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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12. 월요일

멀더요원






얼마 전 꿈을 꾸었는데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가 도망치는 꿈이었다. 아무리 꿈이지만 말도 안 되게 공중전화부스로 도망을 쳤는데, 그게 타임머신이었다. 그걸 타고 2040년 크리스마스로 갔는데 뭐 외계인한테서 도망치다 말고 영화를 보다가 잠이 깨버린 그런 상황이었다. 너무 생생한 꿈이어서 기억나는대로 적어본다.


1. 아빠

예전에 할아버지는 무슨 시장 같은 데서 재봉 일을 하셨다고 한다. 거기서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학교를 안 다니고 있던 여자를 만났다는데, 이 여자가 우리 할머니다. 그때 할머니는 하루에 15시간을 일하고 있었다고 하니 떼돈을 벌었거나 아니면, 정말 일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만난 두 분은 결혼식도 안 하고 그냥 같이 살았다고 한다. 아마도 할머니가 부자라서 할머니네 집에서 반대를 심하게 했고 그래서 일종의 '사랑의 도피(?)' 같은 걸 한 게 아닐까. 후훗.

할아버지는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나중에 대학 가면 못된 놈들이랑 어울려 다니지 말고, 조용히 니 공부나 해라."라고 가르치셨단다. 아빠 말로는 원래 안 그러셨다는데, 할아버지 직장 선배 중에 누군가가 몸에 불을 붙이고 '분신자살'한 이후부터는 식사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인데 얼마나 지겨웠을까. 아마도 아빠가 할아버지 말 안 듣고 못된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녔던 게 할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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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요즘 어때? 이제 먹고살 만하지? 요즘은 예전처럼 그렇게 심하게 안 하지? 요즘 사장들은 젠틀하고 괜찮지?"


어쨌든 시장통에서 '노동'하던, 그런 '무식한 부모'와 달리 우리 아빠는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빠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어떤 책을 읽는 게 중대범죄였다던데, 아마도 꽤 야한 책이었던 모양이다. 책을 무척 좋아하던 우리 아빠는 그런 책 때문에 경찰에 쫓겨 다닌 적도 있다고. 지금도 술만 마셨다 하면 그 얘기를 한다. 아주 지겨워 죽겠다. 

할아버지 말로는 아빠가 공부를 꽤 잘해서, 아빠 형제 중에서 가장 기대가 컸는데 아빠는 맨날 데모나 하고 돌아다녀서 속을 썩였다고 한다. 한 번은 아빠랑 같이 데모하던 친구 중에 어떤 친구가 경찰이랑 '대화'를 하던 중에 책상을 '탁!' 치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에 놀라서 심장이 멎는 '사고'를 당해서 죽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심장이 좀 안 좋은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려 국가 기관인 경찰에서 그렇게 얘기했다는데, 쓸데없이 의심만 많은 아빠랑 친구들은 그걸 믿지 못했단다. 하여간, 아빠는 의심이 많아서 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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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과 박종철
"요즘은 민주주의 잘 되고 있지? 헌법이랑 기본권 같은 것도 잘 지켜지고?"


비싼 등록금 내고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데모나 하고 돌아다닌 아빠는 결국 잡혔는데, 경찰이 "너, 군대 갈래? 감옥 갈래?"라고 해서 군대에 갔단다. 아마도 그때는 군대가 죄지은 사람들만 가는 데였을까? 그때, 이상하게도 아빠 친구들은 좀 운이 없는 것 같은데, 군대 간 친구 중에 총에 맞아 죽거나, 맞아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마 북괴군들은 그때부터도 지금처럼 신출귀몰해서 휴전선 넘어와서 우리 편 군인들 공격해서 죽였을 것이고, 전투 피로로 자살하고 그랬나보다. 하여간 북괴군들은 나쁜 놈들이다.



작사가의 남자친구가 민주화 운동하다가 군대가서 의문사를 당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가 있다.


그렇게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도 졸업을 했던 아빠는 참 희한하게도 취업을 잘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어! 그 회사 회장이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서 회장까지 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그런 대기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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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으니까 그 일 니가 다하고 돈은 나한테 줘라.


