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05. 금요일
가로나
사람들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해피엔딩이거나 눈물을 쏟게 하거나 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나와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살고 있어도 좋아한다. 그녀가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어차피 내 일은 아니니까. 그저 그녀를 응원하며 재벌 2세쯤의 남자 주인공과 잘 되기를 바란다. 분명 그렇게 된다. 주인공들이니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드라마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TV를 끄고 돌아서면, 심심한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드라마가 관심을 끌긴 하지만 '불행한 주인공의 삶'이 나를 따라 오지는 않는다. 다만 다음 방영시간을 기다리며 다음엔 그럴사한 반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지난 봄, 우리는 반전이 없는 드라마의 시작을 보았다. 세월호. 수많은 희생자들이 사라져간 이야기.
바다 위에 가로 놓인 세월호의 거대한 선체를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며 아우성쳤다.
앞다투어 팽목항으로, 분향소로 달려갔고 촛불집회가 열렸다. TV에서는 서서히 가라앉는 세월호가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시간으로 아이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잊지 않을께'
혹은
'눈물만 납니다'
지난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로 줄곧 지겹게 들어왔던 말들이, 또다시 인터넷 게시판을 뒤덮기 시작했다. 구하지 못한 희생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정작 죄책감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아닌 우리를 덮쳤다.
하지만 이 비극적인 드라마 역시, 오래 지나지 않아 잊혀질거라 생각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저 내가 아닌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삶이 아닌가. 먹먹한 가슴으로 함께 가슴 아파 하지만 사람들은 금세 그 비극을 벗어나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셀프 죄사함'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저, 누군가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Ctrl + C, Ctrl + V로 '충분히 슬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댓글'을 다는 것 정도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혼자 죄사함 받는건데 거창하기나 할까.
더불어 내 글이 몇번의 링크를 타고 꽤 많은 수의 '트친'에게 도달한다면 그 죄사함은 살짝 자랑스러워지기도 한다. 세월호 명목으로 마주 앉아 '페북 이웃이 몇명이나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늘 드는 생각이었지만, 면접을 보는 듯 해서 불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사한지 2년째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우리집 주소를 못외우는 판국에 페북 이웃이 뭐 어쨌다는 건가 싶어서.
세월호를 '드라마'라고 말한다면 너무 비약일까. 하지만 드라마를 보듯, 멀어지는 세월호를 보며 '그만했으면'이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도 심심치 않게 '슬프긴 하지만 이제 잊자'라며 쿨하게 뇌까리는 사람을 종종 보곤하니까.
아마도 내게도, 당신에게도. 세월호는 내 삶의 어느 시기에 일어나는 작은 '드라마틱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비극적이고, 해피엔딩이 아닌, 가슴 절절한 사연을 가진 그런 드라마. '잊지 않겠다'라는 다짐은 시간이 가며 희미해지고, 급기야 '언제적 이야기인데'라며 돌아서게 된다. 혹은, 그렇게 돌아서는 사람들을 보며 '어쩔 수 없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위에 도발적으로 나열한 몇가지 이야기와, 그에 대한 꼴사나운 표현들에 대해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5월 초 어느 즈음, 어느 주말 한 친구와 만났다. 친구는 내게 '분향소에 가자'라고 제안했지만, 그 친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싫어. 아직은 아닌 거 같네."
사실 깊게 생각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TV에서 본 끝없는 희생자의 영정을 실제로 보기가 무서웠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도 질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수 퀘스트처럼 번지던 '세월호 분향소 방문하기'에 합류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해야할 것이다. '분향소 방문하기'이후로 스스로 면죄부를 주며 자유로와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나중에 사람들이 잊기 시작하면 갈래."
잊혀질 즈음. 새싹이 움트던 계절을 지나 낙엽이 질 즈음. 그 때쯤이면 사람들이 잊기 시작하겠지. 그때면 한적하게 혼자 가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나는 가을이 짙어지던 10월에 분향소에 처음 방문했다. 혼자는 아니었고, '잊기를 거부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삶의 어느 시기에 가끔 마주치는 '변곡점'은, 세월호와 같은 참사와 맞물리기도 한다. 아니, 그런 비극 속에서 흔하게 자주 마주친다. 무언가를 내게 내밀고는 '자, 이제 어떻게 할래' 정도의 선택권을 주면서. 어느 아침, 생각없이 들어간 어느 싸이트에서 그런 '변곡점'과 마주치게 되었다.
