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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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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21>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찌질한 위인전 <22> - 어니스트 헤밍웨이 (下)]

[찌질한 위인전 <23> - 요제프 괴벨스 (上)]










박사 실업자 괴벨스


무너진 내적 질서와 소외감, 가난과 싸워야 하는 처지가 계속되었지만 괴벨스는 마침내 만 스물 넷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괴벨스에게 있어 박사라는 칭호는 신체 장애로 인하여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 우월한 지적 지위의 완성이었다. 베를린 관구장, 선전 장관 등 이후 그가 얻게 되는 많은 직함에도 불구하고 괴벨스는 언제 어디서나 늘 박사로 불리길 원했다. 확실히 박사괴벨스는 이전보다 더 존중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성취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박사로 부르던 주변 사람들을 보며 괴벨스가 스스로 지적 우월감에 취해있던 간에 현실 속 괴벨스의 처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차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사회 혼란 때문에 거의 붕괴상태에 빠져있었다. 괴벨스가 박사 학위를 취득한 1920년대 초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독일을 휩쓸어 민생이 파탄에 이른 시기였다. 박사 실업자가 된 괴벨스는 가끔 신문에 기고를 하면서 푼돈을 손에 쥐었지만 여전히 그의 설 자리는 없었다. 괴벨스의 우울과 분노는 더욱 심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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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 인플레이션으로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화폐 가치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의 도움을 얻어 가까스로 독일의 국영 은행에 취직한 괴벨스. 애초에 은행가의 돈 놀이에 별 관심도 없었던 그는 금융권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행태에 충격을 받는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화폐 가치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경제 상황에 서민들은 신음하고 있는 반면 소위 은행가라는 자들은 이를 이용해 개인의 부를 쌓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자본 투자라고 말하지. 그러나 그런 그럴듯한 말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짐승 같은 허기만이 있을 뿐이다. ‘짐승 같은이라고 말했지만, 이 표현은 짐승에 대한 모욕이다. 왜냐하면 짐승은 배가 부르면 먹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당시 괴벨스의 일기


직장 내에서도 괴벨스는 외톨이였다. 드레스덴 은행원 괴벨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일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한 차례 병가를 냈던 괴벨스는 또 다시 병가를 신청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해고당한다. 출근을 시작한 지 열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해고를 당한 후에도 한동안 괴벨스는 일자리를 소개해준 여자친구의 눈치를 보며 거짓 출근을 한다.


당시 괴벨스에게 남은 것은 국가와 사회를 향한 증오와 분노, 그리고 우울과 절망뿐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허울뿐인 박사 학위를 가진 박사 실업자 괴벨스에게 사회적 존재감은 단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울감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면 괴벨스는 여자 친구나 주위 사람들에게 자살 통보를 함으로써 관심과 위로를 구했고, 그렇지 않을 때면 사회 변혁을 꿈꾸는 공상가가 되어 현실로부터 도피했다.


잘못은 외부에 있다.


글을 쓸 때 그는 언제나 자신을 구구하게 변명하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언제나 책임을 타락한 세상에 돌렸다. 그는 자신이 고유한 견해, 시민적 용기, 인격, 개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질주의적 세계로 접근할 길이 막혀버렸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예외적 현상이라는 환상 속으로 도피했다.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괴벨스대중 선동의 심리학』


괴벨스는 어릴 적부터 증오의 힘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아왔다. 증오의 원천이었던 따돌림, 그 원인이 된 장애가 그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을 원망했던 어린 괴벨스는 증오의 힘으로 박사 지위를 얻어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으므로, 책임의 화살을 다시 외부로 돌렸다. 괴벨스는 자신의 처지가 박사 실업자로 전락하자 특히나 그 책임을 사회 귀족과 유대인 자본가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 서린 증오는 그를 간신히 지탱할 뿐, 전처럼 삶의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예전의 괴벨스는, 비록 원망하기는 했어도 신이라는 존재가 내면의 질서를 잡아주었고, 지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존재감 획득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연료가 바로 증오의 에너지였다.


