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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08. 목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끔 하는 쟁 이야기 랑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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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무엇일까? 하는 건 어리석은 질문이겠지. 저마다 취향이 다르고 감정이 저마다 인데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가 끼어들 소지가 좁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궁금하여 언론사가 나서서 알아본 적이 있어. KBS가 한국 현대 시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국민 설문조사를 했는데,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1위를 차지한 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었고 시인들 사이에서 으뜸으로 꼽힌 시는 윤동주의 <서시>였단다.


교과서에 실린 시 이외에는 들여다본 적 없는, 척박 그 자체였던 나의 10대 시절에도 윤동주의 <서시>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었지. 워낙 시험에 자주 나오는 시이기도 했고 또 길지도 않아서 아예 외워 버렸던 기억도 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지금 외워 쓴 거다. 으쓱. 아직 내 머리도 쓸모 있구나.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어. 그래서 중국 넘들은 윤동주를 두고 "조선족 시인"(중국인이라는 식이지)이라고 표현을 한다더군. 하지만 이 일대는 그야말로 '불령선인'들이 일제 강점기 내내 으르렁거렸던 곳이지. 윤동주가 두 살 때 일어난 3.1운동 당시에는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어. 훗날 윤동주도 다니게 되는 명동 학교 브라스밴드(그 시대에 브라스밴드라니!)가 시위에 앞장섰고 일본 영사관으로 향하는 시위대에 중국군이 발포하여 19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기도 했어. 이들의 합동 장례식 때는 5천 명의 조선인이 몰려들어 "해방되면 꼭 고국에 묻어 주겠소다!" 맹세하기도 했다니 분위기를 알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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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그 일대에서 유지로 통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어. 반일 분위기가 농후해서 '일본'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놈들 주제에 무슨 태양의 근본이냐!) '왈본'(曰本)이라 부르는 고장에서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기독교 청년.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머리를 수그리고 침묵시위를 벌이기 일쑤였고 신사참배 거부하고 일본 경찰들 멱살 잡기는 으뜸이었던 숭실학교를 다녔던 그는 자신의 진로를 '태극문양 널려 있고 조선어 강의도 하던' 연희전문 문과로 잡았지. 이 과정에서 그때껏 유순한 청년이었던 윤동주는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아버지는 문과 가면 굶어 죽는다고 "네가 문과 가면 신문 기자밖에 더하겠냐?"고 을렀고 윤동주는 이때만큼은 아버지에게 격렬히 대들며 단식투쟁까지 벌였다고 해. "굶어죽어도 나는 문과에 가야겠습니다." 윤동주의 동생의 회고에 따르면 물그릇이 휙휙 날아다니는 활극이 여러 번 펼쳐진 끝에 할아버지에 의해 결판이 났어. "공부를 할 사람은 동준데 동주가 의학을 아이 하갔다니 어찌하겠음. 문과로 보내기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동주를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대. "고등고시를 봐야 한다. 봐서 꼭 성공해야 한다." 하지만 윤동주는 동생에게 이렇게 얘기했다지. "고등고시는 법과를 해야지 문과를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여담이지만 참 웃기는 건 어떻게 된 나라가 식민지 시대에나 지금이나 '의대 아니면 법대'에 매달리는 게 변함이 없냐.


이래서 그는 서울에 입성하고 짧은 젊음의 황금기를 맞아. 그가 연희전문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는 그 후배에게 했다는 자랑으로 미루어 짐작이 가. 


"문학은 민족 사상의 기초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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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 앞에서 (앞줄 우측 2번째가 윤동주)


라이벌이었던 보성전문 학생 들으면 발끈할 소리였겠지만. 그는 연전 시절 수많은 아름다운 시들을 써냈다. 윤동주는 졸업하기 전에 자신의 시 가운데 19편을 묶어서 한정판 시집을 만들고자 했어. 그 제목으로 생각해 놨던 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고 그 시집의 서문 격으로 쓴 게 바로 우리가 아는 '서시'(序詩)야, 시를 지은 뒤 꼼꼼히 날짜를 적은 덕분에 우리는 이 시가 세상에 나온 날을 알 수 있어. 1941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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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서시' 육필원고



