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4. 금요일
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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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대단지 사건은 개발독재시대의 대표적인 참사다.
그러나 그 기억은 희미해졌고 제대로 아는 이들도 얼마 없다. 허나 이 사건은 왜 독재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는지 보여주며, 훗날 5.18 학살이 이뤄지는데 신호탄이 되기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살펴 보자.
1. 발단
1970년대 초 청계천 판자촌 풍경
경기도 광주 대단지는 본디 서울의 빈민가를 제거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편에서도 말했듯이 개발의 상징이자 신문물의 심장이 되어야 할 서울에 너저분하게 널린 빈민가는 큰 문제거리였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용산역 부근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지시를 당시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충실히 이행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 시장은 빈민촌 정리를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와우아파트라는 희대의 업적을 남긴 시민 아파트 건설과 서울 빈민 이주 계획이었다.
1967년 7월 18일 김 시장은 23만여 동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127만 명을 서울시 밖으로 이전시키며, 광주군에 5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10만 5천여 가구를 건설하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한다. 1969년부터 마장동, 청계천변, 용두동의 빈민 2만 명을 광주로 이전시켰고, 얼마 안 되서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상&하왕십리의 빈민까지 광주 대단지로 몰려들었다.
수 많은 빈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광주로 갔으나 광주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곳에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상업시설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약 15만명에서 2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허허벌판에서 천막을 치고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그곳에 거주했던 전성천 목사의 말에 의하면 굶어죽은 사람 시체 치우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고 했으니 그 참상이 눈 앞에 선할 지경이다.
이런 막장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계획을 입안한 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사람 50만 명을 대강 때려 넣어두면 알아서 서로 나눠먹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는데, 실제로 나눠먹기는 했다. 굶주림에 반쯤 맛이 가버린 부모가 갓난 애기를 삶았고 그 냄새에 이끌린 이웃들이 나눠먹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광주 대단지의 천막들
2. 분양권
이렇듯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여진 이들이 분양권을 포기하고 서울의 판자집 신세로 전락하는 일이 속출했다. 이곳에 대한 개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터라 건축 브로커들은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분양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개입으로 입주권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어떤 이는 입주권을 몇 십장씩 사들이기도 했다. 당연히 사기꾼 또한 몰려왔고, 위조 등의 사기사건과 철거관련 비리 등의 범죄들이 만연했었다.
이러한 개발 붐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절정에 달했다. 당시 차지철 후보의 공약인 ‘1백 개의 공장 유치로 실업자 구제’, ‘토지의 무상상여와 5년간의 세금 면제’ 등등의 공약으로 이 저주받은 땅이 노다지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입주권을 사기 위한 아귀다툼 속에서 7월 14일, 갑자기 정부와 서울시는 입주권의 거래를 금지한다. 그 후 전매계약자들은 매수계약을 체결해야한다며 8천원에서 1만 2천원을 일시불로 낼 것을 요구한다. 이는 원래 계약하기로 했던 금액의 40배에서 80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지 취득세로 1만원, 있지도 않은 주택에 대한 등기세로 1만원을 더 뜯어갔고, 보름 안에 건물을 올리지 않는다면 불하를 취소하기로 한다는 공고를 낸다. 결국 입주권을 산 이들은 스스로 지옥으로 가는 급행 티켓을 끊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미 좌절해 있던, 입주권을 산 이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3. 봉기
앞서 말한 전성천 목사는 단지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에 각 단지의 반별 대표자들은 자신에게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돌렸고, 이렇게 모인 이들은 1971년 7월 17일 ‘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해’라는 조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7월 19일에 유지대회를 열었는데 무려 2,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1만 5천명의 서명을 받아 요구사항을 작성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대지불하가격 인하(평당 1500원 이하)
2. 불하가격 상후 10년간 연부 상환
3. 제 세금 5년간 면제
4. 구호대책과 취로사업 보장
경기도의 두 출장소는 이들의 요구사항을 깔끔하게 씹어버렸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당일 성남 출장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새로운 요구사항을 발표한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대지를 무상으로 해줄 것
2. 세금을 면제시켜 줄 것
3. 시급한 민생고를 서울시에서 해결해 줄 것
8월 9일, 성남 출장소장은 삐라가 난립하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서울시 주택관리관에게 '긴급상황 발생, 현지에서 해결 불가능' 이라는 도움 요청을 한다. 이에 주택관리관은 최종환 부시장을 대동하여 황급히 광주 대단지로 향하는데, 이들은 300명의 주민들에게 둘러쌓인 채로 협상을 시작하나 결국 결렬된다. 다음날 11시에 양택식 서울 시장이 직접 와서 다시 교섭하겠다는 내용만 타결한 채 협상은 끝났고, 투쟁위는 시장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며 주민들에게 협상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여차하면 실력행사를 할 것도 각오한 채 말이다.
8월 10일, 오전 9시부터 거대한 민중들이 양택식 서울 시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빗길에 차가 막힌 나머지 양택식 시장은 11시가 되어도 도착할 수 없었고, 감정이 격양될대로 격양된 민중 속에서 한 외침이 터져나온다.
“서울 시장은 우리를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
서서히 술렁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11시 45분이 되자 이렇게 외친다.