하지만 괴벨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던 신앙의 질서는 그 자신이 신을 버림으로써 무너졌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현실의 괴벨스는 그저 실업자에 불과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외부 환경으로 전가한 그에게는 더 이상 뚜렷한 지향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괴벨스는 더 이상의 내적 공허와 혼란의 상태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삶의 잣대가 되어줄 누군가를 갈망했다. 그의 삶을 지배할 누군가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내면의 혼란은 감당하지 못했던 그가, 새로운 구원자의 출현을 위해서라면 사회의 혼란이 좀 더 이어져도 좋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괴벨스는 신을 버렸지만 여전히 신앙인이었다. 다만 믿음의 대상을 찾지 못했을 뿐.


신을 크고 강하게 만들수록, 나 자신이 크고 강해진다

-괴벨스의 소설 「미하엘」의 주인공


괴벨스의 메시아, 히틀러


괴벨스가 드레스덴 은행에서 해고당한 한 달 뒤인 1923 10, 뮌헨의 맥주홀에서는 한 사내가 일으킨 폭동이 실패로 끝난다. 이듬해 2, 법정에 선 이 남자는 반역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사실상 재판장의 묵인 하에 장시간 동안 스스로를 변호하며 자신의 행위가 순전히 애국심에 의한 것이었다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그는, 순식간에 전국적 인지도를 얻음과 동시에 다수의 추종자를 끌어 모은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훗날 나치 제국의 총통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600만 학살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되는 인물. 한 때 나치당을 한껏 조롱하기도 했던 괴벨스는 이 사건을 통해 히틀러의 존재를 머릿속에 각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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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


5년형을 선고 받은 히틀러가 실제 복역했던 기간은 13개월. 그 사이 괴벨스는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열혈 나치당원이 되어갔다. 히틀러의 폭동으로 불법화된 나치당에서 괴벨스는 자신의 독일어 작문 실력과 지성을 뽐내면서 한편으로는 연설 능력까지 인정받아 지역 당내에서 점차 존재감을 키워나간다. 그때까지도 괴벨스는 히틀러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고 수감중인 히틀러는 괴벨스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1925 7 11, 나치당 회의 전날 괴벨스는 처음으로 히틀러와 대면-사실상 괴벨스가 히틀러를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한다. 아직은 그저 나치 지역당 사무장에 불과했던 괴벨스는 곤궁한 형편 만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어서 나치 중앙당 대회에 참석하고자 해도 기차표 값을 먼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 남자는 왕이 되는데 필요한 덕목을 남김없이 갖추었다. 타고난 호민관이며, 떠오르는 독재관이다.”

-괴벨스의 일기, 히틀러를 두 번째 만난 날


이 남자는 누구인가? 반은 평민이고 반은 신이다! 진정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단지 사도 요한인가?”

-괴벨스의 일기,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읽고 난 후


이러한 괴벨스의 일기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사실은, 인간 히틀러를 제대로 만나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괴벨스가 이미 그를 신적 존재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괴벨스를 주목하기 전부터 그는 이미 히틀러를 정의로운 세계를 구현할 시대의 구원자로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사회와 괴벨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히틀러 출현 당시 독일 사회의 모습과 인간 괴벨스 개인의 모습이 묘하게 닮아있었다는 점이다. 1차세계대전으로 패망한 독일 사회는 패전국이라는 멍에와 함께 전쟁 배상금을 짊어지게 되어 최악의 경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국가주의의 물결을 타고 한 때나마 세계 제패를 꿈꾸었던 독일 국민들의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기도 벅찬 마당에 독일 내 정치 혼란까지 더해져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패전국 독일이 처한 국제 사회에서의 소외감, 자존감의 상실은 마치 신체 장애 때문에 일찍이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 받으며 살아온 괴벨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괴벨스가 겪었던 가난과 궁핍, 그리고 내면의 혼란은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과 정치 혼란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괴벨스와 독일 사회 앞에 나타난 히틀러와 나치. 내면의 혼란을 견디지 못한 괴벨스는 신적 존재를 갈구하다 히틀러를 만났다. 정치에 대한 피로감과 국가적 자존감 상실에 고통 받던 독일 사회는 점차 나치당에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그리고 나치당이 독일 내 최고 권력을 획득하는 그 과정의 선두에 선 것은, 다름 아닌 괴벨스 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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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총통 신앙 괴벨스 안에는 괴벨스가 없다


