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04.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
4화까지는 월남전에서의 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했다. 5화부터는 월남전의 일반적인 비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월남전 전투는 장교 교육과정 내 전술학 교과서에 수록할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역사적으로는 부끄러운 전쟁, 더욱이 지고 온 전쟁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전투에 참가한 개인들의 삶에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베트콩도 양민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이미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1971년 6월13일 뉴욕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란 기밀서류를 입수해 기사화함으로써 미국내에서 조차 '잘못된 전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 서류에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구실이었던 '통킹만 사건'이 북베트남의 도발이 아니라 미국의 조작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해상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를 선제공격해 미군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는 '데소토'라는 정보수집 함정이었으며,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함정을 공격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히피 머리에 나팔바지를 입은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반전' 데모를 벌였다. 불행히도 당시 한국안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 탓에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없어 알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월남전 다큐를 만들기 위해서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 생전에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었고 2 대 사령관인 이세호 장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비서실장이었던 H 장군 (당시 대령)과도 오랫 동안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을 통해서 일개 병사가 접할 수없는 고급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월남전이 이길 수없는 전쟁인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 장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수행했듯이 비극적이지만 지는 전쟁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군인의 역할인 것이다. 더 치사한 것은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철수를 하면서도 지휘관의 공명심 때문에 애꿎게 부하 장병들이 수 없이 죽어나갔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맹호부대는 철수를 앞 둔 1972년 4 월 안캐 패스 작전 때 지휘관들의 공명심 때문에 단 3일 동안 75명이 전사했고, 104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쟁터에서 말단 사병은 자기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오직 주어진 명령에 따르기 때문이다. 훈련에서부터 실전까지 그저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을 뿐이다.
지금은 춘천에서 터널이 뚫려 단숨에 통과 할 수 있지만 당시 파월 교육대를 가려면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가 아찔한 배후령 고개의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오음리로 들어가야했다. 교육대에서부터 나는 전혀 모르는 길을 가야했다. 월남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주변에는 둥근 철조망이 5중으로 설치돼 있고, 밖에서 기어 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밤새도록 전등불이 촘촘히 밝힌 기지로 갔다. 작전을 나가서 잔뜩 긴장한채 1미터 앞도 알 수없는 정글 속을 한 발 한 발 옮겨야 했던 길도 내가 모르는 길이었다.
나무 뒤에, 바위틈에, 숲 속에, 나무 위에,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따다닥 쏘지나 않을까? 보이지 않는 부비트랩 선이 나무 사이에 연결돼 있지는 않을까? 그 무섭다는 독창이 바늘처럼 솟아있는 함정이 위장돼 있지나 않을까? 몰라서 불안한 것뿐이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작전지에 가서는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찰나 같은 순간 동안 총질을 하고서 헬기를 기다리다 다시 올라타서 기지로 돌아왔다. 월남전은 전선도 없고, 누가 적인지 우리 편인지도 알 수 없고, 진군도 없고 승리도 없는 전쟁이었다.
'한국군의 월남 참전 민간인 학살'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와서 참전 군인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라 안의 ‘군 의문사 사건' 조차도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데 50년 가까운 세월 전에 타국에서 벌어진 전쟁통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실을 한국군 측에서 인정하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부대와 작전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국인 작전 지역에 민간인이 들어가 살 수도 없거니와 영농지역이 있으면 주간에 농사일을 하기 위해서 한국군의 검문 검색을 받는다. 물론 그런 지역 민간인들 대부분이 항상 베트콩과 연관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비록 그렇더라도 한국군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군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는 전술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지만 한국군 편에서 보면 양민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한국군은 양민학살을 했다는 오해를 받는 것은 베트콩과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었던 전쟁의 성격 때문이다.
대단히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요즘 벌어지고 있다. 대다수의 선량한 월남참전 할배들 가운데 가끔 시도 때도 없이 여기 저기 출몰하는 개스통 할배들이 있다. 일반국민들의 눈으로는 선량한 할배들 가운데 섞여 있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일부 고엽제 피해자 난동꾼들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월남참전 할배 하면 무조건 개스통 할배라는 오해를 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40 여 년전 월남의 현실은 어떠했던가?
