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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0. 월요일

요제프K









최근 새누리당이 법정 근로시간을 52시간에서 60시간으로 늘리도록 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연 우리의 여당의원님들께서는 서민들이 퇴근 후 한가롭게 딴지기사를 읽거나 트위터를 하며 시간 떼우는 것을 영 못마땅해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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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라는 각하의 주옥같은 명언이 떠오르고, 이제 세월호 참사는 그만 잊고 바삐 일이나 하라는 뜻으로 해석 되는 것은 기분 탓 일거다.


이러한 작금의 노동 환경의 후퇴를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노동 강도로 악명 높았던 캐리비안해 섬 (이하 서인도 제도)들의 설탕 플렌테이션이었다. 이번엔 거기서 흑인 노예들이 당한 착취와 또 그들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바로 아이티(Haiti 영어론 해이티라 읽힌다.) 혁명이다.


우리에게 아이티는 낯선 나라다. 아마 몇 년전 지진이 강타하여 국토 전체가 초토화 되었다는 정도가 알려진 이야기의 전부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 이지만 사실 이들도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다.




콜럼버스와 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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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우리가 그림이 잔뜩 들어가 있는 위인전을 보면서 배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실제 일어난 일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그때도 지구는 둥글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러 떠날 때 모두가 말린 이유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 항로로 인도에 도달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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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콜럼버스가 여정을 시작할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대륙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유럽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항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당시의 항해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면 콜럼버스는 어떻게 주위의 만류를 무시하고 여정에 나서게 되었을까?


그가 멍청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유럽보다 과학기술의 수준이 높았던 아랍의 학자들이 계산한 지구 크기를 콜럼버스가 퍼오는 과정에서 단위를 혼동하였고, 원래 계산된 값보다 훨씬 지구가 작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그가 도착한 서인도 제도 정도의 거리에 인도가 있다고 믿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어찌 되었든 저찌 되었든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서쪽으로 인도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득템이었다. 그런데 웬 걸, 어렵사리 도착한 서쪽 '인도'에 도달하여 


"두 유 노 후추?"


라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말도 안 통했지만) 그곳에 후추는 없었다. 당시 어렵사리 얻은 황금이 약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향신료가 없다는 점에 콜럼버스는 크게 실망하였다. (인도에 후추가 없다니!)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어진 2차 여정 때 그는 마법의 작물을 가져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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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였다.


비록 신대륙에 후추는 자생하지 않았지만, 꿩 대신 닭이라, 그 못지 않게 수익률이 높은 사탕수수를 가져가 심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선 '우는 아이에겐 설탕이 최고'라는 유행이 생기기도 할 정도로(15세기의 뽀로로), '꿀과는 다른 오묘한 단맛'이 나는 설탕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콜럼버스와 이후 서인도 제도로 여정을 떠난 유럽인(주로 스페인애들)들은 그곳에 황금이나 후추가 없음을 일찍이 간파하고 본격적으로 설탕을 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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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는 서인도 제도 지도이다. 가운데에 보이는 두 가지 색으로 나뉜 섬이 바로 현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가 위치한 '산도멩'(이 이름은 프랑스령 당시의 이름이다. 그러나 명칭이 자주 바뀐 관계로 이하 산도멩으로 통일하겠다)이다. 산도멩을 기준으로 좌측에 약간 작은 섬은 자메이카, 좌측 상단에 위치한 길쭉한 섬은 쿠바 섬이다. 좌측 하단은 멕시코, 좌측 모서리는 플로리다이다. 이들 섬 중 가장 수입이 좋고 전체 프랑스 식민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곳은 바로 산도멩 섬이었다.




설탕과 노예


최초로 서인도 제도를 탐사한 스페인인들의 힘이 쇠하고, 뒤늦게 식민지 확장에 뛰어든 불란서인들이 산도멩 섬을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들이 이 섬을 빼앗은 이유는 단 하나, 설탕을 재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설탕 플렌테이션의 수익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넘어야 할 걸림돌들이 몇 개 있었다.


 1. 환경파괴와 자원 공급


농장주들은 섬 전체를 설탕농장으로 바꾸었다. 섬 전체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림은 물론이고, 설탕 이외의 작물은 재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각종 환경문제가 일어났다. 설탕 추출 과정에선 불이 꼭 필요한데, 땔감이 부족하여 유럽으로부터 불을 땔 연료를 수입하기도 했고, 노예들을 먹일 식량은 가공된 생선 같은 저렴한 음식을 서쪽의 미국 식민지로부터 조달했다.


 2. 노동력 부족


콜럼버스가 오고 난 직후, 유럽인들이 퍼뜨린 각종 전염병으로 인하여 서인도 제도에 살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사망하였다. 그에 비해 설탕 플렌테이션은 굉장히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오기 시작했다.




노예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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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의 대부분은 서 아프리카에서 거래되었다. 노예 산업이 시작되던 당시 서 아프리카는 혼돈의 카오스였다. 잦은 부족 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전쟁 포로는 주로 노예로 팔린다) 많은 노예가 생겨났고, 갑자기 불어난 노예 공급에 맞추어 유럽 상인들은 서 아프리카 해안에서 흑인 노예들을 잔뜩 싣고 대서양을 건넜다.


대서양은 그야말로 대양이다. 범선의 지하실에 흑인 노예 수백 명을 싣고 가는 몇 달 간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최악의 위생 조건, 잦은 전염병으로 인해 노예선의 최초 기항지에 도달했을 때의 노예 생존율은 상당히 낮았다. 화장실도 제대로 안 만들어 주고 쇠사슬에 묶은 상태로 지하를 봉인하여 몇 달을 여행했다고 하니, 살아남은 노예가 있었다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런 위생적인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되어 (물론 그들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지만 여전히 노예들에게 이 길고 긴 여정은 지옥 그 자체였다.


