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차우 추천8 비추천-1

2014. 10. 08. 수요일

차우








72세를 하루로 환산하면, 서른 세 살 내 나이는 오전 11시.


백수가 된 지금 내 하루의 시작은 11시다, 제길.

 

늦은 아침을 먹고 뭐라도 해볼 양 컴터 앞에 앉아 뉴스 기사를 클릭하다 보면, 끝말잇기 하듯 클릭질이 멈추지 않는다. 회사를 다녔다면 오늘 일당은 벌었겠지만, 백수인 지금 지출이 없는 하루도 위안이 된다. 백수가 되니 시간이 빠르다. 벌써 6시? 남들 퇴근하는 6시가 되면 그나마 자유롭다. 대낮에 가기 뭐했던 마트도 가고, 남들처럼 거리도 활보한다. 집에 돌아와 씻고 인터넷 조금 하면 어느새 밤이네. 내일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내일을 위해 일찍 잠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내일이 오늘 같고, 그 다음 내일도 오늘 같은 무한 반복의 꿈.


갑자기 'VD=R' 생생하게 꿈꾸면 이뤄진다는 어느 개떡 같은 자기계발서가 떠올라 그 꿈이 제발 이뤄지지 않길 바라고 있다. 부모님은 다락방이란 공간 자체를 모르고 있고, 방 안에 갇힌 나는 매일밤 꿈을 꾼다. 언젠가 이 다락방을 부수고 나가는 꿈을.

 

쾅쾅쾅- 쾅쾅-

 

대학 입시에 낙방해 화장실에서 질질 짜고 있던 소싯적 김어준 총수에게 ‘내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그까짓 대학입시가 뭐라고, 얼른 나오지 못하냐'며 화장실 문짝을 부수고 들어왔다던 그의 어머니처럼 나의 다락방을 부수고 ‘네가 왜 여기 있냐, 그까짓 백수가 뭐라고... 얼른 나오지 못하냐'며 소리쳤던 그를 소개하려 한다.


잠깐 BGM 같은 거 있나? 아저씨 생각하면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생각나서 말야.


옛다... BGM (편집부 주)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1.jpg


이름: 쿠로사와 (만 44세)

 

외모: 각진 턱, 튀김과 맥주로 인해 부풀어진 술배가 인상적

 

직업: 공사판 현장감독

 

취미: 퇴근 후 오돌뼈 튀김에 맥주 먹기

 

친구: 타로 (공사판에 세워둔 안전 인형)

 

애인: 그런 건 없다.

 

성격: 소심과 찌질. 뒤를 안 보는 성격 탓에 평범한 일도 엄청난 사건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축구대표팀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던 어느 날. 쿠로사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지금 왜 남의 이름을 외치고 있지?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나에 의한, 나만의 감동이었는데…’ 


친구 하나 없이 비좁은 단칸방에 홀로 누워있던 쿠로사와는 그때부터 인망을 얻고 싶어 안달이 난다. 애초부터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그는 없던 인망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사실, 계획이라는 것도 되게 하찮아. 딱 쿠로사와 다운 단순한 생각이지. 


매일 먹는 동료들 배달 도시락에 전갱이 튀김을 추가로 넣고, 이 사실(도시락에 웬 전갱이 튀김이지?!)을 알게 된 누군가가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전갱이 나눔의 주인을 찾으면 이때 쿠로사와 자신이 '짜잔!' 하고 등장하겠다는 상상! 


하지만 쿠로사와의 이런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괜한 오해로 신망을 얻고 있는 다른 동료와 비교되어 속 좁은 상사로 전락하게 된다. 게다가 외모 또한 그의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돼서 유괴범으로 몰려 경찰서에 갇히기도 하지. 점점 회사에서의 쿠로사와에 대한 소문은 안 좋게 흐르는데...