보통의 종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참된 신앙인은, 내적 판단의 준거를 인간의 잣대가 아닌 신의 섭리와 가르침에 두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 자신의 신념이나 주장을 버려야 신앙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단지 정치 지도자에게 바치는 충성이 아닌 종교적 차원의 신앙을 품었다는 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기록한 일기에 나타난 히틀러의 묘사뿐 아니라 히틀러와 자신의 이념 혹은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보였던 괴벨스의 행동 양식에도 잘 나타나있다. 그가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히틀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괴벨스가 본격적으로 나치 당원 활동을 전개할 무렵, 당 내에서도 그는 사회주의 좌파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당시만해도 그가 생각한 가장 큰 타도의 대상은 증권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이후 나치당의 노선을 놓고 사회주의 좌파 계열과 히틀러의 민족주의 우파 계열이 충돌하자 괴벨스는 같은 계열에 속해있던 사람들을 등지고 미련 없이 히틀러의 의견을 따른다. 자신의 사상과 신념보다는 히틀러라는 신앙을 따르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지배하고 싶어한다. 나는 벼르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히틀러의 편이다. 히틀러가 나를 배신하더라도

-괴벨스의 일기



슈트라서를 비롯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언젠가 본색을 드러냈던 바로 그것이 괴벨스에게는 여전히 신성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는 그에게는 역사를 형성하는 신적인 의지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괴벨스대중 선동의 심리학』


나치당이 독일 정권을 잡은 후에도 괴벨스는 종종 히틀러가 자신의 견해와는 다른 판단을 내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히틀러가 서유럽을 공격하기 위해 그 동안 나치가 원수처럼 여겼던 볼셰비키의 나라 소련과 화친하겠다는 계획을 처음 괴벨스에게 밝혔을 때에도 그는 당황했다. 기어이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 중 독일을 양면전선전쟁으로 몰고 갔을 때에도 괴벨스는 충격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서유럽 국가와의 서부전선전쟁과 소련과의 동부전선전쟁을 동시에 펼쳤기 때문인데, 개전 당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못박았던 히틀러가 말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에 대한 괴벨스의 의심과 실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괴벨스는 자신의 견해와 히틀러의 판단 사이의 괴리가 발생할 때마다 자기기만에 가까운 믿음과 현실 왜곡으로 그 사이를 채워나갔다. 히틀러의 오판 때문에 실패로 귀결되고 만 사안에 있어서도 괴벨스는 신의 섭리 안에서 히틀러와 나치가 더 큰 승리를 위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믿었다. 히틀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에도 그 책임을 히틀러의 주변에서 총통의 판단력을 어지럽히는 무능한 부하들에게 돌려버렸다. 사실 그조차도 필요 없었던 것이, 괴벨스는 히틀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올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순종은 나치의 성장과 정권 탈취 과정에서 히틀러가 시도한 몇 번의 전부를 갖거나 모두를 잃게 되는도박성 모험이 성공을 거두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러한 도박성 모험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괴벨스는 예외 없이 말이나 글을 통해 히틀러를 신의 섭리 안에 있는 인물로 추앙했으며 그것을 온전히 히틀러의 다음 결단에 복종해야만 하는 근거로 만들었다.