기억 하시려나. 어느날 딴지 마빡에 걸린 자그마한 배너를. 다른 누구도 아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아닌, 이 글을 쓰고 있는 '가로나'를 콕 짚어 이야기했던 배너였다.
'73년생 모여라'
마치 누군가 '야! 너!'라고 고함을 지르기라도 한듯 흠칫 놀랐다. 아니, 왜??? 왜 하필 73이냐....딴지에는 근 6개월만에 들어와보는 참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배너가 눈에 띄고 말았다. 그 배너를 본 순간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헐. 너 나 아니?? 왜 부르는데.' 정도였다. 뭐 보험이라도 팔려는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이런 일들이 인생에서 벌어지는 멋진 일들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저 무의식이었지만, 어느 순간 몇개의 선택 중에서 무심코 택한 하나의 선택으로 그 이후의 일들이 바뀌곤 한다. 여느때처럼 기사가 뜨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창을 닫아버렸거나, 기사 몇개 대충 눈으로 훑고 끝났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 기사는, 삐삐라는 닉네임을 가진 친구가 무작위로 73년생을 소집하는 '소환장'이었다. 응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세월호'라는 사고 앞에서 꽤 맨붕을 겪은 듯, 내용도 맨붕스러웠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자면 '뭔가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73이라는 나이. 쉽지 않다. 가족과 자식이 있고, 뭔가 하기에는 애매하게 되어버린 나이이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 친구가 느꼈을 '진짜 맨붕'이 느껴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책없이 '소환장'을 내밀지는 않았을테니. 게다가 73년생들만 모이라고 하면... '동창회 불륜' 정도를 떠올리는 나이이다 보니... '이 친구 뭘 하려는건가'라는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게다가 무엇이든 궁금하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6월 첫째주 벙커를 방문하게 되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삐삐라는 친구의 설명이 한창이었지만... 홀을 채운 인원은 7명이었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무엇보다 삐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한 것에 내심 놀랐다.
삐삐의 설명이 심각했냐고. 아니. 하나같이 'ㅅㅂ 나갈까 말까'라는 심각한 표정이었다는 뜻이다. 그저 소환은 했지만, 삐삐 역시 무얼 해야할지 몰랐던 거다. 한시간 반동안 '뭘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여튼 하자'라는 설명을 듣고 있었으니. 그런 표정이 안 나오면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그냥 실실 웃고 있었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겼던 거다. 잔뜩 긴장해서 이야기가 '삼천포'도 아닌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산티아고'로 빠지고 있는 삐삐와, 무표정하게 '지쟈스'라고 웅얼거리는 듯한 표정의 일곱 명. 일단 여기 앉았으니 같은 나이일 거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디서 무슨 고생들을 했는지 면면들도 화려했다. 아니, 사실 우리는 그 정도 고생은 했을 나이였다.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고, 직장 생활은 여전히 고달팠겠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가슴을 쥐어 뜯었을 테지만, '내 아이들이 아니니 다행이야'라고 위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삐삐를 바라보며 '나갈까 말까'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일곱 명은, 그 위안조차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렇게 '남의 일처럼 세월호를 바라보고 있음을.'
그들이 스스로 소환된 그 자리는, 잔인한 그 사건에 다가가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그냥 뒤돌아서서 '미안하다'라는 면죄의 주문을 몇 번 외우면 끝났을 일일텐데. 지금 이렇게 삐삐의 연설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귀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무작위의 다수에게 손을 내민 삐삐와, 그 손을 잡고 있는 이 생소한 사람들이. 사는 곳도, 직업도, 다닌 학교도 모두 다를 이 사람들이 기꺼이 이 터무니 없는 소환에 응했다는 사실이.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서버의 게임에서 'nim, hoksi korean??'이라는 글귀를 본 기분이었다.
삐삐는 유난스럽게 줄곧 웃고 있는 내게 시선을 고정하기 시작했고, 삐삐의 불안을 조금 덜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라도 미소를 거둘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지 않은가? 게다가 언젠가 무심결에 뱉었던, '사람들이 잊기 시작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하게 되겠지'라며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고, 누군가 내게 '자, 준비해야지?'라고 등을 툭툭 치며 이야기 하고 있는데, 어떻게 기분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위로가 있었단 이유로 나는 이 모임을 삶의 어떤 시기에 마주치는 변곡점이요, 인생에서 벌어지는 멋진 일이라 표현할 수 있는 거다.
고맙다.
그럼, 투비 콘틴뉴
가로나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