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08. 월요일
산하
필자 주 아래 이야기는 픽션이오니 현실과 착오 있으시기 바랍니다. <미생> 명대사를 컨닝했습니다 |
간부회의에 다녀온 팀장님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김문화 과장, 이관광 대리 빨리 내 방으로 오라 그래."
"김문화 과장은 외근 중이고, 이관광 대리는 어제 야근하고 오늘 일찍 퇴근했는데요?"
대답을 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벼락이 떨어졌다.
"이륙한 비행기도 돌리라고 할 판이야. 빨리 둘 불러 와."
비행기 돌리는게 월매나 쉽냐고! 땅콩 때문에도 돌아오는데 말야! 응!
허겁지겁 연락을 돌리고 핸드폰을 때린 지 얼마 안돼 김 과장과 이 대리가 허겁지겁 사내로 들어왔다. 영문을 모르는 새파란 공포가 그들 얼굴에 서려 있었다. 이윽고 팀장님 방에 들어갔다 나온 그들은 휘청이고 있었다.
"뭡니까? 무슨 일입니까?"
"청송 지사로 가라네."
"나는 신입들이랑 재교육이라는데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김문화 과장, 이관광 대리는 입을 열지 않고 짐을 챙겼다. 이미 ERP에는 그들의 부서가 바뀌어 뜨고 있었고 관리팀에서 신분증을 회수하러 왔을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모종의 사태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김 과장님이 뭘 잘못했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여직원에게 김 과장은 웃으며 말했다.
"허허... 먼지 같은 일을 하다가 먼지가 되고 말았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선문답. 팀장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방 앞에 서서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부하 직원들에 닥친 불행에 대한 슬픔,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버무려진 축축한 표정으로. 여직원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그때 팀장은 고함을 질렀다.
"박신정씨! 어디서 동정질이야! 한 가족의 가장한테!"
팀장은 입을 닫았지만 소문은 빨랐다.
문제는 달포 전이었다. 박 사장님 주재 회의에서 박 사장님이 팀장님에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 팀 직원들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눈여겨보라고. 그리고 김문화 과장의 이름도 얼핏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팀장의 배포도 꽤 두둑한 사람이었다. 현 사장과 사이가 안좋은 전임 사장과 맞짱을 떴다는 소문으로 이번에 사장이 바뀔 때 특별히 영전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 배짱으로 근거없어 뵈는 사장 말을 씹었는데 이번 회의에서는 아예 웬 수첩에 이름을 적어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김문화, 이관광 이 사람들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구요.
조치하세요."
"박사장 할 일 더럽게 없구나." "아니, 사장이 과장하고 대리까지 신경 써 주시니 아주 해피하구만." "이게 구멍가게야 대기업이야." "구멍가게도 이렇게는 안해." "아우 그런데 대체 그 수첩엔 뭐가 적힌 거야? 누가 두 명을 찍은 거야?" 휴게실에서 술자리에서 직원들은 들끓었지만 그 뿐이었다.
더 황망한 일이 벌어졌다. 해외 출장 중이던 팀장이 해외 현지에서 직위해제가 된 것이다. 협력업체 만나고 있는데 업체 사장이 "죄송하지만 저희는 후임자와 상담을....." 하면서 일어나 버리고서야 팀장도 알았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울먹임과 성난 외침이 범벅이 된 환송회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유 팀장님. 도대체 뭡니까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겁니까?
그 늙은 기조실장입니까? 아니면 김 전무네인가요?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대체 어느 라인입니까? "
그러자 유 팀장은 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허허... 판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무엇을 노리고, 무엇에 당황하고, 무엇에 즐거워 하는지는
판 안의 사람만 모른다.
밖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데 말이야."
"무슨 말입니까? 다른 라인이 있단 말입니까?
아니, 사장님이 감사실하고 기조실 말고 어떤 라인으로 팀장님을 날려요? 네?
알고 계시면 좀 얘기해 주십시오."
유 팀장은 술만 먹었다. 취한 대리 하나가 가슴 속 말을 토해 냈다.
"대체 사장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아마 유 팀장도 취했던 것 같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꺼내지 않을 말을 누르듯 토해 냈으니까. 그의 사장평은 이랬다.