1968년 7월15일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 김종수 소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예정된 매복지점이 아닌(국방부 보고서)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자정이 넘은 새벽 1시경, 그곳을 통과하는 베트남인 7명을 검거, 체포했다.
이 와중에 갑자기 한 명이 도주했다. 김 소위는 즉각 소대원을 시켜 추격, 사살하게 했다. 나머지 6 명을 끌고 이동하는 중에 이번에는 두 명이 도망쳤다. 그 둘은 그만 놓쳐버렸다. 나머지 4명도 거세게 반항하며 도망치려 하자 다급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사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 다음날 도주한 두 명이 그 지역 군수에게 사건 내용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보고했다. 즉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동에 편승한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부대 앞에 몰려와 대대적으로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낭패가 된 사령부 지휘부는 부랴부랴 사건 수습책 마련에 부심하게 됐다. 김종수 소위는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15 년형을 살았으니 그는 주월한국군 참전 역사 가운데 최악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1970년 11월 27일, 백마 29연대 2중대 3소대장이 매복을 나갔다가 민간인 5명을 베트콩으로 오인하여 오인사격을 하고 귀를 잘라다 전과보고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마침 갓 부임한 전두환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보고를 하고 이세호 사령관은 고민 끝에 대통령께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로 쓴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이세호 장군,
12월 21일자 귀하의 편지는 오늘 23일 접수하여 내용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요즘 월남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국군에 의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합참의 한무협 장군에게도 상세한 보고를 이미 받고 있습니다.
소녀살해사건은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작전상 만부득이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백마부대 29연대에서 발생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각급 지휘관은 물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게끔 각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과를 조작 보고하기 위하여 양민을 살해하고 하물며 죽은 자의 귀를 절단하는 비인도적 행위는 국군의 명예와 지금까지 수많은 전우들의 피의 대가로서 쌓아올린 국군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뜨리는 (무효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군이 월남에 간 기본 목적과 정신을 다시 한 번 전 장병이 상기하고 재인식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세호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는 박정희 전 태통령 (1970년)
나는 귀국 해서 명예롭지 못한 일로 2 주간 국방부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국방부 호텔은 법무부 호텔과 존재 목적이 달라서 숙박 시설이 아니라 교육시설이다. 즉 병신이 되지 않는 선에서 수감자에게 단기간에 최대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래야 영창을 나간 다음 영창에 대한 좋은(?) 소문이 많이 나서 다른 병사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 하면 그 방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지내야 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도 빽이 통해서 군대 나이로는 경로당에 갈 나이에 입대했던 나는 고참 헌병인 후배 덕분에 틈틈이 영창에서 나와 창고에서 월남전에서 기록했던 헌병대 문서를 정리하는 사역을 했었다. 문서를 정리하다가 한국군이 월남에 있는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 기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내 임무는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소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대부분이 강간 사건이었고 살인 피해 배상은 물소 두 마리인가 세 마리 값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월남에서는 물소가 우리나라 시골의 황소만큼 값이 나가기는 했지만 사람값이 그렇게 저렴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병력이 이동하다가 잠깐 쉬곤했던 국도변에 공중변소처럼 담요로 칸막이를 쳐놓고 남편은 손님을 부르고 아내는 손님을 받는 매춘 업소도 있었다. 그러면 병사들이 군화를 신은 채 바지만 내리고 일을 보는 것이다. 전쟁터란 인간이 보통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 가운데 561명의 장사병(將士兵)이 범죄에 연루되어 전범(戰犯)으로 구속, 처벌되었다. 범죄 내용은 항명(抗命), 명령위반, 상관구타 및 살해, 무단이탈, 탈영 등 주로 하극상이 최다로 우리 한국군 자체 내부의 문제에 연류 된 사건이어서 현지 베트남인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베트남인들과 연계된 사건가운데 소위 민간인 즉 양민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숫자는 우리 군(軍) 내부의 기강해이로 발생한 사건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는 ‘부수적 피해’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 Collateral Damage는 군사용어가 있다.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은 전쟁 중 일어나는 민간인의 죽음과 사회 기관 시설 파괴를 ‘부수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맺힐 일이다. 그러나 솔직히 생사가 한 순간에 갈라지는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에게는 월남인들의 안전은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밥을 먹다가 길을 가다가 아니면 휴식 중에 앉아있는 돌멩이에도 부비트랩이 매설되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을 해야 할 때이다. 그것마저 부인한다면 일본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 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하여 베트남 정부는 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우리가 이긴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 없고, 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92년 베트남과 수교 당시 과거사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데는 승전국으로써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이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인 탓도 있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제공과 훈련 등을 돕긴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 적은 드물었다. 거기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남베트남 공산당인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 당했다. 북베트남에다가 죽어라고 폭격을 한 장본인도 미국군이지 한국군이 아니기도 하고. 따라서 불필요한 마찰 없이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베트남 입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면 피곤할 수 있는 게, 자기들 역시 구린 구석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 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라인지 집단인지 깽단인지 정체를 모를 IS라는 것이 나타나서 세계를 공포를 몰아넣는 깽판을 치고 있는 것을 보라!
