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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11. 화요일

뚜벅이






1.


입찰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올 2월 지인의 제안을 받고 나서였다. 지방의 모 교육기관에서 힐링연수교육을 진행하는데 당신 회사가 적합할 것 같으니 공개 입찰에 참여하라는 것. 그날 <나라장터>라는 곳을 처음 알았다. ‘명상’ ‘힐링’ ‘워크숍’ 등의 키워드로 검색하니 행사 예정 기관의 입찰 공지가 주르륵 화면에 떴다. 영업을 확장할 수 있겠다 싶어 바로 회원가입을 하고 조달청으로 달려가 지문을 등록하고 지문 인식기도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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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권유한 그 기관의 입찰 공고문도 내려받았다.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에게 참여제한을 두는 규정이 마음에 들었다. 입찰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던데, 이렇게 공개적인 사이트에서, 작지만 전문적인 회사끼리 경쟁을 시킨다니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공고문과 과업지시서를 반복해 읽을수록 ‘이건 뭐지?’ 싶은 걸림이 이어졌다. 내용도 파악하지 못한 채 타기관의 것을 그대로 베낀 듯 앞 뒤 안 맞는 요구조건, 입찰 참여자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발주처 중심의 일방적 조항 등이 가독(可讀)의 진도 나감을 방해했다. 그러다 기어이 발주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의를 제기한 것은 바로 다음 조항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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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이 퀵 좋고 통신 좋은 시대에?


담당자는 별 전화를 다 받겠다며 퉁명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입찰의 공정성을 사전에 확보하고, 행여 잘못된 서류는 현장에서 반려하기 위해 내린 조치입니다.”


미운털 박혀 불이익을 당할까 봐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마음을 냈으니 끝까지 가보자며 제안서도 쓰고 제출 서류도 준비하며 나와 직원들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몇 번씩 올라왔다. 회사의 재무상황은 재무제표로 충분히 확인 가능한데도 민간기관에서 삼십만 원 이상 들여야 발급해 주는 <기업평가서>를 제출하라 요구하는 것, 행사를 진행한 회사들의 계약서와 세금계산서가 있는데도 <직인 날인 확인증>을 거래한 업체들로부터 ‘원본’으로 받아와야 한다고 강제하는 것, 그것을 일일이 준비하면서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독백이 절로 터졌다. 하지만 '남들도 다 이런 마음이라면 이걸 이겨낸 자에게 승리 있을 것'이라 자위하며 끝까지 가봤다. 그리고 탈락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열 군데 넘게 입찰에 참여했다. 몇 번은 낙찰의 기쁨을 맛봤고, 몇 번은 탈락했다.


그런데 참 간사하기도 하여라.


그들의 과업지시서는 입찰에 처음 참여한 2월의 그것과 변함없이 똑같은데 내 마음은 무덤덤해져 갔다. 그저 그러려니, 그런가 보다 하며 기계적으로 문서를 보고 있었다. 입찰 문서에 대한 감정의 역치(閾値)가 저만큼 상승함으로써 적응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어떤 입찰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수많은 상상력을 동원해서도,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지를 찾아낼 수 없었던, 그런 입찰을.



2.


지방 산하 모 연수기관에서 하반기 명상힐링 교육의 입찰 공지를 동시에 두 개 냈다. 4시간 명상 교육 하나, 6시간 힐링 교육 하나. 그 둘의 과업지시서는 4시간과 6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적인 내용 구성, 업체 평가표, 제출서류 등이 같았다. 그런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최저가 낙찰제 방식을 쓰고 있었다. 제안서 평가에서 80점 이상을 얻은 업체 중에 가장 낮은 행사 가격을 투찰한 곳이 낙찰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단서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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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주처 입장에서는 경쟁에 의해 비용을 무한정 싸게 할 수 있으면서 뒤탈 없이 안전하고 깔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하한선 규정 없는 최저가 낙찰은 중소 업체에게는 당연히 큰 부담이 되고, 교육의 질이 떨어질 위험도 있다. 여하튼, 삼팔선이 지척인 이 기관을 직접 방문해 서류와 제안서를 제출하고, 이틀 후 또 방문해 오전 (4시간 힐링 교육, 3곳 참여)과 오후 (6시간 명상 교육, 4곳 참여) 두 차례의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런데 거의 같은 내용을 발표하는데 오전과 오후의 심사위원이 똑같았다. 의아해서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심사위원 확보가 어려워 어쩔 수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결과가 나왔다.


4시간 교육 입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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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업체가 낙찰됐다. B와 C는 80점이 되지 않는 제안서평가부적격자 판정을 받는다. 당연히 규정대로 A만 가격 개찰이 됐다.


