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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1. 화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끔 하는 쟁 이야기 랑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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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얘기는 그야말로 '사람들 다 아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11월의 찬 바람 맞으며 오들오들 떨다 들어온 오늘 같은 날 해 봤으면 싶어서.

2007년 8월 경향신문과 음악전문 웹진 가슴네트워크(이하 '웹진')는 53명의 심사위원단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발표한다. 물론 음악의 세계를 랭킹으로 구분할 수는 없고 사람에 따라 거기에 들어간 음반에 야유를 보낼 수도 있고 못 들어간 음반을 들고 항의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음악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서는 그 가치를 논할 깜냥은 되지 않고 그 리스트를 훑어 보는 것만으로 황홀하다. 이 100대 명반을 묶어 판매하는 상품이 있다면 카드를 만지작 거릴 것 같아.

그 랭킹 1위는 들국화의 첫 음반 <들국화>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세계로 가는 기차'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등 곡 하나하나가 레전드가 된 음반이고 "한국 대중가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자 "한국 대중음악을 들국화 이전과 들국화 이후로 나눈" 명반이었지. 이 뒤를 이어 2위를 마크한 음반은 "발라드를 이 음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극찬의 대상이지. 바로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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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에 실린 감사의 인사는 세 사람과 기타 등등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창작 과정의 산고를 지켜봐 준 서울 스튜디오 최세영. 그리고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도움을 준 조원익 그리고 '반주를 도와주신' 김애란이 세 명이지. 여기서 우리는 김애란이라는 이름을 주목해 보자. 그녀는 바이올린 전공의 음대생이었는데 플롯도 잘 불었어. 이 <사랑하기 때문에> 음반에 등장하는 플롯 연주는 그녀의 것이지. 하지만 그녀는 플롯으로만 이 음반에 기여한 건 아니야. 오히려 유재하는 '반주를 도와주신'이라기보다는 '이 음반의 실질적 창조자'라고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왜냐면 그 음반의 노래는 죄다 그녀 때문에 만들어진 노래였으니까.


그녀는 유재하의 여자친구였고 보통의 연인들처럼 밀당을 했고 때로는 토라지고 헤어지자는 야멸찬 선언을 주고받기도 했고 떨쳐지지 않는 그리움에 몸서리도 쳤고 다시 한번 잘해 보자고 두 손 모으기도 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어. 유재하 음반의 노래들은 글자 그대로 그들의 연애사(戀愛史)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하네.

유재하는 그녀를 음악대학 연합 동아리쯤 되는 곳에서 만났다고 해. 유재하는 꽤 오랫동안 짝사랑을 했고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며 구애를 했다는구나. 그때 마음을 담은 노래가 <그대 내 품에> 겠지. 이 노래는 짝사랑 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부르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것 같다. "내 취한 두 눈엔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그대 곁에서 맴돌고 싶어라"

화류계 쪽으로 안테나가 잘 발달하지 못해서 학창 시절에도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가장 늦게 아는 축에 들었고 네가 그 녀석이랑 연애한다는 것도 아마 한참 뒤에 알았었지만 일단 정보가 입수된 뒤엔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몃 슬쩍 내비치는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한 행동들에 혼자 미소를 지은 적이 많았네. 특히 에로스의 황금 화살 꽂은 채 누군가를 마주하게 된 가련한 청춘들의 가슴앓이들이란. 허긴 뭐 어디 청춘 뿐이겠느냐만. 언젠가 친구 한 녀석은 좋아하는 여자가 든 소주잔에 질투를 느낀다는(그 예쁜 손끝과 닿아 있으므로) 경천 동지의 멘트를 쳐서 내 배꼽을 천정에 붙여 놓기도 했었다만 유재하도 비슷했던 것 같아. "술잔에 비치는 어여쁜 그대의 미소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그대 입술에 닿고 싶어라"

