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만나고 온 며칠 동안 안 그래도 형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서 마음에 걸렸는데 뉴스에 그 부대마크가 나왔다. 누군가가 선임들한테 고문당하다가 죽었단다. 부대 마크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우리 아빠가 윤씨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랑 누나는 밤새 울었다.
그러게 남의 똥꼬에 지 꼬추 막 문지르지 말라고 그럼 안된다고 똑바로 가르쳤어야지.
4. 누나
누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애들 꿈이 다 그렇지만 누나는 영화배우, 작가, 가수, 마술사 등 돈 안 되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모네' 같은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서였는지 철이 들어가면서였는지 누나의 꿈은 좀 더 현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로 바뀌었다. 그쪽도 돈 안 되긴 마찬가지란다.
형과는 달리 누나는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엄마는 누나가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고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누나의 관심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과 중동평화, 지구온난화, 인류의 먹거리 등으로 확장되었다. 만약 건설사 사장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누나의 세상 걱정은 태양계를 벗어나 팽창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걱정으로 무한히 확장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가카와 그의 친구들은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소고기를 먹게 되었다"며 손녀를 '그랩'하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에 나처럼 소고기 못 먹어서 환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누나는 미국 소는 미친 소가 많은데 얼마나 미쳤는지도 알 수 없다나 뭐라나. 어쨌든 친구들과 함께 밥상을 지켜보겠다고 뛰어다녔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그냥 먹었겠지. 뭐 역시 '의심하지 않는 삶'은 편하다. 으하하.
그 무렵, 누나의 꿈이 갑자기 '기자'로 바뀌었다. 미디어 무슨 법이 바뀌었다는데, 세상이 나아지는 쪽으로 바뀌는 거지 더 개판인 쪽으로 바뀌는 게 말이 되냐. 하여간 아빠 닮아서 의심은. 부지런한 누나는 사서 고생이다. 쯧. 아빠는 그걸 또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하며 무슨 책을 사다 주기도 했다. 하여간 돈 안 되는 거만 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모양이다. 어쨌든 그 가카 덕분에 누나의 관심이 전 지구적으로 팽창하던 게 우리나라로 축소된 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는데 기자가 되고 싶은 누나의 컴퓨터는 제주도로, 평택으로, 밀양으로, 고리 원전으로. 전국을 더 바쁘게 헤집고 다녔다. 웃긴 건 매번 선거 때마다 누나는 바빠서 투표를 못 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투표할 궁리를 했는데, 그중에서 진짜 웃겼던 건 18대 대통령 선거 때, 변장하고 가서라도 엄마 대신 투표하겠다며 아주 유명한 어떤 미친년처럼 변장했던 일이다.
누나 이러고 가서 엄마 대신 투표하게? 그냥 댓글이나 열심히 달지그래?
하여간 그 대통령 선거 전날, 엄마와 누나가 크게 싸웠다. 엄마는 "니네 아빠의 못된 친구 중에 진짜 못된 새끼가 있는데 그 새끼 때문에라도 2번은 찍기 싫다."라고 했다. 누나는 "그렇게 되면 난 이민 갈 거야."라고 했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형은 "야, 너 가면 나도 같이 가자"며 버스나 타겠다는 식의 생각 없는 얘기를 해서 누나를 더욱 열 받게 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누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던 다음 날, 종일 방에 처박혀 울었는데, 엄마한테 참 많이 화가 났던 모양이다.
멘붕에서 벗어난 건지 멘붕에 쩔어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는 누나는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취업이 그나마 좀 나아 보이는 공대를 선택했다. 그리고 뭐 아주 당연하게도 알바를 시작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누나의 알바는 꽤 힘들어 보였다. 매니저 새끼가 중간에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돈을 안 준다고 나가 있으라고 해서 누나는 그 시간을 공원 벤치에서 보냈단다. 늘 새로운 장래 희망을 얘기하던 누나가 꽤 오랫동안 바꾸지 않던 장래 희망인 '기자'에 대한 미련은 안 버리고 있어서, 공원 벤치에서 내내 기사를 읽는 것 같다. 뭐 그렇게 해봐야 기레기밖에 더 되겠냐.
한번은 누나가 주말에는 차라리 형처럼 돈 많이 버는 공사장 같은 데서 일하고 며칠 쉬는 게 낫겠다며, 새벽에 건설 인력 파견 회사에 갔었는데 거기서 다방 아가씨로 오해받고는 열받아서 한바탕 하고 나왔단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나오는데, 길에서 무슨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고 거길, 지나가다가 우연히 엑스트라로 캐스팅되었단다. 아마도 누군가가 안 나왔던 모양인데, 여태까지도 자기가 예뻐서 그런 줄 알고 있다. 뭐 솔직히 몸매나 얼굴이 중간은 된다고 인정한다. 그 이후 주중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편의점 같은 데서 일을 하고 주말은 촬영장, 녹화장 같은 데를 기웃거리면서, 나름 재밌어 보이는 알바를 찾아다녔다.