베트콩 역시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월맹은 파리 평화 회담 이후 미군이 철수하자 남베트남을 기습남침해 점령하는것으로 전쟁을 끝내버렸다. 전쟁은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거지만 할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이대용 공사같은 사람을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붙잡아서 몇 년이나 투옥하고 북한으로 보내려고 공작하기도 했다. 즉 피장 파장인 셈이다.
이대용 전 베트남 공사(왼쪽)와 즈엉 징 특주한 베트남 대사 (2002년)
땡 잡는 전쟁
남의 돈으로 치루는 전쟁이다 보니 병력과 물자를 아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물자는 물론이고 월급을 미군한테서 받다 보니 인원도 채울 대로 채워졌다. 그래서 필요 없는 인원도 파병을 해서 머리 수를 꽉 꽉 채웠다.
위로는 소장 사단장 밑에 행정, 작전 부사단장도 각기 준장이어서 사단에 별이 3이나 되었고(덕분에 나는 행정 부사단장이 탁구 칠 때 공을 열심히 주워야 했다) 아래로는 사단 본부에 인원이 2 명밖에 없는 참모부에도 상사 급의 선임하사가 있었다. 내가 생각할 때 제일 어색한 일은 한국에서는 연대급에서도 제일 할 일이 없는(파월 전에 연대 정훈과에 있어 본 내 경험으로) 정훈장교가 대대급까지 배치되었던 일이었다. 그것도 한국처럼 대대 병력이 한 곳에 주둔하지 않고 중대가 몇 Km 씩 떨어져 있고 헬기로나 이동이 가능해서 일반 병사들을 만날 수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그런 사정이니 정훈장교가 할 일이 없었고, 실제로 나중에 내가 만난 대대 정훈장교 출신에 의하면 파월 기간 1년 내내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기가 너무 고되었다고 했다.
나는 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산처럼 쌓여 있는 군수물자들을 보고 미국의 군수물자 조달 능력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느 책에서 보니 한국전쟁 당시 소모한 총알 대비 죽은 병사의 숫자를 보면 병사 한 명당 총알 한 가마니 정도를 소모한 셈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월남전에서는 베트콩 한 명 사살 하는데 한 트럭분의 총알은 소모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생겨난 새로운 군사용어가 ‘초토화 작전’이었다면 베트남전에서는 ‘융단폭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융단을 깔듯이 폭격을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상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낮았다. 위험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융단폭격을 한 것은 분명 고의적인 학살인 것이다.
미국이 월남에서 1965년부터 사용한 폭탄 양은 제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총 폭탄 양을 합한 것의 1.5배에 달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7,200억 달러(당시 한국의 1년 예산은 10억 달러 정도) 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뿌려댔다.
