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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20. 목요일

홍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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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기노시타 케이스케
주연: 류 치슈, 다나카 기누요, 호시노 카즈마사, 토노 에이지로, 우에하라 겐, 미츠다 겐, 스기무라 하루코
촬영: 타케토미 요시오
전체 관람가 / Black & White / 87분
원제: 陸軍



(광복 70주년 기념으로다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2차 세계대전 국책영화’에 대해 끄적여 봤습니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라고 아시는가? 1912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한, 한국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영화인이다.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전쟁시기의 일본 작품들은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 정도이기 때문에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이름은 낯설다.


기노시타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전쟁기에 새로 부임한 여교사와 12명의 학생들의 유대관계를 다룬 <스물네 개의 눈동자>, 고려장 풍습이 있는 산골마을의 이야기를 다룬 <나라야마 부시코>가 있다. 여기서 대표작이 더 갱신되지는 않고 있다. (한국에선 <나라야마 부시코>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리메이크작이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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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에서의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기노시타 감독은 자국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거장이다. 코미디부터 전쟁물까지 다양한 장르를 구현했지만, 기본적으로 여린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여성 취향의 드라마 장르에 강하다. 데뷔작도 1943년에 나온 로맨스코미디 영화인 <꽃피는 항구>다.


영화계 동기 감독으로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있다. (유도 액션 장르인 <스가타 산시로>로 데뷔한 그는 기노시타 감독과 데뷔한 해, 타계한 해가 같다) 이 두 명감독은 영화계 생활을 하면서 각자 한 번씩 좌절을 겪었다. 사람이 살면서 좌절을 겪지 않는 경우가 있겠냐만, 두 사람이 겪은 좌절은 이 바닥 생활을 접을 수도 있었던 크기였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경우 60대가 넘어섰을 때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했었다. 말하자면 인생을 아예 접으려 한 거다. 반면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청운의 꿈을 품고 데뷔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화인생을 접을 뻔 한 일이 생긴다. 1944년작이자 네 번째로 감독을 맡은 작품인 <육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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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기노시타 감독은 쇼치쿠 영화사의 고용감독으로 일하며 두 개의 전쟁과 관련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 중 하나인 <육군>은 일본 육군성의 의뢰(라고 쓰고 명령으로 읽는다)를 받아 ‘대동아 전쟁 3주년’을 기념하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일본에 의해 서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아시아의 국가들이 일본과 함께 자급자족이 가능한 단일체제를 만들고, 평화와 공동 번영을 모색하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질서인 ‘대동아공영’을 수호하고자 미국·영국과 대동아 전쟁을 벌이자는 게 그들만의 정의이자 설명이다.


이에 감독은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 제출한다. 그러나 최종결과물은 <유주얼 서스펙트>급으로 통수를 치는 형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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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수!


<육군>의 상영시간은 1시간 27분이며, ‘국가지원작’답게 몇 대에 걸친 7~80년간의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작품은 1866년 전당포를 운영하는 다카키 일가(그 다카키 일가 말고)의 인생사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외세의 침략과 국가 내부의 분란으로 시끌시끌할 때, 다카키 일가는 우연한 계기로 부상당한 무사를 치료해준다. 무사는 치료를 받고도 다시 전장에 나선다. 이 때 다카키 일가에 <대일본사>라는 책을 맡기며 소중히 여겨달라는 유언 겸 부탁을 남긴다. 어찌 보면 다카키 일가의 어린 아들인 다카키 도모조노가 이 상황을 본 것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역사를 다룬 책을 맡기고 전장으로 나가는 무사의 모습이 다카키 도모조노의 의식을 어떻게 형성했을지 모를 일이니까. 문제는 다카키 도모조노가 훗날 자국이 외국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던 시기에도 이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제 작품은 청일전쟁 시기에 <대일본사>와 전당포 가업을 이어받은 다카키 도모조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외세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에 항의하러 홀로 도쿄에 간다. 그러다 화병인지 모를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문병 온 아들 도모히코에게서 기어이 육사에 가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는 죽는다. 여기까지가 <육군>의 초반 20여분 분량이며, ‘국책영화’임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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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지 않고 적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절대 ‘전쟁의 비극’을 논하지 않는 영화.”


