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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나 까자 - 원전 호러 쌩쑈 <2>]












1. 프리뷔어슬리 온 <알고나 까자>



지난 글에서 1980년 이전까지 독일의 원전 반대 움직임에 대해서 살펴봤다. 물론 대부분이 안 읽었거나 까묵었음을 감안하여 간단히 추려보겠다.


원전 반대 운동은 당시까지 아주 쪼끄만 성공과 대부분의 실패를 반복했다. 이미 원자력 발전은 값싸고 경제적이며 이러한 기술을 토대로 세계시장에서 기술 강국으로 물뚝... 아니 우뚝 설 수 있다는 환상은 소수 시위대가 내는 목소리를 다 뒤덮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 시위대는 좌절해 갔고, 그들 역시 '원자력이 정말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인가?'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원전 반대 시위는 원전 찬성론자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안에 갇혀 갈 길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시위는 점점 더 줄어들었고 서방 강대국들은 원자력 발전소를 경쟁적으로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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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에 대한 환상...




2.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내다.



2-1. 학계


1979년 3월 말 독일 하노버에서 국제 고를레벤 심포지엄(das internationale Gorleben-Symposium)이 열렸다. 이 학술대회는 시기상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헤리스버그시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직후였다. 우리에겐 일명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잘 알려진 사건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국 원자력 산업의 가장 큰 사고로 기록되어 있다. 사고를 계기로 바다 건너 미쿡 행님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반핵'을 외치자 독일에서도 이 사안에 관련하여 '워메~ 이게 뭔 난리여?' 라며 관심을 두게 된다. 그리고 (적어도 독일에서는) 이 심포지엄을 계기로 원자력 마피아와 원전 반대 시위대 간의 대결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당시 이 학술대회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칼 프리드리히 본 바이츠잭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라는 인물이었다. 핵물리학자이자 그 분야에서 나름 존경을 받던 이 사람이 일선에 섰다. 원전 반대 회의를 주최하고 제일 앞에서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칼 프리드리히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라며 당시 원전 기술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고, 무엇보다 테러에 대한 위험성을 강조하고 경고했다. 그때까지 원전에 대한 반대는 그닥 큰 (과학적) 이유를 갖지 못한,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시위 좋아하는 놈들만 우글우글대는 것처럼 보였으나, 칼 프리드리히는 원자력 발전소가 가지고 있는 폭발과 사고의 위험성을 큰 소리로 주장했고 스리마일 섬의 사고를 지켜본 이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공포가 작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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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동시에 철학자로 그리고 평화 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래서 문꽈와 이꽈 둘다 공부해야 한다능...… 읭?)




무튼 이런 말빨 좋고 실력 좋은 선생님이 앞에 나서서 상대편 토론자로 나온 원전 찬성론자들을 깨알같이 밀어 붙이자 어느새 이를 보던 사람들의 분위기도 스물스물 바뀌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원전 옹호론자 (aka 원자력 마피아)들은 슬슬 이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는 학계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에 감명 받은 니더작센주의 시장은 고를레벤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을 '정치적으로 무작정 밀어부칠 순 없다!'며 포기를 선언하고,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는 '독일 원자력 산업의 뼈아픈 패배'라는 이 한마디 남겨놓고 산속으로 머리 깎고 완전하게 떠나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급해진 원자력 업계는 경제론을 들고 나온다. 




여러분 원론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 반대론자들에 가로막혀 역사상 가장 큰 투자실패를 경험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산업 전반을 위축시키고 서민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 (이하 중략)



잠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 듯한 느낌적 느낌이….




