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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 02. 수요일

벨테브레






존경하는 정종섭 장관님, 아니 교수님!


일면식도 없는 후학이 존경이라는 수식어를 너무 쉽게 붙이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덕담'에 관대한 분이시니, 일종의 덕담으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아무려면 새누리당 의원들 앞에서 술잔을 들고 소리 높여 외쳐주신 '총선 필승'만 하겠습니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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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TN>


그럼에도 장관님께 존경이라는 수식어를 쉬이 버릴 수 없었던 것은, 장관에 취임하기 전까지 '헌법학자 정종섭'이 보여주었던 학문적 실천적 업적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유난히 굴곡 많았던 우리 헌정사 탓이겠지만, 여태껏 헌법학자란 사람들이 보여준 행태는 대체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유신헌법 제정에 앞장선 공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었던 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후에도 '헌법 제정 권력의 근본적 결단'을 강조하는 결단주의 헌법관을 들여와 전두환 헌법 같은 걸 옹호하기 위해 써먹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하긴 결단주의 헌법관은 발상지인 독일에서도 나치 헌법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걸 면치 못했으니, 애초에 좀 위험한 이론이었던 것 같긴 합니다.


그런 결단주의조차 극복하지 못한 채 독재 권력에 영합하던 암흑기 헌법학계에, 장관님과 그 스승인 허영 교수님은 한 줄기 빛과 소금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헌법이 갖는 정당성은 주권자의 근본적 결단 같은 게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와 시대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 통합을 이루는 것이 헌법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허영 교수님의 '동화적 통합이론'은 6월 항쟁을 거쳐 현행 헌법을 쟁취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으니까요.


그 엄했던 시절, 청년 법학도 정종섭이 가졌던 학문적 열정 또한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경북고와 서울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장관님은 판검사가 되어 부귀영화를 좇는 대신, 이렇다 할 연고도 없는 허영 교수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지요. 경희대 법학석사, 연세대 법학박사로 이어지는 장관님의 학문적 궤적은 경희대와 연세대를 거친 허영 교수님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비록 군 복무 중 대학원에 다녔던 것이 훗날 문제가 되긴 했지만, 어두웠던 군사독재 시절 이렇다 할 보람을 찾기 힘들었을 군 법무관으로서 오죽 답답했으면 대학원을 탈출구로 삼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장관님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에는, 학문적 성취를 넘어 현실의 지평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초창기 헌법재판소의 헌법연구관으로서 맹활약했던 장관님의 업적은, 아홉 분의 초대 헌법재판관 못지않게 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장관님은, 헌법재판소에서 최초로 뽑은 자체 연구관 두 사람 중에 한 명이었지요(다른 한 명은 이석연 전 법제처장). 법원 검찰에서 파견된 연구관 일색이던 초기 헌법재판소에서는, 점심밥조차 법원 검찰 출신 연구관들끼리만 먹고 자체 연구관들은 끼워주지도 않을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팍팍한 상황 속에서, 두 분 자체 연구관께서 보여준 고군분투는 헌법재판소가 독자적인 위상을 지닌 헌법기관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장관님을 전속 연구관으로 채용했던 김양균 전 헌법재판관 역시 "허영 교수가 추천하기에 얼굴 한 번 안 보고 정종섭을 채용했다"면서도, "정종섭 교수 책에 김양균에게 많이 도움을 받았다고 썼지만 도리어 내가 도움을 받았다. 아주 우수하고 성실한 사람이다"(이범준,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궁리, 2009년, p.86)라고 극찬했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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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정종섭 장관 페이스북


그 유능함이 널리 알려진 덕분일까요. 장관님은 일찍이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정치권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현실참여에 가치를 둔 장관님의 입장에서, 충분히 매력적일 법한 제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학계로 돌아간 장관님은, 학자의 입장에서 책임 총리제, 청와대 국정상황실 설치, 특별검사제 등 여러 참신한 의견을 제시했고 이 중 상당수가 현실에 반영되었습니다. 위키 백과에 장관님이 '개혁성향의 헌법학자'로 소개된 것 또한 이런 장기간의 노력 덕분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지난해 장관님이 박근혜 정부의 안전행정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체로 당혹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정종섭만큼은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적어도 장관님만큼은, 권력에 영합하여 학문적 소신을 꺾거나 자리에 연연하여 정권의 데코레이션으로 전락하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많은 걸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을 갖고 일하다 보면 박근혜 정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었더랬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지난 6월 박근혜 대통령은 여야 합의로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헌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지요. 거부권 행사에 대한 주무장관이기에 앞서, 존경받는 학자로서 장관님의 학문적 양심을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올해 3월 출간된 장관님의 저서 '헌법학원론'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더군요. 해당 내용을 검토해본 결과 장관님의 견해에 따르더라도 국회법 개정안은 위헌이라고 볼 수 없고, 따라서 거부권 행사도 정당하다고 보긴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장관님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일일이 찾아보시기가 번거롭거든 후학이 딴지일보에 기고한 '[정치]거부권 정국 감상법 : 유승민은 어떻게 될까?'를 참고하셔도 무방하겠습니다.


물론 장관으로서 대통령의 뜻에 맞서기가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본회의 재의결이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며 이 사태가 일단락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거취에 주목했지만 저는 장관님의 결단을 기다렸습니다. "장관으로서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거부권 행사에 참여했으나, 학자로서의 양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에 더 이상 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어 물러나고자 한다"는, 너무 야무진 기대였나 봅니다. 장관님은 어떠한 입장 표명도 없이, 그 후로도 꿋꿋이 장관으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고 계실 뿐이었습니다.