아빠는 그 회사에 다니며 오랫동안 연애하던 엄마와 결혼도 하고 우리 삼 남매를 낳았다. 그 시절, 아빠는 꽤 잘나갔던 모양이다. 가끔 그때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었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를 얘기하며 지금도 흥분하신다. 나는 너무 어려서 기억도 안 나는, 일본으로 가족여행 갔던 사진을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하신다. 지금 아빠 꼬라지를 보면 그게 꼭 아빠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나라 전체가 잘 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긴 환율이 800원대였다니. 전에 내가 아빠의 그 뻔한 레퍼토리를 듣다가 하도 지겨워서 한마디 던졌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미안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잘 나갔는데, 왜 짤렸어?"

선진국 모임인 OECD라는 친목회 같은데도 가입할 정도로 잘 나갔던 나라는 도대체 어떤 새끼가 돈을 얼마나 처 땡겨 썼길래 그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국제통화기금'이라는 데서 돈을 빌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걸 보고받은 대통령이 "누가 국제전화를 그렇게 많이 했냐?"라는 루머가 돌아도 다들 "그 인간이면 그럴 만도 하지."라고 생각할 정도의 지식수준을 가진 대통령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그런 큰 사건이 어디 그 한사람 때문일까 싶다. 그 한 놈 때문에 망할 나라였다면 언제든 망했겠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게네들이 시키는 대로 하느라고 나라가 개판 됐다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나라를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로 졸라 많이 빌린 모양이다.

어쨌든 아빠가 다니던 회사는 21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해체되었고, 아빠와 엄마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찜닭집을 차렸다. 장사라고는 해본 적 없는 엄마랑 아빠가 티비에 나오는 '무슨무슨 특공대'라는 음식점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을 보고 시작한 장사였기 때문이었는지 장사는 그리 잘되지 않았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문을 닫았다. 가게가 망한 이유에 대해서 엄마는 가게 위치가 안 좋아서 망했다고 하고, 아빠는 경기가 안 좋아서 망했다고 한다. 아직도 본인들의 잘못이나 판단착오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 걸 보니, 다시 장사하면 또 말아먹을 것 같아 걱정이다. 말해 뭐하냐. 아빠한테 미안한 소리를 또 하기는 싫다.

이후, 아빠는 여기저기 작은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대학 때 그 못된 친구들이 차린 학원에서 버스 운전도 했고, 어느 날 아예 트럭을 사서 택배를 시작했다. 잠깐 하겠다던 택배를 지금까지 십 년 정도 하고 계시는데, 요즘은 택배 단가가 너무 낮아져서, 매일 12시가 다 돼서야 집에 들어오신다.


2. 엄마

남부지방에 사시는 외할아버지는 아주 예전부터 엄마보다 세 살 어린 외삼촌만 챙기셨다. 이것에 엄마는 늘 불만이었다. 심지어 외할아버지는 엄마를 고등학교 대신 그 동네 근처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직시키려 했는데,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랑 좀 심하게 싸워서 고등학교에 갔다고 한다. (혹시 엄마가 공장에 취직했으면 할머니처럼 '떼돈'을 벌었으려나) 엄마는 그런 외할아버지가 싫어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지원해서 합격했는데, 외할아버지가 등록금을 주지 않아서 외할머니가 마련해준 등록금으로 서울에 왔다고 한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엄마는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했다. 그때는 어떤 책을 못 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불법이었다고 한다. 진시황 시절이 그랬으려나. 사람들이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게 금지된, 그런 천국 같은 세상이었나 보다. 진시황 이 새끼는 공부에 아주 한이 맺힌 듯. 어쨌든 외할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엄마의 알바비로 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니 아마도 그 시절 엄마는 과외로 '떼돈'을 벌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돈 버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물론 엄마는 그 시절 그 친구들 얘기를 하지 않는다. 전에 엄마 술 마셨을 때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친했던 친구들은 다들 강남에서 졸라 잘 사는데, 엄마만 졸라 인생 조졌다고 울더라.

