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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8.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남의 나라 신세지는 한국 참전군인



지난 2010년부터 미국에 살고 있는 참전 전우들이 '월남참전 한국군 공로 결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자며 행동에 나섰다. 그 결과 '한인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미국 군인들과 동등하게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이들의 희생을 기려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워싱톤주를 시작으로 괌, 하와이, 뉴저지, 버지니아, 메릴랜드, 오리건.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에서 통과되어 드디어 20137월 연방의회에 상정되었다. 비록 결의안이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인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로를 연방의회 차원에서 최초로 공식 발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무런 실익도 없는 이 결의안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월남전에서의 한국군의 역할'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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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의 군인들이 미국의 우방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월남전을 미국인들이 월남에서 월맹공산군과 싸운 전쟁으로 이해한다. 미국인이 말하는 월남전의 사상자는 월남에서 죽은 58,000여명의 미국인 남자와 여자들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이야기되는 그룹은 그 전쟁에서 죽은 수십만 명의 월남인들이다. 미국인에게는 5,099명이나 전사한 한국인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안정효의 소설 <하얀 전쟁>에서는 국적이 어디인가에 따라 생시에나 사후에나 다르게 대접받았음을 보여준다. 미군이 죽으면 그들의 시체는 깁거나, 얼려서 관에 넣어 성조기로 감싸 본국으로 보내고, 한국군의 시체는 단순히 화장하거나 묻는 것에 반해, 월남인의 시체는 땅에 묻지도 않고 들판에 던져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인, 한국인, 월남인은 종종 일등, 이등, 삼등 시민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존슨 행정부에게 ROK(the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 병사를 고용하는 것은 미국의 '피와 재화의 상당량'을 절약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미군병사 한 명을 파월할 때마다 일년에 13,000달러를 써야했지만 한국군으로 대신할 경우에는 1인당 5,000~7,800달러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이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호주는 어떠했을까?


호주에서는 고맙게도 '연합군 연금'이라는 것이 있어서 호주가 참전한 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국가의 군인이 이민을 오면 호주의 재향군인과 똑같이 대우해서 연금을 지급한다. 그것도 인심 좋게 부인까지 함께. 따라서 호주가 참전했던 한국전과 월남전(호주인 521명의 전사, 약 3천명 부상)에 참가한 한국인들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받느냐고? 자세한 것은 호주의 국가안보에 관한 사항(?)이기에 밝히기 곤란하나 '너만 알고있어' 식으로 밝히자면 모든 저소득 노인이 65세부터 받는 연금과 같은 액수의 금액을 60세부터 받을 수 있다. 덕분에 젊은 시절 월남에서 피 한 방울 흘려 보지 않고 대신 땀 몇 방울 흘린 것 밖에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멋모르고 호주로 온 덕에 호강하게 된 것이다. 젊은 시절 고생해서 돈은 한국에다 벌어주고 늙어서 혜택은 호주에서 받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호주의 국군의 날이라고 할 수 있는 'Anzac Day' 행사에는 반드시 참여한다. 최소한 밥값은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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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석한 호주, 한국군의 6.25, 월남전 참전군인들



부천에 살 때 내 팔자가 젊어서는 고생을 해도 늙어서는 좀 편해질 거라고 했던 우리 집 옆집의 무면허 무당 아줌마의 영력이 국제적으로 미치는 줄은 정말 몰랐다. 하여간에 나로서는 젊어서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고 호주에 오지 않았어도 역시 큰일 날 뻔한 셈이다.

 

우선 호주는 200 여년의 짧은 역사 동안에 자기 나라 일로는 한 번도 전쟁을 해 본 적이 없다. 제2차 대전 때 일본이 호주 북쪽 끝에 있는 다윈이라는 시골 동네에 연습 삼아 폭격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호주 사람들은 일본의 잠수함이 시드니 항까지 침입한 것을 보고 기겁을 해서 항 입구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약 4 Km에 이르는 지역에 쇠로 된 그물을 쳤단다. 전쟁은 참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게 만든다. 갑자기 박통 때 서울근교 북쪽 전체에 인민군 탱크 못 들어오게 한다고 논바닥에 흉물스럽게 철근 콘크리트 장애물 설치해 놓은 것이 생각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하나의 국가로 독립한 1901년 이후 지구상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전쟁에 빠지지 않고 꼽사리를 꼈다. 세계에서 제일 전쟁을 많이 한 나라이자 맹주이기도 한 영국의 영향권에 있기 때문에 부득이한 점이 없진 않겠지만 자기 나라에서 전쟁 할 일이 없으니 훈련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는 것 같다. 밤낮으로 침략만 당하고 살던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사실 군대가 실지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 더 좋은 훈련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호주는 군대에 갔다 온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만큼 대우를 해준다. 특히 전쟁에 참가한 것은.

