산은 유지하는 융통성도 보여줬다. 그래도 한 국가의 지도자라기엔 너무 검소해서 전쟁 승리 소식을 가져온 전령에게 소식을 묻자 전령이 'ㅅㅂ 넌 나중에 들어!' 하고 지나쳤다는 일화가 있긴 하다.


워낙 전쟁 관련으로 유능한 칼리파였기에 그가 치세한 10년간 이슬람은 대대적인 양적 팽창을 벌인다. 전임자 아부 바크르가 시작한 내정을 완료하자마자 우마르는 현재의 이란인 사산조 페르시아를 비롯해 인접 국가와 세력들을 하나하나 털어갔다. 이슬람 3대 성지 중 나머지 하나인 예루살렘도 이때 이슬람에게 정복되었다. 이때 정복당한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슬람식 예배를 집전하는 것으로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겠거니 생각했으나... 우마르는 정반대로 '내가 그래버리면 이 아름다운 교회는 후일 모스크로 변해버리지 않겠느냐. 우리는 너희를 박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기는 우리 성지이기도 해서 온 것이니, 우린 우리대로 하고 너흰 너희대로 하자. 우리 종교가 더 나아보이면 개종은 그때 해도 된다. 대신 피정복민으로서 세금은 좀 더 내라.'는 쏘 쿨한 정책을 보여줬다.


그 개인적으로는 여성 혐오 등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우마르는 훌륭한 정복 군주였다. 너무 훌륭해서 적도 많아졌다. 우마르는 페르시아계 기독교도 노예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지고, 곧 사망한다. 임종 직전, 유력 인사들은 '다음 칼리파는 아드님이지요?'라고 물었으나 우마르는 '뭔 개소리냐! 칼리파는 선출직이다!'라고 일갈해버리고 최고 6인 회의인 '슈라'를 신설하여 그들에게 차기 칼리파 선출을 맡겨버리고 10년의 치세를 마감한다. 이제 콩라인으로 굳어가고 있는 알리가 드디어 칼리파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럴 리가. 슈라는 3대 칼리파로 우스만 이븐 아판을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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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정복 전후의 정비를 요구받은 3대 칼리파, 우스만 아저씨.


우스만 역시 알리와 마찬가지로 사도 무함마드의 사위였고, 초기에 이슬람에 귀의한 초창기 멤버다. 정신적으로는 약간 불안한 면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메카 최고의 부자였던 만큼 경영 능력은 훌륭히 탑재한 유닛이었다. 알리처럼 무함마드와 아예 같은 가문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속한 우마이야 가문 역시 쿠라이쉬 부족이었기에 혈연도 그렇게 멀지는 않다. 스펙상으로 그렇게 딸리는 칼리파는 아니었으나, 경쟁자인 알리에 비하면 커리어와 이미지에서 밀리는 감이 있는 것이, 알리는 전투형 유닛이었고 우스만은 후방 관리자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스만의 커리어 중 전투에서 패배하자 무함마드마저 버리고 도망간 적이 있다는 점은 그에게 큰 약점이었다. 실제로 그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상당히 심약한 편에 속했기에, 아부 바크르, 우마르, 알리 등의 다른 이슬람 오픈 멤버 동료들에 비해 멘탈면에서 좀 밀리는 편이었다. 이런 약점은 우스만 자신도 알고 있었고, 그 열등감 때문에 더더욱 신앙에 매달린 측면도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 사후 10년이 넘어가자 슬슬 부의 독점과 계급화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알리와 우스만 둘 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이슬람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는 가문들은 알리가 껄끄러웠다. '아직 이슬람이 가져올 개혁은 끝나지 않았다'느니 '이슬람의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야전 사령관 알리보다는, 재산을 축적하고 관리하는 쪽에 유능한 명가의 멤버 우스만이 좀 더 나은 선택으로 보였다. 이슬람의 성립에 공헌한 공신 가문들이 일종의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징후이고, 이런 사람들이 슈라의 멤버 6인을 대부분 차지한 때문에 알리의 '큰 그림'은 또 물을 먹어야 했다.


