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1. 19. 월요일
문화불패 ParisBou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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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힘, 도시
사회는 무엇을 통하여 변화하는가? 만약 하나의 사건이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면, 한 언론사에 침투하여 임직원 10명과 경찰 둘을 살해한 3명의 무장 괴한이 저지른 테러는 프랑스 사회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테러사건의 반작용이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의 빠른 증가와 결속력 확대일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 사건은 무고한 인명을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의 표현의 자유에 중대한 생채기까지 낸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확신할 순 없지만 프랑스 극우파의 활보(안 그래도 성장하고 있었는데)에 까지 파장을 미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사건에 대해서 분석하려면 끝도 없을 것이고 필자도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딱 두 마디만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프랑스는 언론에 대한 테러에 '공분'한 모습이다. '테러리즘'이란 것이 폭력으로 한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는 것이라 한다면, 이번 테러는 반만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부는 공포에 질리긴 했지만, 그것이 언론의 자유에 관한 것이므로 이성을 유지한 채로 공포를 이겨내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공포에 의한 반작용, 즉 '피의 복수'나 '성전' 따위가 등장할 가능성은 아직 희박해 보인다. 비록 일부 언론과 극우파들은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얻겠지만. 프랑스가 진짜 공포에 질릴 만한 테러를 막는 데 경찰력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이성일 것이다.
사진: Damien Meyer/AFP/Getty Images
국가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힘이 이성에 있다면, 이 이성이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은 아마 우리가 널리 배웠던 국가의 3요소, '국민, 주권, 영토' 중의 하나인 영토가 될 것이다. 만약 오늘 프랑스에 벌어진 이 참극에 영향을 끼친 3가지 요소를 저 3요소에서 찾는다면, 프랑스 국민의 아랍인(이라고 읽지만 무슬만이라고 써야 한다)에 대한 인식, 프랑스 정부의 북아프리카 이민자 정책, 그리고 정책에 따라 그 이민자들이 살아간 '도시'를 파헤쳐 봐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현대건축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살아온 도시가 그렇게 잘 작동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들의 인식과 정책의 경제적 영향에 더해, 그들이 살아간 도시가 그들에게 악영향을 끼쳐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런 테러사건보다 도시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회는 그것을 통해 훨씬 많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변화 속도는 이러한 '사건에 의한 변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릴지라도 말이다.
오늘은 프랑스 현대건축사의 중요한 한 단면인 '도시건축가로서의 르 코르뷔지에'를 한번 살펴보겠다. 그리고 앞으로 쭉, 아주 느리게 그러나 거대하게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그것, 도시와 건축에 대해서 계속 다뤄보겠다.
우리는 지금껏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물질적인 요소인 도시와 건축에 대해 무시를 강요받고 살았다. 우리 사회는 다른 요소를 통해서 너무 빠르게 변화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 미미한 것은 아니다. 도시는 우리를 한두 세대에 걸쳐 서서히 변화시킨다. 그렇기에 우리도, 세상이 미친듯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느리게 느리게나마 가끔 우리의 도시와 건축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아파트 경비원 분신자살 사건은
과연 아파트 건축 그 자체와는 관련이 없는 일일까?
2. 르 코르뷔지에, 이론으로서의 도시건축.
도시는 건축된다. 하지만 모든 건물이 건축가의 이름 하에 지어지지 않듯, 도시가 도시건축가에 의해서만 지어지는 일도 흔치 않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아파트라 할 수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현장 건설노동자 전용 아파트'를 몇 채 건설하도록 한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사람도 있다. 그도 당대의 어떤 기술자에게 설계를 대략 맡기긴 했겠지만, 그런 임시아파트 몇 채를 도시라고 부르기도 좀 뭐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건축가'란 직업을 명명하긴 했으나 이들이 뭘 하는지도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들이 '도시건축 이론'까지 만들어 내다니 뭐 이런 황당한 일이 있으려나.
