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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망명자 (4)

2014-11-2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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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1.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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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아래 연재물은 딴지일보 편집부로 전화를 걸어온 한 필자와 

오랜 시간 상담 끝에 본지 마빡에 올리기로 결정한 기고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북한에서 스파이로 길러졌다 활동 도중 

숙청된 남자로 

필자는 그 남자와의 만남을 

본지를 통해 풀어낼 예정입니다. 

 

편집부 확인 결과, 

필자는 오랜 시간 취재를 직업으로 삼아왔고

그의 본명으로 된 다양한 기사 및 취재물을 

여러 통로를 거쳐 직접 확인하였기에 

아래 글을 마빡에 올립니다. 


연재물 도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있을 수 있기에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올린 점, 

독자제위의 양해바랍니다. 


 





 


지난 기사


망명자 (1)

망명자 (2)

망명자 (3)




















 

자존심

 

북한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의 차이를 말하라면 난 이 단어를 입에 올린다자존심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흔한 연애에도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이 자존심일 것이다남한에서 사용하는 그 '자존심'이란 단어의 용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나의 나약함 혹은 약점을 '급하게' 수습하고 포장할 때 사용하는 단어

 

탈북자들을 만날 때 그들에게 가장 부러웠던 게 바로 이 자존심이었다가진 것 없는 자의 허세일 수도, 자격지심에 의한 반동일 수도 있다그러나 이 모든 걸 감안해도 그들이 말하는 자존심은 우리의 그것과 달랐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들의 '교육'이었다주체교육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자신'에 대한 자아가 우리의 그것을 뛰어넘었다어떤 때에는 그들의 자존심이 부담스러운 순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난 그들이 부럽다.

 

아는 교인이 내게 전해 준 이야기가 있다.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용돈을 전해준 적이 있다. 이때 교회에서 하느님을 소개하자는 의도로 교회 예배에만 나오면 지원금을 준다고 말했다. 그때 한 아이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된다고, 요식적인 행위라 설명했지만 그 아이는 끝까지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그 전까지 교회도 곧잘 나왔고, 지금 기독교 재단의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인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 물어보니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였다. 자신이 제 발로 교회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그건 인정하겠지만 돈 때문에 교회를 간다는 건 자기 자존심상 용납 할 수 없다는 거였다. 부끄럽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 교인의 얼굴을 보면서 그 탈북청소년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특정 교회나, 기독교를 비난할 의도는 없다. 그들이 탈북자들을 위해 하는 노력과 봉사는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다. 우리가 말로만 '우리 동포'를 말할 때 혹은 아예 '무시'할 때 그들에게 손을 내민 건 종교였다. 탈북자들 상당수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목사, 선교사들의 주선 혹은 노력에 의해 한국으로 들어왔고 그들의 노력 덕분에 훨씬 더 수월하게 한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노력에도 명과 암이 존재하고, 그 목적이 불분명한 경우도 간혹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행동 자체를 아예 하지 못하는 이들이 압도적 대다수임을 생각해야 한다. 다만 그들이 좀 더 세련되게 지원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런 아쉬움의 발로라 생각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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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쿠키뉴스 



김씨 아저씨가 보위부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온 세상은 변했다. 그의 신분상의 문제 또는 그의 과오가 낳은 결과 같은 미시적인 변화가 아니었다말 그대로 세상이 변했다.

 

핵 위기가 한 바탕 지나갔고영원한 지도자 김일성이 죽었다동구권의 붕괴는 냉혹한 현실세계를 보여줬다. '고난의 행군'이 막 지나가던 찰나였다.