바로 이어서 개찰이 이루어진 6시간 교육 입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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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교육에서 제안서평가부적격자 판정을 받은 B가 이번에는 1등이 됐다. 그리고 4시간 교육에서 1등을 했던 A는 C,D와 함께 제안서평가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어떻게 같은 날, 같은 심사위원에게, 거의 같은 내용의 제안서로 평가를 받았는데 4시간 교육에서 1등한 곳이 6시간 교육에서 제안서 평가 부적격자가 되었을까? 또 6시간 교육에서 1등한 곳이 4시간 교육에서 제안서 평가 부적격자가 될 수 있을까? 왜 단 한 곳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평가 부적격이 되는 것이며, 1등 업체의 점수조차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개 입찰의 생명은 투명성일 텐데 이렇게 생각이 많아져도 이의제기조차 하지 못한다면 이건 참 일방적인 경우가 아닌가?


며칠의 고민 끝에 최저 입찰가의 문제점과 이번 입찰 결과에 대한 의혹을 문서로 제기했다. 예상대로 그들의 대답은 단순했다. “우리는 규정대로 했을 뿐이며, 관련 법률상 하자가 없는 방식이었다.”


해소되지 못하고 찝찝하게 남아있는 감정과 기관 답변의 성실성 여부를 떠나서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나와 내 회사 직원이 이번 입찰에 투입한 시간과 노동은 모니터에 떠 있는 <제안서 평가 부적격>이란 8글자로 허망하게 무효화 됐다는 것이다. 떨어져도 이유나 알고 떨어져야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그동안 쏟은 시간과 금전적 비용을 수업료로 돌리며 부족한 능력을 보강하든 말든 할 것이다. 무슨 국가적 안보가 걸려있는 내밀한 과업이라고, 4천만 원 용역행사에 산처럼 많은 요구와 지시를 해놓고 마무리를 저렇게 암실 속 묻지마로 처리하는지 끝내 나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3.


내가 입찰에 대한 소회를 간략하게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페친들의 댓글 반응은 한마디로 ‘공분(公憤)’이었다. 누군가는 불공정거래의 대표행위라 했고, 또 누군가는 스스로 너무 비참해져서 입찰을 진작에 포기했다고 했다. 이쯤에서 나도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더러우니 하지 말든가 더러워도 아쉬우면 계속하든가. 그런데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가 경험한 일련의 의문점들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아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현실과의 타협 속에서 입찰 제도는 어쩌면 괴물이 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제도는 그 속사정을 알거나 경험한 내부자의 지적 속에서 개선과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나의 6개월의 일천한 경험도, 내부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될 것이다. 포기하거나 따르거나 외의 또 하나의 선택, 나는 떠들기로 했다.


현행 공개 입찰이 가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점 3개를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평가위원의 전문성과 심사의 즉흥성 문제이다.


평가위원은 보통 입찰 기관의 직원 두세 명과 학계 등의 전문가 대여섯 명 내외로 구성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 페친은 현행 입찰 시스템을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심사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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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발표를 마치고 심사위원의 질문을 받을 때,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질문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명상프로그램 2시간에 정신병을 고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짓궂은 심사위원이 발표자의 진정성을 보기 위해 위악적으로 던진 질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이 심사의 장소를 달리해서 반복되었을 때, 그리고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전문 용어에 대해 왜 이렇게 제안서가 어렵냐는 타박을 받았을 때, 나는 발표의 수준을 낮춰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 전문가라는 명칭을 믿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들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나 역시 이러한 입찰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내가 주로 심사를 하는 곳은 온라인 콘텐츠와 소프트웨어 쪽 정부 입찰이다. 심사를 며칠 앞두고 심사위원 참석 가능 여부를 입찰기관에서 전화로 물어 오고 심사위원을 수락하면 당일 현장에 가서 피티 심사를 한다. 심사를 맡으면 가끔 황당한 경험을 하는데, 심사 주제에 관해 내가 문외한임을 당일 현장에 도착해서야 알게 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한번은 무슨 공학 연구 분야의 심사장에 갔는데, 거의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가장 평균적인 점수로 내 심사를 마무리한 적이 있다. 발표석의 쟁쟁한 전문가들 앞에서 무지한 비전문가가 심사위원의 명찰을 걸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설령 전문가가 심사위원이라 하더라도. 참가자가 공들여 만든 제안서를 꼼꼼하게 읽고 피티 심사를 할 시간이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무엇을 심사하는지도 모르고 현장에 도착, 짧은 준비 시간 후 바로 피티를 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젠가 입찰 발표자로 참여했을 때다. 사전에 파워포인트 상황을 점검하고 심사실을 나가면서 심사위원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00시에서 서울 돌아가려면 차 많이 막히니 빨리빨리 끝내지요.” 그것은 영락없이 하루벌이 알바생들의 멘트였다.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곳에서는 심사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직원에게 “어느 업체를 주목해서 볼까요?” 라고 묻기도 했다.


참여 회사에서 밤새 고민하고 준비한 노동의 완성물, 제안서를 앞에 놓고 (나를 포함해) 그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입찰 문서의 갑질 조항이다.