바야흐로 제국이 된 이슬람 신정국가에 새로 던져진 과제는 정복전쟁으로 얻은 부와 영토의 뒤처리였다. 칼리파로 선출된 우스만은 원래 돈 좀 많이 만져봤던 사람답게 능수능란한 국가 운영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재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우스만이 이슬람 신정국가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고의 저축과 지출을 계획하고 세분화하여 경영하는 개념이 전대 칼리파들에게는 약했으나, 우스만은 생산된 국부가 사용되지 않고 낭비되는 일이 없도록 경제 구조와 국가 시스템을 건설해냈다. 농업용 관개 시설, 모스크, 도로, 운하 등의 정비 덕에 후일 유럽 문명에서 말하는 '부유한 이슬람' 이미지가 우스만 치세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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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스만이 경영해야 했던 제국의 규모다. 


그러나... 국가 경제의 양은 증대했으나 그에 수반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분배에 있어서는, 우스만은 실패했다. 우스만의 실수는 두 가지였다.


1. 경제 정책의 수혜가 쿠라이쉬 부족, 특히나 자신의 가문인 우마이야 가문에 집중되도록 묵인해버렸다.

2. 우마이야 가문 중에서도 자신의 6촌인 무아위야 이븐 아피 수피안, 통칭 무아위야가 어떤 야심을 품은 유닛인지 모른 채 중용해버렸다.


메카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보며 자란 사도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이 20년 만에 다시 그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세금도 점점 올라갔다. 특히 이집트와 같은 정복지에서의 세금은 계속 무거워졌다. 게다가 전임자들과 달리 칼리파로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던 우스만은, 자신에게 불손한 지방에는 세금을 더 부과하는 방식으로 군기를 잡으려 했다. 다른 세속의 군주라도 마찬가지지만, 불평등 타파가 교리의 하나인 종교를 기반으로 건설된 신정국가의 군주라면 심각한 결격 사유가 된다. 게다가 부의 집중은 권력의 집중을 의미하니, 쿠라이쉬 부족과 우마이야 가문이 사실상의 왕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점점 이슬람 신정국가는 신정국가의 특색을 잃어가면서 다른 국가와 비슷한 제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시국을 보는 알리의 마음은 뻔하다. 졸라 타들어갔겠지. 그러던 와중에 큰 사건이 터졌다. 이슬람 신정국가의 몰락과 현대 이슬람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 총독이 세금 인상 명령에 대해 '자꾸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했다가 잘렸다. 새로 부임한 총독은 보란 듯이 세금을 두 배로 올렸다. 이집트 피정복민들은 칼리파에게 '제발 총독 해임 좀'이라고 졸랐으나 칼리파는 묵묵부답으로 답했다. 그러자 이들은 사절들을 뽑아 보내 칼리파 앞에 나타나 직접 청원했다. 시위를 벌인 것이다. 칼리파는 표면 상으로는 총독 교체를 승낙했으나 실제로는 이집트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사절단이 귀환하면 모조리 죽여버리도록 명령했다. 문제는 즐겁게 귀환하려던 이집트 사절단이 이를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빡친 사절단은 폭도로 진화해 칼리파에게로 돌진했다. 언쟁과 숨바꼭질이 이어진 끝에 너무 빡친 나머지 이들은 우스만에게 칼리파 사퇴까지 요구했고, 우스만이 당연하게도 이를 거절하자...


칼리파를 죽여버렸다.


우스만의 12년 치세가 너무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이슬람 신정국가에 폭탄이 터진 거다. 일단 최우선 과제는 공석이 된 칼리파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말로, 그간 계속 유망주 취급만 받아온 강력한 콩라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드디어 칼리파로 선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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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권을 잡긴 했는데... 시국이 비상이다.


경력, 실력, 신앙 모두에서 훌륭한 군주감인 알리는... 그러나 너무 늦게 칼리파가 되었다. 이슬람 신정국가는 이미 알리가 고수하는 초기 이슬람 정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우스만을 통해 부를 얻어냈던 기득권 세력으로 분열되어가고 있었다. 이 분열을 해결하는 것이 알리에게 던져진 첫 번째 과제였고, 두 번째 과제는 우스만의 경제 정책이 야기한 부작용을 없애고 장점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러나 알리에겐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없어졌다. 알리만큼 유능한 야심가, 쿠라이쉬 부족의 무아위야가 움직인 것이다.


야심 있는 이 남자는 생전의 사도 무함마드가 경계했던 수하였다. 무함마드의 방법은, 인재이니 쓰긴 쓰되 중대한 사안에서는 뒤로 돌리는 방식이었는데... 무함마드 사후 조금씩 요직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다가 결국 3대 칼리파 우스만의 시대에는 다마스쿠스를 거점으로 하는 거물로 성장해버렸다. 이 남자가 쿠라이쉬 가문을 장악하고는 알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우스만 암살의 배후는 알리 아니냐'는 의혹까지 쿠라이쉬 가문에서 제기되었다. 알리는 어떻게든 자신이 꿈꾸던 이슬람의 초심으로 국가를 되돌려 보려 했지만, 쿠라이쉬 가문을 비롯한 기득권층은 끈질겼다.