원래 엄마의 남자친구는 아마도 아빠 선배였던 것 같다. 아빠와 엄마 남자친구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면서 싸우는데, 엄마는 그때 왠지 아빠한테 끌렸단다. 엄마는 "니네 아빠는 돈키호테처럼 세상을 구하려고 그러고 그 새끼 집안 자랑이 지겨워지고 있었어..그때 내가 미쳤지." 그 부잣집 새끼는 유학 갔다 와서 지금 어디서 교수질하고 있단다.

아빠가 대기업에 취직하면서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다. 형 말로는 그때는 다른 집들도 다들 그랬다던데, 아빠들만 돈 벌고 엄마들은 집에서 살림했단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늘 어딘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빠랑 같이하던 찜닭 집이 망하고, 돈이 필요했던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외할아버지는 단칼에 잘랐다고 한다.

"내가 너, 그 빨갱이 새끼랑 어울릴 때부터 알아봤다."

물론 외할아버지로부터 외모, 재산, 성격 등 대부분을 물려받은 외삼촌도 엄마의 불행을 외면했다. 몇 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엄마는 더는 외갓집과 연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원하게 망하고 나서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린 집을 팔고 안산으로 왔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편의점에서 일하고, 녹즙을 배달하고, 야쿠르트를 팔고, 보험도 팔았다. 몇 년 전부터는 마트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그나마 최근에 하던 일 중에는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한 달에 두 번이나 쉰다고. 얼마 전 우연히 엄마 앨범을 봤는데 고등학생 소녀의 모습이다.

한때 소녀였던 우리 엄마, 그 가슴속에도 한때 시가 있었고 꿈이 있었을 거다.
우리 엄마, 꽤 예뻤네.


3. 형

형은 아빠를 많이 닮아서이었는지 책을 좋아했는데, 책을 많이 읽는 것과는 달리 돈 계산이 자주 틀려서 가끔은 좀 멍청해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형이 어렸을 때 집이 잘살아서 돈 아까운 거 모르고 커서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좀 머리가 나쁜 것 같다. 내 예상대로 형은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는데, 뭔 일인지 재수 한 번 없이 대학을 갔다. 그때 장관인가 뭔가가 제도를 어떻게 망쳐놨다고도 하던데. 어쨌든 형한테는 잘된 일이다. 집안 형편상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았던 형이 대학에 붙었을 때 엄마랑 아빠의 표정은 좀 애매했다.

"붙어서 좋긴 한데..사립이라.."

아빠는 보습학원을 하는 아빠의 못된 친구에게 돈을 빌려 형의 등록금을 마련했다. 형은 하필이면 취업도 잘 안될 것 같은 과에 들어가서는 꾸역꾸역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학교가 끝나면 알바를 하러 갔고 주말에도 내내 일했다. 형이 학생인지 노동자인지 잘 구분이 안 되고 있던 어느 날 형한테 물었다. 

"그 취업도 잘 안될 것 같은 그런 학과..그거 계속 다닐 거야?"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야,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공부도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전부 다 취업공부만 하면 되냐" 

라고 했던 형의 대답은

"아, 씨..뭐..그럼 어째..이거라도 안 다니면,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어쩔 수 없잖아..ㅆㅂ"

2년 뒤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자 형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도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군대에 갔고, 누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은 형을 웃으며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대학 가면 누나가 군대 가려나. 형이 자대배치 받고 나서 우리 가족이 형을 면회하고 온 날 엄마는 계속 울었다. 아무래도 어리바리한 형이 많이 맞는 모양이다. 아빠는 계속 화를 내셨다.

 "군대에서 개인 위생용품 모자라서 용돈 필요하다는 소리는 내 살다 처음 들었다. 쌍팔년도 군대도 이러진 않았다고!!"

형을 만나고 온 며칠 동안 안 그래도 형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서 마음에 걸렸는데 뉴스에 그 부대마크가 나왔다. 누군가가 선임들한테 고문당하다가 죽었단다. 부대 마크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우리 아빠가 윤씨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랑 누나는 밤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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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남의 똥꼬에 지 꼬추 막 문지르지 말라고 그럼 안된다고 똑바로 가르쳤어야지.


4. 누나

누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애들 꿈이 다 그렇지만 누나는 영화배우, 작가, 가수, 마술사 등 돈 안 되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모네' 같은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서였는지 철이 들어가면서였는지 누나의 꿈은 좀 더 현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로 바뀌었다. 그쪽도 돈 안 되긴 마찬가지란다.