결론부터 말하면 모더니즘 시대의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친구들 것만큼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도시건축 이론은 이후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의 도시건축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이후의 것들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론의 발전속도가 노력의 속도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더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이제 비로소 뭔가 알 것 같은 무언가, 한 단어로 다시 줄이자면 '도시'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건축이론을 살펴보려면 다시 한 번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를 디벼보는 것이 좋다.
완벽함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스탠다드의 확립에 생각해야만 한다.
파르테논은 스탠다드에 입각한 '선택의 산물'이다.
건축은 스탠다드에 의해 움직인다.
스탠다드는, 논리, 분석, 진실된 학습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스탠다드는 정확한 문제의식으로부터 확립된다. 실험은 스탠다드를 완전히 확립한다.
Il faut tendre à l’établissement de standarts pour affronter le problème de la perfection.
Le Panthénon est un produit de sélection appliqué à un produit de sélection appliqué à un standardt.
L’architecture agit sur des standarts.
Les standarts sont chose de logique, d’analyse, de scrupuleuse étude; ils s’établissent sur un problème bien posé. L’expérimentation fixe définitivement le standart. Vers une architecture, Le Corbusier, p.103, Edition Flammarion.
3. 스탠다드
건축에서도 스탠다드는 중요한 요소다.
2편에서 이야기했던대로,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이 보편적인 현대인(도시인)의 요구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요구가 연구를 거치면 보편적으로 괜찮게 받아들여질 물건, 즉 스탠다드를 탄생시킨다고 생각했다. 이 스탠다드가 꽤 대단한 물건인 것이, 이것만 있으면 도시인들의 웬만한 고통(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변기와 환기가 되지 않는 부엌,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과 같은 것이 주는 고통)이 해결된다. 게다가 오늘날(그가 살았던 1900년대 초반)의 기술이라면, 하나의 스탠다드만 잘 만들어 놓으면 공장에서 쭉쭉 뽑아서 쉽고 싸게 많은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다. 얼마나 대단한가.
공장생산 제품이라고 멋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제대로 된 스탠다드는 그 자체로도 멋있지만, 그것을 복제하여 잘 배치한다면 엄청난 미술적 가치(심지어 파르테논에 버금가는)를 지닌다. 파르테논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파르테논은 그 자체로도 스탠다드한 기둥들이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만들어진 건물이거니와, 또 그것을 비슷하게 복사해서 로마 시대까지 신전 모양으로 전 유럽 곳곳에서 써먹었으니, 스탠다드라는 것이 잘 만들어놓기만 하면 몇백 년을 우려먹을 수 있는 대단한 것이 아닌가.
저것이 건축 팩토리라면 콘크리트 벌쳐대신 콘크리트 기둥들이 마구 튀어나올 것이다.
(출처: http://www.ygosu.com/community/?bid=st&idx=100590)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른 르 코르뷔지에는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사실 하나의 집을 복제하여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는 건축방식인 공동주택,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는 르 코르뷔지에가 만들었다고 할 수 없다. 유럽 도시에서 너무나도 흔한 건축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건축은 위생에 대한 개념이 없어 냄새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거주자의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길은 좁고 길어서 보행자, 마차, 밀차, 오물, 쓰레기들이 넘쳐흐르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산업화로 도시에 몰려든 사람의 숫자를 받아낼 공간이 부족해 곳곳에 판자촌들이 널리고 아파트 안의 작은 공간에는 3~4세대가 함께 모여 낑겨 사는 상태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스탠다드라는 전가의 보도 같은 상상 속의 칼을 갈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이런 상황을 한 방에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이라는 느낌이 팍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생문제 대부분이 발생하는 주방과 화장실은 이때부터 실험과 실험을 거쳐 뛰어난 스탠다드들이 많이 개발되고 이후 이런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된다.
