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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5. 월요일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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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15> - 리처드 파인만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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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19> - 스티브 잡스 (上)]

[찌질한 위인전 <20> - 스티브 잡스 (下)]

[찌질한 위인전 <21>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찌질한 위인전 <22> - 어니스트 헤밍웨이 (下)]








균형의 상실과 전복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대표적 틀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가늠하는 잣대가 마치 영점을 기준으로 양끝으로 뻗어진 수직선과 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욱 선하거나 좋은 것, 왼쪽으로 갈수록 더욱 악하거나 나쁜 것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한 삶의 태도를 견지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무엇일까. 아마도 쉽고, 편하다는 것일 게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 상황의 대부분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긍정적인 가치와 부정적인 가치가 수직선 위의 (+), (-) 마냥 도식화 될 수도 없고, 더 나아가 어떤 가치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긍정 혹은 부정의 속성을 띄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강력한 자기확신과 굳건한 자존감은 한편으로는 독선의 씨앗이 된다. 상대를 살피지 않는 사랑의 과잉은 집착과 증오를 낳기도 한다. ‘우유부단함과 주저함사려 깊음과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실상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도식화된 세계가 아니라 양면성을 가진 수많은 가치가 얽히고 설킨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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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인생을 빗대어 망망대해 위를 홀로 노 저어가는 것이라 표현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외줄을 타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그것은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 없이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각이나 판단, 선택이 가진 양면적 가능성까지 고려하는 것, 그래서 아차하는 순간 언제든지 그것이 나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균형을 잘 잡기 위해서는 생각의 범주와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심지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 볼 때에도 말이다. 참으로 어렵고, 불편한 일이다. 더 쉽고, 더 편한 길에 대한 달콤한 유혹은 그래서 더욱 뿌리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분법적 사고와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은 쉽고 편하지만, 그래서 위험하다. 그 잣대가 세상을 제대로 가늠하지도 못하거니와 균형을 상실한 배가 전복되듯, 그로 인한 오판과 오류가 개인이나 사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절름발이 악마 괴벨스


<찌질한 위인전>의 열 두 번째 인물이자 외전 편의 두 번째로 소개할 인물은 요제프 괴벨스다. 그는 나치당이 독일에서 아직 미미한 지지 기반을 확보했던 시절부터 뛰어난 대중 선전과 선동 능력으로 일찌감치 히틀러의 심복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탁월한 연설가이기도 했던 그는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연설을 통해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을 역임하면서 나치가 저지른 주요 범죄-2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핵심 역할을 자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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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으로 라디오를 보급하고 갓 시작된 텔레비전 방송을 주관하여 대중매체를 선전에 이용하는 등, 지금까지도 괴벨스는 당시 대중 선전과 선동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의 선동기법이 학계의 연구 대상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괴벨스의 선전과 선동의 목표는 오로지 나치 정권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전쟁과 학살을 합리화하여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의 빼어난 활약(?)은 곧 전쟁과 학살의 피해자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래서 괴벨스에게 붙여진 별명이 절름발이 악마’. 전 독일을 전쟁과 학살의 집단 최면으로 빠뜨린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괴벨스였기에, 그는 최고 권력자인 히틀러를 제외한 나치의 실력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악명이 드높았다. 당시 유태인들은 학살 정책을 주도적으로 실행했던 하인리히 힘러나 루돌프 헤스-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책임자였다- 보다 괴벨스를 더 증오했다고 한다.


왜 괴벨스인가?


아무리 외전이라지만 <찌질한 위인전>에서 괴벨스를 소개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겠다. 단언컨대 괴벨스는 위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덧대어서 독일의 나치제국이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어 지금까지도 전세계의 패권국가로 남아있었다면 그 또한 위인이었을 것이라는 식의 생각 때문도 아니다. 상대론적 관점에서 나치 입장에서는 그를 위인으로 추앙할만하다라는 논리를 펼칠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괴벨스가 절름발이 악마이기 이전에 그 역시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행위의 범주 안에 괴벨스 또한 속한다는 것이고, 인류사에 제2, 3의 괴벨스가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거나 심지어 대단히 가능성이 낮겠지만-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 괴벨스가 절름발이 악마가 되기까지는 몇 가지 변곡점과 내적 요인이 존재한다. 외부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괴벨스가 악마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 외적 갈등과 환경은 당시 독일 사회와 인간 괴벨스라는 특수성에 기반한 것들도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도 상존하고 있다.


괴벨스는 그의 신체 장애 때문에 절름발이 악마로 불렸지만 내적으로도 균형을 잃은 절름발이였다. <찌질한 위인전>의 두 번째 외전, 괴벨스 편에서 우리는 균형을 잃은 한 인간이 마찬가지로 균형을 잃은 사회와 상호작용을 일으켰을 때 개인과 사회에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장애는 신이 내린 형벌인가?