형과는 달리 누나는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엄마는 누나가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고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누나의 관심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과 중동평화, 지구온난화, 인류의 먹거리 등으로 확장되었다. 만약 건설사 사장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누나의 세상 걱정은 태양계를 벗어나 팽창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걱정으로 무한히 확장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가카와 그의 친구들은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소고기를 먹게 되었다"며 손녀를 '그랩'하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에 나처럼 소고기 못 먹어서 환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누나는 미국 소는 미친 소가 많은데 얼마나 미쳤는지도 알 수 없다나 뭐라나. 어쨌든 친구들과 함께 밥상을 지켜보겠다고 뛰어다녔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그냥 먹었겠지. 뭐 역시 '의심하지 않는 삶'은 편하다. 으하하. 

그 무렵, 누나의 꿈이 갑자기 '기자'로 바뀌었다. 미디어 무슨 법이 바뀌었다는데, 세상이 나아지는 쪽으로 바뀌는 거지 더 개판인 쪽으로 바뀌는 게 말이 되냐. 하여간 아빠 닮아서 의심은. 부지런한 누나는 사서 고생이다. 쯧. 아빠는 그걸 또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하며 무슨 책을 사다 주기도 했다. 하여간 돈 안 되는 거만 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모양이다. 어쨌든 그 가카 덕분에 누나의 관심이 전 지구적으로 팽창하던 게 우리나라로 축소된 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는데 기자가 되고 싶은 누나의 컴퓨터는 제주도로, 평택으로, 밀양으로, 고리 원전으로. 전국을 더 바쁘게 헤집고 다녔다. 웃긴 건 매번 선거 때마다 누나는 바빠서 투표를 못 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투표할 궁리를 했는데, 그중에서 진짜 웃겼던 건 18대 대통령 선거 때, 변장하고 가서라도 엄마 대신 투표하겠다며 아주 유명한 어떤 미친년처럼 변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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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이러고 가서 엄마 대신 투표하게? 그냥 댓글이나 열심히 달지그래?


하여간 그 대통령 선거 전날, 엄마와 누나가 크게 싸웠다. 엄마는 "니네 아빠의 못된 친구 중에 진짜 못된 새끼가 있는데 그 새끼 때문에라도 2번은 찍기 싫다."라고 했다. 누나는 "그렇게 되면 난 이민 갈 거야."라고 했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형은 "야, 너 가면 나도 같이 가자"며 버스나 타겠다는 식의 생각 없는 얘기를 해서 누나를 더욱 열 받게 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누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던 다음 날, 종일 방에 처박혀 울었는데, 엄마한테 참 많이 화가 났던 모양이다.

멘붕에서 벗어난 건지 멘붕에 쩔어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는 누나는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취업이 그나마 좀 나아 보이는 공대를 선택했다. 그리고 뭐 아주 당연하게도 알바를 시작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누나의 알바는 꽤 힘들어 보였다. 매니저 새끼가 중간에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돈을 안 준다고 나가 있으라고 해서 누나는 그 시간을 공원 벤치에서 보냈단다. 늘 새로운 장래 희망을 얘기하던 누나가 꽤 오랫동안 바꾸지 않던 장래 희망인 '기자'에 대한 미련은 안 버리고 있어서, 공원 벤치에서 내내 기사를 읽는 것 같다. 뭐 그렇게 해봐야 기레기밖에 더 되겠냐.

한번은 누나가 주말에는 차라리 형처럼 돈 많이 버는 공사장 같은 데서 일하고 며칠 쉬는 게 낫겠다며, 새벽에 건설 인력 파견 회사에 갔었는데 거기서 다방 아가씨로 오해받고는 열받아서 한바탕 하고 나왔단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나오는데, 길에서 무슨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고 거길, 지나가다가 우연히 엑스트라로 캐스팅되었단다. 아마도 누군가가 안 나왔던 모양인데, 여태까지도 자기가 예뻐서 그런 줄 알고 있다. 뭐 솔직히 몸매나 얼굴이 중간은 된다고 인정한다. 그 이후 주중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편의점 같은 데서 일을 하고 주말은 촬영장, 녹화장 같은 데를 기웃거리면서, 나름 재밌어 보이는 알바를 찾아다녔다.

