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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06. 화요일

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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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친구들과 어울려 세월호 관련 집회나 단체를 만날 경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원래 친구셨어요?'라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정색하며 '세월호 아니면 얘랑(보통은 삐삐가 내 옆에 있다) 제가 왜 친구가 되요?'라고 되묻곤 한다. 물론 농담삼아 하는 대답이지만, 진심으로 '세월호가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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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억 속의 '친구'를 떠올려보라. 그 친구와의 인연이 얼마이든 간에, 친구와 당신에게는 '공유되는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일 수도 있고, 사춘기 시절의 일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유되는 기억'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공유되어 있다면, 오랫만에 만난 친구라 할지라도 시간을 뛰어넘는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과 대화를 하면서 내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친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 앞에 늘어놓았지만 내 대답은 일관되게 '그랬나, 기억 안나는데'였다. 물론 그 친구는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몇 시간의 '추억 채굴' 작업 이후로 공유되는 기억이 별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다지 야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어릴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타인과 '기억을 공유한다'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 경우는 기억력도 그닥 좋지 못하고, 기억이란 게 시간이 지날 수록 조작되는 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꼬꼬마 시절의 친구가 없는 편이다. 어쩌다 운좋게 공통된 추억을 발견한다고 한들, 시간이 지나 심하게 변질된 기억만을 확인 했기 때문에.

반면, '세월호를 기억하는 73년생 모임'은 공유된 기억들이 많다. 게다가 올 4월부터 시작된 고통스런 기억들이다. 기록(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업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을 위해 다시 예전 기억을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6개월 남짓한 시간동안 얼마나 바쁘게 '공유되는 기억'을 저장해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할 친구는 '소환장'을 날린 삐삐이다. 삐삐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를 대답할 수 있는 인물이다. 물론, 본인은 '기억안남'으로 일관했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을 듯 하다. 나 역시 그녀와 공유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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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친구 삐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처음 삐삐의 소환장이 무작위 대상에게 발부되었던 것은 5월 말 경으로 기억한다. 세월호 사건 후 한 달 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고, 구조되지 못한 이유와 책임 전가가 연일 인터넷을 달구고 있었다.

가족의 죽음으로 슬픈 사람들. 혹은 살아서 슬픈 사람들. 

우리는 '살아서 슬픈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 가족들을 보며 '함께 있어주어 고맙다'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꺼낼 수 있었다. 이유 없이 아이들을 끌어안거나, 길을 가다가 고등학생 정도의 아이들만 봐도 눈물을 쏟아내거나. TV를 더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있어서 슬펐다.'

삐삐 역시 그랬다. 아직 초등학생인 두 아이의 엄마인 삐삐는 세월호 사고 이후, 하루 하루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가장 처음, 세월호 사건과 마주쳤을 때. 삐삐는 며칠 동안을 멘붕의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밥먹다 울고, 티비 보다 울고, 자다가 일어나서 울었다. 길에 가다가도 울고,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울었다.

그녀의 가장 큰 취미인 '독서'는 더이상 삐삐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생전 처음, '책이 눈에 안들어온다'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삐삐 역시 극심한 '무기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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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삐삐는 남편을 설득해 단원고 자원봉사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5월 초, 긴급히 꾸려진 자원봉사팀에 합류한 삐삐는 안산 지역 시민단체 연합회의 인솔 아래 팽목항으로 향하게 된다.

솔직히, 삐삐는 '독서'말고는 잘 하는 것이 별로 없다. 요리도 그냥 '맛'이라는 게 있는 정도일 뿐이고, 집안 살림도 간신히 해내는 정도이다. 앞서 밝혔듯이, 초등학생인 두 아이들이 엄마 없이도 어지간한 일은 다 해내는 정도인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후 이틀 째부터 각종 물품과 자원봉사자들이 팽목항에 닿고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민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시민의식을 따라잡기엔 사회 전반 시스템이 엉망이고, 그 시스템을 고치기엔 시민의식이 '만성적 단기 기억상실'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다.

여하튼, 팽목항은 자원봉사자들과 전국에서 쏟아지는 물품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스킬이라고는 '독서' 정도인 삐삐는 딱히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삐삐는 급한대로 가족들이 희생자를 확인하는 검안소에 배치되었다. 자원봉사자가 시신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고, 슬퍼하는 유가족을 다독이는 것이 삐삐의 역할이었다.(자원봉사 단체도 삐삐의 '스킬 없음'을 눈치 챈 것이리라)

삐삐는 그곳에서 이곳 저곳을 기웃대며 실컷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나 상황도 맘 편히 볼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삐삐는 무거워지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오히려 다녀와서 마음만 무거워졌었어."

