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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4. 월요일

필리온









1.


2013년 2월. 결혼.


2013년 5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013년 7월. 아들이 태어났다.


2013년 8월.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2.


나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어린 시절, 거실에는 8BIT 애플 컴퓨터가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그냥 부팅하면 베이직이 실행됐다. 그 베이직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나는 언젠가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게임을 만들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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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그렇게 흘러갔다. 친구와 게임을 만들고,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하고, 게임 회사에 입사하고... 10년 전, 면접에서 저 베이직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나는 게임 만들기가 정말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 내 인생의 꿈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10년 후, 나는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후배들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그때 내가 그 애플만 없었어도 의대를 갔을 텐데 말야. 역시 부모님 말 들어서 나쁠 것 하나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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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 첫 게임 제작팀은 6명 정도의 소규모 팀이었다. 우리의 모토는 단순했다. 기존의 게임 리소스를 가지고, 소규모의 인원으로 빠르게 카피캣을 뽑아내자. (놀랍게도 당시 우리가 벤치마킹, 아니 베끼려 한 게임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돈을 잘 벌어들이고 있다. 카피캣의 목표 자체만은 정말 잘 설정했다.)


당시 나는 기획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놀랍게도 메인 기획과 프로그래밍을 겸하는 롤을 맡았다. 팀의 리드 개발자에 준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역량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일정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결국 팀의 인원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프로젝트가 접힌 다른 팀과 합치게 되었다. 6명이었던 우리 팀은, 20명 가까운 제법 규모 있는 팀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대규모의 팀이 된 이 시점에서 우리의 목표는 나가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돌이켜보면, 기존의 리소스를 가지고 빠르게 게임을 뽑아내자는 생각 자체도 좀 거시기한 것 같다. 만들다 보면 결국 다 만들게 되더라구...)


어쨌든 새로 합류한 팀의 시니어 기획자분과 같이 일하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까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흔히 말해, 개념이 없었다. 운동할 때의 트레이닝복과 슬리퍼를 회사에 입고 다녔다. 게다가 근태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주위 분들이 보기에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는 시니어 프로그래머 분이 복장에 대해 지적하자 "일만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대꾸했다. 퇴사하면 군대에 가야 하는 병특 신분의 주니어 사원이 저런 말을 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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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런 마인드로 다른 팀원들과 화합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새로 합류한 시니어 기획자분과 정말 지긋지긋하게 싸웠다. 프로젝트 기획의 메인이 일단은 나였지만, 시니어분이 보기엔 어림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일종의 기선 제압의 의미도 있고 하여 서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그 기획자분도 정말 갑갑하셨을 거다. 기획 경험이라고는 없는 풋내기가, 근거라고는 없는 내용을 들고 와서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의견 충돌을 넘어서 감정 충돌까지 이어졌고, 거의 주먹다짐이 오가기 직전까지의 상황이 매일 연출되었다.


결국,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기획을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 짤린 게 용하다. 그리고 나는 (그나마) 잘하는 프로그래밍에만 전념하다가, 병특 종료와 함께 복학하며 자연스럽게 회사를 그만두었다.




4.


그때 나는 기획이라는 일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생각하던 기획은 이렇다.


'남을 설득할 일이 없는 PD'의 롤.


실제로 게임을 만들면서 기획이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팔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규모 MMORPG를 만든다는 가정 하에, 어떻게 보면 가장 힘들고 재미없고 고생하는 파트가 기획이다. 남을 설득하는 것, 내가 잘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 기획을 했다면, 과연 내가 그나마 밥값은 하는 개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첫 번째 행운은 기획으로 지원한 회사에서 채용 계획이 없어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프로그래머의 길을 가게 된 것.


두 번째 행운은 내가 들어갔던 개발팀이 너무나 좋은 분들로 이루어진 너무나 좋은 팀이었다는 것.


내가 7년간 몸담았던 프로그래밍 팀은 지금 돌이켜봐도 정말 이상적인 팀이었다. 내 평생 그런 팀에서 다시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로를 부단히 비판하되 비난하지 않는 시니어들. 확실한 성과를 내며 비전이 보이는 프로젝트. 실수를 할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실수를 하지 않을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팀의 정책. 윗선에서 내려오는 비난과 억지를 막아주는 우산 역할을,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너무나도 열심히 해주셨던 팀장님들. 그런데 어느새 우산은 다 사라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우산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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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인적으로, 매니저는 정말 재미없는 일인 것 같다. 특히나 좋은 팀에서 코딩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즐거운 일인지를 감안한다면, 그 좋은 팀이 유지될 수 있게끔 노력하는 매니저 역할을 맡는 것은 롤러코스터에서 올라가다 추락하는 것과 진배없다.


코딩과 매니징은 야구 선수와 은행원이 하는 일만큼이나 다르다. 코딩을 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매니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은, 참으로 시발스러운 일이다. 뭐라 적당히 표현할 말이 없군.


매니저가 적성에 맞는 분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매니저가 정말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잘 하지도 못하고, 별로 재미도 없고.


앞서 "일만 잘 하면 되는 거 아니오" 같은 충격적인 발언만 봐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썩 좋진 않은 편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내 강점이 되어본 적은 별로 없다. 


