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7. 월요일
그냥불패 cocoa
편집부 주 cocoa 님의 글은 1번 더 납치될 시, 삼진 아웃의 원칙에 따라 딴지 필진으로 임명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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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잘 있나?"
"여보세요. 어. 잘 있지. 왜?"
좀처럼 먼저 연락하지 않는 엄마의 전화였다. 어딘지 모르게 들뜬 목소리가 수화기 넘어서까지 느껴진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내게 밥 먹었느냐는 질문으로 통화를 시작한다. 당연히 먹었지. 3시 반인데. 그리고 곧 있을 임용시험에 관해서 묻는다.
"니 시험은 어디 쓸라고?"
"나 XX에 원서 넣었어. 거기가 올해 많이 뽑는대."
"그래, 잘했다. 많이 뽑는 데 가야지. 우선 뽑히고 봐야지."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매번 같은 레퍼토리. "패스트푸드 많이 먹지 말고, 밥 잘 해먹고, 엄마가 한번 가야 되는데 시간이 없네." 나는 언제나처럼 "네-네-"를 외쳤다. 그렇게 일방적인 대화가 오가고 엄마는 다시 처음의 레퍼토리로 돌아가서 "밥 잘 챙겨 먹고, 패스트푸드 먹지 말고" 주문 같은 말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나나 싶었는데 엄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 놓는다.
"니..시험 칠 때 있다이가 빨간 팬티..여자 꺼 입으면 합격한단다."
하..합격
아이고...교회도 절도 점집도 드나들지 않는 엄마가 주변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나 싶었다. 나는 얼른 그런 거 미신이니까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으셨는지 입고 합격하면 좋은 거고 떨어져도 본전이니까 괜찮지 않느냐 하신다. 당연히 나는 그런 거 입으면 더 불편하고 신경 쓰여서 시험 망칠 것 같으니 평소처럼 하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자 엄마는,
"그거...구하기 힘들면 엄마가 하나 사서 택배로 보내주까??"
아이고...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고...그냥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웃기기도 하고 혹시나 엄마가 택배로 보낼까 싶어 두렵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빨간 팬티를 입으면 합격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속설인지 궁금증이 들었다. 얼른 생각해보면 빨강 하면 뭔가 정열적이고, 열정적이고, 빨간색 복주머니가 떠오르기도 하고 또 뭐가 있지.. 빨갱이 빨간 망토 차차, 빨간 머리 앤, 빨간 펜 등등. 뭐 그다지 나쁜 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좀 더 찾아보고 싶어서 살짝 찾았더니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출처: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의 휴지통 코너. 지금은 동아일보가 휴지통?!
1996년 7월 5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내용을 살펴보자면, 고시 준비생 이 모 씨(30세)가 남의 집에 들어가 여자 속옷을 훔쳤다가 주거침입 및 절도혐의로 잡혔단다. 이 모 씨는 "사법시험에 다섯 차례나 응시했으나 계속 떨어졌는데 친구로부터 여자 속옷을 갖고 있으면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술김에 속옷을 훔치게 되었다"며 선처를 호소하였다는 짠한 스토리이다.
훔치고 싶은 만큼 여자 속옷에 영험한 능력이 있다는 속설은 오래전부터 내려져 오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확한 출처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마의'라는 드라마에서 합격하라며 속옷을 전해주는 장면이 나오긴 하는데, 이게 그때부터 있던 속설인지 현대에 있는 걸 재미로 가져다 쓴 건지 알 수 없으니. 아무튼 '여자 속옷을 입으면 합격한다.'는 속설은 예~~~~엣 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그 많은 많고 많은 속옷 중 왜 하필 '빨간 속옷'을 입어야 하는 건지 살펴보니, 영남지방에서는 고깃배가 만선이면 빨간색 기를 달고 입항하였고, 여기서 기원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설이 있었다. 그러니까 원래 영험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속옷에 영남 지방에서 풍요, 재물을 상징하는 빨간색이 입혀져 우리 엄마의 "빨간 팬티.. 입으면 합격한단다."가 나온 거시다. 구체적으로 왜 여자 속옷이며 왜 만선 때 빨간색 기를 달았는지 알려달라는 몇몇 독자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지만, 궁금증은 잠시 접어두시라.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으니!
중요한 것은 엄마가 강렬한 제안(?) 한방으로 내 정신을 번쩍 들도록 했다는 거시다. 요즘 시험도 얼마 남지 않고 마음도 뒤숭숭해서 공부도 안되던 차였는데 말이다.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될 놈은 되겠지' 하는 마음에 날짜만 세고 있었다. 내가 될 놈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정작 나는 이렇게 나이브한 생각에 빠져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합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평소 믿지도 않던 속설을 믿으면서까지 간절하게, 나보다 더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다. 더 간절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인데.
흠흠. 이 모든 일이 엄마가 나에게 이런 깊은 가르침을 주려고 충격 요법으로 빨간 팬티를 제안한 것인지, 진심으로 한번 입어보라는 뜻인지는 여전히 오리가 무중하고 ㄱㅎ누나의 속마음처럼 알 길이 없으나,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높이기는 한 것 같다. 오늘부터 다시 맘 잡고 해보련다. 딴지 지면을 빌어 못난 아들을 일깨워 주신 엄마께 감사드린다.
그래도 빨간 팬티는 안 입을 거다.
끝.
그냥불패 cocoa
편집: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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