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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04.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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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서


85년 7월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내가 오랜 동안 하고 싶었던, 그러나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시작했다. 젊어 아직 철이 없어서 처자식 고생 시킬 줄 모르고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원래 편지 한 장 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 까닭은 문장력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써놓은 글씨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추상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완전 고립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에 처박혀 글을 쓸 수 있는 것 밖에 없었다. 


당시 나의 처지는 이러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1986년부터 광명시 하안동 철거민촌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춥고 배고팠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대책도 전혀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거기다 주변에 이해를 해줄 수 있는 사람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길이 없었다. 마치 망망대해의 외딴 섬에 갇혀서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난파선 같은 처지이었다. 밖으로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모진 비바람을 맞아가며 사는 삶, 항상 형사들에게 감시를 당하면서 살고 안으로는 무지몽매한 주민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 일들, 인간 사회의 가장 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잡스런 사건들에 부딪치면서 사는 것은 너무도 힘이 겨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당장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리고 교단과의 사상 차이도 힘들었다. 나는 빈민운동을 이해 해줄 수 있는 진보적 교단이 아닌 맹목적 보수적인 교단 출신이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형벌일 수 있다. 그러나 소외의 결과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타인과 다른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될 수도 있고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는데 나는 전자 편이었다. 이러한 다름이 사실은 백조인데 주변의 오리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의 고독이면 괜찮은 일이지만 단순히 다수로 부터 거부당하는 소수일 경우는 문제가 심각해 질 수 있다. 어쨌든 그 외로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외로움인 것이다.


내 경우는 보수교단 특유의 '순응의 문화' 속에서 홀로 '저항의 질서'로 발걸음으로 옮긴 탓에 외로움을 자초한 면이 있었다. 맹목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은 나에게는 문둥병처럼 天刑(천형)같은 존재였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던 중 어떤 분이 쓰지 않고 있는 공병우 타자기를 빌려 주어서 혼자서 연습을 했다. 당시의 상황은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책만 보는 것처럼 두문불출하고 타자연습을 할 수 있었다. 워낙 손놀림이 둔한 사람이지만 한 달이 지나니까 타자기로 글을 쓸 만할 정도가 되었다. 논두렁에게 물고가 터지면서 홍수가 나듯이 그 때부터 미친 듯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여 한 달에 한 번 '빈들의 소리'라는 20 페이지짜리 팜프렛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빈들의 소리'는 나의 칼이요 방패이자 올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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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를 내고 나면 "다음 호는 어떻게 내나?"하고 힘겹게 고비 고비를 넘긴 세월이 흘러 우연히도 불교에서 '108 번뇌'를 상징하는 108호까지 발행 했었다.


'빈들의 소리'는 뉴스가 빈곤했던 당시로서는 주류 언론에서 접할 수 없었던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불온문서인 샘이어서 지하 유통망(?)을 통해서 퍼져나갔다. 그 결과 '빈들의 소리'를 통해서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인연이 맺어졌고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그 작은 책자가 어떻게 흘러서 호주까지 오게 되었고 결국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지금은 호주에서 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온라인으로까지 글쓰기가 이어져 오늘날 딴지라는 대양까지 이르게 되기도 하였다.


교단이나 교회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교단 목사들과는 달리 후원은커녕 의심과 비난만 받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순전히 내 뜻을 이해해 주는 소수의 개인들의 후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 나라 땅이 아닌, 하와이에서. 


몇 해 전에 미국으로 가서 하와이에서 어렵게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던 여동생이 자기 집에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내가 보낸 '빈들의 소리'를 보여주고 그 곳에서 후원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호놀룰루에 사는 2만 명 정도의 교민 가운데 4,000명 정도가 술집에서 일을 하는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처녀나 주부를 막론하고 젊은 여성들은 거의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술집에 나간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100년 전에는 사탕수수 밭에서 노동을 하던 한국인들이 이제는 유흥업소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춘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접대만 하는 것이어서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민 경제 좌우 하는 영향력이 큰 산업이었다.) 동생이 하는 식당에 단골로 드나들다가 내 이야기를 듣고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는 이들이 생겼다. 나중에는 동생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이런 사정을 알고 초청장을 보내주었다. 