사실 개발자들이 대부분 그렇긴 하다. 그냥 코딩하는 것이 재미있지, 사람을 설득하고 달래는 것을 좋아하는 개발자는 별로 없다. 매니저 역할을 1년 정도 하다 보니, 그제서야 내 위의 우산들이 다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팀장님들이 우산 역할을 하면서 참 재미는 없었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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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계속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게임 만드는 게 재미있는 걸까? 그냥 이 좋은 팀에서 코딩하는 게 재미있었던 걸까?




6.


이때가 대략 2011년 정도였다. 회식 자리에서 쓸데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의대 얘기를 하던 시절. 이 무렵, 나는 모바일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였다.


① 이 정도면 아직 혼자 만들어볼 만 할 것 같아서.


② 일이 재미없는데, 그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다시 ②번에 대해 이유를 달자면, 간단하다. 내가 혼자 게임을 만들면, 나는 '설득이 필요 없는 PD의 롤'을 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내가 꿈꿔온 '재미있는' 개발의 길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 하지 못한 이유도 두 가지 정도 있었다.


① 당장 회사를 그만둘 용기는 안 나서.


② 어머니의 병원비 부담을 회사에서 덜어주고 있었기에.


당시 어머니는 췌장암으로 치료를 받고 계셨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며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셨기에, 만만치 않은 병원비가 발생했다. 이 중 꽤 많은 금액을 회사의 복지 정책 덕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회사에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정말 잘 된 복지는 직원을 잡아두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아픈 어머니에게 부담을 드리면서 회사를 나갈 수는 없었다. 창업은 고사하고,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조차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이직의 조건으로 연봉을 저 병원비 두 배만큼 인상해 준다고 치자. 당신께서 아들이 생돈을 들여 병원비를 보탠다고 하면? 이건 기분 문제다. 안 그래도 우울해하시는 어머니께, 저런 마음의 짐까지 지워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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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스스로 그만큼 결심이 확고하지 못하기도 했다. 당장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는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서 창업할 만한 용기까지는 안 났던 것이다. 딱히 같이 하자고 해볼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생에 만약은 없지만, 생각은 해볼 수 있겠지. 만약 당시 어머니가 아프시지 않았다면 어떨까? 글쎄, 창업했을 가능성은 반반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그때 시작했더라도, 게임을 끝까지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 같다.


이유는 아래와 같다.




7.


나는 어릴 적 게임을 만들고자 했을 때부터, 막연하게 꿈꾸던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림 잘 그리는 여자분과 결혼하는 것.


나는 아트에 전혀 소질이 없다. 달걀을 못 낳아도 달걀이 썩었는지 안 썩었는지만 알면 좋겠지만, 나는 이게 달걀인지 타조알인지 구분을 못 할 정도다. 그래서 게임을 만들고자 할 때,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은 언제나 아트였다. 아무리 작은 게임이라도,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머드가 아닌 이상 아트는 반드시 필요하다. 어디 필요하다뿐이겠나, 최초 진입 유저의 숫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기획과 프로그래밍보다도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임의 핵심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게임 제작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기획도 내가 하고, 프로그래밍도 내가 한다 쳐도, 아트를 내가 그릴 수는 없다. 만약 저 무렵에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더라도 완성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소한 달걀과 타조알 정도는 구분해야 외주를 주더라도 줄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그림에 조예가 깊은 아내와 결혼하게 된 것은 정말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8.


아내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블로그였다. 그리고 우리가 친해진 계기는 놀랍게도 디아블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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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는 하드코어 게이머다. MMORPG를 할 때는 서버에서 손꼽히는 공격대에서 힐러로 활약했을 정도로 게임을 잘 하고, 좋아한다. 디아블로2 역시 굉장히 열심히 즐겨서, 당시 여대에서는 흔치 않은 학사 경고를 맞고 무려 학장과 면담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8회 연속 학사 경고를 맞았지만 전화 한 통 오지 않았지... 1년만 늦게 입학했어도 학교에서 제적됐을 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모로 운 좋은 인생인 것 같다.)


아무튼 아내는 디아블로3 역시 나오자마자 입술이 다 찢어지고 부르틀 정도로 밤을 새가며 플레이를 했고, 게임에 미치면 세상을 잊어버리는 나 역시 회사와 집을 오가며 다른 팀에 엄청난 폐를 끼치면서 게임을 열심히 했다. 그렇게 같이 게임을 하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사실 결정적으로 우리가 만나게 된 이유는 디아블로 3가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서였다. 게임에 약간 시들해졌을 무렵, 오프라인에서 만난 우리는 반해버렸고, 2개월도 되지 않아 결혼 날짜를 잡게 되었다. 아내는 지금도 자신이 그림을 그릴 줄 아니까 부려먹으려고 결혼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묻지만, 물론 절대 그렇진 않다. 정말 운 좋게도 마침 사랑하게 된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던 것뿐이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은 행운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1개월도 되지 않아 임신을 했다.




9.