2.JPG

오히려 다른 사람 전갱이를 훔쳐 먹은 놈이 된 쿠로사와


이렇게 하루하루 되는 일 없이 살던 어느 날. 쿠로사와는 혈기 왕성한 중학생들과 시비가 붙는다. 팔딱거리는 활어 같이 젊고 어린애들에게 '처'발린 쿠로사와는 순간, 개죽음 만은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바지까지 벗으며 중학생들 앞에서 싹싹 빈다. 불행은 항상 또 다른 불행을 낳던가? 중요부위를 가린 채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던 그 순간 쿠로사와는 동료들에게 그 모습을 들키게 된다. 


인망은 커녕 개망신을 얻게 된 이 상태로는 도저히 회사에 출근할 수도, 동료들과 마주할 수도 없는 쿠로사와. 우연히 읽게 된 <시튼 동물기>에 나오는 토끼를 알게 되고, 다시금 용기를 얻는다. 


‘라그’라는 토끼 녀석은 여우나 들짐승을 피해 항상 도망 다녀, 

도망치고 숨는 게 그들의 일평생인 거지. 

그런데도 그놈들은 비굴함이란 게 없다. 그놈들에게는 살아있다는 거 자체가 승리라고! 


쿠로사와는 ‘라그’에 빗대 그 날의 자신을 위로한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다. 그딴 건 동물한테나 통하는 거고, '나는 인간이다!'라고 발악하며 동료들에게 일진 중학생과 맞짱을 뜨겠다고 선포하고 만다.


3.JPG


드디어 결투날! 44살 남자의 중학생과의 결투라니, 이건 이겨도 자랑이 아니고, 지면 말 그대로 개망신인 거다. 괜한짓을 벌였다고 후회하며 '이제라도 포기할까?'라는 번뇌 속에서 중학교 앞을 서성이던 쿠로사와. 하지만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어떨결에 날린 주먹이 상대에게 정확히 꽂히고, 물러설 수 없기에 공격을 피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에 상대는 차츰 겁을 먹는다. 


어찌저찌하여 상대 중학생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학교 일진인 나카네와 맞붙게 된다. 죽을 각오로 덤비는 무사 같은 심정으로 쿠로사와는 싸움에 임하고, 죽기로 덤벼드는 쿠로사와를 보며 살기를 느낀 나카네는 도망간다. 중학생 일진을 이긴 쿠로사와! 어찌보면 크윽- 웃음이 나지만 그는 싸움의 전설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노숙자들을 괴롭히는 깡패들과 시비가 붙고, 그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최강전설이 된 그의 이야기다. 중학생과 맞짱 뜬 아저씨 이야기. 별 거 없지?


근데 말야, 다락방에 있을 때 나를 깨운 건 스티븐 잡스도 아니고, 김연아도 아니었어. 그 별거 없는 쿠로사와 아저씨였지. 쿠로사와를 생각하니까 내 안에 있던 뜨거움이 울렁 거리는거야. 그런 거 잊고 산지 정말 오래 됐었거든.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길에서 만난 '도를 아십니까?'의 말처럼 나를 향한 우주의 기운은 개뻥이고, 나를 따라다니며 비춘다고 생각했던 핀조명은 사실상 시야가 좁은 내 탓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회사나 세상은 내가 없어도 태연하게 돌아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고, 내가 태어난 건, '그날 밤 부모의 성욕이 빚어낸 해프닝인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4.jpg


인간의 자긍심과 자멸감은 한 끗 차이라서 나를 향해 비추던 무한한 자긍심도 추운 날씨에 쪼그라든 고추마냥 밑도 끝도 없이 쪼그라 들고 있었다. 이러다 자칫 포도씨 크기만큼 작아져 포도씨까지 씹어 먹는 녀석에게 걸린다면 한 번에 누군가 뱃속으로 사라지겠구나... 아, 씨바, 이렇게 죽는건가?


쾅쾅쾅- 쾅쾅


'이봐! 나는 고흐와 찌질함 배틀을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규!' 그렇게 쿠로사와는 나의 다락방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객관적으로 가진 것도 없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했고, 소심했고, 매우 찌질했다. 그랬던 인간이 피하고 싶은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마주한 모습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 여기서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건 쿠로사와가 찾았던 자신만의 행복이지.