 

제1차 대전 때 터키군과 싸울 때는 터키의 갈리폴리라는 해안에 상륙작전을 하다가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 10,000 명 정도가 사망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그 날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AUSTRALIANEWZEALAND의 머리글자를 따서 우리로 말하면 '충무공 정신' 정도 되는 ‘ANZAC 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자기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전투에 차출되어가서 이긴 것도 아니고 몰살 당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나라라서 내세울 정신적 가치가 없다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 줘야지 어떻게 하겠나? 여기에는 자기들이 유럽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적 유대감이 크게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Anzac Day'의 행진은 현역 군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퇴역 군인들이 가슴에 훈장과 기장을 주렁주렁 달고 늙은 몸을 이끌고 참여한다. 수만 명의 늙은 군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혹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대열을 이루어 행진을 하는 것은 관광객들에게도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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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아침 9시부터  오후1시까지 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행진이 벌어지는데 실제 개인의 행진 시간은 30분 정도 밖에 안 된다. , 부대 마다 정해진 시내 집결 장소에 군데군데 모여 있다가 짜인 시간표에 따라 출발지점으로 와서 행진을 하고서 해산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해산을 하는 것이다.


퇴역 참전용사들이 각기 자기가 참전 했던 전투의 부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현대사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TV는 오전 내내 행진을 생중계하고 도로 연변에서는 시민들이 환호를 보낸다.


최연소자가 60대 후반의 나이인 파월 한국군 참전부대는 그래도 그 중에 영계에 속하는 편이다. 호주인들은 대강 줄만 맞추어서 발은 맞추지도 않고 완전 자유민주주의식으로 행진을 하지만 오랜 동안 군사독재 시절을 겪은 한국인들은 줄은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발까지 맞추어보려고 애를 많이 쓴다.


원래 국가의 통제가 강한 나라일수록 군인들의 행진이 절도 있는 법이다. 호주 영감들에 비해서 그래도 비교적 싱싱한 한국인들이 보무당당하게 행진을 하는 것을 보고 연도(沿道)의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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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 계신 이분들 만큼 각 잡힌 것 아니겠지만서도. 



2006년, 시드니에 있는 월남참전 전우회원들은 오랜 숙원 사업, 즉 옛 상관이자 전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을 'Anzac Day' 행사에  초청하기로 했다. 나는 이 기회를 계기로 영화 쪽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노병들의 재회>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기획했다.

 

월남전 종전 후 월남에서 일하던 기술자들과 현지에서 제대를 해서 일을 하던 한국인 150 여명이 호주로 왔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월남전 종전 후 공산정권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경험도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안되어 나라가 경제적으로 불안한 때였기에 호주를 택한 이들은 낮선 땅에 도착해서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들 대부분은 정식으로 영주권을 받아서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여행 비자로 호주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미혼이었던 그들은 그 후 고국에서 여자들을 데려와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은 키워서 오늘날 한인사회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미 월남에서 월남 여자들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여정은 특히 험난했다. 왜냐하면 당시 월남인들은 보트가 아니고서는 월남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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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피플



이렇게 호주로 온 노병들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살면서, 전쟁 참여 시기와 관계없이 모두의 상관이었던 노장군을 초청해서 만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국계 호주인 2, 3세들에게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그리고 이웃으로서 그들이 전쟁터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호주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영화는 행사 2 주 전에 한국에서 먼저 채 장군과 인터뷰를 끝내고, 채 장군 일행이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모습과 시드니 공항에서 환영 나온 전우들에게 경례를 받는 감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려 했다. 아들에게 시드니 공항 출구를 나올 때엔 밖에서 촬영 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중구난방으로 나오지 말고 채 장군을 선두로 해서 질서 있게 나오도록 주문을 해놓았다. 촬영을 위해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아들에게 채 장군 일행의 군기를 단단히 잡으라고(?)를 강력하게 당부를 했는데 불행히도 채 장군이 출국 직전에 갑작스럽게 복막염 수술을 하게 되어 오지 못하는 바람에 월남전에 참전했던 다른 예비역 장성 몇 명이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행사에서 너무도 한국스러운 관경이 연출되었다. 행사 중에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호주 예비역 장성들은 묵묵히 비를 맞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산을 꺼내서 예비역 장군들을 가려주었다. 나는 그 모습이 호주인들 눈에 얼마나 이상하게 비쳐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전역을 하면 평범한 민주시민으로 돌아오는데 한국인들은 결코 민주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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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우산 굴욕, 지못미...