누나는 알바를 참 골고루 했는데, 커피 전문점에서 알바할 때는 손도 데고 월급도 떼여서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화점에서 인사하는 알바는 도저히 못 하겠더란다. 그래도 누나가 이상한 알바를 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어떤 여자애들이 이상한 데서 돈 벌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이 돌고 있는데.

누나가 세상에 대한 얘기를 안 하게 된 것도 꽤 됐다. 아니, 누나는 늘 학교에 있거나 알바를 해서 누나 본지도 꽤 된 것 같다. 며칠 전에 '청와대 십상시'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는데 "이제, 세상이고 지랄이고 다 모르겠고 그냥 이민이나 가고 싶다."라며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겠단다. 누나는 군대 대신에 외국인 노동자의 길을 택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별 생각 없이 "형 제대하면 같이 가."라고 했는데 아차 싶었다. 그때 누나 표정이 어휴. 그건 마치 어떤 병신이 "사장이 알바비 떼먹는 사람인가 아닌가 구분하는 것도 능력이다."라고 했을 때, 보통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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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알바비 떼먹게 생겼는지 아닌지 딱 보면 몰라?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까 이런 소리 들으려고 온 거 아냐?

뭐 어쨌든. 내가 대학 들어갈 때 쯤에는 누나가 어딘가에 가긴 해야 할 텐데, 잘 된 건가. 그래서 그런 거라면 아직 1년 정도 남았는데. 아. 이런 소리 하면 또 혼나겠다.


5. 아주 긴 여행

내가 4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나를 할아버지 집에 맡겼단다. 뭐 찜닭 집 한다고 바빠서 그랬다는데 누나는 아마도 내가 주변에서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게 그래서 그런 거라고 한다. 차라리 유럽 어디로 입양을 보냈으면 좋았을걸. 뭐 그래도 고아원에 맡기지 않은 게 어디냐. 다 이해한다. 다들 IMF 때문에 세상이 힘들어졌다고들 하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늘 가난했기 때문에 그게 딱히 IMF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가 많은 편이다. 우리 집도 아파트긴 하지만. 30년 된 아파트. 그냥 같은 반에 있는 애들을 '친구'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게네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지들끼리 어울린 애들이다. 엄마들끼리 모임도 있고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혼자여서 그랬는지. 난 그냥 혼자 있는 게 더 편하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 시선 때문에 좀 불편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급식하는데, 우리 집은 항상 급식비가 밀렸다. 5학년 때 담임은 꼭 애들 다 있는 데서 불러서 돈 내라는 소리를 했기 때문에 좀 많이 창피했다. 그런 거 말고도 그 인간 덕에 우리 반 애들은 각종 차별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여간 좀 이상한 인간이었다. 급식비 때문에 창피해 하고 있을때 형이 "그거 너무 신경 쓰지마..너 말고도 몇 명 더 있을 거 아냐..너도 나처럼 귓구녕 틀어막고 음악이나 들어..ㅎㅎ"라는 멍청한 소리를 했는데 형은 늘 그런 식이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되게 시큰둥한 거. 어쨌든 형은 그걸 위로라고 한 모양인데 신기하게도 위로가 된 것 같았고, 아마도 그때부터는 내가 관심 없는 일에는 아예 신경을 끊어왔던 것 같다. 뭐, 남들이 왕따를 하든 말든 괴롭히지 않으면 싸울 일은 없으니까. 6학년 때는 '신종플루' 때문에 수학여행을 안 가게 되었다. 돈도 없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등학교는 무상급식을 한단다. 내가 있을 때는 안 하고. 어쨌든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학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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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짱 먹었으니까 나까지만 하고 니들부터는 쿠데타하기 없기



형은 팝 음악을 주로 들었는데 대학가더니 친구가 쓰던 기타를 하나 빌려왔다. 그 바람에 나도 기타를 좀 배우게 됐는데, 어느 날 "오호. 이게 되네. 우하하."하는 경험을 한 이후로는 계속 기타에 매달렸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합주를 해보자고 했는데, 그게 교회였다. 우리 가족 모두는 교회를 싫어했고, 나 역시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냥 친구들과 합주를 해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갔다. 물론, 난 여전히 교회가 싫다. 거기서 어떤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그건가..사..사랑? 간지럽게 왜 이래.

