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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7. 화요일

trexx





 







1. 새롭고 자유로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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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들의 잔치인 Woodstock 69 festival



가정용 컴퓨터 시대는 초기 미국 개척시대와 비슷해 보인다. 미국 서부의 한 장소에서 유독 발전하게 되는 이 새로운 시장은 자율적인 지식 공유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좋은 기술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순수함에 믿음을 가진 기술 매니악들의 잔치와 같은 것이었다. 이 시대의 천재들은 이상주의자들이였다. 아타리의 놀런 부시넬, 애플의 스티브 워즈니악, 디지털리서치의 게리 킬달 등 자신의 열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들이다. 


그들이 만든 건 전혀 새로운 시장이었다. 기술추종자들은 저작권이니 특허권이니 하는 법과는 상관없이 개발하고 싶은 물건을 순수한 열정으로 만들 뿐이었다. 실리콘 밸리는 히피문화가 탄생한 곳이다. 기성세대의 법과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 히피문화가 기술 매니악에게도 영향을 미쳐 폐쇄적인 강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 경쟁이 아닌 서로의 지식 공유를 통해 새로운 다른 것을 발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70년대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실리콘밸리 기술 매니악들은 자신들이 공유한 지식이 이후 30년 동안 전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몰랐다. 50~60년대를 절대적으로 호령하던 GE, IBM 등 거대 전자, 컴퓨터 회사는 동부에 위치해 있었다. 70년대 이전까지 가정용 컴퓨터 시장 규모는 IBM이 군주로 있는 메인프레임 시장과 비교 자체가 될 수 없었다.



2. 거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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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의 1924년 로고, 지구본을 상징.

 

IBM은 APPLE II의 성공이, 엄밀히 말해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VisiCalc의 성공이 못마땅하였다. IBM이 말하는 사무용 컴퓨터는 메인프레임에 연결된 터미널로 족해야 하는데, 허접한 하드웨어로 별것 아닌 소프트웨어로 사무업무가 가능하게 되어 점차 시장이 커지게 되자 IBM도 위기의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IBM이 가정용 컴퓨터로 시선을 돌린 건 스티브 잡스의 주장처럼 APPLE II 때문만은 아니었다. APPLE이 공격적으로 캘리포니아 공립학교에 APPLE II를 무상으로 지원하여 인지도를 넓혀갔고, 코모도*사를 비롯하여 여러 회사들의 제품을 통해 개인용 컴퓨터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코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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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dore PET과 Commodore 64


코모도는 잭 트라미엘이 1954년 캐나다 토론토에 세운, 타자기 제작부터 시작한 비교적 오래된 회사다. 전자계산기 사업을 통하여 1976년 저가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인 APPLE I에 사용되었던 MOS 테크놀로지를 인수한다. 코모도는 APPLE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퍼스널컴퓨터 시장에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코모도 입장에서는 애플은 당시 코흘리개 회사였고, 자신들의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이 훨씬 월등하다 여겼다. 코모도는 컴퓨터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아예 애플을 인수하려 했지만 뭣도 없는 스티브 잡스는 투자만을 요구하며 단칼에 이를 거절한다. 코모도는 '빡'돌아 애플에 대한 투자를 끊어버리고 가정용 컴퓨터를 직접 개발하여 1977년 PET을 내놓았다. 