2-2. 정치권


한창 칼 프리드리히가 <100분 토론>에서 상대 토론자들을 맹꽁이로 만들어 버리고 있을 때 정치권에서도 이에 발맞추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당시 사민당(SPD)의원이던 라인하트 위버호르스트(Reinhard Ueberhorst)를 필두로 원자력 에너지 관련 <연방 국회 조사 위원회>가 꾸려진다. 위버호르스트라는 인물은 원래 핵을 싫어해 여러 시위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브록도프 지방의 반핵시위에서 시위 도중 부상까지 입고 정계로 복귀한 화끈한 활동파 인물이다. 그런 그의 '반핵 전투력'이 얼마나 높아져 있었을지 쉬이 짐작이 간다. 그가 하필이면 조사위원회 대표 자리에 앉아 버렸으니 원자력 마피아들로서는 정말 순간 조류대가리가 되는 아스트랄 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당시 국회조사에서 상대편을 막무가내로 몰아붙이지 않았었다. 오히려 '내가 반핵의 선봉에 서 있지만, 대화의 여지는 드릴께~' 라는 태도로 원전 반대자들과 찬성자들 모두를 아우르는 타협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하지만 그의 타협안은 당시 국회에서 그닥 환영받지 못했고 정책적으로 연결 되지도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당시보다 현재 더 크게 평가받는다. 그의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당시 외부에서 일어나던 시위대와 원자력 마피아 간의 싸움을 국회 내부로 끌고 들어와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둘째, 원자력 발전의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타협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토론과 회의를 이어갔다. 그에겐 양측이 다 수긍할 수 있는 타협안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셋째, 핵 없는 에너지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고 이를 위해 기술적인 (소위 일반인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전문가들이 쓰는) 언어가 아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논의를 해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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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차 귀여움 주의 ...읭?





우리에겐 에너지 정책에 관한 많은 옵션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핵발전을 통해서도 혹은 그것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핵발전을 통해 유발될지 모르는 대규모 사고의 위험은 


그 위험성이 적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by Ueberhorst






2-3. 상호작용


반핵운동 과정을 살펴보면 이게 단지 시위대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더 큰 부분에서 시민운동 플러스 언론, 정치, 행정당국, 법조인 그리고 역량 있는 학자들의 알흠다운 콜라보레이션이 그들의 힘을 극대화 시켰다. 이러한 독일의 반핵운동 전략은 미쿡 형님들의 환경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미쿡이 현재 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걔들은 뭔가 합리적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라도 보인다. 


반면 잠깐 한국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사실 우리도 환경운동이나 반핵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다. 그리고 열심히 한다는 것도 안다. 다만 시민단체와 언론, 정치인, 학자들이 힘을 모아 여론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그닥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특히 원자력 산업에 관한 문제에서 학자들의 침묵은 사실상 한국 원자력 마피아들의 좋은 토양이 되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밉보이면 내 밥줄이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그들의 입장을 마냥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러한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각계각층 (시민사회, 언론, 특히 정치권)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알흠다운 제도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서로에 대한 상호작용 없이 양심있는 학자들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은 '너 혼자 좆되바라!' 심보 아닐까? 


비단 한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프랑스 등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 상호작용을 잘 이루어내지 못하는 곳에서는 한결같이 원자력 마피아들의 힘이 더 강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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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좀 합치자!




2-4. 세력화 


68운동의 세대들과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만났고 그들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뭉쳤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세력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들은 새로이 <녹색당>이라는 하나의 지붕 아래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녹색당은 좀 더 조직적으로 그리고 좀 더 전략적으로 반핵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이들은 현재 독일에서 대략 10%의 지지율을 얻고 있는 정당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국회 63/631석, 유럽의회 11/96석) 지금까지 독일에서 가장 큰 반핵 운동이 있었던 것과 나름 큰 규모의 녹색당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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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는 촌스럽군...


 


3. 원자력 마피아의 반격



70년대부터 수많은 반핵시위와 토론이 있었다. 그 당시에 이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원자력 발전에 관한 논점(원전의 불안정성) 과 대안 (대체에너지 개발) 들은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다. 그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고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다만 원자력 마피아들 역시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3-1. 국뽕에 ... 아니 군사뽕에 기댄 원자력 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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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국가에서 원자력 산업이 군사뽕을 맞으면 상당히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한국에도 정몽즙 선수가 이를 노려봤으나 실패!! 




80년대에 다시 한번 군사적 용도로서 핵발전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주제가 크게 부각 되는데 이는 원자력 산업 보호를 위한 논거로 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간의 반핵운동 성과로 이미 대중들의 인식 속에 원자력 산업과 독일의 과도한 무장강화에 대한 반대 여론은 마피아들의 방식보다 더욱 공고했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큰 힘을 받지 못하고 다시 묻혀버렸다. 


미국, 일본, 프랑스, 중국 등 소위 말하는 유수의 강대국들과 독일은 차이가 있다. (물론 여기서 일본은 조금 애매하긴 하다만….) 여타의 강대국들과 달리 독일은 원자력 산업에 관련된 기술과 군수산업 (aka 핵무기)의 연결을 처음부터 우려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2차대전의 책임이 있는 독일은 미국의 압력이 없어도 내부에서 군사력 증강에 반대하는 여론이 굉장히 높다. 