갑작스러운 신병으로 오지 못한 채 장군은 다음 해에 호주에 오게 되었고 드디어 한국과 호주의 베트남 참전 용사 친선모임에서 자랑스럽게 채 장군을 호주 예비역들과 내외 귀빈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다. 소개를 받은 채 사령관이 강단에 섰을 때 나는 전우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경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집총 시에는 '받들어 총!' 맨손 일 때는 '거수 경례!'

비록 지금 우리들 손에는 총이 없지만 

40년 전 월남 전장에받들어 총!’을 하던 마음으로 경례를 하겠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한 사령관으로 남아 있는 

채명신 장군께 우리 생애 마지막 경례를 드리겠습니다

절도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우회 회장의 우렁찬 "사령관님께 경례!"구령에 이어 시드니 필하모니 단원인 군악대 출신 맹종섭 전우가 이날 행사를 위해서 특별히 영국 왕실에서 쓰는 곡으로 편곡을 해서 평소 보다 길게 부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경례를 주고받는 전우들과 사령관의 마음에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경례를 하고 있는 몇 분 동안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로 가려고 했던 것, 살아 돌아온 것, 지금은 조국을 등지고 이국땅에서 고독과 서러움을 숨기며 나이를 먹어가는 입장에서 옛 사령관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면서 경례를 하는 마음을 누가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몇몇 전우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은 내 생애 몇 번 되지 않는 감동의 순간으로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마음속에서 감동이 밀려온다. 그날 행사에서 한국 전우들이 기립하는 바람에 분위기에 휩쓸려 영문도 모르고 함께 일어선 호주 전우들과 내빈들은 이런 기분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채 장군은 2013년 11월에 사망하여 유언대로 동작동 현충원에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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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옆으로 잠깐 새는 감이 있지만 노무현이 왜 병장이 아니고 상병 제대를 했는지 아는가? 아니 월남전과 관계가 있으니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당시에는 월남에서 돌아오면 무조건 병장이었기 때문에 병장이 너무 많아져서 할 수 없이 TO맞추기 위해 병장 진급을 못하고 상병만기제대를 하기도 했다. 군 생활도 시절을 잘못 만나 36개월을 꼬박 근무를 하고도 상병으로 제대한 노무현이 월남을 갔다 오고도 상병으로 제대한 나를 여러 번 울렸다. 노무현 때문에 마지막으로 운 것은 딴지들도 다 마찬가지겠으나 첫 번째 운 것은 다를 것이다.


시드니에서 택시 운전을 하던 내게 2002년 12월 19일 밤은 특별한 날이었다. 10시 쯤 BBC 방송의 뉴스에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는 뉴스가 간단하게 흘러 나왔다순간 ''하고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눈물 때문에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차를 세웠다.


안경을 낀 상태였기 때문에 운전하면서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남자 손님은 이런 내 모습에 놀라 근심스럽게 "왜 그러느냐?" 고 물었다. "한국에서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서 기뻐서 그런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내 친구냐?" 고 물었다. "아니" 라고 했더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나를 미친놈으로 생각하고 불안해할까 나는 신통치 못한 영어로 주섬주섬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외국인들에게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내 개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야 운동이라고 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한국에서 레지스탕스 같은 일을 하던 사람인데 한국에서 청춘을 받쳐 온갖 고생을 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이민을 왔으나 내가 못 얻은 것을 노무현 씨가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아마 그날 그는 집에 돌아가서 "오늘 정말 미친 놈 보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우는 놈 보았다."고 했을 것이다.


7년이 지난 후 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드니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했고



추도사 모습



8년 후에는 봉하 마을의 부엉이 바위에 올라서 아내와 둘이서 손을 잡고 눈물을 삼키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눈물 나는 전우애

 


이야기가 너무 비장하게 흘렀으니 명랑하게 가보자.