 

사회의 내구도

 

90년대 북한을 보면서 그 '내구도' 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클린턴 행정부를 비롯해 서방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북한의 사회적 내구도를 낮게 잡았다북한은 독재자의 나라였고소련의 그늘 밑에서 살았던 나라였다기아의 나라였으며, 아사자들이 속출하던 시절이었다누가봐도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다핵은 그 최후의 단말마라 생각했다그들은 6~70년대 김일성 '영광의 시대'를 과소평가했다회상할 아름다운 추억은 희망이 되었고, 그 희망은 사회적 내구도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행군'은 힘겨웠다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고 해야 할까만약 이때 누군가가 문을 걷어찼다면 북한은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그리고 먼 훗날 통일에 대한 연대기 혹은 평가를 내릴 상황이 된다면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통일의 촉매제 혹은 변곡점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이건 한 세대 자체가 붕괴된 경우다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부여잡았던 것이 배급이었지만, 그 배급은 겨우 평양과 그 인근을 지켜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북한을 '평양공화국'이라 부르는 이유가 이것이다. 북한은 평양과 그 이외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평양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 혜택이며 북한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최근에 평양의 경계를 줄였는데, 이 역시도 배급을 줄이기 위한 꼼수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사회적 내구도는 '고난의 행군'은 버텨냈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다.

 

북한은 20123월 북한은 징집하는 신병의 키 하한 기준을 142cm로 낮췄다이전까지의 기준은 145cm였다.

징집병의 숫자가 부족하자 군복무 기간을 늘리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여군의 숫자도 늘리고 있다.

 

이게 뭘 의미할까?


고난의 행군 시절 많은 영유아들이 사망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아이들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굶어죽는 이들이 3~4백만이 넘어갔던 시절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면서 배급경제는 무너졌고장마당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가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가부장적이 사회였던 북한이 어느샌가 여자들이 득세하는 사회가 됐다남편 손님이 오면 같이 겸상도 하지 않고 대기하던 여자들이 이제는 가정경제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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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구호단체 '캅 아나무르'가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공개한 장마당 사진




탈북자란 단어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낯섬을 지금 세대는 알고 있을까초등학교 시절 '귀순용사'란 말을 들었건만어느새 이들은 뭉뚱그려 '탈북자' 가 됐다북한을 나온 이들이 많아지면서 그 희소성이 떨어졌다물론 더 이상 무의미한 체제경쟁이 필요 없었기에 나온 말일 수도 있다이유가 어쨌든 간에 탈북자가 흔해진 건 사실이다체제 자체가 헐거워진 것이다.


김씨 아저씨가 본 북한은 어느새 지옥이 돼 있었다북한 사회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행운인지 불행인지 김씨 아저씨는 이 지옥을 체험할 기회가 없었다아니, 지옥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그는 그대로 탄광으로 끌려가게 됐다.


막장에서의 삶땅의 끝이었다.


원래부터 막장인 곳에 죄를 짓고 끌려갔다그의 고난이 어느정도였을까?

 

내가 특수훈련을 받아서 살았지. 아니었으면...(못 버텼을 거야)”

 

'...아니었으면' 에는 단서가 붙었다살겠다는 의지. 그 의지의 시작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걸 먹는 것이었다.

 

'진흙쿠키'(클릭하시면 관련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를 보면서 사람이 흙을 먹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김씨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나서는 흙을 먹는 것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탄가루를 먹으면서 버텼지.”

 

갱도 아래에 차 있는 지하수를 보면 석탄가루가 둥둥 떠다닌다그 탄가루 중에서 기름이 묻어있는 걸 봤다고 한다그 기름과 탄을 건져 먹었다고 한다어쨌든 살아야 했기에 말이다.

 

살기 위해 탄가루를 훑어 먹으며 버텼던 그


스파이로 만들어졌던 인물이다


인간병기로 키워졌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6개월 만에 내뱉었던 말은,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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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아저씨가 탈출을 결심했던 시절은 이미 북한이란 나라가 나라로서의 기능을 포기했던 시절이었다북한 사회의 엘리트로 키워졌던 인물이 탈북을, 그 누구보다 투철한 국가관과 당성을 인정받던 그가 북한을 버릴 생각을 할 정도로 북한은 헐거워졌다국경선은 이때쯤이면 그냥 '선'일 뿐이었다.