4. 복제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의 이론은 화장실이나 부엌 같은 부분적인 문제를 뛰어넘는 훨씬 더 거대한 무언가를 건드리기에 이른다. 일단 스탠다드한 집을 만들어 낸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1920년대에 이르러 완전하게 꽃이 핀 철근 콘크리트기술은 그가 '자유로운 평면' 이론에 따라 그려놓은 현대적인 집들을 빠르게 다양한 방식으로 복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먼저 건물의 벽, 기둥, 바닥 등을 부품화시켜 공장에서 선 제조하여 공사장에서 후 조립할 수 있는 기술이 나와 공사장의 기후조건에도 상관이 없고, 콘크리트가 마르는 긴 기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빠르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역학의 발달에 의한 하중 계산의 정확성이 높아짐에 따라 건물을 이전보다 적은 재료로 훨씬 더 높이 쌓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벽으로 건물을 올리는 것이 아닌 기둥으로 올리는 구조이기 때문에 르 코르뷔지에가 원하는 대로 창문을 뚫어서, 큰 창문으로부터 오는 많은 빛과 좋은 환기, 그리고 멋진 경관을 고층건물에서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 이전의 건물과 이후의 건물은 창문 크기자체가 다르다.
건설기술의 발전은 집안에 더 많은 빛을 공급하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위는 파리의 한 건물의 파사드 / 밑은 Boulogne-Billancourt시의 시청 안마당에서 본 시청건물
Tony Garnier, 1934년 작
집을 복제하여 건물을 만든 르 코르뷔지에는 이제 그 건물을 복제하기에 이른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법칙들과 자연의 일관적인 비율(흔히 말하는 황금비율) 등을 과학이 계속해서 발견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건축에도 이런 '법칙'을 적용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건축이 모여서 생성하게 되는 도시도 그 법칙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도시의 건물들은 그가 만들어낸 건축이론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기에, 모두 필로티(1층의 공간이 비어있고 2층부터 시작되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한 최대한 얇은 기둥들만이 땅에 박혀있게 되는 건축방식)로 지어져 있으므로, 이 도시의 1층 공간은 완전히 열린 공간이 된다.
벽 하나를 서로 공유하며 다닥다닥 붙어있던 유럽의 건축들이 만들어내는 좁고 지저분한 길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르코르뷔지에는, 건물들 사이에 최대한 많은 공간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서로에게 그림자로 피해를 주지 않고, 공기는 잘 통할 것이며, 시야도 확 트이는 넓은 공원 같은 도시공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좁은 면적에 최대한 많은 집을 지어 나머지 면적을 모두 빈 공간을 남겨 놓을 수 있도록 고층으로 집을 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lan voisin('이웃 계획' 정도로 해석) 르 코르뷔지에, 1922-1925
르 코르뷔지에는 이미 불결할대로 불결한 파리 중심부를 싹 밀어버리고
자신이 생각한 도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았다.
물론 실행되지는 않고 프로젝트로 그쳤다.
이 계획은 그가 도시건축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는 지를 잘 보여주며,
그가 하고 싶었던 도시건축도 잘 보여준다.
스탠다드의 확립에 따른 집과 건물의 복제 재생산된 아파트는, 물론 도시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도시는 주거공간 뿐아니라, 상점, 상점에 들어가는 물건을 만드는 크고 작은 공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어줄 길이 모두 모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꼭 르 코르뷔지에가 혼자 주장했다고 할 순 없지만, 모더니즘 도시건축가들은 이런 문제를 조닝(Zoning)이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르코르뷔지에는 그의 모더니즘 건축가 동료들과 함께 만든 CIAM(Congrès Internationale d’Architecture Moderne:국제 현대 건축 회의기구)에서 "도시는 삶, 일, 여가, 그리고 교통 인프라의 기능을 해야 하며 각 기능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발표한다. 우리가 오늘날 흔히 말하는 '공업지구', '상업지구'등이다. 특히 공업지구에 대하여 이미 모더니즘 시대 이전부터 미국에서 사용되기 시작된 이 용도별 구역 나눔은, 주거공간은 다른 활동에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조용한 공간이어야 하고, 공장들은 공해를 만드니 이 모든 것들을 다 따로 때어 놔야 하며 이들은 거대한 도로(고속도로)로 연결한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이미 자동차를 발명해 놓았기 때문에 그정도 거리의 움직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주거지구에서 자동차는 역시 공해를 만드는 기계이므로 모든 도로가 지하로 들어가고 1층은 통째로 공원이 되야만 한다는 생각 정도가 대충 그들의 이론의 핵심이다. 참으로 만들기도 쉽고 사용하고 편리한 완벽한 생각라 할만한, 꽤나 그럴듯한 이론이다.