월남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남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 전쟁배상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베트남은 거인 미국을 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즉 미국의 자존심을 마구 구긴 대가로 이때부터 베트남은 27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경제적 보복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한 미국 역시 1971년 달러를 평가절하하고 그때까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태환 중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국제통화체계가 크게 동요하고 국제 금융 혼란이 닥쳤으며,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월남전의 피해는 월남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이웃에 있는 캄보디아에게도 혹독했다. 우리가 흔히 '킬링필드'로 알고있는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은 69 년~73년간 벌어진 미국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제 1 학살과 크메르 루주 집권기간인 75년~79년까지 벌어진 제 2학살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제로 한국국방연구원의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에는 캄보디아 땅에 단지 베트콩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4 년간 미군의 폭격으로인한 사망자가 60 만 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자신이 불리할 때면 미국의 학살책임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미국을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캄보디아 폭격을 거부하다 군사법정에 기소됐던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은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라고 증언을 한 바 있다.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 만 9129t 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 만 t의 3 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 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은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 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출처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 쓴 '킬링필드의 진실')
클러스트 밤
궁핍한 처지에서 정신력 하나로 버틴 베트콩 쪽에서는 힘든 전쟁이었겠지만 미군 쪽에서는 남아도는 전쟁 물자를 때려 붓는 전쟁이었고 그 편에 붙었던 한국군은 덕분에 호강 할 수 있었다. 모든 무기와 보급품을 미국에서 지원 받았었기 때문에 고국의 가난한 군대 사정과는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물건이 남아돌아 낭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능한 한 하나라도 더 빼돌려서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애국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월남에서 수송 업무를 맡고 있었던 한진에서는 대규모 작전이 없어 수송물동량이 줄어들자 수송능력이 남아돈다며 물동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을 주월 사령관에게 부탁했었다. 그런데 사령관이 지시한 방법이란 것이 기가 막혔다. 전방부대에 야간 요란사격을 최대로 많이 하라는 지시를 내려 포탄의 수송량과 탄피의 반송량을 증가시켜 수송물동량을 증가시켰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미군과 수송용역을 맡은 한진이 더 많은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포탄을 많이 쏘아 없애는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이 귀국할 때 사방 1m 되는 나무상자에 자기가 사용하던 사물이나 구입한 물품을 담아 갈 수 있는 귀국 Box을 가지고 들어왔다. 월남에서 보내온 귀국박스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 이전에 한국인들이 단체로 외국의 문물과 대중소비문화를 받아들인 예로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병들은 월급이 적고 PX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품도 한정되다 보니 사실상 자기에게 할당된 Box에 물건을 채워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몫의 박스를 월급을 많이 받는 장교나 하사관들에게 주기도 하고 수단 좋은 사병들은 휴대식량으로 나오는 C-Ration이나 하다못해 한국에 가서 고물로 팔 수 있는 신주로 된 포탄의 탄피를 넣어 오기도 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지 물건에 욕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소수의 결벽증환자들을 제외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모든 군인들은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하나라도 더 챙겨가려는 정신무장 하나는 투철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베트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말단 소총중대의 경우에는 중대장이라도 돈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사병들이 귀국 박스에 담아 올 수 있는 건 탄피와 맥주 캔뿐이었다. 그러나 적과 싸우러 다니는 일반사병의 경우에는 탄피를 줍거나 만들 시간도 없었으며 탄피 모은다고 할 일없이 실탄사격을 할 수도 없었다. 손으로 실탄을 분해해서 화약을 쏟아버리고 탄피를 모으기도 했으나 뇌관을 처리 못해 귀국선이 항해할 때 파도에 흔들려 귀국 박스 속의 탄피 뇌관이 터지는 일이 생기곤 해서 나중에는 탄피를 귀국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탄피 말고 일반 병사들이 모을 수 있는 건 알루미늄 맥주 캔이었다. 병사들은 부대내외 심지어 그 나라 1번 국도변에 도로정찰을 나가서도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맥주 캔을 줍기도 했었으니 본질적으로 보면 요즘 독거노인들이 폐박스나 헌 병을 주워 모으는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것은 노인들이 폐품 줍는 것은 개인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전쟁하러 온 군인들이 폐품을 줍는 것은 나라의 가난 때문이었다.
PS. 지난 호 말미에 독구 기자가 편집장에게 슬며시 내년도 딴지 MT를 시드니에서 하면 어떠냐 하는 베트콩 스타일의 제안을 했다. 만일에 그런 봄날 따듯한 양지 볕에 앉아서 졸고 있는 개가 꾸는 꿈 같은 제안이 현실화 된다면 시드니의 딴지 독자들의 힘을 긁어 모아 월남에서 미군이 한국군에게 보급해주던 것만큼은 못해주어도 월맹이 베트콩에게 보급해 주는 수준 정도는 할 터이니 딴지 수뇌부는 작전 계획을 세워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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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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