어머니는 이 무렵 많이 쇠약해져 계셨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우리는 일단 임신 사실을, 안정기인 16주 정도가 지날 때까지는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병원에서 어머니가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어제 꿈을 꿨는데... 하얀 거북이가 나한테 와서 안기더라고. 혹시 좋은 소식 있는 거 아니니?"


너무 당황해서 대충 얼버무렸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참고로 아내가 이 무렵 꾼 꿈들은 대부분 개꿈이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도마뱀을 돌로 쳐서 죽이니까 도마뱀이 무한정 증식하는 꿈이었다고 한다. 이 꿈을 태몽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대신 꾸신 하얀 거북이 꿈이 아들의 태몽이 되었다. 아들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시지는 않으셨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기 2달 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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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어릴 적 몸이 참 약했다. 감기라도 한번 걸리면 천식 때문에 쌕쌕거리며 호흡이 곤란해지곤 했다. 그 감기를 365일 중 200일 정도 달고 살았다. 학업이 힘들 정도였던 나를, 어머니는 말 그대로 업어서 키우셨다. 저 200일 중 100일 정도는 어머니 등에 업혀 등교했다. 20kg이 넘는 8살짜리를 매일같이 500미터씩 업어서 데려다 주시곤 했다.


결혼식 때 이미 많이 마르시고 쇠약해지셔서 가지 못할까봐 걱정하시던 모습, 의사가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했을 때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소화도 제대로 못 하시면서 결혼식에서 식사를 얼마나 즐겁게 하시던지... 


그래도 가장 예뻐하던 막내아들 결혼식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을 축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더라. 이왕이면 두 달만 더 사셔서 그렇게 예뻐하던 막내아들을 꼭 닮은 손자 한번 안아보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두 달 뒤, 아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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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이 흔한 말이 그처럼 절실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2013년, 나에겐 정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배우자를 맞이했고, 어머니를 떠나보냈고, 아들을 안았다.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걸 진짜 이제는 꼭 해봐야겠다고. 혼자서 게임을 만들 수 있을 때, 만들어보자.




12.


사실 때가 좋진 않았다. 요즘은 유명한 말이 된, 아는 형님이 늘 하던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라고."


2013년 중순에 모바일 게임을 혼자서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건 진짜 늦은 거였다. 이미 당시 모바일 시장에 슬슬 미들 코어급의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시장의 경쟁도 점점 과열되는 추세였다. 자본도 별로 없는 개인이 게임을 만들겠다고 하는 건 그냥 정말 '나 한 번 게임이 만들어보고 싶었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힘들었다. 35살의 나이에 롤 프로게이머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썩 나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적기라고 생각했다. 왜냐고? 


지금 내가 이걸 하고 싶으니까.


단순한 이유지만 사실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거다. 내가 이걸 정말 미치도록 하고 싶은가. 미치도록 하고 싶다면, 하게 되는 거다. 예전에도 돌이켜보면 마찬가지였다. 결국 내가 이걸 해보겠다는 간절함이, 했을 때의 리스크에 비해 더 약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은 건 시장 상황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출산을 앞둔 아내와 막 결혼한 가장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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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게임을 만들기 전,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조언이 있었다.


"지금 모바일 시장은 완전 레드 오션이야. 진짜 안 좋은 생각 같은데?"


"뭐,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너무 크게 목표를 잡지 말고 해봐."


"혼자 하면 나태해져서 도저히 일정 맞출 수가 없을 걸."


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음과 같다.


"넌 진짜 니 아내에게 감사해라. 여자가 가장 보수적인 스탠스가 될 때가, 임신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인데, 흔쾌히 한번 만들어보라고 하다니. 진짜 대한민국 1%의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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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렇다. 아내는 딱히 별로 놀라지도, 반대하지도 않고, 해보고 싶으면 해보라고 했다. 해보고 싶은 건 해봐야 한다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시작하게 되면 얼마나 지출이 더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아내는 정말 대한민국에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있고, 와이프는 이런 와이프가 어딨냐며 자신에게 더 감사하라고 하고 있다.


아무튼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해보면서, 나는 선택지를 얻을 수 있었다. 원래는 회사를 그만두고, 1년 정도 본격적으로 작업한 후 게임을 런칭할 할 생각이었다. 비슷한 길을 가고 있던, 다른 선배의 반응은 이랬다.


"너 혼자 하면 좀 힘들 거야. 팀이라면 몰라도, 혼자 한다면 말리려고 온 거야."


"와이프랑 할 건데, 애기가 이제 태어나요."


"그러면 진짜 안 될 것 같은데?"


지난 1년간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분명히 그렇다. 갓난아기를 돌보면서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정말 안 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건 정말 아기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들이나 선택할 만한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회사를 그만둘 필요 없이, 육아휴직을 하면 되잖아?"


"육아휴직이요? 남자가?"


"왜, 남자도 할 수 있어. 회사를 그만둘 각오가 되었다면 육아휴직을 못 할 건 뭐야? 만약 실패하면 회사로 돌아가면 되니까, 더 안전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그렇다. 어차피 1년을 작업할 거면, 육아휴직은 퇴직보다 불리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들이 태어나고 2주가 지난 후,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그리고 육아를 하며,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으로...)






필리온


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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