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8. 31. 월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가끔 하는 전쟁 이야기 사랑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한국 지폐에 등장하는 위인들은 한 번 정해지면 좀체 그 자리를 내놓지 않지? 조선의 이씨 가문 말이야. 그에 반해 영국의 경우는 좀 달라. 영국의 모든 종류의 지폐에는 현재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화가 들어 있지만 그 뒷면의 인물들은 주기적으로 바뀌거든. 영국 중앙은행은 2016년 발행될 새로운 5파운드 화폐 인물로 윈스턴 처칠을, 2017년 발행 예정인 10파운드 화폐에는 작가 제인 오스틴을 담는다고 공지한 바 있어. 


영국 화폐 일반의 주인공들처럼 기품 넘치는 귀족풍이거나 귀족 전용의 양털 가발을 쓴 차림새를 한 사람이 지폐에 들어가야 할 것 같지만,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영국 20파운드 화폐 반쪽의 주인은 ‘흐트러진 머릿결’과 수수한 옷매무새의 한 평민 과학자였어. 바로 마이클 패러데이지. 


1.jpg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제임스 와트가 기존의 증기 기관을 혁명적으로 개량하여 특허를 받은 것이 1769년의 일이었고, 그에 힘입은 면직물 공업이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가운데 영국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걸었지. 1791년생 마이클 패러데이는 학교 문 앞도 가보지 못하고 교회에서 더하기 빼기 정도나 익힌 애였어. 어린애 티를 갓 벗은 14살부터 손이 부서져라 일하며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수백만 영국 소년 중의 하나였지.

그에게나 인류에게나 다행스런 일은 페러데이가 탄광이나 면직물 공장에서 혹사당하지 않고 책 제본 공장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거야. 그는 자신의 일거리에서 빛을 보았고 지혜를 얻었다. 하지만 회개 이전의 스크루지 영감 같은 주인장 밑에 있었다면 패러데이의 지적 탐구욕은 주제넘는 노동 계급 소년의 몽상으로 끝났을지도 몰라. 하지만 주인 리보는 이 영특하고 성실한 소년에게 호감을 품었고 쉬는 시간이면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스폰지처럼 지식을 흡수하던 패러데이는 어느 날 '전기‘(電氣)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며, 과학적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작동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접할 수 있는 ’전기‘는 어린 패러데이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어.


리보는 자신이 거느린 이 유망한 일꾼의 존재를 주변에 열심히 알렸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패러데이에게 영국 왕립학회가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순회 강연 티켓을 전해 주게 돼. 이 강연에서 만난 사람이 험프리 데이비였어. 데이비는 ‘전기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야. 그의 강의는 전기에 인생을 걸고자 마음 먹은 젊은 패러데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갖은 노력 끝에 패러데이는 험프리 데이비의 조수가 되긴 하는데 데이비는 패러데이에게 훌륭한 스승이었지만 아름다운 인연은 아니었어. 그는 한국의 일부 못된 교수들과 같이 자신의 조교를 노예 취급했단다. 데이비의 아내는 한 술 더 떴지. 심지어 여행 중 밥도 같이 안먹는다고 마차에서 나가서 먹으라고 내쫓았다니 알만하지? 


또 패러데이가 유명해진 뒤에는 사사건건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그거 별 거 아니야! 누구 거 베낀 거야!” 식으로 타박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패러데이는 옛 스승에게 야박하게 굴지 않았어. 그가 벗에게 남긴 말은 과학자 이전에 한 유연하고 인내심 많은 인간으로서의 단면을 엿보게 해,



“상대가 나한테 적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되면 알아차리지 못한 척 평소와 다름없이 대했고, 반대로 상대가 내게 약간의 호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알만큼 고마워했소. 그게 둥글둥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니까요.”

말이야 하기 쉽지 그렇게 행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 모두가 안다. 패러데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대했어. 실패했다고 실망하지도 않고 모르겠다고 그리 크게 괴로워하지도 않았지만 사소한 발전과 누군가의 연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진보시켜 나갔다. 


1831년 8월 29일 그가 역사적인 실험을 통해 전자기 유도 실험(전지와 연결된 회로의 전류의 변화가 철 고리의 자기에 영향을 미쳤고 자기의 변화는 반대쪽 회로의 전류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결론)에 성공한 것도 그 결과였지. 이미 1822년 “자기는 전기로 변한다.”는 메모를 써 놨지만 규명이 안되자 덮어 놓고 있던 걸 다른 이들의 연구에 도움받아 다시 뛰어든 결과였거든.


3.png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또 이런 말을 남긴다.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하기에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는 또 있었어. 바로 아내 사라였지.