형이 군대 간 이후에 드디어 내방이 생겼다. 이제 내방 문을 잠그면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방해할 사람은 없다. 학교 가는 거만 빼면, 요즘 아주 하루하루 사는 게 즐겁다. 근데 또 수학여행 시즌이 왔다. 고민이다. 물론 이런 고민은 내가 할 게 아니라 엄마나 아빠가 해야 하는 건데 안 그래도 힘든 분들 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묻는다.

"너넨 수학여행 언제 간대? 얼마래? 얼른 말해. 돈 나갈 데 많어."

엄마가 미리 뭔가 알고 얘기하는 것 같다.

"안 갈라고. 공부 할 것도 많고, 친구도 별로 없고..그냥 집에서 기타나 치고 있을래"

"혼자 궁상떨지 말고 갔다 와. 기타는 갖고 가서 치고 놀아."


역시 엄마 스타일이다. 쿨해! 그리고 우리 학교 수학여행을 일주일 남겨두고, 단원고 애들이 탄 배가 제주도 가는 길에 자빠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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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야..다 구조됐대.."

"야, 카톡 보내봐.."

"단원고 애들 진짜 재밌었겠다..ㅋㅋ"

점심시간이 지나고 난 잠이나 자려고 엎어져 있었는데 애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난 그 학교에 아는 애도 없고 구조대랑 특공대도 보냈다니까 뭐 별일 있겠냐 싶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하단다. 조류가 빨라서 구조가 어렵단다. 집에 와서 티비를 켰는데, 온통 세월호 얘기뿐이다.

"아, 맞다..교회에서 봤던 걔..단원고 교복이었던 것 같은데..2학년은 아니겠지? 2학년인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인터넷 기사를 봐도 얘기가 다 다르게 나온다. '뭐, 구조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래. 구조된 애들 인터뷰도 하고 할만도 한데 왜 그런 게 없지? 현장에 왜 구조된 애들이 별로 안 보일까. 쟤는 아까 걔잖아. 왜 계속 같은 화면만 돌리고 있지? 궁금하네.' 실종자가 갑자기 300명으로 늘었다.

"뭐야. 뭐냐고! 아니. 아침부터 배가 딱 보였는데, 왜 못 구하냐고!!"

화가 났다. 정말 이상했다. 누가 나한테 욕한 것도 아닌데, 너무 화가 나서 막 욕을 했다. 눈물이 났다. 정말 이상했다. 쟤네 내가 아는 애들도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났다.

나처럼 싸가지 없고 쿨한 놈이 왜 눈물이 날까. 누나가 들어왔다. 사장이 인터넷이나 들여다보면서 죽을상을 하고 있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 그래서 대차게 한바탕 하고 때려치웠단다. 그날 누나한테서 이 나라에 대해 정말 많은 얘기를 들었다. 특히 이 나라 언론이 제일 쓰레기라고 그래서 누나가 기자가 되려 한다고. 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다들 세월호 얘기를 한다. 하지만 다들 그리 길게 하지는 못한다. 그냥 평소와 달리 조용한 것 같다. 기분 탓일까. 며칠째 신문과 방송은 모두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서로 미리 짠 듯이 거짓말만 쏟아내기도 어려울 거다. 이제 생존자는 없을 것 같다. 엄마는 요즘 티비만 켜면 운다. 나도 얼마 전에 그냥 눈물이 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 엄마가 자주 우는 게 이해가 간다. 아빠가 밤늦게 들어와서는 팽목항에 자원봉사하러 간 누나랑 전화한다.

"여기서 친구 만났어..동생이 아직 여기 있대.. 여기 모인 기자들..다 개새끼들이야.."

누나는 이제 기자 같은 거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진도에서 올라오는 대로 호주로 일하러 갈 거란다.