그러나 APPLE II에 비해 성능은 떨어져 PET은 시장에서 밀려났다. 그래픽을 개선한 VIC-20이 299달러로 파격적으로 나오자 250만 대를 판매하게 되고 1982년 코모도 64를 595달러에 발매하여 전작의 10배인 2,300만 대를 팔매하여 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제품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나 APPLE II의 경우 대당 1,000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하는 고가전략으로 수익을 늘렸으나, 코모도는 그 절반가격으로 시장에 판매하면서 반대로 수익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애플의 인지도를 넘어서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마케팅 비용을 지출하였다.(왠지 지금하고 비슷하지 않는가?) 결국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애플을 고급제품으로, 코모도는 싸구려로 인식하게 되었고 IBM PC(호환 제품 포함)가 시장의 지배자가 되자 시장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거인 IBM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IBM은 가정용 컴퓨터에 빨리 진입하고 싶었다. 동시에 2만불 가량 책정된 자신의 기술로만 만든 Portable Computer 5100 등에 자가잠식을 당하지 않기 위해 BIOS를 제외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에서 아웃소싱 전략*을 택한다.(상품가치전쟁 3편 下 참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자사의 기술을 이용하지 않고 외부에서 조달할 경우 가격을 낮추고 빠르게 설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웃소싱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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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소싱 전략의 가장 성공적인 전략은 애플의 아이팟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애플은 1983년 리사와 1984년 매킨토시 제작할 때에는 아웃소싱을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외부 하드웨어 인터페이스는 애플 규격으로 하였고 내부 슬롯 또한 PC와 호환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팟은 외부 엔지니어였던 토니 파델의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하드웨어와 작동 소프트웨어 일체를 아웃소싱으로 구성하였다. 애플이 유일하게 내세운 기술은 아이튠즈 플랫폼 전략이었다. 물론 아이튠즈 소프트웨어 또한 제프 로빈이라는 애플 직원이 퇴사하여 벤처회사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애플이 다시 구매한 프로그램이었다. 애플이 10개월 만에 아이팟을 만든 건 철저하게 계산된 아웃소싱 전략으로 가능하였다. IBM PC가 1년 만에 완성제품으로 나왔던 배경하고 비슷하다.


그러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각각의 발전에 대해 전혀 예상 못한 IBM의 이 판단은 시대를 전혀 읽지 못한 것이었다.(사실 알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IBM은 컴퓨터를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했다. 


사실 IBM이 IBM PC를 만들면서 참조한 실제 모델은 아이러니 하게도 가정용 컴퓨터 APPLE II 였다. APPLE II는 ROM을 절대 공유하지 않았고 확장 슬롯으로 서드파티 하드웨어 제품에 공개하였다.(현재의 애플이 내부는 공개안하고 선더볼트 등 외부 인터페이스에 집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APPLE II는 내부는 닫혀있지만 외부는 열린 구조였다. 또한 APPLE II의 내부 기술을 보니 APPLE 스스로 만든 건 ROM 안에 들어있는 소프트웨어 밖에 없었다. CPU는 MOS 6502였고 보조 기억장치도 IBM이 최초 개발한 플로피 디스크였다. IBM은 ROM에 해당하는 BIOS만 제어 할 수 있다면 외부 기술을 통하여도 컴퓨터를 덩어리 제품으로 판매가 가능하다 여겼던 것이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아니 컴퓨터의 최고 기술을 가지고 있는 IBM은 자신이 예전에 개발한 기술들을 대충 가져다가 가정용 컴퓨터를 만드는 모든 회사 모두를 좆밥으로 여겼다.



3. 싼 부품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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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컴퓨터 프로덕트의 Q-DOS(왼쪽)와 똑같은 IBM PC-DOS(오른쪽)


당시 애플 II를 제외한 대다수의 가정용 컴퓨터에서 그나마 성능이 우수한 INTEL 8088을 CPU로 사용하였다. 당시 많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8bit로 작동하여 외부 하드웨어도 8bit였다. IBM이 PC를 제작할 때 8088을 선택한 이유는 16bit CPU 중에서 8bit 하드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내부연산은 16bit, 외부 버스는 8bit로 작동하는 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IBM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한 운영 체제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1975년 Portable Computer 5100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칩셋은 인텔 혹은 MOS 테크놀러지 등에서 만든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아니었다. 5100에 들어있는 프로세서는 메인프레임을 에뮬레이트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PALM Processor였다. PALM Processor는 명령어 셋이 없기에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게다가 상품 가격도 2만달러 육박하여, 1,000달러 시장인 가정용 컴퓨터 시장에 도입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IBM은 '손대지 않고 코풀기를 시도'하기 위해 시장에 나와있는 OS를 헐값에 사려고 하였고, 당시 가장 유명한 CP/M을 찾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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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M Processor' 요런 걸 갖다 쓴 거다.

 

컴퓨터계의 절대 권력인 IBM은 CP/M을 성능도 떨어지는 싸구려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돌아가는 허접한 프로그램으로 생각했다. IBM은 단지 이 프로그램을 시간과 여력이 없어서 못 만들 뿐이라 여겼다. 이런 마이크로프로세서와 OS에 대한 몰이해는 IBM의 기술 우위에 대한 자만심 때문이었다.