이 때만 해도 몰랐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하와이 행이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 김대중과 만나는 계기가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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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의 만남


하와이에 가자니 하늘의 별따기라는 미국 비자는 두 번째 문제이고 당장 여권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오늘처럼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복수 여권은 커녕 일회용 단수 여권도 얻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생각다 못해 당시 야당 총무인 김동영의 추천서를 받아 달라고 김영삼 씨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 씨에게 부탁을 했다(체격이 좋은 김무성은 그 때 비서실 막내였다). 김 실장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영삼 옹의 사무실로 찾아 건 것은 1986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이 날은 국회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이 김영삼이 총재로 있는 신민당의 유성환 의원이 감히 '반공이 국시냐?'는 질문을 했다고 체포동의안을 결의하는 날이었다. 이날 국회에서 전 국회의원과 기자들이 총집결하여 민정당의 단독 통과를 막아보려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려는 긴장된 시각이라서 평소에 항상 기자들과 국회의원. 정치지망생들로 북적거리던 시청 뒤에 있던 민족문제연구소에 김영삼과 비서실장 김덕룡과 여비서만 남아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 아니었던 김영삼 옹은 속수무책으로 자기 계보의 의원이 제명을 당하는 굴욕을 견뎌야만 하는 통탄의 날이었다.


김덕룡이 비서답게 "총재님이 지금 굉장히 우울해 계시니 들어가서 기도라도 해드려야지 않겠느냐?"고 했다. 김 실장으로부터 나를 소개 받은 김 옹은 30대 후반의 젊은 나를 그래도 목사라고 대우를 해주면서 기도를 청했다. 새파랗게 젊은 목사가 한국 제일의 정치인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이 격에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분위기 상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하나님께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속히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나고 김 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신세 한탄을 했다. 


"목사님! 오늘 잘 만났네. 사실 내가 남들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나는 긴장을 해서 "무슨 일이신데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제가 맹색이 충현교회 장로 아닙니까? 그래서 몇 달에 한 번씩 주일 대예배에 대표기도를 안합니까? 그런데 제가 기도시간에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를 하면 우리 김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그것을 모두 뒤집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제 와서 교회를 옮길 수도 없고 내 원 참!"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심을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인이라도 아마 그 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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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대통령 재임 중 충현교회 예배에 참석 중인 김영삼




김대중과의 만남


사실, 김대중과의 인연은 좀 더 일찍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1980년대 김대중 씨가 전두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고난 받는 김대중 씨를 위해서 기도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김대중 씨에 대한 정치적 추종이 아니라 그 분을 민주화의 불씨로 생각하고 그 불씨가 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소수의 목회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매월 첫 토요일에 모인다고 해서 이름도 그냥 '첫토기도회'라고 했다. 첫토기도회는 때로는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 씨와 함께, 그가 해외에 있을 때는 회원들끼리, 연금이 되어 동교동에 들어가지 못할 때는 집 근처 다방에서 비밀리에 모였다. 그러나 가택 연금 기간이 많아서 실제로 동교동 자택에서 드렸던 기도회는 몇 번이 되지 못했다. 나는 양구에 있을 때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서울로 올라와서 86년 초부터 이 기도회에 참여했다.


이번에 가면 혹시 못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국 전에 고교 선배인 김대중 선생의 비서실 차장으로 있던 남궁 진 선배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동교동을 찾아 갔다. 남궁 선배는 나중에는 국회의원,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도 했지만 당시에는 언제나 술이 덜 깬 것 같은 몽롱한 모습이었다. 남궁 선배가 멀리 가버릴 후배에게 해줄 것이 없으니 미안했던지 "선생님이나 한 번 뵙고 가지?"라고 권했다. 나는 첫토기도회 회원이기는 하지만 김 선생께 하직 인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사양을 했다. 그래도 남궁 선배는 이미 내 뜻을 읽고서 "이번에 못 뵈면 언제 뵐지 모르잖아?"라고 했다. 


남궁 선배의 따라서 응접실로 들어가니 이재연 사무총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궁 선배로부터 내가 미국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리에 좀 앉으라고 하더니 '김대중 옥중서신'을 꺼내더니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휘갈겨 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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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대통령의 친필 글씨


그러면서 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LA에 갈 거냐고 묻더니 가면 홍걸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있으니 홍걸이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부모로서 해외에서 고생하고 있을 자식을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당장 내 처지가 집도 절도 없이 떠나는 '내 코가 석자'인 판인데 나를 도와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도와 달라는 그의 말에 속으로 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더 나가서 동포들을 만나서 모금을 해달라고 말을 지시를 하듯 했다. 나는 정치인은 이렇게 뻔뻔해야 하는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며칠 간격으로 양 김 씨를 만났던 것인데 돌이켜보면 이렇게 풍문으로만 듣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대인관계의 차이를 몸소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출국을 앞두고 두 분을 만나게 된 것은 내가 대단한 인물이어서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미국을 가는 일이 흔하지 않았고 두 분 다 각기 야당의 당수 노릇을 하고 있었어도 한 마디로 춥고 배가 고플 때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당시는 오히려 그들 쪽에서 누군가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할 때이기도 했었다.




