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8. 07. 금요일
영구읍따
1. 도연명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야지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호불귀) 논밭이 황폐해지는데 어이 아니 돌아가리
이렇게 시작하는 '귀거래사'는 도연명(陶淵明)이 남긴 산문시의 걸작으로서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41세 때, 지방 현령(지금의 동장 정도)을 하다가 중앙정부의 관리가 시찰을 나오니 의관을 정제하고 마중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겨우 五斗米(오두미, 쌀 다섯 말. 당시의 월급)를 받기 위해서 새파란 핏덩어리의 영접을 하란 말이냐, 에이 썅 안 해” 하면서 벼슬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쓴 것이라고 한다.
내가 귀거래사를 처음 접한 것은 복학생 때, 자유선택으로 교양한문을 들으면서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은 바로 이것이었다.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 지난날은 돌릴 수 없음을 알았으니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이에 앞으로는 그르치는 일 없으리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은 후회해봤자 소용 없겠지만, 앞으로의 인생은 내 주관대로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에, 먹고 살기 위해 아니꼬운 갑(甲)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 대목에 공감할 수도 있겠다.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2. 선택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고 있을까?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는 하루에 150번 이상의 선택을 하면서 산다고 한다.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걸어갈까? 점심은 짜장면을 먹을까? 아니면 짬뽕을 먹을까? 뭐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업무적으로 자칫 실수하면 크게 좋(?)게 될 수도 있는 일은 누구한테 미루면 좋을까? 하는 잔머리까지 수시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렇지만, 그런 일상적인 선택 말고, 정말 본인의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신중하게, 또 합리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선택을 하고 살까? 아니 살아왔을까?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그리고 우리 세대들이 별로 자기주도적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하면서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우리 아이들조차 선택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획일을 강조하는 군대식 문화의 잔재,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오래된 피해의식(보신주의라고나 할까?), 남의 인생에 태연히 간섭하는 오지랖의 일반화와 다름과 틀림을 구별할 줄 모르는 비논리 – 나하고 생각이 다른 거 보니 네 생각이 틀린 거야 - 의 횡행 등이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나 또한 그런 이유로 나이가 되니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 – 군대 이런 코스를 거쳤을 뿐이다. 그 와중에 본인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가느냐 실업계로 가느냐, 고등학교에서 반을 나눌 때 문과냐 이과냐 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이가 갈리게 고마우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 덕분에 - 아니 지지리 공부를 못했다고 하던 박지만 덕일지도 – 중학교도 뺑뺑이, 고등학교도 뺑뺑이 하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는 더욱 없었던 듯 하다.)
3. 변곡점
야구에서도 한 게임에 3번 정도는 기회가 온다고 한다. 우리 인생에서도 3번 정도의 기회는 있다고 한다. (그것이 기회인지 모르고 놓치고 나서 깨닫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내게도 그런 인생의 변곡점이 몇 번인가는 있었던 듯 하다.
우선, 생각나는 첫 번째는 논리학.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것 저것 잡다한 지식은 많지만 체계적인 사고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고 느꼈기에 군대생활이 절반 꺾인 시점에서 휴가 나왔을 때 청계천 헌책방에 들러 논리학 책을 샀다. 그리고 틈틈이 게다가 자발적으로 그 책을 완독하고 그 내용을 전부 숙지했다. (자발적으로 한 최초의 공부) 국민교육헌장을 만든 박종홍씨가 쓴 책이었는데, 덕분에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책 맨 뒷부분에 ‘행정과 기술’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 논리학 책에 왜 이런 내용이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 기술도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맞지만 결국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행정의 영역이라는 문장을 보고 무릎을 '탁' 치면서 동감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는, 전공을 포기하고 사무직으로 입사한 것이 있겠다. 당시 통신공사 대우가 좋네 어쩌네 하는 소문을 듣고는 통신공사하고 전화국하고 같은 건지도 모르는 채, 책을 사서 독학으로 약 8개월간 밤을 새우면서 공부를 했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절) 전공은 전자공학이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고 – 중학교 때부터 수학이 싫어졌었다. – 이과를 선택해야 대학 가기가 좋다는 선생들의 꼬임에 아무 생각 없이 이과를 선택했고, 그러다 보니 갈만한 데가 공대 밖에 없어서 적성 무시하고 전자공학과로 진학을 했는데 역시 내 체질에는 안 맞더군. 