IBM 같은 거대기업은 종종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실수가 바로 'CP/M을 만든 사람을 착각'한 것이다. IBM은 24살의 젊은 빌 게이츠가 CP/M을 만들 줄 알고 MS사를 먼저 방문한다. 당시 MS의 빌게이츠는 게리 킬달과의 인연을 생각하여 IBM에게 CP/M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하고, 게리 킬달의 디지털 리서치사를 정중히 소개했다. 빌 게이츠가 선선히 그럴 수 있었던 건 당시 IBM이 MS를 찾아 왔을 때 OS 만 찾았던 것이 아니라 MS가 가지고 있는 BASIC 언어 인터프리터등의 납품계약을 했기 때문에 흥이 나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4. 날조된 신화: 게리는 비행기 몰고 있었어 (“Gary went fl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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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PC가 등장하기 이전 가정용 컴퓨터 점유율에서 APPLE II는 미비했다.

 

CP/M을 만들어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표준을 만든 게리 킬달은 이미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APPLE II를 제외한 여러 회사에서 만든 가정용 컴퓨터의 사실상 표준 OS는 CP/M 이었다. 이는 BIOS를 통하여 여러 컴퓨터에 손쉽게 CP/M을 포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리 킬달은 1980년까지 돈을 쓸어 모으다시피 했다. 고로 돈에 대하여 전혀 아쉬울 것 없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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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마이크로컴퓨터 소프트웨어 'CP/M'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고 사실로 받아들여진다고 했던가? 게리 킬달이 망하게 된 이유는 IBM이 찾아왔을 때 게리 킬달이 한가롭게 비행기나 몰러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일까? 데이비드 A. 캐플란 뉴스위크 기자는 1980년 8월 당시 기술 책임자였던 톰 로랜더(Tom Rolander)와 20년 후 당시(2000년) 배경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다. 로랜더는 인터뷰에서 ‘게리는 비행기를 몰고 있었어’에 대해 날조된 신화라고 반박했다.


1980년 8월 어느날 빌 게이츠는 게리 킬달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회사라는 말은 안하고 대형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후 얼마 있어 IBM 보카랜턴팀이 게리 킬달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찾아오겠다 하였다. 그러나 당시 게리 킬달은 로랜더와 함께 CP/M 고객인 빌 갓바우(Bill Godbout)와 오클랜드 공항에서 선약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회사 운영자이자 게리 킬달의 아내인 도로시 킬달이 IBM을 먼저 만나 미팅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아쉬운 쪽은 게리 킬달이 아닌 IBM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킬달은 이미 수백만 달러를 벌고 있었고 IBM이 제시하는 불공정한 태도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쪽은 IBM이었지만 이미 거대기업이었기에 디지털리서치 운영자 도로시 킬달에게 매우 무례하게 행동했다. IBM은 가정용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 뿐 아니라 IBM에서 디지털리서치(DRI)에 전달한 내용 모두 비밀이고 DRI에서 IBM에 전달한 내용은 공개하자는 내용으로 갑을계약을 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계약서 서명을 거부하고 고문 변호사에 전화 걸어 자문을 요청하자 거대기업 IBM은 이런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다.

 

게리 킬달과 로랜드는 IBM이 왔다간 후 아내에게 관련 내용을 들었다. 그리고 쿨하게 대단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IBM은 거대기업이었기 때문에 가정용 컴퓨터 시장에 들어오게 되면 큰 실익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게리 킬달은 그저 수십만 달러짜리 건수나 올리고 말겠구나 생각하고 못 이긴 듯 IBM이 내미는 서류에 사인을 하게 된다.(추후 게리 킬달은 계약을 번복하고 만다.) IBM이 내미는 서류에 사인 했다는 사실을 MS가 퍼트린 역사에서 일부러 누락하였다. 로랜더 말에 따르면 “비행기를 타러 갔을 뿐”은 철저하게 날조된 승자의 역사인 것이다.