문제는 가족이었다.

 

생존보다 가족을 걱정하던 이였지만남은 가족의 안녕을 생각하기에는 현실은 위중했다그리고 그에게 한 줄기 기대를 걸 만한 긍정적 신호가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조국은 이제 국가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생존 앞에서 국가체제는 무너졌다국민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국가국민들은 국가를 버렸고, 국가의 시스템은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탈출은 비장하지 않았다심장을 조여 오는 긴장감은 더더욱 없었다잠입과 탈출, 위장은 그가 몇 년에 걸쳐 배워왔던 것들이었다냉정한 상황판단과 결단력은 그의 자질 중 하나였다많이 쇠잔했지만, 그는 특전사에 버금가는(혹은 뛰어넘는) 체력훈련을 받은 이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수용소 탄광에서 탈출하려 결심했다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허술했다고문을 당했을 무렵에 보여줬던 조국의 예리함은 온데간데 없었다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조국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함경북도 은덕군우리에겐 아오지 탄광으로 더 잘 알려진 곳. '혁명화 대상' 가족들을 몰아넣어 강제로 채탄작업을 시켰던 곳. (그가 정확히 어디 탄광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오봉탄광이나 6.13 탄광은 아니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그는 두둑한 배짱과 약간의 뇌물, 그리고 독도법을 익힌 두뇌를 가지고 탈출을 시도 했다.


너무도 쉽게 나왔다. 최초의 생각으론 탄광을 벗어나는 게 가장 힘들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그 부분이 가장 쉬웠다고 한다그가 정말 힘들었던 건 탄광을 나온 뒤 중국으로 길을 잡고 올라가던 시기였다그가 탈출을 결심한 시기가 겨울이었다. 갈수기였기에 두만강의 수위가 낮을 것이고, 강이 얼었을 때 수월하게 국경을 넘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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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두만강변 숭선과 남평 사이 언덕에서 바라본 북한 무산시

이 지역은 외곽지역인데다가 경계가 삼엄하지 않아 주요 탈북 루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이 이곳에 간이 저수지를 만들어 탈북을 봉쇄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는 탈출을 했다탈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이미 그들을 관리할 의지가 상당부분 저하된 상태였다고 한다만약 탈출을 했다고 하더라도 낙반 사고나, 영양실조, 병사 등등의 이유로 죽은 걸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있기에 말이다.

 

김씨 아저씨는 탈출이 아니라 마실 나가는 느낌이었다며 탄광을 나온 것보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적절한 뇌물을 통해 나왔고, 이후의 검문 같은 것은 아예 길을 우회했기에 제지당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탈출, 그리고 민가를 피해 산길을 따라 움직였다생존을 위해 가끔 민가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도 예리함은 없었다북한을 북한답게 만들었던 예리함은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생존과 타성이 자리 잡았다국경을 넘는 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게 됐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탈북이란 게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김씨 아저씨의 생각은 명징(明澄)했다.

 

압록강은 수위가 높지만, 두만강은 아니다.

압록강 쪽은 한족들이 살지만, 두만강 쪽은 조선족 자치구다

같은 민족이니까 최소한 비빌언덕은 돼 줄 것이다.”

 

김씨 아저씨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후 탈북자들의 탈북 러쉬를 보면, 거의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함경북도 무산, 회령, 온성을 통해 넘어갔다. 조선족 연변 자치구가 있고, 강물 수위가 낮다는 점, 겨울에 도섭(渡涉)는 것이 쉽다는 점 등등의 이유로 이쪽이 애용되고 있다. 이렇게 탈북자가 많아지자 중국 정부는 두만강 일대에 철조망을 치기 시작했다.

 

김씨 아저씨의 긴장감 없는 탈북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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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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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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