누나는 알바를 참 골고루 했는데, 커피 전문점에서 알바할 때는 손도 데고 월급도 떼여서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화점에서 인사하는 알바는 도저히 못 하겠더란다. 그래도 누나가 이상한 알바를 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어떤 여자애들이 이상한 데서 돈 벌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이 돌고 있는데.
누나가 세상에 대한 얘기를 안 하게 된 것도 꽤 됐다. 아니, 누나는 늘 학교에 있거나 알바를 해서 누나 본지도 꽤 된 것 같다. 며칠 전에 '청와대 십상시'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는데 "이제, 세상이고 지랄이고 다 모르겠고 그냥 이민이나 가고 싶다."라며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겠단다. 누나는 군대 대신에 외국인 노동자의 길을 택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별 생각 없이 "형 제대하면 같이 가."라고 했는데 아차 싶었다. 그때 누나 표정이 어휴. 그건 마치 어떤 병신이 "사장이 알바비 떼먹는 사람인가 아닌가 구분하는 것도 능력이다."라고 했을 때, 보통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 정도?
아니, 알바비 떼먹게 생겼는지 아닌지 딱 보면 몰라?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까 이런 소리 들으려고 온 거 아냐?
뭐 어쨌든. 내가 대학 들어갈 때 쯤에는 누나가 어딘가에 가긴 해야 할 텐데, 잘 된 건가. 그래서 그런 거라면 아직 1년 정도 남았는데. 아. 이런 소리 하면 또 혼나겠다.
5. 아주 긴 여행
내가 4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나를 할아버지 집에 맡겼단다. 뭐 찜닭 집 한다고 바빠서 그랬다는데 누나는 아마도 내가 주변에서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게 그래서 그런 거라고 한다. 차라리 유럽 어디로 입양을 보냈으면 좋았을걸. 뭐 그래도 고아원에 맡기지 않은 게 어디냐. 다 이해한다. 다들 IMF 때문에 세상이 힘들어졌다고들 하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늘 가난했기 때문에 그게 딱히 IMF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가 많은 편이다. 우리 집도 아파트긴 하지만. 30년 된 아파트. 그냥 같은 반에 있는 애들을 '친구'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게네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지들끼리 어울린 애들이다. 엄마들끼리 모임도 있고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혼자여서 그랬는지. 난 그냥 혼자 있는 게 더 편하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 시선 때문에 좀 불편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급식하는데, 우리 집은 항상 급식비가 밀렸다. 5학년 때 담임은 꼭 애들 다 있는 데서 불러서 돈 내라는 소리를 했기 때문에 좀 많이 창피했다. 그런 거 말고도 그 인간 덕에 우리 반 애들은 각종 차별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여간 좀 이상한 인간이었다. 급식비 때문에 창피해 하고 있을때 형이 "그거 너무 신경 쓰지마..너 말고도 몇 명 더 있을 거 아냐..너도 나처럼 귓구녕 틀어막고 음악이나 들어..ㅎㅎ"라는 멍청한 소리를 했는데 형은 늘 그런 식이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되게 시큰둥한 거. 어쨌든 형은 그걸 위로라고 한 모양인데 신기하게도 위로가 된 것 같았고, 아마도 그때부터는 내가 관심 없는 일에는 아예 신경을 끊어왔던 것 같다. 뭐, 남들이 왕따를 하든 말든 괴롭히지 않으면 싸울 일은 없으니까. 6학년 때는 '신종플루' 때문에 수학여행을 안 가게 되었다. 돈도 없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등학교는 무상급식을 한단다. 내가 있을 때는 안 하고. 어쨌든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학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짱 먹었으니까 나까지만 하고 니들부터는 쿠데타하기 없기
형은 팝 음악을 주로 들었는데 대학가더니 친구가 쓰던 기타를 하나 빌려왔다. 그 바람에 나도 기타를 좀 배우게 됐는데, 어느 날 "오호. 이게 되네. 우하하."하는 경험을 한 이후로는 계속 기타에 매달렸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합주를 해보자고 했는데, 그게 교회였다. 우리 가족 모두는 교회를 싫어했고, 나 역시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냥 친구들과 합주를 해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갔다. 물론, 난 여전히 교회가 싫다. 거기서 어떤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그건가..사..사랑? 간지럽게 왜 이래.
형이 군대 간 이후에 드디어 내방이 생겼다. 이제 내방 문을 잠그면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방해할 사람은 없다. 학교 가는 거만 빼면, 요즘 아주 하루하루 사는 게 즐겁다. 근데 또 수학여행 시즌이 왔다. 고민이다. 물론 이런 고민은 내가 할 게 아니라 엄마나 아빠가 해야 하는 건데 안 그래도 힘든 분들 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