5. 갑을 계약


게리 킬달과 IBM이 종국에 계약이 안된 이유는 IBM 측에서 새로 나온 CP/M-86을 개 당 10달러의 로열티가 아닌 수십만 달러의 일정액으로 라이센스(한 번만 지급)할 것으로 요청했고, 또한 당시 누구나 알고 있었던 이름인 CP/M을 버리고 PC-DOS로 명명하길 요구했다. 게리 킬달은 이 두가지 조건에 대해 거절한다. 게리 킬달 입장에서 이미 CP/M으로 알려져 한 카피당 75달러에 판매하는 제품을 불공정하게 계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IBM은 협상이 결렬되자 속이 타기 시작하였고, 게리 킬달과 재협상을 위해 협상 중개자로 빌 게이츠를 다시 찾아갔다. 이때 이미 빌 게이츠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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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바꿔 먹어 볼까.


빌 게이츠는 프로그래밍 실력으로는 게리 킬달의 발끝에도 못미쳤지만 변호사 어버지 덕분인지 사업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다. 빌 게이츠 자신은 IBM과는 비교 할 수 도 없는 임직원 40명 남짓 신생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가 보기에도 MS가 개발한 BASIC 인터프리터는 컴퓨터의 필수요소는 아니었다. 컴퓨터에 반드시 필요한 건 OS 였다. 히피하고는 거리가 먼 빌 게이츠는 IBM이 다시 찾아오자 일생일대의 천운이라 생각했다.

 

빌 게이츠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MS는 자신이 만든 OS가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빌 게이츠 편이었다. 공동 대표 폴 앨런은 운영체제를 가진 회사가 도시 건너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회사가 시애틀 컴퓨터 프러덕트(Seattle Computer Products)라는 회사였다. 이 회사에서는 빠르고 부정한 운영체제(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 Q-DOS)라는 이름으로 CP/M 동작을 모방하여 만들어 이용하고 있었다.(빠르고 부정한... 이름이 꼭 자신의 운명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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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앨런, 그리고 빌 게이츠.


게리 킬달은 CP/M에 대한 소유권을 독점하기 위해 법적인 조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시애틀 컴퓨터에서는 게리 킬달과 서로 알고 있었고 거래도 하고 있었다. Q-DOS가 CP/M을 베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히피였던 게리 킬달은 별로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CP/M 소스를 가져가서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니 그냥 모른척 했을까? 아님 자신도 UNIX와 IBM VMS CP/CMS에서 많은 기술을 공유하여 개발했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을까? 아쉽게도 게리 킬달이 간과했던 건 OS의 작동 방식이 아닌 어느 하드웨어에서도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끔 한 BIOS 개념이었다.


1980년 늦가을 폴 앨런은 시애틀 컴퓨터와 접촉하여 IBM 이야기는 쏙 빼버리고 75,000달러에 소프트웨어 소유권을 가져오고 MS-DOS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나서 IBM과 협상자리에 앉았다. IBM은 저명한 변호사이자 빌 게이츠의 아버지인 메리 게이츠를 의식한 탓인지 MS에게 대당 50달러의 로열티를 주면서 소유권도 인정해 주었다. MS에게는 천운이고 IBM에는 뼈아픈 계약이었다. (그 계약으로 MS는 1981년 한해에만 IBM PC 판매하는 첫해에 3억 달러를 벌었다.)

 

게리 킬달은 MS-DOS가 CP/M을 모방한 상품임에 분개했지만 소송을 걸지 않았다. 거대기업 IBM을 상대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당시만 하더라도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대한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리 킬달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소문을 내자 IBM이 다시 찾아 왔다. MS와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자고 하였다. 단 가격을 IBM이 결정하였다. MS-DOS의 경우 60달러, CP/M의 경우 240달러로 책정하였다. CP/M-86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MS-DOS에 비해 성능이 우수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변별력을 모르는 일반 소비자들은 200달러 가량 더 지불하고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IBM의 가격결정의 배후조정자가 혹시 빌게이츠가 아니였을까? IBM PC 계약에서 결정적인 갑은 IBM이 아닌 빌게이츠가 되었다.



6. 최종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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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까지 CP/M은 여전히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었다.


