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4. 금요일
Anyone
1988년 국민학교(미안하다. 초등학교 다녀본 적이 없다.) 1학년이었던 한 꼬마의 눈이 머문 작은 TV 화면. 음악이나 가사를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었지만, 그 안에 보인 어떤 형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날에는 노래를 부르던 그 형아의 이름이 무언지도 알지 못했고 그 이름이 꼬마의 인생에 얼마나 깊이 들어올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알게 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요.
내 보물중 하나인 무한궤도 LP(1989년산)
신해철,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던 잘생긴(씨바 당시엔 꽃미남이었다구) 형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무한궤도 앨범과 솔로 앨범 1, 2집을 연달아 내며 시대의 아이돌(믿기 힘들겠지만 진짜 쩔었다구)로 떠올랐던 기억이 나네요.
신해철과 넥스트-97년 넥스트 해체에 관한 기사에도 '신해철과 넥스트'라는 표현이 있었다 씨부엉-를 결성하고 음반을 내며 대마초도 피고 감옥도 가고 아이돌이 아닌 음악인으로서 비상하게 됩니다. 1집 수록곡인 '도시인'을 전자댄스음악 취급했던 음악 기사를 보고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훗날 신해철 본인도 '도시인'을 댄스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2집 '날아라 병아리'때에는 "얄리를 죽인 게 신해철이라메?"라고 깐죽대던 친구와 싸웠던 기억도 있군요.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음악도시'를 미친 듯이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그거 듣겠다고 섬세한 손길로 채널을 맞췄더라지요. 껠껠껠. 고스트스테이션도 열심히 들었지만 어쩐지 '마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서 그를 불러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냥 해철이 형이었지요.
생각해보면 어이없게도 처음으로 넥스트의 콘서트를 갔던게 97년 12월 31일의 넥스트 해체 콘서트. 뭐 그것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넥스트 공식 팬클럽에 가입하기도 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공식홈페이지랍시고 잠시 존재했던 ALCYON에서 활발히 술을 마시고 다니기도 하고 팬클럽에서 사랑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콘서트와 행사에 따라다니기도 하고, 따라다니다가 어느 날은 경인방송국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그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다 서로 웃기도 하고. 그날 그의 자동차인 링컨 뒷자리에 스페인 독립사에 관한 책이 있는 것을 보고 나중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다른 멤버의 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9사단 훈련소에서 받은 친구의 편지에 적힌 그의 결혼 소식에 '오오 드디어!' 하며 마음속으로 축하를 보냈던 기억도 납니다.
그와 관련된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렇게 성장한 결과 그 꼬마는 300에 글을 싸지르는 "이런 잉여가 되었습니다!". 형광등 100개는 비교도 안 되게 빛나던 형아는 배 나온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구요.
그런데 그가 매우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약간 아픈 정도면 관리 못 한다고 화라도 내겠는데... 심각한 상황이라니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걱정에 잠도 오질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그의 이름을 검색하며 뭔가 나아진 점이 없나 확인해보고 있습니다.
내 삶의 또 하나의 영웅을 맘속에 묻기에 아직은 이르겠지요.
형.
어여 깨어나고, 어여 건강해집시다. '50년 후의 내 모습'에 대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잖아요.
힘내요. 형.
Anyone
편집 :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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