그렇게 그녀 주위를 맴돈 지 2년 만에 유재하는 답장을 받는데 그 답은 흔쾌하지 않았다고 해. 사실 이때가 제일 애매하겠지. 완전한 '뻰찌'도 아닌 것이 시원스런 오케이도 아닌 것이 우리 이래도 될까? 내지는 마음에 확신이 안 선다 뭐 이런. 가부간에 결단을 내려 달라기엔 무섭고 이쪽이 끊자니 싫은 상황. 그때 지은 노래가 영화 <살인의 추억>에 등장한 '우울한 편지'였다지. "나를 바라볼 때 눈물짓나요. 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 그럼 아무 말도 필요없이 서로를 믿어요.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그대는 아는가요 아는가요. 내겐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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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밀고 당기고 타전하고 반송되고 등등을 거듭한 끝에 사랑의 문이 열린 순간만한 축복의 기쁨을 무엇에 비기리오. 유재하 1집 속에서 유재하는 아픔과 갈구와 좌절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신 난다. 그리고 그 신명은 모든 거리낌을 없애고 다소 무리한(?) 요구까지 하게 되지. "가슴으로 느껴보세요. 난 얼마만큼 그대 안에 있는지 그 입술로 말해보세요.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해 왔다고 말이에요." (우리들의 사랑 중에서)

하지만 항상 그렇듯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이란 게 무수한 오해의 크레바스와 어긋남의 절벽으로 점철돼 있는지라 그들에게도 이별은 찾아왔고 여자친구는 유학을, 유재하는 군대를 선택하게 돼. 이쯤 되면 꽤 극단적인 분리 설정이고 대개는 인생의 새로운 장르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아서 과거를 돌돌 말아 추억장이라는 이름의 장롱에 넣어 두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지만 유재하는 끝내 그녀를 잊지 못해. 무작정 옛 연인을 찾아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가지만 그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어. 일설에 따르면 통화는 됐는데 "그런 사람 없다."는 애인의 목소리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채 꺼이꺼이 태평양을 넘어왔다는 말도 있고.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가리워진 길 중)

잡힐 듯 말 듯 잡히지 않던 그녀는 마침내 무지개다리를 건너 목메어 기다리던 유재하에게로 돌아왔어. "그대여 힘이 돼 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가리워진 길 중)이라고 노래한 유재하에게 화답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유재하의 1집 제작에 자신의 음악을 보탰고 그녀의 플롯 소리는 한국 대중 음반 역사 100대 명반 중 랭킹 2위 <사랑하기 때문에>의 일부로 길이 남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의 노래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지금도 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11월 (1일)이 되면 그의 독특한 목소리와 함께 리바이벌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는 바로 돌아온 그녀를 위해 지은 노래였다는구나.

세상에는 음반도 많고 사연도 다양하고 곡절도 풍성하고 스토리도 지천이지만 음반 하나에 이렇게 한 천재의 연애사가 오롯이 담긴 일은 그렇게 흔치 않을 것 같다. 더하여 영화 같은 이야기 하나. 유재하가 죽은 뒤 서럽게 울었던 여자친구는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까페에서 우연히 유재하의 노래를 들었다고 해. 영국인 주인에게 영문을 물어보니 가게에서 일하던 한국인 유학생이 선물하고 간 노래고 가사는 모르지만 멜로디가 좋아 가끔 튼다는 대답이었다지.


자신의 사랑이 불멸의 나이테가 돼서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대중음악사 불멸의 음반으로 남게 된 것은 그녀에게 영광일까 슬픔일까. 나이를 넘어 시대의 고개를 넘어 여전히 울리는 유재하의 노래를 스마트폰 버튼 몇 번을 누르고 듣는 가운데 떠오르는 질문이다. 너는 어떨 거 같니?

사진은 <사랑하기 때문에> LP판 표지라고 하네. 담뱃불을 형상화하여 아랍 글씨같이 휘갈긴 한글이지만 웬지 향불이 피어오르는 느낌을 주지 않냐? 이것도 천재의 예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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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sanha88

편집: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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