강경한 상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알리는 점점 강경해졌고, 끝내는 전임자 우스만이 임명했던 모든 총독들을 해임시켜 버렸다. 예멘 총독을 제외한 모든 총독이 불복했고, 사임한 예멘 총독도 명령을 따른 게 아니었다. 사임 직전 국고까지 횡령해버린 다음, 사도 무함마드의 제3부인인 아이샤를 게임판 위로 끌어들였다. 아이샤는 1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딸이며 사도 무함마드의 아내들 중 가장 유력한 사람인데다 그녀 자신도 유능한 학자였다.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무함마드의 언행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는 덕에 3대의 칼리파들이 모두 매달린 경전 정리 프로젝트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연히 강력한 정치적 거물로 떠올랐고 무아위야의 지원을 받으며 반-알리파의 수장이 되었다.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발발한 내전은 좀처럼 확산되지 않고 국지적 전투 레벨에만 머물렀다. 그건 다 양세력의 수장인 알리와 아이샤의 특성 때문이다. 둘 다 사도 무함마드의 최측근이었고 이슬람의 초심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샤는 알리를 개인적으로 경멸했고 알리 또한 아이샤가 껄끄러웠지만, 두 사람은 그런 개인적 감정을 뛰어넘어 대국을 위한 수를 쓸 줄 아는 레벨이었다. 알리와 아이샤는 대화를 통해 의견을 조율하면서 현재 내전 상황의 갈등을 풀어가는 길로 착착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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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샤 이븐 아부 바크르. 그녀의 수식어는 '예언자의 아내', '믿는 자의 어머니' 등이다.


하지만 서로를 증오하기 시작한 두 사람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이런 화해 무드가 맘에 들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아위야도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내전이 본격화되어야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측 진영에서 상대편과 내통하던 인사들도 상당했는데, 이런 사람들도 당연히 불안했다.


결국 656년, 알리와 아이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두 사람의 명령을 듣지 않는 양쪽 세력 중 일부가 서로를 향해 돌격해버렸다. 내전의 분수령이 되어버린 이 전투는 우발적으로 갑작스럽게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무아위야의 뒷공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양측 수장인 알리와 아이샤는 개전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서로에 대한 배신감에 이를 갈았다. 아이샤가 낙타에 탄 채로 실제 사령관인 오빠와 함께 전투를 지휘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낙타 전투'로 명명된다. 하지만 승리는 군사적 역량이 더 출중한 알리에게로 돌아갔고, 생포된 아이샤는 약간의 모욕을 받기는 했지만 목숨을 잃지는 않고 메디나에 연금되어 22년을 더 살았다.


승리는 했으나 사실상 상처뿐인 영광을 얻고 한숨 돌리려는 알리를 향해, 무아위야는 곧바로 자기 자신을 칼리파로 선언하며 반란의 기치를 든다. 내전은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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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파를 배후에서 암살한 알리는 칼리파가 아니드앗!"

-무아위야 이븐 아피 수피안


내전 답지 않게 온건한 진행 양상을 보였던 알리 vs 아이샤 때와는 달리 알리 vs 무아위야의 내전은 매우 치열했다. 오래도록 별러왔던 무아위야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초에 살포했던 '알리 배후설' 루머를 이용해 우스만이 피살될 때 입었던 옷이라며 피 묻은 옷을 가지고 다니며 보여준다거나, 음유시인들을 고용해 사방에 알리를 음해하는 노래를 지어 퍼뜨리는 등의 프로파간다 공작에도 힘썼다. 군사 전력 또한 비등했다. 때문에 내전 상황은 일진일퇴의 백중세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알리 역시 칼리파가 되기까지 오래 별러왔던 사람이었다. 끝내 전쟁의 승기를 잡아낸 사람은 알리였고, 무아위야는 주도권을 내주고 밀리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무아위야 역시 유능한 군주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필사적인 항전으로 알리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내주지 않았고, 결국 알리는 평화 협상을 통해 내전을 끝낼 생각을 한다. 무아위야의 항전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이긴다 해도 너무 큰 희생을 치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알리의 협상 제안에 무아위야도 동의했다.