열 곳의 입찰 과업 지시서를 모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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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는 비용은 다 제안업체가 부담하고, 심지어 제안서 결과물 등의 저작권도 발주처가 갖는다.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야바위꾼 놀이를 흉내 내며, ‘하려면 하고 싫음 말고’ 식의 오만한 멘탈에다 도적 심보까지 더해진 이런 갑질, 그냥 “부끄럽다” 는 한마디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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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은 취소하면 손해배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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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은 취소해도 된다


낙찰자가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면 계약 파기 및 금전적 책임을 지라고 하면서도, 발주처가 어떤 사유로 행사를 못하게 되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이 후안무치함은 ‘쪽팔리다’라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계약을 위해 업체가 진행한 숙박업소 등에 대한 위약금은 온전히 업체가 다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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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비는 모든 연수가 끝나면 지불한다는 후불에다가 시설물 파손도 고의성이 없으면 (고의성이 없다고 주장하면) 을이 배상하고, 이견이 생기면 발주처의 해석에 따라야 한다. 교통사고, 식중독 사고도 모든 치료 경비를 을이 부담하는 것까지 아주 꼼꼼하게 을의 책임 사유를 ‘갑’의 입장에서만 적어대는 이 완벽함! ‘뻔뻔하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을 못 찾겠다.


참 후졌다. 정부기관 및 공공기관에서 입이 아프게 주장하는 <규제 개혁>, 도대체 뭘 개혁한다는 것일까? 요즘 사회적으로 번지고 있는 갑의 자세에 대한 비판적 여론 속에서도 기관들의 입찰 문서는 ‘법률적 근거에 의해’ 라는 수식어를 투구와 방패 삼아 갑의 모범을 꿋꿋이 시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서류 제출을 직접 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참여한 10곳 중 딱 한 군데만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걸 뭐 힘들게 직접 가지고 오시냐” 는 담당자의 말이 오히려 신기하게 들렸을 만큼 직접 제출이 관행이었다. 그 많은 서류를 다 챙겨서 대전으로, 대구로, 군산으로, 울산으로 지자체와 공공기관을 방문해야 했다. 그래놓고도 어느 곳에서는 10분이 늦는다고 거절당했고, 어느 곳에서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귀하의 회사 한 곳만 접수를 해서 유찰되었으며 서류는 반송되지 않습니다”라는 맥 빠진 문자를 받아야 했다.


제출 서류는 왜 그리 많은지 50페이지 제안서를 10부 복사하면 500장이다. 이걸 제본하고, 강사 자격증, 학력증명서, 사업 실적 증명서, 행사 계약서 등도 10부를 준비하면 여행용 트렁크에 한 가득이다. 정말 이것이 입찰에 참여하는 회사가, 스스로 '을'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감내해야만 하는 노동일까? 낙찰이 되면 다 보상 받을 수 있는 기회비용이라고 넘겨야 하는 것일까? 행여 이런 것을 행정적 편의주의가 낳은 사회적 비용의 낭비라고 해석하면 심성이 꼬이고 불온한 것일까.



4.


나는 내가 관련된 연수 분야 용역 입찰에 대한 부분만을 이야기했다.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내가 가타부타할 정보도 없고 그럴 주제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기사가 나와 내 회사에 어떤 부작용으로 돌아올지 나는 모른다. 다만, 누군가는 나와 내 직원들처럼 자기 노동을 허무하게 부정당하고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모든 타인의 노동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입찰의 형태라면 그 존중은 낙찰의 결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제안에서, 과정에서, 결과에서 모두 존중의 형태가 유지돼야 한다. 모 기관은, 2등으로 탈락한 우리 회사에 전화를 걸어 수고했다고 하며, 보완점을 이야기해줬다. 담당자의 말투에서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졌고, 나는 그 행동이 참 고마웠다. 어느 곳은 심사위원의 명단을 가리고 각 위원의 점수까지 등기로 보내줬다. 나는 그 투명한 행동이 미더웠다. 우리가 진보된 사회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타인의 수고에 대한 이런 작은 교양이 법률적 근거의 합법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를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투명성을 생명으로 하는 공개 입찰의 취지를 의심하지 않게 하는 자세라고도 생각한다.


확실히 하고 싶어서 사족이라도 단다면, 나는 입찰 발주처들과 담당자들이 비도덕적이거나 반윤리적이어서 입찰이 갑찰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라면 부도덕함이 아니라 부조리함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는 관습적 무감각일 것이다. '의도된 갑질' 이 아니라 '자각조차 없는 갑질'에 나는 더 절망했고, 또한 누군가는 계속 상처를 받을 것 같아 오지랖 넓게 속상했다.


이해할 수 있고 결과에 승복할 수 있음으로써 과정에 흘린 땀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개 입찰 제도를 만나고 싶은 것, 그 바램이 그리 어려운 것일까?








딴지 관광청장

뚜벅이 윤용인(ddubuk@nomad21.com)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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