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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10. 월요일

홍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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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양병간
주연: 김문희, 이미지, 이상일, 김예령, 원유미, 한승희, 안영주, 송일동, 박용팔, 박예숙, 이은영
음악: 강인구
촬영: 최정원
18세 관람가 / Color / 93분





(이 리뷰는 양병간 감독의 신작을 환영하고 뜨거운 여름을 더 뜨겁게 보내자는 의미로 끄적였습니다)


갑자기 최근에 웬 작품 하나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미묘한 인기를 얻으며 온라인상에서 회자되고 있다. 아마 7월 중순, 혹은 요근래 개봉 예정 영화 목록을 본 사람이라면 범상치 않은 푸른색 포스터를 봤으리라고 믿는다. <무서운 집>이란 작품의 포스터 말이다.


처음 봤을 때 감독의 이름이 굉장히 낯익었다. ‘양병간’이라.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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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침내 그의 이름을 어디서 봤는지를 기억해 냈다. 양병간 감독. 그는 1993년에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를 만든 영화인이었다. 맞아, 그랬었지.


감독은 역시나 강렬한 제목을 가진 1985년 작 <피조개, 뭍에 오르다>로 충무로에 데뷔하여, 90년대 초반에 두 편의 작품을 만들고는 20년 간 (작품으로는) 소식이 없던 인물이다. 참고로 한국영화계에서 80년대에 데뷔하여 2010년대까지 작품을 낸 감독은 강우석과 정지영, 배창호 정도다. 한국영화계는 영화인들의 정기를 빼먹으며 성장하는 곳이라 한 번 실패하거나 공백기가 길어지면 복귀를 할 수 있는 발판이 사라져 버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활동을 중단했던 감독이 복귀했다는 건 여러모로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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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간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데뷔작 이후 8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끝에 나온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시대 성종 8년, 수절을 강요하다 못해 칭송까지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창 팽팽할 나이에 독수공방을 하게 된 한 과부(성이 한 씨다)는 수절하는 생활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아침마다 묘하게 신기 있어 보이는 바위 앞에서 기도를 한다. 어느 날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하늘이 이상한 나무토막 하나를 떨궈준다. 모양이 흡사 남자의 그것처럼 오묘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 번 집어 들면 마법의 주문마냥 읊조리는 나무토막이다.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고. 그런데 정말 마법의 주문이 맞는 게 나무토막이 근육질의 남자로 변하였다. 이른바 ‘딜도 사내’. 등장하자마자 뛰어와서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읊조린 사람을 덮친다. 하지만 최소 작품 속의 여인들에게는 상호합의 하에 최상의 섹스를 선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유부남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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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법과도 같은 판타지는 어느 순간 액션 스릴러로 변모하는데, 딜도 사내가 더 이상 한 과부만의 것이 아니면서 부터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여성성을 회복한 듯 교태를 부리면서 걷는데다 혈색까지 좋아지는 한 과부를 과부 동료인 오 과부가 의심한다. 오 과부가 그 비밀을 알게 되고, 딜도 사내 역시 주문을 외우고 나타나면 일단 냅다 덮치니 그 대상이 지나치게 다양해진다. 양반집 과부를 덮치는 것도 모자라 스님, 사또의 항문을 공격하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을 덮쳐버릴 정도로 통제불능이 된다.


하도 억압받던 탓에 성적 본능마저 잊고 살던 여인들은 서로 나무토막을 차지하기 위해 이 산 저 산을 뛰어다니고, 두 과부는 이종격투기를 벌이다 쇠스랑을 들고 서로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 묘사되는 이 긴박감 넘치는 상황들은 일종의 광기에 가깝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풀어주지 못할망정 거기에 '열녀문' 이라는 비정상적이고 불합리한 족쇄를 오랫동안 채운 것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불합리한 강제적 억압은 결국 참다 참다 폭발하며, 여기서 나오는 힘은 비정상적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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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놀라울 정도로 뻔뻔하게 등장해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묘사들이 많이 나오지만 여기서 느껴지는 박력이 대단하다.