누가 봐도 협상에서 유리한 사람은 현재 적법한 칼리파이자 내전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알리였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이 열리자마자 무아위야는 왜 자신이 거물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극강의 협상 능력으로 무아위야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갖는다는, 사실상 자신과 알리가 동등한 위치가 되는 것으로 협상 결과를 도출해내는 괴물 같은 실력을 보여준다. 협상 후 벙쪄버렸을 알리에게 애도를.


이 협상 결과에 대해 가장 분노한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알리의 지지 세력이었다. 개고생을 하며 내전을 수행했는데 돌아온 것은 국가가 사실상 분단되는 것이라니. 그런데 가장 급진적인 세력은 지나치게 빡쳐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도 무함마드의 적법한 계승자인 칼리파가, 칼리파를 참칭한 한낱 반역자인 무아위야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벌였다는 것 자체부터가 분노의 요인이었다.


결국 이들은 알리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같은 요구를 받은 적이 있던 전임자 우스만과 마찬가지지만, 알리가 이런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요구한 세력도 5년 전 다른 칼리파에게 요구했던 자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칼리파를 죽여버렸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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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신앙. 첫 도전부터 치면 24년의 기다림.

간신히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전임자들과 달리 업적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내전만 줄창 하다가 사망하다.


나라가 둘로 갈린 내전 상황이었기에 칼리파를 선출해야 할 슈라는 소집되지 못 했다. 정통 칼리파는 4대째만에 공석이 되어버렸고, 남은 건 칼리파를 자칭한 무아위야였다. 무아위야는 사실상의 칼리파가 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세력을 계승할 수 있는 존재인 알리의 장남 핫산을 회유하여 하야를 권유했고... 핫산은 내전에 지쳐있던 터라 무아위야의 회유에 넘어갔다.


무아위야가 최종 승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점차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력을 통합해가며, 이슬람교 역사에서는 최초의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했다.


글타. 세습이다. 이제 칼리파는 더 이상 선출직이 아니게 되었다. 무아위야 1세는 자신의 칼리파 지위를 아들 야지드 1세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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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옴미아드'라고 표기했던, 우마이야 왕조의 최대 강역이다.

무아위야 1세와 야지드 1세를 비롯한 우마이야 왕조의 초기 칼리파들도 유능한 군주였지만,

중세 최고의 제국을 최초로 건설하여 우마이야 왕조 번영의 기틀을 놓은 사람들은 

결국 무함마드와 그를 이은 4명의 정통 칼리파들이었다.


야지드 1세가 세습 형태로 칼리파를 승계한 때는 680년이다. 알리의 장남 핫산은 저항 의지를 잃었으나 차남 후세인은 달랐다. 후세인은 열심히 정권에 저항하며 아버지 알리의 옛 세력을 회복하려 애썼고, 야지드 1세는 그런 후세인을 암살해버렸다. 시간이 가고 사건이 생기고 시체가 늘어갈수록 우마이야 왕조와 구 알리 세력 간의 감정의 골은 더 이상 바닥을 모를 정도로 떨어져버렸다.


알리의 후예들, 우마이야 왕조에 저항하는 이 세력은 정권의 통치에 저항하던 이라크 지역과 페르시아 유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곧 시아파라는 별도의 종파로 분화하게 된다. 그리고 제국 내에서 끈질긴 저항 운동을 펼친 끝에,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에 큰 역할을 하게 되지만... 뒤이어 집권한 아바스 왕조 역시 시아파를 탄압해버렸다. 아바스 왕조의 성립이 750년이니, 우마이야 왕조 야지드 1세의 즉위인 680년부터 쳐도 70년의 저항이었지만 그 결과는 허무했다.


물론 그게 시아파의 정치적 종말은 아니었다. 909년이 되어서야 튀니지 지역에서 시아파의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우바이드 알라 알마흐디가 파티마 왕조를 건국하고 칼리파가 되었다. 이 우바이드는 알리의 후손인데, 바로 이 점이 시아파를 정의하는 첫 번째 특징이다. 시아파는 반드시 무함마드나 알리의 혈통상 후손이어야 칼리파일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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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하기아 소피아에 걸려있는 현판. 

저 아랍어 서예는 4명의 정통 칼리파의 이름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하지만 시아파는 알리만을 인정한다. 