괴벨스 안에 괴벨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괴벨스의 중심에는 오로지 지구상 최고의 천재’, ‘반인반신의 히틀러가 자리하고 있었다. 신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하는 사제나 할 수 있는 행동을, 괴벨스는 현실 정치에서 인간 히틀러를 신의 지위에 올려놓고 행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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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 부부와 히틀러


선동가 괴벨스 증오의 선지자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선동가이자, 역사상 최초로 라디오를 비롯한 방송과 매체를 선전에 이용한 나치제국의 선전 장관 괴벨스. 그의 탁월한 선동술의 본질적 핵심은 증오에 있었다. 증오를 자양분으로 평생을 살아온 괴벨스는 증오가 지닌 파괴적 에너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증오의 대상이 되는 공공의 적을 내세워 얻게 되는 내부 결속과 세력 확장 효과를 노린 괴벨스는,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설과 연출 기법의 활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히틀러라는 절대신앙을 신봉하는 괴벨스에게 선전과 선동은 일종의 포교 활동이나 다름 없었다. 괴벨스는 사람들의 증오심을 자극하여 과격한 행동으로 적을 공격하도록 선동하는 한편, 그에 대한 상대의 반격으로 아군이 공격을 받아 희생자가 발생하면 그것을 더 큰 복수심과 증오로 치환시켰다. 괴벨스는 나치의 돌격대원 호르스트 베셀을 비롯한 나치의 희생자 장례식을 가장 확실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선동의 장으로 만들었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그에 대한 증오가 더 큰 증오를 낳게 하는 악순환의 연속. 괴벨스가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애초에 인간의 존체 자체를 경멸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그의 시각이 자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뿐 아니라 따르는 사람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도 갖지 않았다. 그는 증오의 선지자였다.


나치즘 선동과 학살의 희생양, 유대인


나치는 초창기부터 몰락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유대인을 증오의 제물로 삼았다. 그 당시 반유대 정서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넓게 퍼져있었고 역사 또한 짧지 않았다. 더욱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출판된 몇몇 학자의 반유대 관련서는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괴벨스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박사학위를 취득할 무렵까지만 해도 괴벨스는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여자친구에게 유대인을 없애자는 식의 반유대주의는 천박하고 비인간적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박사 학위 지도교수는 유대인 군돌프 교수였다. 그러나 이후 괴벨스는 과격한 반유대주의에 천착해 갔고 그 광기를 나치와 히틀러를 만나면서 폭발시킨다.


1차세계대전 패망으로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에게는 당장의 좌절과 분노를 폭발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스스로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런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비교적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독일에 닥친 이 모든 시련의 근본 원인이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주장은, 그 진위 여부를 깊게 따지고 들어가기도 전에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나치는 반유대주의에 반공주의까지 곁들여 세력을 넓혀갔고, 괴벨스 자신조차 비인간적이고 천박하다고 이야기한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는 나치 정권 하의 독일 내 주류 정서로 자리 잡아 결국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산업적 학살이라는 비극을 야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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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흐름을 선두에서 이끌어간 괴벨스. 괴벨스가 입안시키려 하는 반유대 정책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악랄하게 변모해 갔다. 나치와 히틀러를 만나면서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얻은 괴벨스는 나치가 승승장구 함에 따라 개인의 부와 영향력이 나날이 커져갔다. 그런 그에게 더욱 강력한 반유대주의 선동과 정책은 더 커다란 성공과 치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게다. 또한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자, 괴벨스는 인종청소, 인종절멸 수준의 유대인 말살을 획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 과시하고자 했으므로 600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괴벨스가 끼친 영향은 크기는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하겠다.