“또 속았다. 내려가자”
궐기대회는 폭동으로 발전하고 "허울 좋은 선전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 "살인적인 불하가격 반대" 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출장소로 몰려가서 출장소를 아작을 내버린다.
당시 시위대에는 70대 노인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식칼과 곡괭이,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참가한 군중 손에는 식칼, 곡괭이, 몽둥이 등이 쥐어져 있었고
눈망울은 먹이를 찾아 날뛰는 야수처럼 살기가 서려 있었다.”
(박기정, 1971)
단지의 골목 곳곳에는 '우리는 더 이상 속을 수 없다', '대책을 세워 달라' 등의 벽보가 붙어있었고, 군중은 "죽여라, 밟아버려라."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출장소에서 근방의 서울시 파견 광주단지 사업소로 몰려가서 기물들을 작살내놓고 방화를 시도했으나 비 때문에 사업소는 불타는 꼴을 면했다.
그리고 성난 군중은 지나가는 차들을 닥치는 대로 탈취하여 고함을 지르며 단지 거리를 누비고 다녔고, 일부는 서울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서, 지나가는 택시들을 박살내며 “우리는 몇 끼니를 걸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팔자 좋게 택시만 타느냐”, “죽어도 같이 죽자”, “왜 도망가려 하느냐”고 욕설을 퍼부으며 승객들을 강제로 하차시켰다.
한 시민은 경찰관에게 맞아서 머리가 터졌다며 자신을 때린 경찰관을 죽여버리겠다며 날뛰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경찰들이 나타나자 시위대는 우리들에게 밥 줄 생각은 없고, 몽둥이로 막으려 한다면서 경찰에게 맞섰다. 이런 사태속에서 지나가던 참외트럭이 넘어져 참외가 길바닥에 구르자 굶주림에 미쳐버린 군중들은 순식간에 한 트럭 분량의 참외를 다 먹어치워버렸는데, 그 야수적인 실상은 소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저것 좀 보라고 청년이 갑자기 소리칩니다. 그렇잖아도 난 이미 보고 있었는데요. 빗속에서 사람들이 경찰하고 한참 대결하는 중이었죠.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서고 있었어요. 청년은 그것이 마치 자기 조홧속으로 그려진 그림이나 되는 것같이 기고만장입디다만, 솔직히 얘기해서 난 비에 젖은 사람들이 똑같이 비에 젖은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그 장면에 그렇게 감동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으니까요. 이 친구가 여기까지 끌고 와서 끝내 날 어쩔 작정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장면이 휘까닥 바뀌져 버립니다.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로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 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니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니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깜짝할 새 동이나 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먹는 거예요. 먹는 그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 못 되었어요. 다만 그런 속에서도 그걸 다투어 줏어먹도록 밑에서 떠받치는 그 무엇이 그저 무시무시하게 절실할 뿐이었죠.
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팍 부딪쳐 옵디다. 나체를 확인한 이상 그 사람들하곤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해 나온 근거가 별안간 흐려지는 기분이 듭니다. 내가 맑은 정신으로 나를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중
오후 2시가 되자 성난 군중은 광주 경찰서 성남지서를 다 때려부수고 경찰차를 불태워버렸다. 당시 광주 대단지내에 지나는 버스는 6대에 버스노선도 제대로 없는 지경이었지만 소요 동안 불탄 차만 22대에 달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민란은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늦게나마 도착한 양택식 시장이 투쟁위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락하겠다는 발표가 있고 나서야 주민들은 해산하였다. 양 시장은 추가로 조치를 취하기로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매 입주자들의 대지가격도 원 철거 입주자와 같이 취급한다.
2) 주민 복지를 위하여 구호 양곡을 방출하고 자조 근로 공사를 아울러 실시한다.
3) 경기도 당국과 협의하여 취득세 부과는 보류토록 하겠으며
그 밖의 세금도 가급적 면제토록 중앙정부와 협의하겠다.
4) 주민들은 당국과 협조하여 계속 지역발전에 노력해 줄 것을 바란다.
이 민란속에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당했고, 민란의 주동자로 22명이 처벌당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 탄생한 도시가 바로 성남시였다.
4. 총평
이렇듯이 격렬하기 짝이 없는 역사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참고로 필자도 학창시절에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를 배웠으나 이 소설의 배경이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게 변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정책입안자들과 대통령은 이러한 소요사태를 '사회 기강의 해이와 윤리적인 타락에서 오는 병폐'라고 규정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시위대를 더욱 더 잔학하게 탄압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저런 시각에서 벗어났는가? 그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PS 1.
이 글은 김동춘《공간과 사회》 21 (4): 5-33의 내용을 사용하였음을 명시한다.
PS 2.
재난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그 이후에도 씨랜드 화재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등등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적지 않겠다. 너무 많기도 할뿐더러 상대적으로 최근의 이야기이기에 찾아보는데에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에 적지 않겠다.
글을 쓰는 내내 우리 사회는 만성적인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고 행태가 이전의 사고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잊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가슴 아픈 일이라면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당당히 트라우마와 맞서서 그 트라우마를 부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다음부터는 독재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첫 타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포르투갈의 살라자르에 대한 이야기다. 참고로 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너무나 많기에 다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유럽지방과 아시아지방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생각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박정희 또한 나온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자.
돼끼
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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