구견서 교수는 본인의 저서 <일본영화와 시대성>에서 ‘국책영화’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육군>은 제목처럼 일본의 젊은이들이 모두 육군에 자원입대하길 바라는 작품이다. 은연중에 당시 중국을 적으로 삼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사실 작품은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기 보다는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히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같다.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풍경은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무척 기괴하다. 아버지는 병문안 온 아들에게 일왕의 동상 앞에서 절을 하고 오는 게 순서 아니냐며 윽박을 지른다. 그에 아들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일왕의 동상을 향해 절을 한다. 이것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일본에서 흔하게 만들어졌던 국책영화다.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고 애꿎은 국민들을 사지로 내보내고 있는, 최악의 범죄를 시작부터 끝까지 외면하는 것 말이다. <육군>은 이 지점까지는 분명 일반적인 ‘국책영화’의 탈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후부터 작품이 점점 이상해진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애국심을 열심히 설파했고 중일전쟁 부분을 다루고 있음에도 전쟁 시퀀스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 이상하긴 했다. 주인공의 자리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도모조노의 아들인 도모히코에게로 넘어간다. 하지만 영광스러운 도모히코가 황군의 교육을 받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등의 전개를 아예 생략시켰다. 되레 그가 참전 중에 부상을 입어 전군이 귀향할 때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잘 된 일이라는 동료의 위로를 받지만 거기서 미묘한 굴욕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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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히코의 아들 신타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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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에서 아버지 도모히코는 류 치슈가, 어머니 와카는 다나카 기누요가 연기한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일본의 명배우들이자 국민배우인데 커플연기를 한 경우는 많지 않다.


도모히코가 퇴원하고 난 후, 작품은 도모히코가 전당포를 닫고 매일매일 ‘애국의 정신’으로 아내인 와카와 아들 신타로를 챙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때 참전을 하지 못했던 것이 컴플렉스가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모히코는 전쟁과 국가에 관하여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일단 화부터 낸다. 이런 태도 때문에 취업에도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육군>은 ‘전시’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일상의 삶과 당연히 부조화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만약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삶의 태도로 체화한 사람이라면, 부조화의 정도는 더욱 심할 것이다. 도모히코의 퇴원을 기점으로 작품은 참전을 촉구하는 프로파간다 대신 가족 드라마의 색채가 점점 더 짙어진다.

그러다 이상해 보이는 시퀀스가 불현듯 튀어나온다. 시간이 지나 도모히코는 사쿠라기라는 사람과 동업을 한다. 두 사람의 아들들도 성장하여 입대를 하는데 사쿠라기의 아들이 먼저 중국 상하이의 전장에 나간다. 도모히코는 왜 전장에 나가지 못했냐며 자신의 아들을 꾸중하고 사쿠라기는 아들의 입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쿠라기가 상하이 전투에서 많은 일본군들이 전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아들의 생사여부를 알게 된다. 작품은 사쿠라기의 표정이 웃음에서 절망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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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생사 여부를 들은 사쿠라기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진다.


이 시퀀스는 무척 이상하다. 등장인물들이 시종일관 애국심을 자랑을 하는 ‘국책영화’에서 불안이 드리워지는 순간을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한 사람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진 뒤에야 다음 쇼트로 넘어간다. 다음 쇼트에선 다시 국책영화의 색깔을 찾아 사쿠라기는 상대방으로부터 애국이 우선인데 자식 걱정을 하고 있느냐는 꾸중을 듣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도모히코가 사쿠라기의 사무실을 방문하고 그와 대화를 나눈다. 사쿠라기는 마침내 웃음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작품에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사쿠라기의 절망적인 표정과 뒤이어 나오는 도모히코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쇼트는 전혀 감정선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야기와 정서의 통일성을 생각했다면 사쿠라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롱테이크를 없애거나 줄였을 것이다. 하지만 <육군>은 부자연스러움을 각오하고 이어지지 않는 감정선을 그대로 배치해 놓았다. 작품은 자식의 죽음에 대해 기쁨이 아니라 슬픔과 절망을 먼저 느끼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애국심이 꼭 가족과 개인의 행복을 압도하고 있지 않다는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다. 갑자기 불편한 감정의 균열이 잠시 얼굴을 슥 들이밀고는 사라진다. 충격효과처럼 말이다.


이제 <육군>을 감상하는 경험은 결코 행복하거나 뿌듯하지 않다. 작품이 후반을 향해 갈수록 국가를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치는 사람들을 보며 위대하다고 느끼거나 본받고 싶다는 열망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되레 염려와 의문만 가중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신타로도 전장에 나간다. 당시의 국책영화들은 이럴 때 최선을 다해 분위기를 띄우려 애쓴다. <육군> 역시 전쟁에 참전하는 아들을 향해 자랑스럽다며 떳떳하게 전사하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가족끼리 ‘전사’를 운운하고 있을 때,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깨를 안마해주고 있다. 하룻밤이 지나면 더 이상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저런 말이 나올까. 작품은 이런 대사를 하고 난 뒤 한없이 상황을 불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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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행군을 보려고 달려가다가 넘어진 와카.
기모노는 넘어지기 위해 만든 옷인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대망의 다음날 아침이 된다. 작품은 주로 아버지인 도모히코를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하지만 마지막 10분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인 와카의 시선을 주로 다룬다. 신타로는 일찌감치 군부대의 행렬에 합류한 상태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러 나가있다. 와카는 눈물이 날까봐 행렬을 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마음을 바꾸고 행렬을 보러 나가기로 한다. 카메라는 그 때까지도 갖고 있던 책인 <대일본사>를 비추고, 와카가 혼자 텅 빈 거리를 다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비춘다.