이를테면 딜도 사내가 여인들을 덮치는 순간에는 천지가 흔들리고, 집이 폭발하며, 열녀문이 기울어진다.

갑자기 넘쳐나는 여자들의 음기를 제어하려고 ‘음무제’를 지낼 때는

자크 오펜바흐가 1858년에 초연한 오페라 <천국과 지옥>의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캉캉'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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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딜도 사내가 한 과부를 덮칠 때 그의 힘과 과부가 느끼는 절정,

이들이 벌이는 활동을 암시하는 줌 인과 줌 아웃의 활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별도의 특수효과 없이 위의 세 가지 정서를 모두 표현해내는 경제성이 뛰어날 뿐더러 충격도 대단하다.


결국 이 작품은 인물들이 단순히 욕구를 넘어서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때 비로소 정상적이고 진지하다 못해 가장 아름다운 섹스 신을 보여준다. 이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 포착하고 또 집중하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사랑은 국가나 사회제도 등이 허락을 해주고 말고가 없고 상호합의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이 지닌 한계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본편이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자막을 통해 모티브가 된 이야기를 전한다. 관객에게 야심을 말하기 위해서다. 당대의 명재상 강희맹이 여인들의 억압된 성도덕과 고통들을 풍자와 해학으로 엮은 <촌담해이>의 ‘하용물야’편을 영상화 했으며, 조상들의 슬기·해학·강인한 삶의 뿌리를 다루겠다느니 뭐시깽이니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본편을 감상하면 딱히 그런 야심들을 느끼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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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니 강인한 삶의 뿌리는 무슨. 그냥 냅다 덮치는 거다!


물론 잘만 이끌어내면 풍자와 해학의 어떤 경지로 갈 수 있을 여지들은 있다. 개인적으로 딜도 사내가 작품 시작부터 끝까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점과 남권 중심 사회인 작품 속에서 남자들마저도 딜도 사내에게 무차별 습격을 당한다는 설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작품에서 설명하지 않지만 어쩌면 딜도 사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강제적으로 욕망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 여성과 말 못하는 남자, 이들은 사회의 시선으로 볼 때 불구들이다. 그런 존재들끼리 서로를 위안하다 마지막에 맺어진다. 그리고 딜도 사내에게 습격당하는 ‘남자들’ 중에는 사또와 이방 같은 공권력의 존재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여자를 쉽게 취하는 존재이나 그 반대의 경우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들에게 엄청난 만족감과 활력을 주는 딜도 사내가 이런 남자들에겐 무시무시한 흉기(!)로 돌변한다. 사람의 욕망과 사랑을 억압하던 남자들이 엉덩이를 부여잡고 쓰러질 때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하지만 작품에서 이런 남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분이 적은 탓에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다. ‘90년대 초반에 항문공격을 영상으로 만들다니’하는 식으로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여자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해학이니 뭐니 해도 결국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의 섹스 신은 일반적인 에로의 농도가 짙은 작품들에서 보여준 연출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에로 장르의 주 관람 층이 남성들임을 생각하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암만 자체적으로 풍자와 해학, 억압받는 여자들의 이야기 등을 내세우고 있다고 해봤자 결국 남자들의 욕구만 채워주는 작품이다. 그냥 사람, 특히 여자가 가진 욕망과 이에 대한 시대의 억압을 그저 볼거리로만 생각하고 전시하는 작품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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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을 남용한 자들의 비참한 최후.
이 중 사또는 “여, 여봐라! 모두 엉덩이를 가리고 도망쳐라!”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퇴장하신다.
한국 영화의 역사 속에서 사또가 아녀자를 겁탈하는 작품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사또가 겁탈당하는 작품은 아마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가 유일할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작품이 도입부의 자막에만 그렇게 야심을 밝혀놓고, 정작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딱히 주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도입부 자막이 없었으면 이 정도까지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충분히 심각하고 처절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텍사스 소떼가 침을 튀기며 맹렬하게 쫓아오는 것 같은 속도감과 상상력으로 끝까지 발랄하게, 젠체하지 않고 간다. 섹스를 소재로 주제의식을 담아낸다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주제의식이 어떻든지 섹스라는 요소가 시선을 끌어 다른 요소에 집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쉬쉬하는 사회일 경우에는 더욱 더 왜곡된 평가를 내리기 마련이다. 결국 이 소재는 영화인의 역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꽤나 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담기를 꺼려하거나, 혹은 본래의 주제의식을 실종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섹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희화화한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게 오마주를 바친 바 있던 신한솔 감독의 <가루지기> 같은 작품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안타깝다. 가벼우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우울한 변강쇠’를 만들었는데, 세상에. 변강쇠가 우울하면 누가 좋아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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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목표도 없이 가볍다고 배척당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그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자기 주제를 아는 것이다. 게다가 비현실적 상상력이 가미된 넌센스 코미디는 개봉한지 2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굉장히 신선하다. 작품이 도입부에서 보여준 야심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완성도를 가지고 비판을 할 수 있겠지만, 뭐 어떠랴. 어쩌면 그건 감독이 자긴 예술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건 최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최면이 작품의 유일한 흠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째 좀 서글퍼진다만... 유머 감각이 원체 비범한지라 이대로도 좋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감독의 상상력과 장르와의 배합이 마치 찹쌀떡마냥 제대로 맞은 결과물이었다. 주제의식은 빼고.