조닝 쉐마 (Michelle Holley, 1959작, 레이몬드 로페즈와 연계된 건축가)
1950년대 파리의 도시계획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레이몬드 로페즈(Raymond Lopez)는 1960년대에 설계를 시작해 72년에 완공되는 파리 15구(서울의 서초구 정도의 심리적 경제적 위상을 갖고 있는 동네다)의 아파트 단지, Front de Seine(세느강변 아파트 정도로 해석하겠다)를 계획, 설계한다. 이 아파트도 CIAM이 주장했던 도시계획 이론인 Zoning을 거의 완벽하게 따르고 있으나 차이점은 이 프로젝트에서는 조닝이 수평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이루어진 다는 것이겠다. 고층부는 Habiter(주거), 저층은 Travailler(일), 1층과 지하는 Circuler(교통)의 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어수선하고 비위생적이며 긴급한 조치를 필요로 한 당시 유럽의 도시상황에서 출발한 모더니즘 도시이론은 결과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새로운 도시에 빠르게 건설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갈 데 없는 주민이 수십 만에 달하던 유럽의 도시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건물들의 상당수를 한 번에 지워버리고 그 위에다 새로운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을 올린다는 것은 그 공사가 아무리 빠를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도시의 가치를 '편리한 주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있던 당시 도시인들과 지식인들의 반대로 오늘날 우리는 유럽 어느 도시에서도 모더니즘 도시이론이 적용된 아파트 단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도시건축의 주체가 '권력'에 있다면 어떨까?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전투적으로 지어지는 모더니즘 건축은 태생적으로 권력을 매료시킬 수 밖에 없다. 애초에 공사의 규모 자체도 왠만한 권력이 아니면 지시를 내릴 수도 없는 규모이므로 공사 자체만으로도 권력의 과시가 될 수 있을 뿐더러, '하나의 법칙'으로 화장실부터 집, 건물, 도시를 질서 있게 만든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하나의 잘 컨트롤된 국가를 만든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깨끗하고 새로운 집들을 한 방에 하사 받은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그 후 평생동안, 혹은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대를 이어 우러러 볼테니, 권력자로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독재국가들이 모더니즘 도시를 애호한 이유가 결국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어딘지는 모르겠다. 출처는 엔하위키
다시 도시건축이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필자는 아까 도시건축이론은 결국 도시 그 자체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즉 르 코르뷔지에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통째로 건설하는 것이 아닌 도시 그 자체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도시건축이론이라고 부른다. 거기다 건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도시의 모양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그 다음이다. 어떤 도시던 건축을 제로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도시는 최소한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 이유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 도시가 '신도시'일 지라도, '구도시'와 신도시가 들어설 땅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건축가 마음데로 설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르 코르뷔지에의 아파트를 '도시건축'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된다. 그동안 심시티를 하며 나도 이정도면 도시건축가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심시티는 도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신(god)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야 옳다.
현실에서 심시티를 즐기신 이붕은 그렇담... ㄷㄷㄷ
하지만 조닝(Zoning), 즉 용도에 따른 구획의 지정은, 그 이후 발전해 나가는 도시들의 패러다임을 바꾼 중요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도시에서 나누어 져야 하는 것이 귀족들이 사는 동네나 군사시설 정도에 불과했다면 그 이후 새로 지어지는 도시들에서는 상업지구/공업지구/주거지구의 구분이 꽤나 명확해진다. 굳이 외국의 예를 들 필요 없이 분당만 봐도 주거지역인 아파트 단지와 상업지역인 역 근처가 얼마나 다른 분위기인지를 생각해보고, 그것을 서울에 있는 다른 동네들, 예를 들면 대학로와 대학로 뒷골목의 주택들의 물리적 거리와 분위기를 비교해보면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쪽은 대로를 건너고, 가로수가 크게 나있는 길을 육교를 통해 건너 나와야 비로소 큰 공원이 딸린 아파트들이 나온다면, 한쪽은 왁짜지껄한 대학로 골목이랑 연결되있는 똑같이 생긴 그 골목에 연립주택들과 독립주택들이 마구 혼재되어 있다.