그대로 몇 주가 지났다. 어느 날 교실에서 어떤 새끼가 "야, 단원고 애들은 대학 특례입학시켜준대."라고 해서 "야, 이 새끼야. 너는 너 뒈지고 니네 부모가 니 영정 사진 들고 대학 가면 좋겠냐. 이 대학에 미친 병신새끼야!"라고 한바탕 쏟아 부어 줬다. 1학기가 끝나가는 시점이었지만, 아마도 그 새끼랑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유일한 대화였던 것 같다. 물론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몇 개월이 지났는데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어떤 학부모는 단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새끼들은 그 앞에서 치킨을 먹으며, 그걸 조롱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빨갱이라고 막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도에서 올라오는 대로 호주로 가겠다던 누나는 휴학했고 세월호 진상규명 되는 거 보고 가겠다며 광화문을 돌아다니는데 아마도 영원히 못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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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나라를 치킨과 피자로 지켰느냐. 나라를 지키고 싶으면 군대에 가야지.
(출처: 오마이TV)


몇 개월이 지났지만, 합동 분향소에는 가보지 않았다. 그 이름도 모르는 애, 얘기도 안 해본 애를 굳이 내가 만나볼 이유는 없잖아. 200일이 되어서야 한번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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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 아저씨가 단원고 선생님이었구나. 어? 쟤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애를 만났다. 사진을 보니 왠지 전에 잘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실물이 훨씬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분향소 오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뭔가 대단한 느낌도 없었다. 분향소를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봤는데 갑자기 사진 속 아이들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들이 아니라 내가 실종자처럼 느껴졌다. 옆에서 흐느끼던 사람이 우리 엄마 아빠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나왔다.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되었고 어느 예능 피디 하나가 그 시절을 추억하며 90년대 가요를 틀어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70년대 세대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시절을 왜곡해서 특정한 부분만을 그 시절의 권력과 같은 목소리로 보여주는 건 매우 곤란하다. 억압적인 권력으로 인해 부부싸움 하다가도 국기에 경례를 하는 상황을 '나라 사랑'으로 치환하는 멍청이가 관객 중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시절을 좋게 추억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약간의 민주 공화정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좋은 추억이 너무 멍청하고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모욕적인 일이다.

"니들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서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부모도 겪고, 우리도 겪고, 우리 자식들도 겪을 게 너무 뻔한데도 그걸 바꿀 수도 없는 이 지랄 맞은 상황은 참 불행이라고."

그들도 할 말이 있을 거다.

"그래도 니들은 밥은 안 굶잖아. 니들 밥은 먹고 살잖아!"

그래.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밥을 좀 적게 먹고 꽤 힘들게 죽긴 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이 밥은 안 굶는 것 같다. 그럼, 다 되는 거냐? 사는 게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도 미안한 이 상황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면 되는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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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 미안해요.


아빠가 세운 나라건 엄마가 세운 나라건, 그게 뭐든 간에 자신들이 겪은 전쟁과 가난을 자식들이 몰라준다고 우리 애들도 똑같이 겪어 보라는 인간들이 전 지구를 통틀어서 여기 말고 또 있나?

만약에 그런 인간들이 있다면, 존중할 가치가 없다.




1. 여기서 다루지 않았던 이 사회의 굵직한 문제들은 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겠냐는 변명으로 넘어간다.


2. 꿈에서 봤던 이 영화의 결말을 보긴 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마도 결말을 여러 개 찍어놓고 랜덤으로 골라서 보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2040년쯤 되면 그런 게 있지 않겠느냐.


3. 2040년에 저런 종류의 영화를 보는 인간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일 거다. 

하나는 "이햐. 저 때는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그랬구나.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을"이고, 두 번째는 "저 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일 거다. 마지막으로는 "야 지금 이 세상이 저 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했구나. 그래도 저 때는 지금처럼 이 정도는 아니었나 보네. 저 때가 더 낫네."일 거다.


만약 그때 많은 사람이 첫 번째나 두 번째 반응을 보인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멍청하거나 미련하게' 보일 거다. 세 번째 반응을 보인다면 우린 뭔가를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4. '결말은 당신을 포함한 우리에게 달려있다.'라고 하면 너무 유치한가?





멀더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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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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