요제프 괴벨스는 1897 10 29, 독일 라인란트 지방의 라이트 시()에서 프리츠 괴벨스와 카타리나 오덴하우젠 사이에서 3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괴벨스의 아버지인 프리츠 괴벨스는 심지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사무직원인 회계 책임자로 승진했지만 그렇다고 집안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괴벨스는 갓난아기 때 사경을 헤맬 정도로 폐렴을 심하게 앓았다. 폐렴은 나았지만 그 영향으로 병약한 영유아기를 보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괴벨스는 일곱 살 때 골수염을 앓게 되어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다. 괴벨스의 부모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어린 괴벨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돌아오는 것은 마비된 오른 다리의 성장이 더뎌지고 발이 안으로 굽으면서 점차 만곡족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대답이었다. 괴벨스가 열 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는 없는 살림에도 기어이 괴벨스가 다리 수술을 받게 했지만 수술 결과는 실패. 괴벨스는 평생을 의족에 의지한 채 절름발이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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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괴벨스(오른쪽)


괴벨스의 가정은 독실한 카톨릭이었고 그것은 마을 안의 대부분의 가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만해도 장애를 신이 내린 형벌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괴벨스의 장애를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거짓 설명해야 했다. 장애를 대하는 왜곡된 시선 속에 괴벨스의 성장기는 암울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유태인과 함께 나치 우생학에 의해 극단적 차별의 대상이 된 것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괴벨스는 언제나 또래의 놀림과 따돌림에 시달려야 했다. 맘껏 뛰노는 아이들 속에서 어울릴 수 없었던 괴벨스는 어린 시절부터 극한의 외로움을 겪으며 성장했고 외로움은 고통으로, 고통은 다시 증오와 냉소로 변해갔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괴벨스의 뿌리깊은 증오는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다른 아이들이 달리고 마구 설치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하느님에게 불평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고, 자신과 같은 병신을 여전히 좋아하는 어머니를 비웃게 되었다.”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괴벨스가 따돌림과 조롱 속에서 남들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학업에 매진하는 것뿐이었다. 괴벨스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지식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학업 성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얻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게끔 만들고 싶어했던 괴벨스의 성적은 일취월장했고, 그의 부모는 장애를 가진 아들이 공부에 재능을 보이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괴벨스, 그러나 그가 가진 신체 장애와 그로 인한 따돌림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신을 원망했고, 신을 갈망했다. 그것은 그가 가톨릭 집안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자신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모습이 되어 경멸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끔 만든 절대자, 그래서 사랑대신 증오를 먼저 가슴에 품게 만든 신을 원망했던 괴벨스는 그럼에도 열 세 살 무렵에는 성직자가 되어 자신의 삶을 종교에 헌신하는 꿈을 꾸었다. 아마도 괴벨스는 고위 성직자가 된 자신을 따르고 존중하는 사람들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을 것이다. 당시의 괴벨스는 십대 소년에 불과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신의 세계 안에서 신을 원망하는 편이 그 바깥에서 영문도 모른 채 혼란스러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이후 괴벨스의 삶의 행적이 이러한 추측에 근거가 된다- 어쨌든 괴벨스는 당시까지는 여전히 신의 세계관에 속해있었다.


청년 괴벨스의 좌절, 무너진 세계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괴벨스가 마련한 이상의 도피처는 신앙에서 점차 국가로 옮겨졌다. 1914년 발발한 1차세계대전이 그것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개전과 함께 맹렬히 고조되었던 국가주의의 열기는 괴벨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괴벨스에게는 국가를 위해 헌신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형을 비롯한 수많은 학도병 지원자들이 국가를 위해 전장에 뛰어드는 것을, 괴벨스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신체 장애는 그렇게 괴벨스를 또 주저앉혔다. 텅빈 학교를 바라보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굳이 짐작해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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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지움 시절


뛰어난 성적으로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을 졸업하게 되어(특히 독일어 작문 성적이 뛰어나 학년 수석을 했다) 졸업사를 낭독하기도 했던 괴벨스였지만 1917, 스물 한 살의 대학생 괴벨스는 학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날 뻔한 위기를 군사보조단체의 소집 통보 덕분에 겨우 면하는 신세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초라하고 허약해 뵈는 행색 때문에 며칠 되지 않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져 애국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다시금 절망하고 만다.


1918년, 1차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이미 독일 내에 싹튼 국가주의가 꺾이지 않은 것처럼, 애국의 대열에 참가하려는 노력이 번번히 실패했음에도 괴벨스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국가'라는 화두는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점점 초라해질수록, 현실이 팍팍해질수록 괴벨스는 그로부터 도피하여 더욱 국가적 차원의 문제에 몰입했다. 장애로 인한 편견과 조롱, 궁핍한 생활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그의 곁에 있는 연인 안카 슈탈헤름은 자신과는 달리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으므로 괴벨스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시 괴벨스의 눈에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실낱같이 그를 지탱하고 있던 종교적 세계관은 빠르게 허물어져 갔다. 괴벨스는 점차 국가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 하면서 공상에 빠져들었다.


내 안의 혼돈, '나는 모르겠다. 이 세상을'


1918년 12월, 괴벨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미사에 불참한다. 그 후로도 괴벨스는 교회에 가거나 고해성사 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괴벨스는 신을 버린 것이다. 괴벨스를 지탱하고 있던 신의 섭리와 질서도 더 이상 그 안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 신을 버렸지만 괴벨스가 혼란에 빠지게 된 것 또한 자명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확고했던 그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대신에 이 세상을 더는 잘 모르겠다는 고백이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괴벨스대중 선동의 심리학』에서 괴벨스의 일기를 토대로 기술.


'이 세상을 더는 잘 모르겠다'는 그의 고백은 괴벨스가 당시 겪었던 공허와 혼란을 잘 나타낸다. 괴벨스는 자신의 『비망록』에 1919년 무렵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안의 혼돈'. 


혼란, 공허, 혼돈을 채우기 위해 괴벨스는 더욱 국가주의에 천착하고 증오를 자양분 삼아 현실을 벼텨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안에 이전의 신앙을 대체할 만한 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청년 괴벨스는 표류했고, 이러한 내적 아노미 상태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히틀러'라는 신앙을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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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편에 계속.



엇을 믿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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