이는 어느 정도 독일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독일 애들의 역사의식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치 시대에 대한 교육만큼은 굉장히 열심히 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네오나치나 극우파가 있다는 것은 메롱이지만 그 비율은 상당히 낮다. 


그러한 면에서 핵산업에 대해서도 기술은 기술, 무기는 무기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는 일본처럼 재처리 기술을 야금야금 쌓아가며 언제든 무기화시킬 준비를 하지 않는 토대를 만들었다. 자연스레 원자력 발전은 군사적 측면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 역시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원자력 마피아들이 야심 차게 추진하고자 했던 핵 폐기물 재처리 공장은 오히려 반핵 운동가들에게 역풍을 맞게 된다. 반핵 운동가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안보적 입장에서 한번 터지면 대형사고가 되고 


테러라도 당하면 국가 안보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원자력 발전소나 핵폐기물 재처리 시설은 


군사적 우위를 취하기보다는 안보적 약점을 노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3-2. 환경에 기댄 원자력 마피아


1981년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제기된 '심각한 산림 훼손'을 계기로 원자력 마피아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된다. 학계와 언론은 화력발전으로 전 세계의 산림이 줄어들고,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너덜의 인생은 좆게된다고 경고하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유수 잡지들엔 도시가 물에 폭 잠겨 있는 평화로운 사진들이 실리고 환경이 파괴된 암울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영화, 소설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원자력 마피아는 다시 한번 '차카고 몸에 좋은 에너지' 코스프레를 하며 전면으로 등장한다. 지구 온난화 걱정 없는 친환경 에너지, 산림을 보호하는 에너지, 힘세고 오래가는 에너지 이야기를 하며 전 세계의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다시금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역시 몇 년간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계획이 없는 상태였지만 '우리의 소중한 지구를 생각해서 미래는 원자력 에너지' 라는 그들의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당시는 대체에너지에 대한 기술이나 투자가 아직 미비했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에 대응할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이 반핵 운동가들의 딜레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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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카...고 ....몸...에... 좋...은 ………...에….너….지 ...




4. 사고를 통한 깨달음 



그렇게 환경운동은 점점 힘을 잃고 원자력 발전은 힘을 얻어가고 있던 어느 날... 두둥! 


1986년 4월 26일 독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체르노빌에서 그 악명 높은 원전 사고가 터지고 만다. 이 사고의 참상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던 독일은 그간 살짜쿵 긍정적으로 돌아서던 원자력 발전의 무시무시한 대가와 후유증에 다시금 눈을 뜨게 된다. 많은 이들이 메이드 인 체르노빌 방사능이 독일로 건너오지 않을까 걱정을 했고 그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예상 못 하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뭐 메이드 인 후쿠시마 방사능 때문에 수산물 시장의 폭망을 지켜봤던 사람들과 비슷한 기분을 당시 독일인들이 느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혼란이 왔다고 한다.)


이에 당시 헤센주의 환경부 장관은 시민의 불안을 해소할 방법으로 정보공개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당시가 80년대 중반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환경이라는 문제는 현재와 비교하면 거의 아웃 오브 안중인 상황이었다. 즉 부처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당시 환경부라는 곳은 그리 할 일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럴까? 당시 헤센주의 환경부는 각 지역의 공기 중, 먹을 것, 뭐, 뭐, 뭐 등등의 방사능 수치를 세세하게 기록하여 시민에게 공개하였고 이 방식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를 본 독일의 다른 여러 도시도 곧바로 방사능 수치공개를 하기 시작했고 이 유행은 근처 유럽으로 퍼져 나간다. 투명한 데이터의 공개는 주민의 여론을 순식간에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여론이 주변으로 퍼져간다.