중학생 무렵, 지방에서 공부를 곧 잘했던 나는 의사가 될 거라 말하고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니 점수 맞춰 의대는 포기했고, 대신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가야겠다는 꿈을 꿨다. 의대는 아니었지만 서울권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엔 티비나 잡지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유명인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취업이나 돈 문제로 고민하는 건 나와 먼 얘기였다. 그랬던 내가 졸업 시즌이 되자 토익책을 들고, 취업과 돈 문제로 고민하고 있더라고. 다행인지 취업은 했고, 전공과 그닥 관련 없는 회사를 3년 정도 다니다 너가 아니어도 얼마든 니 자리는 대체할 수 있다는 회사의 소모품 정책에 열 받아서 현재는 백수가 되었지.


간만에 누리는 늦잠. 그리고 주말만 기다리는 바보 같음에서 벗어났다. 한 2주는 몸과 마음이 편했는데, 가끔씩 걸려오는 엄마 전화와 나날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니 나도 모르게 밤마다 회사에 출근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겠어? 요즘은 하루하루 불안감과 친구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다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되었지. 여태껏 자신만의 행복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거였어. 틀에 맞춰 대학도 다니고 회사도 다녔지만 뜨거움 같은 게 없더라고. 미지근한 거 말고, 가까이 가면 데일지도 모르는 그런 뜨거움 말야.


쿠로사와는 만 44세니까 시간으로 따지면 오후 3시쯤 된 거야. 오후 3시라는 시간은 뭘 시작하기도, 포기하기도 참 애매한 시간인데, 그런 시간에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는 게 위안이 되더라고. 싸움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게 된 쿠로사와처럼 인생은 정답이 없다고 생각해. 그 말의 의미를 머리로는 알지만, 늘 보기 좋은 답과 내가 이끌어 낸 답 사이를 저울질하며 항상 고민했던 나에게 쿠로사와의 이야기는 많은 위안이 되더라.


백수가 된 10월의 어느 날, 내 다락방을 부수고 쳐들어온 쿠로사와를 떠올리며 이만.


5.JPG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쿠로사와의 시선. 뜨거운 땡볕 아래 개미를 괴롭히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점점 다가가면 쿠로사와의 어린시절이다. 순간, 개미에게 손바닥을 물린 어린 쿠로사와>

 

 

잘했다 개미야... 장하다 개미야... 한방은 갚아줬구나. 무자비하고 압도적... 부당한 폭력... 강요되는 일방적인 고통과 압제... 절망적...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한방 먹인거야... 보복이다.

 

그래... 훌륭하다. 그 녀석은 훌륭했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히 싸웠어.


나는 어떻지? 될 수 있을까? 그 날, 그 여름날의 그 개미가... 


좌우간 너무 강적이었어. 세상은. 이 세상은 역시 너무 강대해.


너무 강해서 마음 속은 언제나. 가득했다. 무력감으로... 사춘기 무렵에는 이미 알 만큼 알아버렸지.


원래부터 타고난... 그대로 어쩔 수도 없는. 태어난 집, 재산, 머리, 재능. 


내 카드는 최악이었다. 그냥 꽝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주제에 꿈만은 있었다.


그게 서글펐다. 혹독했다. 여자한테 차이고 직장에서 물 먹고, 생각한 건 반대로 되고, 


마치 거대한 손바닥. 이길 수가 없다. 너무 강해. 서서히 압사하는 듯한 나날. 


그래도... 저항했다. 나는 저항했다.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싸웠다. 싸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될 수 있겠지? 그 여름날의 개미가….


하늘에 있다는 하느님. 안 그렇소? 분명 나는 아무 것도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따뜻하다.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편안하니 잘 살았어. 


나 치고는 잘 산거야.


따뜻하다. 마지막 순간만은 따뜻해.


-<최강전설 쿠로사와> 中













차우


편집 : 홀짝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