<육군>의 마지막 10분을 이렇게 글로 다루는 게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결말부만큼은 영상으로 보는 게 가장 좋지 않겠나 싶다.




작품의 마지막 시퀀스는 육군성에서 굉장히 신경을 쓴 결과물이었다. 자신들이 의뢰를 했으니 관여를 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 마지막에 삽입된 음악도 직접 골랐다. 여기서 등장하는 군부대의 행렬도 실제다. (물론 이 날 카메라에 찍힌 병사들 대부분 전사했다) 그러니 작품은 최대한의 환호를 담아 전송하는 결말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아들은 웃으며 사지로 나가고, 어머니는 애써 웃어 보려 하지만 결국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작품 내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아버지는 끼어들 틈이 없고, 당장 사지로 나가는 아들을 잡아 이끌어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들이 자초한 것도 있지만 당시의 국가시스템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을 테니까. 와카는 여태껏 애쓰며 만들어온 가족이라는 세상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예감하듯 넋이 빠져 있다.


시사회를 통해 <육군>을 본 육군성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감독이 만든 부적합한 작품’이라며 노발대발했다. 전쟁을 기념하라고 만들었는데 이걸 보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냐고! 어찌어찌 통과되어 결국 상영은 했다만, 결국 감독은 1945년까지 계속 육군 정보국의 감시를 받으며 영화 활동을 금지 당한다. 촬영준비 중이었던 차기작 역시 취소됐다. 다음 해 8월, 일본이 두 개의 원자폭탄을 맞고 패전한 뒤에야 감독은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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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부에서 보여주는 다나카 기누요의 ‘혼 빠진 연기’가 압권이다.


문득 생각해본다.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정치적으로다가 강렬한 비판 의식을 가졌다고 여길 수 있을까? 최소한 이 작품에서 그런 모습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소신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현실을 이야기 하는데 무리가 없음을 관객에게 증명하고 있다.


<육군>은 국책영화의 탈을 쓰고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작품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정신을 혹은 가족 간의 역사와 유대관계를 어디까지 파탄 내는지를 다루기 위해 국책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한다. 덕분에 작품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악명높은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인 <의지의 승리>의 길을 피해가며, 국가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과연 이게 정상적인 국가에 사는 국민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작품은 아무리 국가가 전쟁을 강요했다고 할지라도 자식이 사지로 나가 죽는 걸 좋아하는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인간적인 믿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광기에 물들어 가족애마저 잃어가는 그 때의 자국을 진정으로 염려하고 있다. 그것도 일본이 패전 선언하기 1년 전인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이 일왕을 필두로 자국과 침략한 국가들을 향해 마지막 발광을 하던 그 엄혹한 시대에 말이다. 이런 걱정을 하고도 무사할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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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적이었던 시대에 대해 ‘최소한의 의심’없이 영화를 만들면 <의지의 승리> 같은 작품이 나오는 법이다.

(<의지의 승리>를 공포물로 생각하면 최고의 걸작이다)


<육군>을 복기하면서 문득 한국의 현 정부는 일제강점기와 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되돌아보고 있는지를 생각해 봤다. 그래, 올해는 무려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광복 70주년’이 아니던가.


하지만 서울 청계천에서는 광복절 대신 ‘건국절 기념식’이 열렸다. 독립 운동가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지 오래고 후손들은 셋방살이와 들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친일파의 후손들은 번들거리는 얼굴을 드러내며 떵떵거리고 산다. 현 대통령의 여동생은 일본의 신사참배에 대해 ‘하지 않는 게 패륜’이라며, 일본에게 위안부에 관련된 사과를 요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덧붙인다. 사지로 끌려가 비참한 성적 추행을 당했던 딸들을 위로하는 소녀상 주변에는 어버이 연합이 버린 쓰레기와 잿더미만이 남아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대통령의 축사에는 ‘광복 70주년’ 대신 ‘건국 67주년’을 운운하는 발언이 담겨 있었다.


현재 한국의 과거인식과 현실을 생각해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함이 느껴진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1940년대 당시에 자국과 세상을 바라봤던 태도보다 현재의 한국 정부가 훠~얼~씬 못한 방식으로 과거를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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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로, 그냥 나간 것도 아니고 끌려갔던 자식을 기리는 상을 사회에서 대하는 방식.
진짜 너무하잖아 이건.
(출처- 미디어몽구 페이스북)



P.S


1) 만약 기노시타 케이스케가 영화 활동을 금지당하지 않았다면 차기작은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였을 거라고 한다. 이 역시 일본 육군성의 후원을 받았다. 엎어지긴 했지만 만약 만들어 졌다면 처량하기 그지없는 가미카제 영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2) <육군>을 보시려면 미국 크라이테리언 사에서 출시한 DVD를 사서 보거나 유튜브에서 찾아 보시면 된다. 참고로 유튜브에는 자막이 없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