그리고 감독은 20여년 후 기괴한 신작인 <무서운 집>을 들고 돌아왔다. 무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같이 무성 공포 영화 시절의 푸른 톤으로 범벅된 포스터와 굴림체가 공격하는 예고편과 함께 말이다. 가히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를 만든 감독에게 어울리는 귀환이다. 충무로에서 긴 공백을 가졌던 감독이 복귀하는 일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다. 양병간 감독의 귀환을 환영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오래 전에 출시된 VHS를 제외한다면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매체가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작품의 필름을 소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출해서 보는 방법이 간단하지도 않거니와 싸지도 않다. 그래도 오래 전 한 용자가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되던 이 작품을 녹화한 덕에 (그 때는 케이블 심의가 느슨해서 어지간해선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던 시기다) 후대의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 명성을 쉽고 빠르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신원 미상의 용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15년 7월’에 개봉한 양병간 감독의 ‘신작’인 <무서운 집>의 예고편이나 보고 끝내자. 본래 하루만 개봉했지만,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이번 달에 재개봉한다.






P.S


1) 사실 이 작품은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에로 영화라서 그나마 필름이라도 남아있지 않나 싶다. VHS용 에로 영화들은 얼마나 찾기 어려워졌나. 돈을 아낀다는 이유로 새 작품을 단물 다 떨어진 이전 작품의 테이프에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던데.


2)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를 다시 보면서 최근 ‘새’로 시작하는 모 정당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이 묘하게 떠올랐다. 사실 그 정당에서 성폭행이나 성추행 사건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몇 십 년에 걸쳐 정치만큼 꾸준히 몰두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그 정당의 구미 지역 국회의원이 대낮에 호텔에서 성폭행을 했다는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침묵하고 있던 양병간 감독이 다시 복귀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그 국회의원에게 이 작품을 보여줘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골방에서 자위기구로 자위만 했어도 사회에 폐를 덜 끼치고 살았을 텐데 말이다.


3)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건 토니 레인즈 감독이 2001년에 만든 다큐멘터리인 <장선우 변주곡>을 보다가였다. <거짓말>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사이의 장선우 감독을 다룬 작품인데, 거기서 감독의 개인 서재로 보이는 곳에 있는 VHS들을 비춰주는 장면이 있다. 비범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을 그 때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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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