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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8. 화요일

햄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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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가게의 포장지처럼 예쁘게 꾸민 미소만으로 모두 반할 거라 생각해도 그건 단지 착각일 뿐이야

 

신해철 1, <안녕>

 



내가 처음 들은 신해철의 노래였다. 1990, 나는 국민학생이었다. 7:3 가르마에 안경을 쓴 날카로운 눈을 숨긴 미청년. 그는 내게 잘생긴 대학생 형의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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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촌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그땐 존나 멋있었어...

 


<안녕>은 당시 꽤나 인기였던 곡이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몇 주간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간주 부분에 들어가는 영어 랩이 무척이나 신기했고 멋있었다. 그건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를 부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부모님을 졸라서 신해철의 1집을 샀다. 생애 첫 카세트테이프였다. 고등학생이던 사촌형에게는 <안녕>의 영어 랩 가사를 적어달라고 졸랐다. 형은 친절하게도 영어가사와 함께 우리말 독음까지 적어주었고, 나는 그걸 붙들고 달달 외우며 하루 종일 읊고 다니다시피 했다.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 신화의 전진이 오디션에서 불렀다는 바로 그 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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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모든 노래를 흥얼댈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이듬해 발매된 그의 2집부터는 왠지 그와 거리감을 느꼈다. 국민학생의 신분으로 이해하기에 그의 음악세계는 너무 빠르고 멀리 움직이고 있었던 것일까.

 

<재즈 카페><50년 후의 내 모습>같은 노래들은 지금 생각해봐도 국민학생이 공감하며 흥얼거리기엔 꽤나 큰 거리감이 있는 가사였다.

 


빨간 립스틱 하얀 담배연기 테이블 위엔 보석 색깔 칵테일

촛불 사이로 울리는 내 피아노 밤이 깊어도 많은 사람들

토론하는 남자 술에 취한 여자

모두가 깊이 숨겨둔 마음을 못 본 체하며 목소리만 높여서 얘기 하네

 

신해철 2, <재즈 카페>

 


성인이 된 지금에야 카페도 술집도 다녀보았기에 저 가사에 담긴 분위기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만, 애초에 카페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재즈는 더욱 모르는 꼬맹이의 머리로는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TV의 가요프로그램에 나와 1위를 하거나, 통기타를 메고 고개를 까딱이며 CF를 찍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낯설고 멀어진 느낌이 들었던 게 가장 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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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해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 TV를 휩쓸었고, 나 역시 그들의 형광색 모자와 반바지, 회오리춤에 열광하게 되면서 신해철이라는 가수는 나와 큰 인연이 없는 이름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의 노래에 다시 빠지게 된 건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한 이후였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아이돌 댄스 음악이 줄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 욕구를 힙합 음악과 록에서 찾아 헤맸다.

 

그는 잘 생긴 대학생에서 긴 머리를 풀어헤치는 넥스트란 밴드의 록커가 돼있었다. 강렬하고 직설적인 사회비판, 심오하고 애절하기까지 한 자아의 성찰. 넥스트의 음악은 사춘기를 채 벗어나지 못하고 인생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따위의 질문을 내던지던 내게 일종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다.

 


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친구들과 경쟁하며 걷는다

각본대로 짜여있는 뻔한 인생의 결론 향해

생각 없이 발걸음만 옮긴다

 

세상은 날 길들이려 하네

이제는 묻는다 왜 왜 왜

 

Fight! Be free!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넥스트 2, <껍질의 파괴>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와 넥스트의 음악을 번갈아 들으며 그래 씨팔 길들여지지 않겠어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결국 착실하게 입시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는 대한민국 평균의 테크트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남들이랑 달리 그래도 난 저런 생각이라도 했어하며 자위했을 뿐.

 

대학생이 된 무렵엔 첫사랑에 실패했다. 수년간 짝사랑해오던 소꿉친구였다. 나는 뒤늦게야 넥스트 1집에 수록된 <인형의 기사>라는 노래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고, 선배 동기들과 함께한 술자리-노래방에서 틈만 나면 청승맞게 그 노래를 불러 제꼈다.

 


이제는 너는 아름다운 여인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해

 

언제나 그 말은 하지 못했지

오래 전부터 사랑해 왔다고

 

넥스트 1, <인형의 기사>

 


회상하면 참 추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내 청춘의 한 기억에 신해철의 노래가 있었구나 하며 새삼 쓴 웃음이 지어진다.

 

대학생 하면 또 <그대에게>아니겠는가. 전 국민의 응원가. 내가 신해철이라는 이름을 알기도 전에 무한궤도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그대에게>는 전국에서 대학생이라면 아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리라. 별 대단한 시합도 아닌, 과 대항 축구경기 따위를 할 때도 응원가로 <그대에게>만 부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운 좋게 그가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 와서 노래하는 것을 볼 기회도, 또 강연을 하는 것을 들을 기회도 있었다. 가까이서 직접 본 그는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키였지만, 여전히 나는 그가 거대한 사람으로 보였다.