미국에서 망명을 시도하다


당시 미국 비자를 받기가 어려워서 돌아온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별별 증명을 다 해야 했었다. 집도 차도 아무 것도 없던 나는 너절한 주변 이야기를 좀 과장해서 썼더니 4명의 영사 가운데 제일 까다롭다는 여자 영사가 두 말 않고 잘 갔다오라며 도장을 꽝꽝 찍어주어 무사히 비자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은 하루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현실, 그야말로 앞으로 험한 길을 어떻게 헤쳐갈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해서 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행이 마음 가벼운 여행이 될 리가 만무했다. 김포공항에서 KAL기를 타면서부터 기분이 나쁘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나라 비행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하나도 없고 일본 젊은이들만 하나 가득 타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패를 갈라 한 편에서는 최루탄을 쏘고 한 편에서는 돌을 던지고, 한 쪽은 위협적인 태도로 가방을 수색하고 한 쪽은 비굴하게 가방을 열어 보여야 하는 암담한 현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일본 젊은 애들은 세계가 좁다고 누비고 다니니 어떻게 울화통이 치밀지 않겠는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하와이는 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워도 우리의 것이 아닌 이상 나에게는 이발소 벽에 걸린 액자 속의 그림일 뿐이다. 지상의 낙원이라고 하는 하와이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이기 때문에 공장이 하나도 없어서 지구상에서 제일 공기가 맑고 날씨가 좋은 곳이라는 말대로 자연 환경이며 시설이며 모든 것이 탄복할 만했다. 내가 머문 동생이 사는 아파트 바로 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이키키 비치였건만 나는 태평양 바닷물에 발목 한 번 담가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몸은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자유로운 땅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길을 지나도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슬픈 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하와이에 와서 그동안 나에게 후원금을 제일 열심히 보내주던 제니라는 여성을 만났는데 그에게 보답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첫토기도회 배지를 주었다. 그 배지는 동교동 김대중 씨 응접실의 주인 의자 옆에 항상 놓여 있는 '기도하는 손' 모양의 검은 돌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우리 회원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돌은 지금 즘 김대중 기념관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들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는 돌이었다. 나로서는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준 셈이었지만 제니는 그 배지의 뜻을 알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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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의 '기도하는 손'

 

하와이에 있는 동안 경희대 한의대 학장을 지내고 하와이로 와서 한의원을 하고 있는 나와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노정우 박사를 만났다. 노 박사는 내 상황을 이해하고서 자기 환자 중에 한 사람인 하와이대 정치학 교수인 페이지를 소개해 주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따져 보아도 내가 전혀 정치적 망명씩이나 신청할만한 위인이 못되는 것을 설명하느라고 오히려 애를 먹어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979년 11월 발생했던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 망명생활을 한 홍세화 씨도 망명을 신청하는데, 막상 활동내용을 설명하려다 보니 전단을 뿌린 것 말곤 한 일이 없어서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다. 당시로서 고작 전단이나 뿌린(?) 홍세화 씨보다 나는 훨씬 위험한(?) 일을 많이 했지만 불행하게도 홍세화 씨처럼 재수 좋게(?) 공안당국에 쫒기는 신세가 아니어서 망명신청이 가당치도 않았던 일이었다.


2010년도에 시애틀에서 열린 북한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해서 공교롭게도 하와이 대학 교수 출신인 남북관계의 원로학자인 서대숙 박사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서 교수에게 하와이에서 있었던 옛날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일이라면 나한테 왔어야지"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에 나는 서 박사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고 경계를 하는 입장이었다. 이미 지난 옛날 일이기에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더니 서 박사는 비록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하와이 대학에 한국학 센터를 건립하기는 했지만 북한과 접촉 가능성 때문에 항상 남한 정부와도 긴장 관계를 유지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만일 당시의 중앙정보부에서 내가 도미 직전에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접촉하고 온 사실을 알았다면 뭔가에 크게 이용을 했었을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나의 망명 신청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그들은 나 같은 송사리에게 까지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바빴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바빴던 덕에...