몇 시간을 커피전문점에 감금(?)해 놓고 그때의 기억을 물었을 때, 삐삐의 표정은 많이 어두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큼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있을까. 남편의 바다처럼 넓은 배려로 그토록 가고싶던 팽목항을 다녀왔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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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의 1박 2일 이후, 삐삐는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죽어도, 촛불은 들기 싫었다고 한다. 이래도 헤헤, 저래도 헤헤 스타일의 삐삐가 '싫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몇 년 전, 소고기 촛불 집회 이후 생긴 거부반응. '촛불을 들어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누군가, '그래도 들어야지'라고 한다면. 삐삐를 대신해서 내가 멱살을 잡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니까. '그래도 해야한다'라며 매주, 매일 대책없이 '소환장'을 날려대던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실패의 경험을 알려주고 싶은 거냐'라고. 그들이 모두 지쳐 주저앉을 때까지 '계획'이나 '재충전'이라는 단어는 머리속에 들어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다.

실제로, 소고기 촛불 집회 즈음의 나 역시 1주일 중 사나흘을 길바닥에서 생활해야 했다. 미안해서. 그곳이 편해서.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은 '실패의 경험'과 함께 만신창이가 된 건강이었다. 그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나 역시 '촛불을 들어라'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독한 단어가 입에서 쏟아지곤 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

여하튼, 삐삐가 고민에 빠졌을 즈음 청와대로 향하던 부모들은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주저앉아야 했다. 삐삐는 냉큼 청운동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한 생존 학생의 아버지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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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학생의 아버지는 삐삐에게, 모범생이던 자신의 아들이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며 걱정을 했다. 곧 대학에 가야 하고 군대도 가야하지만, 친구를 잃은 충격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있는 아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청운동의 맨 끝자락에 앉아, '아들이 살아서 미안한' 부모로 말없이 유가족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생존학생을 위해서라면 내가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삐삐의 결심이 선 것은 그 생존 학생의 아버지를 만난 이후였다. 살아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삐삐는 곧 중학생이 될 딸을 위해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엄마와 딸의 단 둘의 여행이라는 거창한 계획은 세월호 앞에 무너지게 되었고, 여행을 위해 모아둔 자금을 깔끔히 없애기로 결정했다.

처음 계획은 '생존 학생을 위한 빵집을 차리자'였다. 이 계획은 자세히 뜯어보면 '아이들 쉼터'를 계획한 이야기였는데, 어느 책에서 읽은 '사람을 위로하는 빵 가게 주인'을 떠올리며 세운 계획이었다. 아이들이 실컷 울 수 있는 공간. 위안이 될 수 있는 공간.

물론 그 공간을 만들기에 삐삐의 '비자금'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삐삐는 이렇게 결심하게 된다.

'동료를 모으자.'

마치 별 스토리 없는 MMORPG의 프롤로그 같은 생각 아닌가. 지금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의문이지만, 삐삐는 그 귀한 돈을 동료를 모으는 데에 사용하기로 한다. 자신과 같은 73년의 동료를.

여하튼, 삐삐는 그 돈을 쥐고 딴지일보를 찾았다. '편집장이 73년이라 특혜를 받은 거냐'라는 오해가 많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삐삐는 딴지일보의 엄연한 '광고주'이다. 무엇보다 삐삐의 '빵가게'와, '자전거 고치는 법'(이것은 삐삐의 '73년 모임 소환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야기를 듣고, 앞뒤 정리 안된 그녀의 생각을 '기승전결'로 완성한 딴지의 성실한 서비스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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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6월 첫째 주, 첫 모임이 있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나를 포함한 8명이 전부였다. 삐삐가 모임을 위해 투자한 돈에 비해 실망스러운 인원이었지만, 다행히 삐삐는 '뼈 속까지 무념무상'의 캐릭터이다. 아마도 나였다면 모인 인원이 두 당 얼마짜리인가를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삐삐는 몇 달 뒤에야 '광고비를 주고 우리를 샀음(?)'을 고백했다. 왜 말하지 않았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까먹었었다."

그리고 배은망덕하게도, 그날 모인 8명은 삐삐의 계획을 사정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계획한 빵집과 산티아고 여행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계획인지를 설명했고, 삐삐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실제로 우리가 처음 대면한 날, 감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가로나는 '빵집을 차리고 싶다'는 삐삐의 이야기에 '빵은 구울 줄 아느냐'며 '학원부터 다녀라. 국비학원이면 공짜다'라는 드립을 날리고 만다. (미안. 그때는 정말 이해가 안됐었다) 게다가 어바웃은 한 술 더 떠서, '생존 학생들에게 빵을 주는 건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라는 현실적인 발언으로 삐삐의 아름다운 계획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마음만 앞서 생존학생에게 다가가는 것. 이미 어른이 된 우리에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것은 또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그날 삐삐는 인식해야 했다. 대신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손에 닿는 일부터 천천히. 

그리고 그 후 몇 번의 모임을 더 가져야 했다. 무엇을 해야할지, 어떤 게 좋은 방법인지 우리 역시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첫 날 이후 한 명이 더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후 두 명이 더 자취를 감추었다. 어바웃, 하나반, 쟈스민, 도도, 가로나. 그리고 그날 참석하진 않았지만, 멀리 경북의 루씨군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최초 소환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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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로나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