 

시간이 흘러 대학도 졸업하고, 나 역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사는 방식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서, 그때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던 그의 노래들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넥스트 5집도, 그가 솔로로 발표한 재즈 앨범도, 예전만큼 내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아마도 무의식중에 내가 변했다기보다는 그의 음악이 변했음을 애써 탓했던 것 같다.

 


"한 물 갔어. 옛날이 나았어."

 


흔히 말하듯이, 나도 내 청춘의 영웅에게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 던졌다.

 

왜 그랬을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음악을 기대하고 있었다. 일련의 <응답하라 199X> 같은 드라마로 90년대가 재조명되고, 그때 그 시절의 뮤지션들이 다시금 의기투합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내심 그가 윤상과 함께 했던 노땐스 2집 같은 프로젝트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서태지가 9집을 내놓고 컴백하기 전, 신해철은 이승환, 서태지와 함께 합동공연을 추진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서태지 역시 독불장군처럼 활동했던 이전과는 달리 그러한 화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심지어 그의 앨범에는 <90s Icon>이라는 노래가 실렸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노래를 듣자마자 이건 신해철이 불러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단순히 가사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나 멜로디가 마치 서태지가 <소격동>을 아이유에게 부르게 했듯 신해철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 과장을 좀 보태서 신해철이 작곡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 가는 변명들

세월이 흘러가도 망설임 따위뿐인걸

내 기타에 스미던 둔해진 내 감성

하지만 난 아직도 멈추지 못할 뿐

 

한물간 90s Icon

물러갈 마지막 기회가 언제일까 망설이네

질퍽한 망상 끝을 낼까

 

(중략)

 

눈감은 순간 흩어지는

바람에 밀려 버려지는

당신의 삶과 같이한

너와 나의 쓸쓸한 이야기

 

해답이 없는 고민

하지만 밤이 온다면

나의 별도 잔잔히 빛나겠죠

 

서태지 9, <90s Icon>

 


서태지가, 신해철이, 이승환이 다시 대중의 화두에 오르고 90년대가 비록 추억이지만 진행형으로 거론될 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90년대 인간이구나느끼면서도 괜스레 뿌듯하고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불러줄 <90s Icon>, 그리고 서태지 이승환 김종서와의 합동공연을 기대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올랐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제2, 어쩌면 제3막을 열어젖힐 그들의 행보를 여태까지 그래왔듯, 팬이라는 위치에서 마냥 서서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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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어제 저녁 그의 부고를 접하고 내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은 추잡스럽게도 욕설이었다. 씨발. 이렇겐 아니잖아. 솔직히 그렇잖아. 슬프기 이전에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사람들은 빠르게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명복을 빈다는 말과 함께 그의 노래 가사에 빗대어 그를 추모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했다. 씨발, 너무 빠르잖아. 어떻게 벌써 인정할 수 있어? 어떻게 부고가 나가고 한 시간도 안 돼서 <날아라 병아리>를 인용하며 그를 보낼 수 있나. 누군가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저 내 감정이 그랬을 뿐이다.

 

어젯밤 나는 작업실의 노트북 앞에 앉아서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의 노래도 듣지 않았다.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감상에 휩싸여서 그의 죽음을 빠르게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추모 기사를 써야 하나? 꾸물 팀장에게 연락했다. 뭐라도 한 번 써보겠다고 말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한참을 앉아있었지만 추모를 할 순 없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르겠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추모의 글을 쓰더라. 부럽다. 신해철을 형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난 하물며 그를 마왕이라고 부른 적도 없다. 오글거리기도 했고, 딱히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난 고스트 스테이션도 듣지 않았고, <안녕 프란체스카>도 시청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난 신해철이란 가수의 팬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것뿐이다.

 

내가 처음 좋아하게 된 그의 노래가 아이러니하게도 <안녕>이다. 지금 난 그에게 안녕이란 말을 하지 못하겠다. 언젠가는 할 수 있을까. 안녕이란 말 대신, 그가 나보다 아주 약간 먼저, ‘인생이라는 이름의 꿈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고 싶다.



 


꿈결을 가듯 걸어온 세월

시간은 점점 빨리 가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는 걸까

내가 슬픈 꿈을 깨어나 그댈 울며 찾을 때

그댄 어느 곳에 있나요

내가 인생이란 이름의 꿈에서 깨어날 때

누가 나의 곁에 있나요

 

신해철 1, <인생이란 이름의 꿈>

 


언젠가 나 역시 꿈에서 깨어날 때, 먼발치에서나마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그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꿈을 깬 세상에서 그가 진짜로 ‘Reboot My Self’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딱히 충성도 높지도 않은 팬인 나 따위를 기다려달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나는 먼 훗날 언젠가, 당신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그때에는 형이라고 한 번 불러 봐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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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촤

트위터 : @hamchwa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