나는 문제가 있으면 피하지 않고 부딪히는 위험할 만큼 무모한 성격을 가졌다. 그런 까닭에 살면서 때로는 알고 때로는 모르고도 위험한 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너무나 위험했던 일들이었다.


동생은 하와이에서 '장터'라는 레스토랑을 하고 있었는데 매제가 김태촌, 조양은 또래의 건달 출신이었기 때문에 미국을 드나드는 한국의 건달들은 '장터'를 중간 연락처로 삼았다. 당시 해병대 출신의 매제는 지미 신이라는 해병대 상사 출신의 무기거래상의 참모 노릇을 하고 있었고 지미 신은 매일 장터에 들러 매제와 사건을 모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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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이 자기보다 급수가 한 참 아래인 매제에게 고급 정보를 주었을 리가 없고 행동대원 정도로 부려먹고 있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매제가 이 사건에 개입된 것을 알게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국가적인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나를 어렵게 초청해준 동생 내외를 배신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고뇌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나 자신을 바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전기를 마련할 가능성이 있는 정보를 접하고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장터'에서 일을 하면서 지미 신과 인사도 하고 지내면서 촉각을 곤두세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도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내가 수집한 정보를 인편을 통해 비밀리에 동교동으로 남궁진 비서실 차장에게 상도동으로 최기선 비서실 차장에게 전해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동교동 쪽에 더 가까웠지만 상도동에도 정보를 준 것은 동교동에서 혹시 무시하고 넘어갈지도 몰라서였다. 가슴을 졸이면서 매일 한국에서 오는 신문을 기다렸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양 김 씨 중 하나가 한국에서 폭로를 시작하면 나는 곧 바로 미 본토 어딘가로 도망을 갈 계획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대의를 위해서 동생 부부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각오를 했었다. 


그런 큰 정보를 비서진이 양 김 씨에게 보고를 안 할 수가 없었겠지만 설령 보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상황은 야당의 힘으로 그런 사실을 폭로하고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5공의 탄압 아래 그들 자신 생존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렇게 무서운 때였다.

 

결국 사건은 1988년 5월 19일, <월 스트리트 저널>이 '노스롭 스캔들(Northrop Scandal)'을 폭로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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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롭 사의 로고


'노스롭 사건'은 한국판 록히드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5공 비리 특별수사본부는 동양고속 사장 이민하가 노스롭사로부터 350만 달러를 받아 유용했다는 사실까지는 밝혀냈지만, 더 이상 수사에는 진전이 없었다. 또 이미 박종규가 1985년 12월에 사망했었기 때문에 나머지 돈의 행방이나 사건의 진상은 오늘날까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신 상사는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커미션을 돌려받으려고 작업을 했던 것이다.


만일 그 때 그 사건이 폭로 되었다면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추적이 되었을 것이고 자연히 내 존재가 드러났을 터이고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영삼, 대중 두 분이 형편이 여의치 않아 폭로를 하지 못한 것이 나로서는 천만 다행이었다. (휴~!)

 

(그나마 지금이라도 이런 글을 공개 할 수 있는 것은 양아치 세계의 공식대로 지미 신이 그 후 이민화로부터 돈을 뜯어낸 후 몇 년 동안 온갖 굳은 심부름을 한 매제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아서 지미 신과 찢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공개해도 더 이상 매제와 의리를 상할 일이 없어졌기 까닭이다.) 




다시 한국으로


처음 미국에 가서는 워낙 긴장되고 어려웠던 절차 탓에 떠나기에 급급하다 보니 막상 남겨 두고 가는 아내나 아이들에 대하여 많이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 머물면 머물수록 가장 힘든 순간은 8살, 10살이었던 아이들이 보고 싶어질 때였다. 그럼에도 연말까지 아무 것도 보낼 형편이 못되었기에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카드를 가장 큰 것으로 3장을 샀다. 아내에게 보내는 것은 한 번에 썼는데 아이들에게 보내는 카드를 쓰려고 하면 울음이 터져 덮었다고 또 쓰고 해서 카드를 쓰는데 1주일이 걸렸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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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아일보 기사