"애는 쓰는데 무리가 많고, 열정적인데 기본이 없어.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항상 추하게 보이지."
데스노트를 보고있는 사장님
몇 달 뒤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감사실 직원 보고서가 언론에 누출된 것이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회사의 주요 결정 사항에 회사 앞 까페 '정이랑' 주인 정마담이 개입하고 있으며, 일부 기조실 직원들은 정기적으로 마담에게 회사 업무를 보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장은 '찌라시'가 언론 보도에 나왔다고 벌컥 화를 내며 언론사에 소송을 걸었지만 정마담이라면 우리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원래 사장의 전 비서였다는데 어디서 뭘 했고 학교는 어딜 다녔는지 까마득히 모르는 정체불명의 여자였고, 사장이 업무추진비를 쏟아붓고 회식도 거기서만 해서 매출 올려 주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급기야.
"김 과장님하고 이 대리도 그 여자 작품이래.
그 여자 딸이 협력업체 면접을 봤는데 좀 힘써 달라고 얘기했나 봐.
그런데 김 과장님하고 이 대리가 그런 부탁 안된다고 잘라 버리니까 이 여자가 앙심을 품은 거야.
그래서 사장한테 얘기했고 사장은 수첩에 적어놨다가 나쁜 사람들이랜다 이런 거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열을 냈다. "뭐 그런 닭대가리가 사장이라고..." "하긴 이상하다 했어. '나쁜 사람'이라니 아니 무슨 만화영화 보는 애야?"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따지게?" "저 여자 워딩을 그대로 적은 거 아냐?" 하지만 그래도 설마 사장이 그렇게까지 닭대가리는 아닐 거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 팀장님한테 전화해 봅시다. 아니 내가 할게. 그래도 우리 사장이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유 팀장과의 짧은 통화가 끝난 후 전화를 건 윤 대리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닭대가리 맞네."
유 팀장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분명히 그건 사실이네. 그런데 부탁 하나 하지.
잘못을 추궁할 때 사람을 미워하면 안되네. 잘못이 가려지니까.
잘못을 보려면 인간을 치워 버려야 돼."
맞는 말씀이었다. 문제는 사장이 정상적인 경로가 아닌 사적인 경로에 의해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통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 부하 직원에게 타당한 이유가 아닌 도덕적 비난을 퍼부으면서 좌천 인사를 강요했다는 것이었고, 그 외에도 정 마담이 회사 일에 개입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면 그 점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다. 정 마담이 사장하고 어떤 관계고 호텔을 몇 번 드나들었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사장은 도저히 인간을 걷어낼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처신을 했다. 정마담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게 누출된 것이 문제라는 식의 발언을 계속했고, 심지어 사장의 수족들은 사실을 밝힌 유 팀장을 두고 배신자니 뭐니 하고 지껄였다. 급기야 이런 말까지 했다.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회사 전체가 흔들리는데
정말 우리 회사가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이 자기이고, 자기가 흔들리는 것을 왜 회사에 전가하고 회사에 부끄러움의 망토를 억지로 걸치게 하려는 것인가. 찌라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본인이 실행했음을 전직 팀장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제외한 회사 직원들은 무관심했다. 회사를 정마담이 좌지우지했어도 내 월급만 나오면 된 거지 뭘 떠드냐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사진의 42퍼센트는 견고하게 사장을 지지했다.
"그 아버지가 잘했으니 사장도 잘할 끼야."
그 시멘트들에게는 무슨 말을 퍼부어도 시멘트를 굳게 만드는 물 세례에 불과했다. 이 회사를 내가 다닐 이유가 있을까. 사표를 내고 이민이라도 가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짐이 곧 국가다
고로 짐을 흔들리게 하지 말지어다
친구를 찾았다. 억병으로 술을 먹는 중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결국 미생이야.
네 회사도 그렇고.
싸움은 기다리는 것부터 시작이야. 상대가 강할 때는...
이런저런 핑계로 도망치듯 장사하면 안돼.
그리고 친구는 덧붙였다.
"더럽다고 눈 돌리지 말고, 무섭다고 눈 깔지도 말고
똑바로 봐.....그냥 우선 봐.
그러면 할 말이 생기고 할 일이 보일 거야."
청와대 실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현 사장님과 전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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