군대 갔다 오고 복학해서 1년 열심히 해봤지만 한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과감히 포기. 덕분(?)에 면접 보러 가서는 “요즘 전자공학과 잘 팔리는데 왜 행정직으로 지원했느냐?”는 당연할 질문을 받았고, “기술적 바탕 위에서 행정 업무를 하면 더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라는 입에 발린 대답으로 무마했지만, 입사하고 나서는 “적성에 안 맞아서 전공을 포기했습니다.”로 이실직고하곤 했다. 그리고 사무직으로만 근무했어도 별반 불편한 건 못 느꼈고, 통신에 대한 기본을 이해하니까, 최소한 용어 정도는 알아듣는 ‘통신사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 번째는, 일본어를 공부한 것. 이건 우연한 계기로 하게 된 건데, 당시 교육을 꼭 갔다 와야만 진급을 할 수 있는 상황. 내가 원하는 교육은 순번에 밀려서 안 되고, 교육 담당자에게 부탁했더니, 남은 교육이 이것밖에 없다고 해서 엉겁결에 일본어 교육을 가게 되었다. 그것도 무려 2달짜리에 게다가 초급도 아닌 중급 과정. 덕분에 연수원에 들어가서도 새벽 2~3시까지 잠 못 자고 공부하는 괴로운 나날이 이어졌지만, 의외로 일본어가 내 적성에 잘 맞음을 알게 되었고, 교육 수료 후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우연한 계기로 일본 주재원으로까지 파견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주재원으로 갔을 때. 전임자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긴급하게 대타를 구하는데, 지원자 중에서 일어를 조금이나마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파견자 당첨. 그렇지만 당시 나는 진급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고, 가족들도 낯선 환경에 가서 벙어리 행세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반대했지만, “까짓, 군대도 갔다 왔는데 여차하면 군대 한번 더 간다고 생각하고 혼자 가지 뭐”라는 생각으로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가족들도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귀국 후에도 사내에서 일본 전문가로 인식이 되어 사장 통역하러 일본이 아닌 홍콩 같은 나라에 출장을 가기도 했으니, 인생의 변화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외국 생활을 통해서 우리나라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외국 나가서 보니까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일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한국사람들이 유난스러워서 그런 경우가 꽤 많았다.)
아, 그리고 여담이지만, 대학 졸업할 즈음에, 한문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하였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한 기억도 있기는 하다.
4. 퇴직
지난 4월 말일 자를 기해서 27년 넘게 다녔던 회사를 그만뒀다. 명목상 명예퇴직이지만, 토끼몰이 하듯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고, “이거라도 받고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버티다가 더 험한 꼴을 보시겠습니까?”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행태가 꼴 보기 싫었다. 맹박이 취임 후에 통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대거 낙하산으로 몰려와서 멀쩡한 회사를 결단내는 꼴을 보면서 마음은 이미 차가운 재와 같이 되어버렸었지만, 이런 모양새로 등 떠밀려 쫓겨나는 건 분한 일이었기에 버텨볼까도 했으나, 마눌님의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에 힘을 얻고, “그래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나” 하는 생각으로 아쉽지만 사표를 썼다.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백수가 되었다. (따져보니 입사할 때까지 인생보다 회사생활이 더 길었군.) 처음에 입사하자마자 내가 몇 년을 근무할 수 있을까 계산해본 적이 있다. 30년이 채 안되더군. 그러나 몇 년 후 정년이 연장되어 30년 이상 근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IMF 위기 이후 있는 정년도 안 지키게 되면서 결국은 늘기 전 정년도 못 채우고 퇴사를 하게 되었다. (2016년까지 정년을 2년 더 연장한다고 하는데, 연장은 개뿔. 있는 거나 좀 잘 지켜라.)
입사 당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은 “내가 밥값을 못 하면 스스로 그만둬야지” 였다. 결과적으로 그 다짐은 지키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직급이 오르고 급여가 많아졌지만, 조직 내에서 운신의 폭은 점점 좁아졌고 회사에 붙어있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하면 잘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회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 그 다짐은 지킬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만두고 싶지 않아도, 업무를 수행할 충분한 능력과 체력이 있어도 경영층은 나이 순으로 줄을 세워서 쫓아냈으니까.
5. 소원
회사를 그만두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이 있다. 머리 염색 안 하기, 머리 길러서 묶고 다니기, 개량한복 입고 다니기. 누가 들으면 그런 것들이 무슨 소원씩이나 되겠나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진지하다. 아버지 유전으로 40이 되기 전부터 염색을 해왔던 입장에서는 – 도대체 왜 우리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보다 흰머리가 더 많으면 안 되는 거냐? – 십 몇 년에 걸친 염색이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었고, 좀 더 자유스럽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 안하고 놀고 먹으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으면 최상이겠으나, 그 정도로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아쉬운 대로 로또라도 좀 맞아줬으면…) 그래도 ‘영원한 백수’에 대한 동경은 아직 버리지 못한 상태로 ‘잠정적 백수’에 머물러 있다.