택시 운전을 할 때 한 번은 늙수그레한 신사가 탔길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당신도 Anzac Day 행진에 참여하겠구나." 하니까 자기는 한 번도 참여해 본적이 없단다. 왜 그랬냐니까 소대장으로 참전 했는데 자기 소대에서 6명이 죽었단다. 그는 철저한 반전인사가 되어 모든 것이 재향군인회 중심으로 짜여 있는 호주사회를 완전히 등지고 살고 있었다. 역시 호주 사회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황석영의 소설 제목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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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어떤 영감이 술에 취해서 택시에 올라탔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자기 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했었다고 자랑을 하길래 예의상 고맙다고 했다. 그랬더니 신이 나서 직업군인이었던 자기 아버지가 참전한 전쟁을 줄줄이 사탕으로 늘어놓았다.


술 먹고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에 운전에 집중하느라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저 ". 응"  하고 형식적으로 적당히 대꾸를 하는데 자기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직업군인이 되어 1966년도에 월남에 갔다 왔단다. 그래서 나도 월남에 갔다 왔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재호 월남참전전우회에서 월남 참전 호주 전우들을 초청해서 대형 파티를 한 일이 있어서 그 파티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그 파티에 참석했단다. 그날 행사에서 내가 사회를 보았다고 했더니 "아 그랬냐? 너 참 사회 재미있게 보더라."면서 반색을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행선지를 바꾸더니 이상한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좀 수상한 곳에 세우라고 하더니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다. 내가 못 알아듣겠다고 하니까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친절하게 다시 설명을 되풀이 해주는데도 뭔 소리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없었지만 은근하게 이야기하는 폼을 보니 '여기가 여자들이 있는 집인데 들어가서 같이 놀다가 끝나고 자기를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전우애가 흘러넘쳐서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 된 것이다.


그가 매춘업소를 지칭하며 내가 알고 있는 ‘brothel'이라는 단어 대신 ’knocking shop'이란 슬랭을 쓰는 바람에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 단어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눈물나도록 고마웠지만 나는 돈을 벌러 나왔다고 했더니 "걱정마라. 내가 다 변상해 줄 테니." 하는 것이 아닌가참, 호주에도 이렇게 기분파가 있다니 확실히 술이란 신비한 것이었다. 세상에! 하나님인들 이렇게 사람을 갑자기 너그럽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나까지 책임지고, 내가 일 못하는 시간의 임금까지 물어주려면 당신 감당 못 할 거야. "


"아냐, 책임 질 수 있어. 날 믿어!"