총력전 괴벨스의 선동이 만들어낸 집단 광기    


스스로 열광했기에 타인을 열광시킨 신도

-독일의 극작가 롤프 호후투트의 괴벨스 인물평


2차세계대전의 전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 히틀러의 양면전선전쟁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선전을 거듭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소련의 모스크바까지 진격하는 등 괴벨스가 믿어 의심치 않은 히틀러의 천재적 전략이 빛을 발하는 듯하였으나 이내 어려움에 직면했다. 혹한의 겨울과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에 부딪힌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했고, 미국이 참전한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을 밀어내면서 점차 독일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이른바 총력전을 제안한다. 총력전이란 국가의 총동원체제를 일컫는 말로 전 국토를 병영화하는 한편 모든 생산설비를 병참기지화 함으로써 전력을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괴벨스는 일찌감치 자국을 총력전 체제로 탈바꿈시킬 것을 계획하면서 스스로 총력전의 총책임자가 되고자 했다.


1943 2 18, 괴벨스는 체육궁전에서 전국민의 총력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연설에 나선다.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전세를 왜곡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독일 국민 개개인의 운명을 국가의 운명, 정확히 말하자면 히틀러와 나치의 운명에 결부시켜 구성원의 힘을 한곳에 모으고자 했던 괴벨스 일생일대의 선전, 선동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당시의 연설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을 통해 우리는 현장의 열기가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소름 돋는 집단 광기의 현장. 그러나 괴벨스에게 그들은 단지 히틀러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 열광했기에 타인을 열광시킨 신도 괴벨스. 독일 극작가 롤프 호후투트의 인물평은 히틀러를 신앙으로 떠받는 광신도 괴벨스가 어떻게 대중을 광기로 몰아넣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사실 괴벨스가 구상한 총력전은 체육궁전의 연설이 있고 나서도 훨씬 후, 독일의 패전이 기정사실화 되고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히틀러가 여전히 총력전을 망설인데다 총력전의 전권이 괴벨스에게 위임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길을 택한 광신도의 최후 증오는 우리의 의무


1944년의 2차세계대전 전황은 나치 독일의 몰락이 굳어진 해였다. 그 해 6,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프랑스를 탈환하고 독일 본토의 서부 국경을 위협해왔다. 동부의 소련 또한 독일의 동쪽 국경에 다다르면서 히틀러의 도박은 이제 그 끝을 얼마 남겨두지 않게 되었다.


히틀러는 정신과 육체가 모두 예전 같지 않았다. 자제력과 판단력을 잃은 나치 제국의 우두머리는 패전이 불 보듯 뻔하게 된 상황에서도 비이성적인 낙관론으로 허무맹랑한 전술 지시를 내리며 참모들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유일한 예외, 괴벨스 만이 끝까지 히틀러의 지시를 경청하며 혹시 모를 희망을 잃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뒤늦게 총력전의 전권을 손에 넣은 괴벨스는 이미 독일 국경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에도 결사항전의 채비를 갖추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남아있던 모든 가용 인원을 끌어 모아 국민보병사단국민돌격대를 창설했는데 군대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민병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력의 부대였다. 그들은 연합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동원된 총알받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괴벨스의 악마적 선동술은 그렇게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국민을 대량 학살의 현장에 투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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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이 확실해진 순간에도 독일 국민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괴벨스의 선동에 이끌린 이유는 오직 하나, 괴벨스가 끝까지 증오와 복수의 심리를 그들에게 주입시켰기 때문이었다. 괴벨스는 1차세계대전에 이어 또다시 독일이 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된다면, 살아남아봤자 연합국의 노예가 되어 죽음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거짓 선동과 증오의 메시지를 쏟아내며 차라리 목숨을 바쳐 승전의 희망을 이어나가는 쪽을 택하도록 강요했다. 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존재 히틀러가 가망이 없는 전세에서 다시금 독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만도 빼놓지 않았다. ‘복수는 우리의 미덕, 증오는 우리의 임무!’ 괴벨스가 내놓은 최후의 선동 구호는 끝까지 힘을 발휘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양산했다.