당시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상당히 우호적인 기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푸릇푸릇 아름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에 사는 하이디 들은 지역의 산림을 위협하는 화력발전에도 반대했고 푸르른 강물의 미관을 해치는 수력발전에도 반대했다. 따라서 독일 등 주변의 반핵 운동에 무심한 듯 씨크하게 무관심을 날리며 힘세고 오래가는 원자력 발전소를 지지해왔다. 하지만 체르노빌 이후 그리고 그 방사능의 여파가 공개된 이후 알프스 산맥의 하이디 들은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는 초록 헐크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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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나도 싫을 듯… ㄷ ㄷ ㄷ ㄷ




5. 하지만 이 기류가 왜 전 유럽으로 퍼지지 않았을까?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은 항상 미묘한 관계를 유지한다. 서로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하지만 유럽 연합의 가장 큰 두 축인 이 나라들의 자존심 대결은 원자력 발전에 관한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원자력 마피아의 힘이 강했고 독일은 어느 정도 그 반대의 기류가 형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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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도시들에서 발표한 원자력 수치도 판이 하였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프랑스는 원전사고 전과 다름없는 낮은 방사능 수치를 언론에 공개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킨 반면, 독일 방사능 수치는 계속해서 올라간다고 발표가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정치권과 독일 정치권의 대응도 달랐고 국민의 반응도  달랐다. 물론 프랑스가 독일보다 체르노빌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반문도 제기되었으나 당시 기록에 따르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 마을의 방사능 수치 역시 심하게 다른 결과를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양국의 다른 반응은 두 나라의 여론을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게 된다. 그리고 체르노빌 사고를 거치며 독일의 여론은 거의 원자력 옹호론자들이 설 땅이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그들을 밀어붙이게 된다. 여론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원전 반대를 외치는 상황에 이르자 원자력 산업에 관련된 사람들 역시 원전 반대 여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시민의 자발적인 시위뿐 아니라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원전에 대한 불신, 그리고 대형사고를 목격하고 체감한 사람들의 쓰리콤보가 완성되자 독일은 슬슬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6. 느림 VS 빠름 



6-1. 느림느림느림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하루아침에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원전 반대를 외치던 사람들은 대체에너지 개발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이미 지구 온난화와 환경문제로 화력발전이 원전의 대체재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한쪽에서는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라' 라고 소리를 질렀고 다른 쪽에서는 그곳에 자금을 투입했다. 시간은 오래 걸렸다. 성과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고속증식로 라던가 퍼블베드 원자로 등의 '안전한 핵발전' 이라는 대안들이 제시되었고 실험되었다. (물론 저게 뭔지는 필자도 모른다. ㅈ도 모른다. 다만 후지니까 현재 사용 안 하겠지?) 


하지만 이미 핵발전은 '임시 혹은 일시적인 에너지원'이라고 못 박아놓은 정부와 여론은 이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느리지만 꾸준하게 태양열, 풍력, 잉여력 등의 꾸준한 대체 에너지 개발에 매진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은 통일을 이루게 된다. 당시의 변화 속에서 독일은 사회적으로 큰 혼란기를 맞게 되고 환경운동 따위(?)의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녹색당의 환경운동도 힘을 잃어갔다. 간간이 이곳저곳에서 반핵 시위가 있었지만, 이 역시 아웃 오브 관심의 영역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고 여론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 조용하던 이 시기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의 문제보다 핵폐기물의 처리가 더욱더 노답 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노무 폐기물은 땅에 묻어도 바다에 버려도 우주로 날려버려도 해결 안 되는 골치 아픈 문제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은 미국이나 러시아처럼 땅뗑이 크고 배부른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 이런 폐기물의 문제에 더욱 관심 갖게 만들었다. 처리도 노답, 해결책도 노답, 기술력도 노답인 폐기물 처리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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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빠름 빠름 빠름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또다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지게 된다. 자연스레  다시금 시민의 반핵운동이 일어났고 정부는 이에 화답하듯 가뿐하게(?) 탈핵을 선언한다. (사실 2033년까지 하려던 계획을 2022년까지로 앞당긴 것 뿐이긴 하다만…) 


80년대 중반부터 대략 25년의 준비기간이었다. 그간 정부의 지출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성과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 제조업이 국가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독일. 산업전기의 사용량이 드럽게 많은 독일. 아직 충분한 기술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대체에너지 기술 등 정부 역시 확신을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탈핵을 선언한다. 너거들이 원한다면 '핵 없이 한번 살아보자'라는 용기를 냈다. 그렇게 독일은 탈핵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 집의 전기는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다. 