이런 모더니즘 도시건축이 발표되자마자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씹혀오고 있는 이유는 다양한데, 중요한 줄기는 두 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다양성이다. 어떤 장르의 문화에서도 다양성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더니즘 도시건축은 이런 다양성에 완전히 정반대를 외치며 달려나갔다. 특히 대한민국의 건축은 도시를 너머 온 나라가 거의 비슷한 공간구조의 집, 거의 비슷한 건물들이 모인 단지를 살아가게 되었을 정도로 다양성의 파괴가 심각하다.
서울의 가락동 아파트(위키페디아 / 아이디:Stegano)와 대구 상인동의 아파트 (위키페디아 / 아이디:Kys951)
건설된 시기도 다르고 위치도 상당히 다르며 기후도 정말 다른 이 두 아파트는
건물의 외장을 제외하면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파트의 내부구조도 90% 이상 일치할 것이 확실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다문화 가정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어느 가정도 홀문화 가정은 없는 상황에서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 다문화로 따로 지칭해서 부르는 것이 그닥 다양한 문화를 지향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어떠한 교육도 논평도 하지 않는 채, 사회적 성별 불균형으로 인해 급격하게 많아진, 그리고 급하게 만들어진 가정의 본질적 문제점은 건드리지 않는 채, 갑작스래 그들의 다양성을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은 스타크래프트를 해보지도 않은 사람한테 벌쳐를 줄테니 마인을 뽑아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민자들이 이미 사회에 존재하는 기득권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에 사회에서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민자들이 자신의 필요나 개인적 이유가 아닌 그 사회가 노동력이 필요해서 그들을 불러 들였다면,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기회나 비용은 생각보다 꽤 크다. 수십 수백 만의 이민자가 단기간에 한 사회에 노동시장의 편의를 위해 유입되었을 때 가장 급하게 필요한 것은 역시 의식주, 그중에서도 가장 공급하기 힘든 것은 집이다.
프랑스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이후 급하게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자신들이 한때 지배하고 약탈했던 북아프리카 몇몇 국가들에 대대적인 이민 편의정책을 펼치고, 그 때 프랑스땅을 밟은, 갈 데 없는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한 곳이 파리 같은 도시 인근에 새로이 지어졌으나 곧 버려지고 말았던 아파트 단지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아파트 단지들은 버려졌던 이유와 같은 이유로 세상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이민자들만 사는 완전한 게토가 되어버리고 만다.
게토화된 도시가 배경으로 쓰인 영화 <13구역>의 13구역은 파리가 아니라
파리 외곽의 작은 도시중 하나가 배경이다. 파리의 13구는 꽤나 살만한 지역으로,
현재는 중국인 이민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아파트 단지가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 다양한 도시공간이 함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도시들은 자동차 말고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이민자들 뿐 아니라 프랑스인들 조차도 살기 버거워했다. 도시구획이 완벽하게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상업지구도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장보기도 힘들었고, 출퇴근도 당연히 힘들었다. 깨끗하고 큰 집들은 곧 넓고 밝은 감옥처럼 되어 버렸으며, 때문에 처음에 내 집 마련의 꿈을 품고 입주했던 프랑스인들은 원래 살던 도시공간을 떠나갔고 이후 집값이 떨어져 북아프리카 이민자 그룹에게 대대적으로 공급됐다. 도시에서 완전히 분리된 이 거주공간에서 이민자 그룹은 뭘 할 수 있었을까? 교육도 제대로 못받고 도시의 다른 서비스를 향유할 수 없었던 이들은 이사갈 돈도 없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신들의 게토를 스스로 만들었고, 이민 1세대가 퇴직할 무렵엔 이곳에서 자라 별다른 할 일이 없었던 2세대들이 심지어 생활비도 없이 이곳에 살게 되었으니,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게다가 할 것도 없는 젊은 청년들이 파리에서 멀지 않는 곳에 짱박혀서 무슨 궁리를 하고 살게 될지는 거의 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역의 문제는 결국 이거다. 주거지역만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다. 한 가지 층의 사람(비교적 하층 도시민)들만 살게 되니 사회의 다른 곳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바로 집앞에 상점이 있고 공방이 있고 학교가 있었다면, 이들은 사회적 문제를 이르키는 집단이 되었을까?