1945년 봄, 최후의 방어 거점인 베를린 시가지가 연합군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가 되었다. 괴벨스는 사이비 종교집단 최후의 추종자마냥 전혀 가망 없는 희망의 끈을 찾아 헤맸다. 역사를 탐닉하면서 극적인 부활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최후를 준비했다. 괴벨스를 그 자리까지 몰아세운 어긋난 히틀러 신앙으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은 순교자의 길이었다.


괴벨스가 직원들과 작별하면서,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부하가 될 것을 강요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지극히 냉소적으로 이제 여러분은 목이 잘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끝없는 멸시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괴벨스대중 선동의 심리학』


히틀러를 추종했던 나치의 핵심간부, 이를 테면 괴링, 힘러, 슈페어 같은 이들은 패망이 눈 앞에 다가오자 제 살길을 찾아 히틀러를 떠나갔다. –물론 대부분 실패로 끝나서 종전 후 전범 재판을 통해 처형되거나 처형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따르는 길이 곧 신앙의 길이었던 괴벨스는 히틀러와 최후를 함께할 것을 다짐한다. 괴벨스는 자신보다 더한 히틀러 추종자였던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슬하의 여섯 자녀를 히틀러의 벙커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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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4 30, 연합군 병력이 히틀러가 머물던 지하벙커 지척에 다다르자 히틀러는 불과 하루 전에 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 자살한다. 히틀러의 뒤를 책임지기로 한 괴벨스는 히틀러와 브라운의 시신을 소각하는 한편 히틀러의 뒤를 이어 나치 제국의 총리자리에 오름으로써 히틀러의 가장 충직한 신하이자 신도가 되고자 했던 그의 목표를 성취한다. 다음날인 5 1, 마그다 괴벨스가 수면제와 청산가리로 여섯 자녀를 모두 죽이고 난 후에, 괴벨스 부부는 나란히 히틀러의 뒤를 따른다. 괴벨스는 죽기 직전까지도 나치즘의 부활을 소망하고, 예견하며 생을 마감했다. 순교자가 된 괴벨스는 죽어서도 나치스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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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남은 괴벨스의 시신


쉽고 편한 것, 어렵고 불편한 것


시간이 지난 뒤, 한 사회 전체를 광기로 몰아간 괴벨스의 선동술과, 그에 동참한 당시의 독일 사회는 나란히 연구 대상이 되었다.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듯 시스템을 갖춘 수용소에서 산업적 학살을 당해야 했던 6백 만 유대인을 바라보는 당시 독일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일인 가운데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협력한 숫자는 전체의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나머지 90%는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어쨌거나 그들은 모두 나치에 권력을 위임했기 때문에 책임이 있고, 이후에도 그들의 행위를 방관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가혹한 경제난과 정치 혼란 속에 느꼈을 그들의 피로감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됐든 그들이 조금 더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통째로 나치에 위임한 행동의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게 나타난 이상, 좋든 싫든 당시의 독일 사회는 인류사의 본보기로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 증오의 에너지를 한껏 응축시켰던 괴벨스는 히틀러라는 메시아를 만나면서 그것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절름발이 악마라는 별명이 모자라다 싶을 정도의 그의 행적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악랄하고 사악했기에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겠다.


다만,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괴벨스 또한 악마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다. 괴벨스를 통해 우리는 인간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어두운 면의 저 끝을 확인했다. 괴벨스가 악마로 변모해갔던 지점에는 지금껏 살펴보았듯 몇 가지 변곡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괴벨스와 당시의 독일 사회가 처했던 환경과 고민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주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문제는,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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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균형


인간 괴벨스의 총체적 특징, 그것은 외부와 내면의 심각한 불균형이다. 어려서부터 자존감을 상실한 괴벨스는 모든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발생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증오. 괴벨스의 증오는 언제나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 사회와 타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법도 없었다.