그래서 시아파 무슬림을 만나면 칼리파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시아파의 신앙적 선조들은 알리의 지지세력이었으며 알리의 이상주의와 영욕의 세월과 서글픈 최후를 지켜본 사람들이다. 능력도 출중했고 초기 이슬람의 정신을 지켰으며, 이슬람의 변질을 막고 싶어 했으나 그럴 수 있는 칼리파에 오르자마자 내전에만 힘 쏟다가 허무하게 죽은 영웅이 알리였다. 때문에 시아파는 점점 알리를 무함마드와 동격으로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알리를 제치고 칼리파가 되었던 세 명의 전임 칼리파는, 그래서 시아파에서는 쳐죽여야 할 찬탈자로 인식한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파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의 군주직이 아니라 신성한 직위로 해석한다. 때문에 파티마 왕조의 개창자 우바이드는 시아파가 알리 이후 처음 가지게 된 칼리파였던 것이다.


1171년에 파티마 왕조가 멸망한 후로는 시아파에게 칼리파란 없었다. 쿠란과 율법을 해석하여 이슬람을 이끌어야 할 칼리파가 없으니 그 역할을 대신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맘'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맘은 이슬람교에서 사제를 지칭하는 단어다. 하지만 시아파에서는 단순한 사제 이상이다. 칼리파가 해야 할 역할을, 비록 무함마드나 알리의 혈통은 아니지만 그래도 쿠란과 율법을 열심히 공부한 석학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오늘도 진정한 칼리파가 돌아와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를 기도한다. 이 '돌아올 칼리파' 내지는 '최후의 이맘'은 마흐디라고 불리며, 더 이상의 구세주 개념이 없는 이슬람교에서 시아파만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칼리파 우바이드의 이름에 알'마흐디'가 들어가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또한 이맘에도 계급제가 있어서 최고 계급의 이맘은 아야톨라라고 불린다. 아야톨라들은 시아파에서 유일하게 율법을 가지고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는 위치이며, 이런 아야톨라 중에서도 최고위였던 사람 중 하나가 1979년에 이란의 팔라비 왕조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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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이슬람 혁명을 가져온 루홀라 호메이니. 

왜 이 사람 이름 앞에 아야톨라가 붙어있었는지 알 것이다.


시아파를 제외한 나머지 이슬람의 대다수이, 시아파와 대비되는 종파인 수니파는 이런 게 없다. 일단 칼리파와 이맘의 개념부터 다르다.


수니파에게 있어 칼리파란 시아파에게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슬람 역사의 최초를 장식한 군주명이니 낭만성도 있고 통합 군주이니 중요하긴 하지만, 의미 자체는 신의 대행자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정치/종교의 통합 지도자일 뿐이다. 공동체에 의해 선출되었다면 칼리파가 맞다는 것이 수니파의 입장이며,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세습제가 된 후에는 이슬람교의 패권을 가진 왕가에서 세습 원칙이 지켜지면 끝인 칭호가 되었다. 게다가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칼리파는 수니파의 것이었다. 시아파의 칼리파는 1171년에 12세기 최고의 계몽군주인 살라흐 앗 딘, 통칭 살라딘에 의해 사라졌지만 수니파의 칼리파는 '최소' 1527년까지 버텼다. 이 해에 북쪽의 터키인들이 쳐들어와서, 즉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인 셀림 1세가 쳐들어와서 당시의 맘루크 왕조를 박살내고 칼리파 칭호를 아랍권에서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칼리파 칭호를 갖고 있던 세월까지 합하면, 완전한 소멸은 1924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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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칼리파인 압둘메지트 2세.

터키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에 의해 직위를 박탈 당하면서 

셀림 1세 이후로는 명목뿐이던 칼리파마저 사라져버렸다.


대신 이런 신학적 의미의 입장 차이는 있지만 둘 모두 칼리파에 대한 낭만적 그리움을 갖고 있는 건 공통이다. 시아파에게는 제대로 실현해 본 경험이 많지 않은 정통성이기에 가진 그리움이고, 수니파에게는 북쪽 타지인들이 가져가서 몇백 년 동안 갖고 있더니 날려먹어서 안타까운 그리움이니,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결국 이슬람에게 칼리파의 귀환은 낭만적인 떡밥이다.


이맘 또한 시아파가 두는 의미만큼 중요한 직책은 아니다. 율법학자이니 신학적 권위를 갖는 건 비슷하지만, 시아파의 이맘처럼 신도들을 이끌고 예배를 집전하는 지도자의 위상은 거의 없다. 수니파 예배에서 이맘은 사회자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다.