하와이에서 이 뉴스를 접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풍지대인 그곳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판단되어 LA로 갔다. 김대중 선생이 부탁한대로 LA에 가서 홍걸이를 만났지만 그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김홍걸은 인권 문제연구소 사무실에 분향소를 설치해 놓고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누가 찾아오는지 감시를 당하는 형편이었다. 아무도 없는 분향소에서 분향을 한 다음에 홍걸이와 식당에 가서 설렁탕을 먹었는데 돈은 누가 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나 내나 당시에는 알거지 신세였기 때문이다. 홍걸이도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어 나를 도울 입장도 못되고 다른 방법도 없어서 다시 하와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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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때의 김홍걸 씨

이미지 출처 - 김대중 사이버 기념관


물론 나에게는 지상의 낙원이라는 하와이에서의 생활도 우리 민족의 한이 뜨겁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국제결혼을 해서 시커먼 흑인 병사를 따라와 이역 만리에서 영어를 못해서 돈 한 푼 만져 보지 못하고 식모살이 몇년 만에 강제 이혼을 당하고 거리를 나와 윤락가를 떠도는 여인, 비자가 없이 남의 나라에 몸 붙여 살아 보겠다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고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기만 하면 돌아가겠다는 사람들, 교육제도만 바뀌면 고국에서 아이들이 키우고 싶다는 사람들, 조상들의 한 맺힌 이민사회의 아리랑은 형태는 다르지만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호놀룰루 시내를 조금만 벋어나면 백 년 전에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짐짝처럼 화물선에 실려서 태평양을 건너와 무서운 백인 농장주들에게 노예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던 사탕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우리 선조들이 국민회를 만들고 그렇게 몸서리치는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5전, 10전씩 모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벌어서 보낸 돈을 이승만이 독립운동한다고 워싱턴의 호텔에 앉아 흥청망청 쓰다가 해방 후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얘기가 떠올라 생각이 복잡해졌던 적도 있다.)


아버지가 국민회 회장이었던 노인 분이 살아 계셔서 찾아갔었다. 70대 중반이었던 그 부인은 남편이 미군 의무관 대령 출신이었는데 이미 작고하고 혼자서 살고 있었다. 부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독립 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 국민회 인사들은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청년 시절에 하와이 노동자로 가서 결국은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5공 정권이 한창 선전을 하던 대국민 사기극인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서 남아 있는 국민회의 노인 분들이 성금을 모았다고도 했다. 지금도 "나라가 떠내려간다는데 어떻게 해요?"라고 하던 노부인의 얼굴이 생생하다.


집에서 이야기가 길어지자  부인이 섬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하자기에 오하우 섬을 한 바퀴 돌다가 태평양 바닷가의 끝없이 펼쳐진 사탕수수밭에서 차를 세우고 그 곳에서 노동을 하던 조상들을 생각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동해물과...'로 시작했지만 '백두산...'으로 가기도 전에 눈물이 솟구쳐 우리는 끝내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 하세'까지 부르지 못하고 노부인과 나는 손을 잡고 통곡을 했다. 그 순간 그 동안 나의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치워졌다. 구약 성경에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다소로 가다가 고래의 배 속에 던져져 돌아왔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단칼에 잘라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구로공단 위를 지날 때, 게딱지처럼 붙어 있는 안양천 뚝방 동네가 보였다. 그 광경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뜨거운 눈물이 솟고 가슴이 메어져왔다. 비록 공해로 오염된 안양천변에 살아도, 젊은이들이 학생과 전경으로 갈라져 최루탄과 돌멩이의 공방전을 벌리며 살아도, 함께 어깨를 부둥켜안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내 나라라고 하는 것을 뼛속부터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예정 보다 훨씬 짧은 미국 생활은 나에게 있어서 그 때까지 분명하지 못했던 점들이 오히려 분명해지는 기회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여행은 나의 마음 한구석에나마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이스라엘 민족이 비록 노예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집트를 떠나지 않으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이집트의 고기 가마의 희망을 끊어버리는, 나 자신의 출애굽이었다.

 

1987년 2월 4일 귀국한 바로 다음날이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전 국민 결의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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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나는 조선호텔 앞에서 행렬의 선두에서 비장한 마음으로 현수막을 들고 서 있었다. 누가 뒤에서 툭 치기에 뒤 돌아다보니 출국 전 김영삼 총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던 김덕룡 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아니? 지 목사님! 언제 왔어요? 세상에! 그렇게 힘들게 나갔는데 왜 이렇게 금방 왔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었다. 이미 전태일에게 뺨을 맞았는데 박종철의 발길에 채여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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