아울러, 회사를 그만두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과 연관 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먼저 퇴직한 선배들이 비굴한 모습으로 자회사, 혹은 유관업체에 빌붙어서 예전 동료나 후배들을 찾아 다니며 매출을 구걸하는 모습이 보기에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내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가 아닌 사무직이었기 때문에 통신업계에서 나를 써먹을 데도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 그런 연고로 현재의 나는 재직 시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그들과의 관계를 지우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6. 창업/재취업
직장을 그만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경제행위는 크게 창업과 재취업의 2가지로 볼 수 있다.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선 창업.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건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의 자영업 비율은 30%가 넘는데, 이는 OECD 평균의 2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IMF 이후 직장에서 쫓겨난 40~50대들이 1~2억 정도 되는 퇴직금으로 치킨집, 분식집 등을 차린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많은 경쟁업체의 난립, 게다가 거의 없다시피 한 진입장벽 때문에 대부분의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거지끼리 자루를 찢는 식’의 무한경쟁을 하다가 같이 망하는 경우가 많다. 창업을 해서 그럭저럭 먹고 사는 수준까지 포함한 성공률은 10%가 채 안되며 나머지 90%는 3년 이내에 폐업을 한다고 한다. 결국,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장사나 해 볼까” 했다가 돈을 벌기는 커녕 인건비, 임대료로 제대로 감당 못해서 남 좋은 일 시키고 문 닫는 경우가 십중팔구라는 말씀. 게다가 자기 장사를 하게 되면 직장 다닐 때처럼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가게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것도 문제. 결국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내 돈 까먹기 딱 좋은 것이 바로 창업이라는 말씀. 그런 고로 창업은 나의 선택지에서 진작 제외.
다음 재취업. 가능하다면 적정한 재취업이야말로 퇴직자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월급은 좀 줄겠지만) 적당히 돈도 벌고, 출/퇴근 규칙적으로 하면서, 4대보험이나 퇴직금 적립 등 각종 복지후생도 보장이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어디까지나 '가능만 하다면' 재취업을 하는 것이 좋기는 하다.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도 취업이 안 돼 놀고 있는 판국에 나이든 사람에게 돌아올 일자리가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이며,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이 자기 적성에 맞을는지, 게다가 월급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등등을 생각해 보면 재취업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지금 우리나라 근로자의 35%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근로자 3사람 중 1명은 비정규직이라는 얘기.) 그리고 설령 재취업이 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염색을 해야 할 것이며, 조직 내 윗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생활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결코 내키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최소한도로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향후 10년간은 경제활동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지만, 창업도 재취업도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씀.
7. 어떻게 살 것인가?
마눌님은 귀농을 하자고 한다. 귀농교육을 100시간 받으면 되고, 처남이 바이오 벤처를 경영했던 노하우가 있으니 유기농 비료, 무공해 농약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기가 뭘 하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를 부려먹으려는 심보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해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기는 하다. 일단 수입이 없으므로 씀씀이를 줄여야 할 텐데, 서울에 계속 살면 하다못해 채소 하나도 돈 주고 사먹어야 하므로 지출을 줄이기가 어렵다. 생활비를 줄이려면 가능한 한 자질구레한 것들은 자급자족을 하고, 생활을 단순화해서 지출을 줄이는 수밖에 없는데, 서울에 있으면 그게 안 된다. 친구도 만나야 되고, 친목 모임에도 나가야 되고 등등.
그렇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가 농촌에 가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농사를 지어보기는 커녕 풀이나 나무를 봐도 그 놈이 그 놈 같아서 잘 구별을 할 줄도 모르는데… 게다가 각자의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서울과 달리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까지 서로가 훤히 알만큼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농촌에 가서 그곳 토박이들에게 ‘서울촌놈’ 소리를 들어가면서 융화될 수 있을까? 게다가 내 성격은 까칠한 편이란 말이지.
그래서 지금은 내가 농촌에 가서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이것 저것 알아보고 있다. 시골에 가서 살 수 있겠다는 마음가짐이 굳어지면, 일단은 귀촌을 하고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면 농사도 짓는 것으로. 그 와중에 딸들하고는 같이 내려갈 건지 아니면 서울에 떨궈놓고 갈 것인지 등도 결정해야 하고… 그리고 어떤 방식이 되었든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수고롭게 해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므로, 일단 체력단련을 위해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생을 대략 셋으로 나누어 봤을 때, 학교 다니고 졸업해서 취직할 때까지가 1/3, 지금까지의 직장생활을 또 다른 1/3이라고 보면, 앞으로의 내 인생은 1/3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취직까지의 인생이 배움의 시기였다면, 직장생활은 가족들 먹여 살리고 자식들 가르치기 위해 나를 희생해 온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애들도 다 컸고 아직 결혼을 하거나 안정적인 직장을 잡지는 못했어도 제 앞가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하니 앞으로의 인생은 나를 위해 사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싶다.
그리고 조급한 결정을 했다가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자 하며, 그 제1단계로서 일단은 직장생활 시의 버릇을 지우고 – 일단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연습을 하고 있다. – 회사에서의 인맥은 잊고자 하며, 내가 이래봬도 이런 사람이었는데 하는 생각을 다 지워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혹시 아나, 지금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잘 되면 아래의 노래처럼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유유자적하는 여생을 보낼지도 모르지. ㅎㅎ
일출이작(日出而作) 해가 뜨면 일하고
일입이식(日入而息) 해가 지면 쉬고
착정이음(鑿井而飮) 우물 파서 마시고
경전이식(耕田而食) 밭을 갈아 먹으니
제력우아하유재(帝力于我何有哉)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8. 도연명의 '귀거래사' 전문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이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영구읍따
트위터 : @nodudrn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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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