어려서 꽤 불우하게 자랐기에 워낙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많았던 그는 사랑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해. 오히려 “사랑을 개풀 뜯어먹는 소리.”같은 짤막한 시도 아닌 저주도 아닌 문장들들 끄적여 놨다고 하지. 그런데 친구 하나가 그 시를 보고 여동생 사라에게 얘기해. “마이클이란 놈 사랑을 몰라. 사랑도 안해 본 놈이 사랑이 쓸 데 없다니 낄낄”


패러데이보다 아홉 살이나 연하였던 사라 버나드는 맹랑한 호기심의 아가씨였나봐. 패러데이를 만나서 대체 뭐라고 개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썼는지 보자고 들이대. 그런데 연구 앞에서는 한 치의 거짓이 없었던 우직한 패러데이 총각이 당황을 해 버린 거야.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시가 아닌 다른 시를 써서 사라에게 보여 준다.

즉 지금까지의 실험(?)을 부정하고 전혀 다른 조건에서의 실험(?)을 시작한 거지. 그는 사라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가 사라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킥킥거림이 절로 나온다. 패러데이의 요란한 업적 묶음에서 그 사람됨을 읽는 건 쉽지 않지만, 그의 편지를 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캐릭터라는 걸 알 수 있거든.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내가 당신을 향한 내 마음에 충실한 것이 좋을지 아니면 당신에게 다가서지 않는 편이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매우 상투적인 도입부. 자신 없고 카리스마 부족의 남자들이 흔히 내뱉는 말.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내가 당신을 향한 내 마음에 충실한 것이 좋을지 아니면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는 편이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패러데이는 마치 그가 독실히 믿었던 신 앞에서처럼 겸손해진다.

”내가 단순한 친구 이상이 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친구 이하로 떨어뜨리는 형벌을 내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만약 지금보다 더 당신에게 나아가는 것을 당신이 허락할 수 없다면 적어도 당신을 향한 지금의 내 감정만큼은 그대로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오금을 박는 과학자의 의지.

“그렇지만 당신이 허락해 주기를 기도합니다.”

사라는 아버지에게 이 편지를 보여 줬는데 사라의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고 해. “이 과학자라는 친구 되게 웃기군.” 사라와 패러데이는 결혼에 골인했고 그 후 해로하면서 사라는 남편을 온 인류에게 빛과 온기를 선물한, 즉 전기라는 희대의 발견을 하도록 한 공로자로 남지. 페러데이가 왕립회원 증서라든가 뭐 기타 소중한 서류들 사이에 끼워 둔 메모는 그에게 사라라는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입증해 주지.


“이 기록들 사이에 존경과 행복의 효시로서 다른 물건들보다 훨씬 훌륭한 것을 이곳에 둔다. 우리는 1821년 6월 12일에 결혼했다.” (이상 <마이클 패러데이 평생의 발자취> - 아이치 게이치, 리디북스 참조)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어. 그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겠으나 패러데이는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더 많은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어. 19세기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른 사람이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거나 뭘 주제로 설명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패러데이는 숱한 강연을 열어 가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심지어 사재를 털어 가며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에게까지 과학을 알려 줬지. 아내 사라가 왕립 연구소 청소를 맡아 곳곳에 빗자루를 대며 청소하는 동안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시간’과 싸우며 이룬 업적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리려고 했던 거야.


크기변환_002.jpg

출처 - 위키피디아


말년에 그는 몹시 쇠약해져서 별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지내는 일이 잦았다지. 그런데 한 일화가 듣는 사람의 맘을 뭉클하게 한다. 어느 날 비가 쏟아졌고 하늘에는 화창한 무지개가 걸렸대. 아내 사라가 무지개가 예쁘다고 하자 패러데이는 무지개를 꼭 보고 싶다고 하며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네. 그러면서 흐뭇한 어조로 한 마디를 했대. \


“신께서 하늘에 선행의 표시를 보여 주셨구려.”

아마 그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잘난체가 아니었을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어 주겠다는 말에 “그냥 평범한 패러데이로 죽게 해 주세요.”라고 했던 한 사람의, 하나도 눈꼴시지 않고 일점도 걸리적이 없는 잘난체. 그 옆에서 사라도 행복하게 웃고 있었겠지...




11949324_1007368579308327_1069538130147378937_n.jpg







지난 기사

 

신기전으로 이인좌를 잡다

그들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그다의 빗나간 사랑

1991년 5월 25일 김귀정의 죽음

800년 전 고려에서 일어난 일

영화 <명량> 개봉을 맞아

김취려 장군과 못난 최충헌

거목 이병린의 슬픔

슈바이처와 헬레네

구르카 이야기

모세 다얀, 애꾸눈의 바람둥이

역대 명반 랭킹2위 유재하

톨스토이와 소피아

최무룡은 어떤 남자일까

타라와 전투

<빨간 머리의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조 디마지오의 사랑

쌍령 전투

쑥맥, 윤동주

이준 열사와 이일정

잠비아 축구팀의 기적 : 22대 11의 경기

꺼벙이 아저씨

인간을 버린 광기의 산물, 제로센

오드리 헵번, 그리고 기억의 숲



 






 

 산하

트위터 : @sanha88


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 & 홀짝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