즉, 시아파의 이맘은 카톨릭의 신부와 같은 사제이고, 수니파의 이맘은 초기 개신교의 목사와 같은 사제이다. 왜 '초기'를 붙였는지 알 사람은 알 것이다. 현대 기독교 목사의 대부분은 시아파 이맘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으니까.


이런 위상의 차이 때문에 두 종파의 신학적 입장도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알리에 대한 신격화와 이맘에 대한 의존성을 띄고 있는 시아파는 교리 해석의 변화가 수니파에 비해 넓고, 그 때문에 하위 분파가 굉장히 많다. 이맘이 경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분파가 생겨나는 식이니까. 수니파는 시아파에서 이맘이 하고 있는 역할을 경전에 넘겨버렸다. 제1권위의 경전인 쿠란과 제2권위를 갖고 있는 하디스, 무함마드의 언행록이 모든 교리와 교리 적용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수니파의 이맘은 경전을 해석한다기보다는 경전을 수색하는 쪽에 가까운 신학자들이다. 따라서 교리 해석이 거의 바뀌지 않고 한 번 바뀌면 매우 엄격하게 오래  간다.


수니파에서 매우 극단적으로 엄격했던 율법학자 한발리의 경우엔, '하디스에 무함마드가 수박을 먹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나는 수박을 먹지 않겠다'는 당황스러운 말을 할 정도다. 이 한발리의 신학에서 꼴통의 차원을 향해 한 걸음 나가면 와하비즘이라는 수니파 최고의 극단주의가 되고, 여기서 조금 더 나간 친구들이 지금 알 카에다가 되어 있다.


칼리파에 대한 입장 차이와 그 기원에서 언급했듯, 시아파는 수니파에게 굉장한 탄압을 받아왔다. 다수인 수니파에 비해 시아파는 늘 소수였고, 서로 이단이라며 싸울 때는 늘 쪽수 적은 쪽이 서럽다. 때문에 시아파에게는 역사적으로 쌓인 피해 의식과 그로 인한 구세주 열망이 있고, 때문에 가끔 시아파 정권이 들어서면 수니파에게 헬게이트가 열리곤 했다. 현대에는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살상 수준이 높으니 정권 외에도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다. 테러 말이다. 당연히 수니파가 이들을 형제의 사랑으로 대할 리가 없다. 이단 종파인 색히들이 폭탄까지 던지고 있으니 수니파 정권은 구실만 생기면 시아파를 찍어누른다. 시아파에 대한 탄압은 이제 거의 수니파 정권의 종특이 되었고, 수니파 무장단체의 테러 대상에서 시아파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이슬람이 아닌 사람들이 볼 땐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같은 경전인 쿠란과 하디스를 품었고, 같은 율법인 샤리아를 지키며, 같은 신과 예언자의 이름을 외우고 똑같이 칼리파의 낭만성을 그리워하니까. 하지만 개인 대 개인의 접촉이야 어차피 같은 이슬람 아니냐고 퉁치고 넘어갈 수 있어도 집단 대 집단은 결코 그럴 수 없는 법이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알리가 처음 칼리파에서 미끄러졌을 때 싹트고 알리가 암살 되었을 때 피어난 씨앗에서 태어난 두 나무이다. 이 두 종파의 탄압과 저주가 서로를 향해 핑퐁한 것이 이슬람 역사의 반을 채운다. 또한 이 갈등이 현재의 중동 상황의 대부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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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수니파와 시아파를 이해하면 이슬람 정치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싸우는지를 아니까.


현재 시아파는 이란, 이라크 등지에 퍼져있다. 이란은 대다수가 시아파이며 이라크는 60% 정도가 시아파, 레바논은 30%가 시아파이며 시리아 등의 그 외의 인근 국가에서는 엄청난 소수다. 반면 수니파는 이란/이라크/레바논을 제외하면 압도적 다수이며 중동 지역 이외의 이슬람은 거의 100% 수니파라 보면 된다. (당연하지만 한국도 그렇다.)


시아파가 대부분인 이란이 미국과 각을 세우고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과 박 터지게 싸운 덕에, 우리에겐 시아파의 이름이 약간 더 친숙하다. 그런데 이번에 IS를 세우고 세계적으로 깽판을 치고 있는 사람들은 시아파가 아닌 수니파다. 물론 위에서 살짝 언급했듯 알 카에다 같이 가장 악명 높은 테러조직도 수니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다음 회에서 디벼보자.







슈르나


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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