도리어 애꿎게 사퇴를 당한 유승민 대표가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기염을 토했지요. 아시겠지만 그는 경제학자 출신입니다. 어쩌면 유 의원의 일갈에는, 경북고 동기(57회)이기도 한 장관님을 겨냥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장관님께선 공사다망한 와중에도 헌법 조문으로 된 책을 펴내며 국민들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했던 분이니만큼, 유승민 의원이 강조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하시는 바가 남달랐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건 메르스 뒷수습, 임시 공휴일 지정, 특별사면, 북한 도발 등 숨 가쁘게 이어진 국정의 한가운데에서, 장관님 또한 쉼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잘해보려는 욕심이 지나쳐서 였을까요. 아니면 지난 몇 달간의 긴장감이 갑작스레 풀린 탓일까요. 새누리당 의원 연찬회 자리에서 장관님이 외친 "총선 필승!"이라는 건배사는 정치권은 물론 장관님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제가 아는 장관님이 맞는지,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장관님의 저서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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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사에서 펴낸 2015년 판 '헌법학원론' p.977에 실린 내용입니다.



국가는 언제나 중립성을 유지하면서 전체 국민의 복리와 국가질서를 실현, 유지하여야 하므로, 국가의 정책이 정권을 장악한 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이념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국가의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은 업무수행에 있어 정치적 편향성을 띠어서는 안 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장관님이 건배사 할 때 참고하셨다는 연찬회의 브로슈어에는 ‘4대 개혁으로 총선필승’이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울러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하반기 경제동향 보고를 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내년에는 잠재성장률 수준인 3% 중반 정도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 여러 가지 당의 총선 일정 등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더군요.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정책이 정권을 장악한 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이념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p.978에는



우리 헌정사에서 국가 원리상 당연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헌법에서 명시한 것은 우리 헌정의 현실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정해진 것이다. (중략) 특히 이러한 편파적인 정치적 파당성에 기초한 비중립적 행위는 집권세력이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동원되었는데, 선거에 강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관권선거의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라는 대목이 있더군요. ‘총선필승’을 외친 장관님의 행동은 과연 어땠을까요?


장관님께서 인용한 '헌법재판소 2004. 5. 14. 선고 2004헌나1 결정'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국가기관의 지위와 책임은 선거의 영역에서는 '선거에서의 국가기관의 중립의무'를 통하여 구체화된다. 국가기관은 모든 국민에 대하여 봉사해야 하며, 이에 따라 정당이나 정치적 세력 간의 경쟁에서 중립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기관이 자신을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와 동일시하고 공직에 부여된 영향력과 권위를 사용하여 선거운동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편에 섬으로써 정치적 세력 간의 자유경쟁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곧 헌법 제7조 제1항의 요청인 것이다.’(p.980)


잘 아시겠지만 위 판례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한 결정입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 및 기자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


“앞으로 4년 제대로 하게 해 줄 것인지 못 견뎌서 내려오게 할 것인지 국민이 분명하게 해줄 것”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


“대통령이 뭘 잘 해서 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



는 취지로 답변하다가 탄핵소추를 당했었지요. 야당에서 장관님에 대한 탄핵을 거론하는 것 또한 선례를 바탕으로 한 근거가 있는 셈입니다. 더욱이 장관님은 정부조직법 제34조 제1항에 따라 ‘선거·국민투표의 지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있는 분이니까요. 장관님이 제시한 탄핵소추의 실체적 요건 중 적어도 '직무관련성'과 '위법행위의 존재'는 만족시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남은 건 '직무수행의 불가성' 뿐인데 고작 건배사 한 마디에 탄핵까지는 너무한 게 아니냐 싶다가도, 장관님도 인정한 ‘위법행위가 중대하지 않더라도 직무의 성질상 위법행위가 존재하고 계속 직무를 수행하게 할 이익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에는 파면한다’(p.1113)는 법리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일종의 명예직에 불과한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조차 ‘오바마’(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는 건배사의 후폭풍으로 사퇴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여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실제 탄핵소추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나, 장관님께서도 말씀하셨듯 '탄핵심판제도가 헌법을 보호하는 수단인 이상 탄핵소추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국회는 탄핵소추의 의결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p.1116)고 봅니다. 장관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항권의 행사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국회가 탄핵소추의결권을 행사하지 아니하는 것도 국민의 저항권 행사를 정당화하는 한 요소'(p.1116)가 될 테니까요.


헌정사에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것은 총 13번이 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제외하면 대법원장이나 대법관, 검찰총장이나 검사에 대한 것이었고 전부 부결되거나 폐기되었습니다. 누구보다 헌법에 밝은 장관님이 하필이면 헌법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을 이유로 통산 14번째이자, 국무위원으로서는 처음으로 탄핵안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합니다. 비록 실제 파면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존경받던 헌법학자가 학문적 양심을 접고 특정 정치세력의 치어리더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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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학자로선 레전드였으나 장관으로선 그간의 업적을 마이너스 무한대로 깎아 먹을 정도로 실망스럽기만 한 당신을 보며, 선동렬 전 프로야구 감독의 어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현 상황에 맞게 인용하는 것으로 두서없는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장관님, 더 추해지기 전에 물러나십시오! 이대로 가면 학계에 돌아가도 자리 없지 싶습니다."





벨테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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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