그를 지탱한 또 다른 버팀목은 신앙. 신앙의 대상이 신이 되었든 신적 존재에 비견할 만한 인간되었든 간에 외부 존재로부터 강한 동기를 얻고 그에 이끌려 자신이 가진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 또한 엄밀히 말하면 내적 요인이 아닌 외부 요인이므로, 괴벨스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간 증오와 신앙의 힘은 모두 그 방향이 괴벨스의 내면이 아닌 외부를 향하고 있었다. 평생을 열등감 속에 살았던 괴벨스는 실상 그 자신은 빈껍데기인 상태로 외부적 요인을 가득 채운 채 살아갔다.


괴벨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히틀러를 만나기 전 괴벨스는 좌절과 내면의 혼란에 빠져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지만 그때야말로 스스로의 무언가를 채워 넣을, 그래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기회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괴벨스는 스스로에게 그러한 기회조차 주지 않고 서둘러 자신을 구원할 외부의 존재를 찾기에 급급해 했다. 괴벨스 안에 들어찬 히틀러의 공간은, 히틀러가 괴벨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만든 자리가 아니라 미리부터 괴벨스가 만들어 놓고 누군가 들어오기를 기대한 자리였다.


히틀러를 향한 신앙에 가까운 믿음에서조차 괴벨스는 균형을 잃었다. 나치당 내부의 노선문제로 갈등을 겪었을 때에도, 괴벨스는 별다른 고민 없이 신념을 버리고 히틀러를 선택했다. 이후 수 차례 히틀러의 판단과 자신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지만 괴벨스는 자신의 판단과 히틀러에 대한 의구심을 너무 쉽게 꺾어버렸다. 문제는 히틀러가 신이 아닌 인간일 뿐이라는 것, 괴벨스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억지로 히틀러를 신적 존재로 끌어올리면서 내면의 혼란보다는 강제된 질서를 택했다는 것이다.


파도 위에 떠 있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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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우리 자신이 겪는 혼란이나 사회가 겪는 혼란은 심한 파도 속에서 노를 젓는 상황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 위에서는 물결이 잔잔할 때보다 파도가 심하게 일렁일 때 더욱 균형을 필요로 한다. 혼란을 겪는다는 것,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균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버티고, 기다려야만 한다. 파도를 극복한다는 것은, 파도를 강제로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전복되지 않고 버텨내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파도가 잔잔해졌을 때,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던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항해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를 지켜내는 데 쓰일 것이다.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버텨내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질서나 스스로 고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강제된 질서에 몸을 맡기는 것은 마치 심한 파도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지껏 움켜잡고 있던 노를 놓아버리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게 했을 때, 파도를 견뎌내는 더 이상의 노력은 기울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우리가 느낄 질서와 편안함은 전복된 배, 바다 속에 잠긴 상태에서의 안락함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찌질한 위인전의 두 번째 외전, 요제프 괴벨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에필로그


2013년 8월 26일, <찌질한 위인전>은 프롤로그와 함께 김수영 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오늘,

괴벨스 하편을 마지막으로 <찌질한 위인전>의 첫 번째 시즌을 마감합니다.

(두 번째 시즌이 언제 시작될지, 어떤 모습일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찌질한 위인전>의 기획은 제가 딴지일보에 들어오기 전부터

언젠가 한 번 꼭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찌질한 제 모습에 괴로워하다가, 

어느날인가 굵직한 인물들의 평전을 보니,

왠지 그들의 찌질한 모습이 눈에 더 자세히 들어왔습니다.

그게 위로가 될 줄은, 그땐 미처 몰랐는데 말이죠.


연재를 통해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것을 단 한 가지 꼽으라면,

저는 '위로'를 먼저 떠올리겠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 우리가 다시금 찌질함의 구렁텅이에 빠질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덜 찌질해질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뱀발> 내년 중으로 <찌질한 위인전>이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부족한 부분 더 잘 다듬어서 최대한 덜 부끄러운 결과물로 찾아뵙겠습니다.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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