그런데 이제 슬슬 궁금해지지. 사각모를 쓴 윤동주는 사실 매우 뛰어난 미남이야. 저 외모에 운동도 잘하고 성품도 부드럽고 거기에 아름다운 시까지 써내리는 문학청년이라면 그를 따르는 서울의 신여성들이 서대문에서 연전 캠퍼스까지 줄을 섰음 직도 한데 과연 청년 윤동주는 어떤 사랑을 누구와 나누었을까. 기실 그의 시를 보면 범상치 않은 것들이 엿보이지. 이를테면 툭하면 등장하는 미지의 여인 순이.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내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습이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내려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루련다."



이게 연전 1학년 때 쓴 건데 여기서 등장하는 순이는 계속 그의 시에 출몰하게 돼.



".....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소년 중)




같은 짝사랑을 토로한 듯한 시, 그리고 이별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시까지.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욱을눈이 자꾸 내려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1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눈 오는 지도 중)




그런데 놀랍게도 윤동주는 여자 앞에서는 무척 숙맥이 되는 성격이었던가 봐. 여자가 윤동주에게 먼저 호감을 드러내도 수줍어하면서 피했고, 여자에 대한 진지한 호감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거야. 요즘 말로 '초식남'이라고나 할까. 기껏 윤동주의 여자관계를 '밝힌다'는 옛 후배의 전언이 이 정도야.



"이화여대 문과 졸업반 여학생이 있었고 그와 협성교회와 바이블 클래스를 함께 했다. 동주 형은 물론 나이 어린 나에게 그 여자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든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저- 푸른역사 중) 




그리고 다른 케이스로 일본 유학 중에 동생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며 "이 여자 어떠냐?"고 물었고 눈치 빠른 동생이 오빠가 이 여자를 마음에 두는구나 여기고 집안에 알려 온 집안이 기뻐했으나, 그만 "그 여자 약혼했다더라."는 편지로 싱겁게 끝나 버린 일도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조선 말이 곧 사라질 테니 조선말로 된 것은 악보라도 다 모으라"고 했던 윤동주는 그 억척을 여자 사귀는 데에는 발휘하지 못했어. 의대 가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단식투쟁을 하는 결연함을 여자 앞에서는 보여주지 못했어. 사람들의 답답한 속을 그야말로 그린 듯이 풀어낸 가객 김광석이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고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라고 버스 떠난 뒤에 노래한 것과 유사하달까.


그가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너무도 아깝게 세상을 떠나고 해방이 왔을 때 그의 친구들은 해방 몇 달 전 아깝게 죽어간 친구의 기록을 모아 펴내게 되는데 윤동주의 시를 일부 보관하고 있다가 내놓은 친구 강처중은 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네.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사랑을 토해내지 못하고 간직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일 거야. 사랑은 소화불량 같은 거라서 손톱 밑을 따든 토하든 아래로 내리든 얹힌 것들을 기어코 내보내게 만드는 습성이 있잖아. 하지만 윤동주는 그 젊음의 소화불량을 꿋꿋이 그리고 아프게 삼키고 누르고 참았던 것 같아. 오로지 펜 끝 잉크에만 그 마음을 실어 백지에 흘려보내면서. 바람에 별이 스치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그 심경 나는 이해가 되네 낄낄. 원래 입 밖에 내면 순간 속은 후련할지도 몰라도 그거 치우기엔 민망한 토사물이 되기가 십상이잖아.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여자는 자신의 아이들이 줄줄 외우고 다닐 서시를 쓴 시인이 자신을 하얗게 태워 가며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하는 윤동주의 토로에 공감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또 그는 이렇게 노래했으니까. 


"가슴 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 나 하나를 헨 다음 별 둘 너 둘을 셀 '그대'는 없었으나 아침은 오고 내일은 밝고 청춘은 아직 멀었다는 뜻이었을까? 아무튼, 윤동주는 그렇게 영원한 청년으로 우리 역사에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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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윤동주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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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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