IBM은 게리 킬달이 구축한 BIOS 개념을 간과했다. CP/M의 구성 중 하나가 BIOS였는데 IBM은 호환이 안되는 BIOS 개발하여(IBM PC에서 유일하게 개발한 것이 ROM BIOS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저작권을 걸어두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컴퓨터 하드웨어 회사들이 게리 킬달의 BIOS 개념을 통하여 서로 다른 하드웨어에서 CP/M을 설치하고 있었다. 고로 컴퓨터 BIOS 개념에 대해 많은 가정용 컴퓨터 회사들이 이미 익숙해 있었다. 이때 컴팩은 IBM BIOS 코드를 베끼지 않고 역설계(라 읽고 노가다로 번역한다.)로 IBM BIOS를 재구성하게 된다. (상품가치전쟁 3편 下 참조) 게리 킬달의 IBM에 대한 복수를 엉뚱하게 게리 킬달의 BIOS 개념을 이해한 컴팩이라는 회사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빌 게이츠로 성공으로 인해 사업에 흥미를 잃어버린 게리 킬달은 죽을 때까지 빌게이츠 망령에 사로잡히게 된다.IBM과의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한 아내 도로시와 이혼하고 자신의 분신인 DRI를 노벨에 매각하여 1억 2천만 달러를 챙겼다. 그 후 재혼을 했지만 빌 게이츠에 대한 화병은 가라앉지 않았다. 게리 킬달은 PBS에서 6년 간 컴퓨터 프로그래밍등을 진행했지만 결국 우울과 술에 쩔게 되었다. 노벨사에 매각하여 번 돈 1억 2천만 달러로 300만 달러 리어제트기와 호화 저택에 머물렀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1990년 게리 킬달은 자서전을 집필한다. 내용의 대부분은 빌 게이츠에 대한 날선 비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출판되지 않았다. 게리 킬달 사후 게리 킬달의 아들이 법정 송사에 휘말리기 싫어 출판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8일 금요일 자정 바로 전 술집 안에서 게리 킬달은 비디오 오락실 옆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지만 그 자신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만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누군가와 싸웠는지 어쩐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병원 응급처치를 마다하고 집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 주 주말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들은 뇌의 출혈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3일 후, 게리 킬달은 사망한다. 그 때 그의 나이 52살이었다. 게리 킬달의 장례식에 빌 게이츠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홍보담당 직원을 보내 'PC 업계의 손실'이라는 짧은 추도를 읽게 했을 뿐이었다. 한 때는 친분으로 회사를 합병하려고 했던 사람에 대한 너무나도 냉정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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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킬달 1942~1994


빌 게이츠의 MS는 MS-DOS로 PC의 플랫폼을 만들었고 그 것을 바탕으로 WINDOWS를 발표하여 거대 제국을 완성하였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만, 게리 킬달이 IBM과 공정한 계약을 했다면 지금의 MS자리에 DRI가 자리하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게리 킬달은 비록 서부에 거주하지 않았지만 기술 매니악이자 이상주의자로... 그냥 히피 였다. 그런 탓에 빌 게이츠와 같은 날이 선 판단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 빌 게이츠는 애플II를 통해 가전제품의 가치를, IBM을 통하여 시장의 크기를, CP/M을 통하여 IBM이 미쳐 보지 못한 BIOS개념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MS는 거대기업인 IBM 앞에서 철저한 약자로 있었지만, MS-DOS의 상품가치를 게리 킬달보다 1,000배 이상 크게 보았고, 그 예상은 완전히 적중하게 되었다. 강자에 빌붙어 동료 기업인의 뒤통수를 치는 빌 게이츠의 행위는 비난 받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상품에 대한 그의 판단엔 감탄을 하게 된다. 그는 히피가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의 게임의 승자는 다시 히피가 세운 기업에게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거대 MS를 이긴 기업은 30년 동안 히피 짓으로 항상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애플이다. 애플은 시장에 승복한 듯 INTEL CPU를 맥에 채용하는 등 많은 기술을 IBM PC 산업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다시 방향을 완전히 틀어 언제 그랬냐는 듯 iPhone을 통하여 독자적인 걸음을 걷고 있다. 다시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OS를 하드웨어와 완전히 통합시켜버렸다. 처음에는 iOS에만 그러하다가 맥킨토시까지 하드웨어에 OS를 통합하여 가전 상품으로 만들었다. 물론 70년대의 OS 시장 분위기 하고는 매우 다르지만 지금의 iPhone으로 대변되는 애플은 40년 전 Apple II와 DRI의 CP/M가 양분했던 가정용 컴퓨터 시대와 묘하게 닮아 있다. 지금의 윈도우즈, 리눅스, 윈도우 모바일, 안드로이드등은 게리 킬달이 CP/M에 구축했던 BIOS 개념에 빚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애플도 포함해서.

 

 

이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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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