최초 기항지는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에 내려 경매를 통해 노예를 팔고, 팔리지 않은 노예를 다시 배에 실어 남미 대륙을 한 바퀴 돈다. 그 후 북상하여 서인도 제도로 노예들을 실어 왔다. 이렇게 노예 산업은 빠른 성장을 거쳐서 금세 자리를 잡았고, 노예선 관련 보험도 등장할 정도로 신대륙 식민지에선 중요한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죽음의 노동


설탕 플렌테이션 농장이 노예들에게 요구하는 노동은 가혹했다. 기후 특성상 농한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사탕수수는 무섭게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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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라나는 사탕수수를 일일이 손으로 베고, 모은 사탕수수를 농장 중심에 있는 기계로 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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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계는 밤낮 가리지 않고 돌아갔다. 사탕수수의 특성 때문이었는데, 사탕수수는 베어진 지 24시간 이내에 줄기 속에 있는 진액을 추출하지 않으면 진액이 말라 설탕을 추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악한 기계의 구조와 피로에 찌든 노예들의 건강 상태로 인하여 저 기계는 피가 흥건히 고여있는 날이 많았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에 노예들의 사지가 빨려 들어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인데, 그럴 때마다 옆에 있던 감시자는 노예의 온몸이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 정도만 수행했다. 기계를 멈추는 것보다 노예의 사지가 잘리는 것이 싸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수입과 미국 식민지


이렇게 척박한 노동 환경과 과한 노동량, 그리고 가혹한 기후 때문에 노예 사망률은 굉장히 높았다. 농장주들이 수익성을 위해 남자 노예만 구입하는 것을 고수했고, 그 때문에 깨져 버린 남녀 성비 불균형과 밤낮 구분없이 이어지는 노동으로 인해 노예들은 가족을 만들거나 자녀를 낳지 못하였고, 끝없이 착취만 당하다 죽어갔다. 설탕 농장은 이렇게 수많은 노예들을 집어삼켰다.


이 와중에 서쪽의 미국 식민지 남부에선 조금은 다른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좁은 땅덩어리의 서인도 제도의 섬들에 비해 넓은 땅을 가진 미국은 식량과 기타 자원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미국 식민지 남부의 농장주들은 설탕 대신 비교적 노동의 강도가 낮은 목화와 담배를 재배했다. 남녀 성비를 맞추었으며, 적절한 영양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절대 노예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부 농장들의 최고 수입원이 바로 '노예' 였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노예선들의 이동항로는 브라질 – 남미 - 서인도제도였고, 마지막 종착지는 바로 미국 식민지 남부였다. 유통 과정이 길다 보니 노예 가격은 미친 듯이 뛸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자체 생산'이었다. 이렇게 '자체 생산'된 미국 식민지 남부의 노예들은 서인도 제도로 되팔려갔다. 결국 모든 백인 농장주들의 행동은 자신의 재산증식을 위함이었던 것이다.




백인 농장주의 악행


산도멩의 인구는 소수의 백인 농장주와, 그들을 위해 일하는 백인들, 그리고 다수의 흑인 노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압도적으로 많은 흑인 노예들을 다스리기 위해 백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노예들을 짓밟았다. 지속적으로 여성 노예들을 강간하고, 사소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노예는 죽기 직전 까기 채찍질을 하는 등 흑인 노예들을 겁 먹이기 위해 각종 방법을 동원했는데, 이런 잔혹한 행위들의 동기는 바로 '공포' 였다. 심심찮게 백인 농장주가 흑인 노예로부터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백인 농장주들은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언어를 이용하기도 했다. 일부러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에서 온 노예들을 사서 그들이 대화를 못하게 하고, 가족 단위의 노예는 각기 다른 농장으로 보내 떨어트려 놓았다. 노예들의 집단행동이 두려웠던 것이다.




부두교


이러한 백인 농장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예들은 자기들만의 문화를 창조하고 결속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미국 남부의 노예들이 기독교에 빠져든데 반해, 서인도 제도에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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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부두교다. 

 

서로 섞여 버린 탓에 그들 고유의 문화가 없었던 노예들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종교와 풍습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조해냈다. 부두교는 문화적 결속이 부재했던 노예들에게 연결고리를 제공하였고, 곧 서인도 제도 전역으로 퍼졌다. 최근 영화에 뱀파이어만큼이나 자주 나오는 (죽여도 죽여도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는 장치) 절대 악의 상징 좀비가 바로 이 부두교에서 기원한 것이다. 백인 농장주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종교 행사와 사제들을 두려워 했고, 이러한 두려움이 이어져 '좀비'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훗날 비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를 찾던 할리우드 사람들이 바로 이 좀비에 착안하여 절대악 캐릭터를 창조해 냈고, 현재까지도 나치 이후 가장 성공적인 절대악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물론 북한도 치고 올라오고 있지만)


이러한 서인도 제도의 흑인 문화에 대한 백인들의 공포는 훗날 산도멩이 독립한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렇게 21세기의 한 반도 국가가 연상되는 (물론 한국이 훨씬 낫지. 과장법이다.) 노동환경과 착취의 굴레에서 죽어가던 흑인 노예들과, 그들이 일으킬지도 모를 반란에 두려워하며 더욱더 그들을 야만적으로 탄압하면 자칭 문명인 농장주들의 긴장이 이어지던 산도멩섬에 불란서 본국에서 속보가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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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가 기요틴에서 목이 달아났다."


이 소식에 산도멩 섬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하편에서 계속...>







요제프K

트위터 : @JosefK44 


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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