마르세이유에 외곽에 있는 어떤 아파트.
이런 곳들은 경찰을 부르면 보통 중무장을 하고 나타날 정도로 범죄율이 높고 중범죄가 많이 일어난다.
(출처: http://quartiernordconnection.skyrock.com)
한국의 아파트가 발생시키는 문제도 비슷하다. 조금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이 들어 산다는 것이 다를 뿐, 같은 동네의 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모여있는 아파트는, 비슷한 돈을 버는 층위의 사람들만 살 수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프랑스의 예와 똑같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 이런 집단은 결국 배타적 사고를 하기 마련이다.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지고, 자기들끼리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배타적 자본주의와 대부분의 한국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태생적으로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이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더니즘 도시건축의 또다른 문제점은,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규모가 큰 건축은 한 번 완공되면 뒤엎기가 힘들다. 한국에서 이뤄지는 대규모 재건축 열풍은 논외로 하자. 여기서는 잘못된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뒤엎는 경우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방식의 공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게 된다. 방금 말한 배타적 집단의 조직이 형성되기 매우 쉬운 구조의 도시다. 거대한 단지를 몇 키로미터에 달하는 담장으로 둘러 쳐놓고 그 안에 꼭꼭 숨어서 사는 사람이 대부분인 도시가 제대로 된 도시적 기능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시는 소통의 장소이기 때문에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지 편리하기 때문에 가치있는 곳이 아니다.
이쯤되면 여러분들도 필자가 이 글을 왜 쓰고 있는지를 파악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결코 한 명의 독재자, 혹은 몇몇의 건축가, 혹은 몇몇의 건설회사가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런 도시는 우리사회를 점점 더 끼리끼리 뭉치게 하고, 다양성이 숨쉴 수 없게 한다. 모더니즘 도시건축의 이런 명확한 문제점들은 이미 그것이 이론으로써만 존재할 때도 지적되었고, 현실화 된 후에도 계속해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몇몇 필요한 개념을 제외하고는 용도폐기되다시피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건축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와 언론은 건축에 대해서 이야기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 건축이 어떤 이론적 바탕에서 왔는지, 어떻게 지어졌는지도 모른 채 마치 그것이 우리의 고유 문화인냥 집 현관문에 숫자 네 개를 붙이고 집 건물에는 동수를 그려놓고 살고 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속에서 대안을 찾기는커녕 대안이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며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건축가들이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니, 정치인들조차도 도시와 건축에 대해 뭘 해보려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우리는 또 똑똑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그 제품을 혼자서 묵묵히 공부해봐야 한다. 우리의 도시를 다시 소통의 장소로 돌려 놓기 위해서는 시민이 도시를 알아야 한다. 이 연재가 도시와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이나마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한국건축과 도시의 문제점에 대한 비평은 그때 그때 주제에 맞춰서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정도로 마치겠다.
이로써 드디어 '프롤로그+르 코르뷔지에 편'이 끝났다. 르 코르뷔지에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지만, 사실 그닥 재밌진 않다. 특히 도시건축은 뭐 좀 우울하기까지 하다. 이전에 밝혔다시피 앞으로 연재에서는 꼭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책이나 작가, 도시이야기, 정책이야기 등을 통해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어쩌면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대안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다음 편은, 또 건축가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존하는 건축가중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뽑을 만한 건축가에 대해서 함 이야기 해 보겠다. 그럼 이만.
Ps. 이 연재에 나오는 그림이나 사진은 모두 출처와 작가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출처와 작가가 표기되지 않은 사진이나 그림인 필자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따로 저작권은 주장하지 않으니 필자의 사진과 그림에 한해서는 마음대로 사용셔도 되나, 글은 링크가 아닌 딴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의 펌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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