그것은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택시운전사가 신성한 승객 수송 임무를 저버리고 업무 중에 딴 짓을 한다는 것은 직업윤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웃으며 "장군님! 잘 놀다 오십쇼."라고 거수 경례를 했다. 그제야 영감은 몹시 서운해 하는 표정으로 택시에서 내려서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진정한 연합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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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월남전 참전 예비역에게 그런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건전한 일도 있다. 한 번은 이민자와 서민층이 주로 사는 시드니 변두리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열린 Anzac Day 행사에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원래는 1차 대전 중 터키의 갈리폴리 해변에서 죽은 1 만 명의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을 추모하는 의미의 행사였지만 1. 2차 대전의 생존자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전과 월남전 참전자가 초청을 받아 참석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이 700 명이나 되는, 호주 기준으로 큰 학교인 이 학교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연례행사는 모두 학생들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계획이나 준비는 모두 교사들이 해 주었겠지만 순서 자체는 교사들의 개입이 전혀 없이 십여 명의 학생들이 순서를 하나씩 맡아 진행했다. 특이하게도 자기 의자를 들고 나올 수 없는 유치원과 1학년 학생들은 텐트천이 깔린 앞자리에 주저앉았고, 2학년 부터는 교실에서 자기 의자를 가지고 나와서 전원이 앉은 상태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인디언(미국 인디언이 아닌)들이 가장 많고 학생들 대부분이 이민자 자녀들인 이 학교 학생들이 100년 전에 죽은 백인들을 추모 한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였지만 학생들에게 국가의 의미를 알려 주기에는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안 혹은 인디언 피부를 가진 학생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100 년 전 죽은 백인들의 제사를 지내는 모습에서 국가라는 장치의 섬세한 장난을 보는 것 같았다. 통합적인 일체감이 있을 리가 없는, 이민으로 구성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국가관을 심어주는데 늙은 퇴역 군인 만큼 훌륭한 시청각 자료감이 어디있겠는가하기야 시청각 자료로서 자극적인 것이 한국의 가스통 부대만 한 것이 있겠는가? 어렸을 적부터 군대를 징그럽게 여기게 만드는 것으로는 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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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사회적 입장은 미국과 한국에서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은 '선한 전쟁'으로 평가되는 반면, 베트남전쟁은 '부당한 전쟁'으로 평가된다. 1975년 갤럽(Gallup)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참전군인의 51%만이 베트남전쟁이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응답했으며, 49%는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이미 '전쟁에 반대하는 베트남 참전군인회(Vietnam Veterans Against the War)'가 결성되었고 현재에도 많은 참전군인 단체가 베트남과의 화해와 반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는 전혀 달라서 참전군인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전·평화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보수 이데올로기와 강력한 연대를 과시하지 못해 몸살을 앓고 있다. 또한 고엽제 단체는 고엽제 후유증 문제 집회나 시위보다는 베트남 참전을 비판적으로 다룬 매체에 대한 시위와 폭력 행사, 혹은 냉전·안보주의를 표방한 수구·보수단체의 집회나 행사의 행동대원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월남전의 보조 선수들이 주전 선수들 보다 더 냉정하지 못하고 열을 내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처음 파병을 할 때는 자유의 십자군어쩌구하는 국민학교 반공 교과서 스토리를 녹음기 틀듯이 들려주었지만 교차 병력이 들어가는 1966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군은 파월을 독려하기 위해 병사들의 경제적 이익을 강조했다. 부대 내에는 "월남에 가면 월급 얼마 준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고, 가지 않으려는 병사들에게는 막걸리를 사 먹이면서 "월남에 가면 돈 번다."라면서 독려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군 당국에 의해 위로부터 조장된 파월 유인책이 효과를 발휘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베트남에서 무사히 귀환한 파월 군인과 그들이 들려주던 이국의 풍경, 병사 개인의 경제적 필요와 당시 사회적으로 조성되었던 '월남 붐'은 전장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고 있었던 것이다.

 

1967년을 넘어서 1968년경이 되면, 군에서도 오히려 지원병이 늘어 '대한민국에 공짜가 어디 있어, 월남 갈려면 공짜로 못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고, 베트남에 가기 위해 상납이 이루어졌을 정도로 '군내의 월남 붐'이 일었다. 전장은 더 이상 사지가 아닌, 아직 해외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의 유일한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파월장병이 인기이어서 전국에서 위문품이 쇄도하고, 쏟아지는 위문편지와 펜팔이 장병들을 신나게 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보여주는 '대한뉴스'의 앞머리는 거의 파월장병의 활동에 관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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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꼭 가고 싶다는 박카스 선전이 떠오르는 상황



그러나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면서 전쟁의 기억은 잊혀졌고, 그와 더불어 참전군인도 대중에게 사라졌다. 참전군인 단체를 결성하려는 노력은 1966년경부터 있었으나, 이는 소규모의 친목단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집단적인 응집력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198012월 신군부가 재향군인회 산하 38개의 임의단체를 해체하면서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월남참전전우회도 해체되었다.


그 자신이 월남 참전자였으나 파월 전우들에게는 평생 도움이 되는 일이 없었던 두환이 형님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특전사의 2대 사령관이 된 조천성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고 연대장직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한 것이 유명하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까지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두환이 연대장으로 부임한 이후에 지나치게 잦은 과시적인 행사, 빈번한 민간인과의 접촉, 작전 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인수인계, 부족한 전투수행능력에 더해 파티까지 너무 많으니 '이건 뭐 전쟁을 하러간 것이냐 놀러간 것이냐' 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직속상관 2명이 모두 반대했지만, 결국은 훈장을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회를 키워야 했던 속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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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712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참전군인 350여 명이 모여 '따이한 클럽'의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으며, 1988년 문화공보부 제415호로 '따이한'이 등록됨으로써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따이한'이 창립하자 대한해외참전전우회 (199110월 창립),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1992년부터 활동, 199712월 사단법인화),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20048월 창립) 등 다수의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각 조직은 조직 목표나 방향의 명확한 차이보다는 조직 대표나 내부의 이해관계 등에 따라 이합집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들은 공통적으로 보수 세력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남이가?' 하는 강력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으니 어쩐 일일까? 이들에게 어떤 증세가 있고 그 발병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디벼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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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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