7. So...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핵을 선언한 독일의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무수히 많이 보도되었다. 그리고 언론은 독일이 마치 하루아침에 '핵 꺼지세요'를 외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싸움과 오랜 준비기간이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체르노빌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독일의 탈핵준비와 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긴 후쿠시마의 사고, 그곳의 인명과 재산피해를 보며 준비해온 사람들과 당장 나의 피해가 아니면 침묵하는 사람들은 현재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필자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누가 옳은지는 아직 100% 확신은 없다. 그럼에도 세계의 대세는 탈핵이다. 미쿡도, 프뢍스도 이 나라건 저 나라건 탈핵으로 한 발씩 나아간다. 한, 중, 일, 북 제외! 한국의 종특이 아무리 빨리빨리즘 이라고 하더라도 이젠 슬슬 우리도 탈핵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기...는 개뿔 더 늘리지나 마시길!! 


지금부터 박차를 가해도 내 죽기 전에 탈핵을 선언하는 한국의 모습을 볼 수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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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사 하나에 5500만원 이라는데... 난 첨부터 줄을 잘 못 섰 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망한듯.

출처: 뉴스타파




지금까지 어설프게 '핵 발전소 포기'한 독일의 반핵 운동사에 대해서 디벼봤다. 


칠팔십 년대에 나팔바지 입고 시작한 싸움이 그들의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이제야 결론을 내린 오래 걸린 싸움이었고, 그 과정의 많은 이야기는 종종 무시되어 왔다. 


미쿡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독일의 반핵 운동사에서 미쿡과 이들의 가장 다른 점은 소위 말하는 시위대의 '대형 스타' 없이 싸웠다는 것이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없는 이들의 싸움은 그래서 더 오래 걸렸다. 더 큰 동력을 얻지도 못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풀뿌리(?) 자잘한 활동가들이 모인 시위대는 느리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당장 나의 힘이 보잘것없이 약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단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기는 싸움은 우리 도처에 널려 있다. 핵발전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내 삶에 포기하지 않는 것 몇 가지는 가지고 가고 싶다는 훈훈한 마인드로 마무리를 하겠다. 


가을인가 보다. 괜히 센치하... 퍽!! 

 



8. 몇 가지 뱀발



얼마 전 독일에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배터리 파크라는 예비전력 저장소가 슈베린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게 뭔고 하니 충전지처럼 전력을 평소에 보관해 두었다가 전기가 모자란 상황이 오면 전기를 공급해주는, 즉 전기대란을 막자고 설치한 시설 되겠다. 주로 대체에너지와 신재생에너지에 많이 의존하는 국가들이 이 시설에 눈독을 많이 들인다고 한다. 


지난달부터 가동을 시작한 이 시설은 우리의(?) 졸라 자랑스런 삼성 SDI가 전부 도맡아서 공사했다. 뭐 삼성이 한국회사냐 아니냐의 논란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한국도 저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어차피 세계의 기술력은 어느 정도 평준화가 되었다고 본다. 조금만 더 연구 투자를 해준다면 우리도 신재생에너지든 핵폭발 에너지든 못 가질 게 없을 것 아니냐. 전력 대란이라고 호갱님들 전기 아껴쓰라고 협박하던 정부와 저런 기술 선보였다고 자랑하는 삼성. 뭔가 아이러니 하지만 어쨋든 우리나라 졸라 좋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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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베터리라능




독일 전기세 비싸다. 엄청 비싸다. OECD회원국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축에 속한 나라 중 하나이다. 그래 결국은 돈이다. 그게 바로 너님이 판단하고 서야 할 입장이 될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좌우의 이념문제도 아니고 경제 정의(?) 이런 문제도 아니다. 전기값에 대한 산업용 가정용 차별 논의나 과도한 누진세 논란 등을 빼고도 핵발전을 포기하면 대략 두 배가 비싼 전기료를 감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그래도 마냥 핵발전 포기를 외칠 수 있을지는 개인이 잘 생각해 볼 문제다. 참고로 평균 전기세는 독일이 한국의 세배라고 한다. 그리고 당분간 그 값은 계속 오를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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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독일인들은 졸~라 짜다. 

전기 드럽게 아껴 쓴다. 




아무리 그래도 기레기들아!


원전 반대 시위는 수없이 있었지만 전기료 비싸니 원전 다시 만들자는 시위는 없단다. 그니까 독일이 탈핵 선언 이후 후회하고 있다는 루머나 그만 만들어라!! 


끗.











타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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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