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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 03. 목요일

김현진입니다







살면서 호구 아니었던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라.
아니, 도로 들어가세요. 별로 보기 싫으니까.


세상 살다 보면 복 받았구나,

정말 귀티 나네, 싶은 사람이 가끔은 있다.

내가 마음이 덜컥, 하고 불편해질 때는

그 사람들이 동그랗고 천진한 눈을 뜨고 불행이란 것을 믿지 않을 때.

돈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 끝없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까지 천해질 수 있으며

가장 잔혹한 폭력은 흔히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누구의 벽장에도 해골이 들어 있다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해골에 대해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해골들은 풍화된 후

가끔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에 시간이 더해지면, 코미디가 된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축복이 있기를. 특별히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해골에게도.  

 






호구, 박복, 삽질의 장대한 역사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돕니다. 뭐, 70년대 유행했다는 <혼자 뜨는 쌍무지개>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원래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불행, 그런 박복과 삽질일수록 더 저열해서 슬퍼지기 마련이죠. 호구, 박복, 삽질, 이거 안 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남자 분들은 군대, 특히 강원도로 다녀오신 분들은 수없이 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나도 ‘슬픔, 아니 박복질은 나누면 쪽팔림이 반이 된다’는 확신으로 내가 했던 삽질의 역사를 글로 좀 풀어보려고 합니다. 같은 삽질을 한 동무들에게 다소의 위로가 되길 바라며 다시 글질을 시작합니다. 첫 시간이니까 좀 약한 것부터 시작하죠. 베이비 호구 시절 얘기입니다.


어린이 시절부터 훌륭한 호구의 자질이 있었던 나는 어른들이 천 원, 오천 원, 아주 가끔 만 원씩 주는 용돈을 100원도 쓰지 않고 신발 모양의 저금통에 꼬박꼬박 모으곤 했습니다. 평생 목회만 하셨으므로 형편이 좋지 않은 (어떤 목사들은 벤틀리도 선물 받고 다닌다더만) 부모님은 늘 그 돈을 가져가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죠.


“그거, 다 부모 주라고 부모 얼굴 보고 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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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그래요...


나는 친구들을 표본으로 조사를 한 후, 이 경우 부모님의 사유재산으로 귀속시키고 부모님 역시 네가 알아서 저금하라고 독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엄마에게 상납을 거부했지만 엄마는 ‘할머니에게 2만 원을 받으면 만 원은 내놓으라’고 했고 아빠는 ‘그럼 왜 나는 안 주냐’며 나머지 만 원을 가져갔어요. 내가 뒤끝 긴 성격으로 성장한 것은 이런 영향이 없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따로 용돈도 받지 않았고, 2만 원이 들려 있던 손에 순식간에 백 원도 남지 않아 눈물을 흘렸는데, 바로 운다고 맞았기 때문이에요. 돈 털리고 매까지 맞다니 이건 엄마 아빠가 일진도 아니고 원.


사실 그때는 꽤나 맞아서 엄마가 “너 집에 가면 혼날 줄 알아”라고 말하면, 문 닫힌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길에서 맞으면 덜 맞을 것 같아 그냥 지금 때려 달라고 애걸할 정도였죠. 이 나이에 부모 탓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구요. 우리가 많이들 그렇게 컸듯이. 물론 엄마는 네 사촌들도 다 그 정도는 맞았다, 네가 유난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시지만 죄송하게도 너무 유난한 나머지 서른 넘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네요. 다 늙은 엄마에게 톡톡히 원수를 갚아 버렸지 뭐예요. 아, 엄마 미안해요.


어쨌거나 당시 모친의 폭정은 계속되었어요. 어머니는 그 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에 예제로 나왔던 ‘어머니 은행’ 이야기를 들며 나를 회유하기 시작하셨죠. 철수라는 소년이 심부름을 하거나 친척들을 뵙고 용돈을 받을 때마다 꼬박꼬박 어머니에게 저금을 했다는 얘기에요. 자신이 돈을 관리할 경우 군것질이나 싸구려 장난감에 함부로 쓸 테니 어머니 은행에 저금했고, 나중엔 상당한 저금이 모여 철수는 꼭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고 해요. 철수는 어머니 은행과 어머니에게 크게 감사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신 어머니는 베테랑 창구 텔러 같은 태도로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도 ‘어머니 은행’에 적립하지 않으련? 이율 같은 건 말해 주지 않았지만 너도 철수처럼 어머니 은행에 예치해서 네가 갖고 싶은 걸 살 때까지 돈을 모을 수 있지 않겠니, 하며 마치 사은품도 줄 것 같은 태도로 나왔습니다. 그 바람에 나는 기어이 어머니 은행의 고객이 되었고 돈이 생기면 모조리 어머니 은행에 적금했어요. 이쯤 되면 적당히 모였겠다 싶었을 때 뭔가 갖고 싶어진 나는 어머니 은행에 출금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일체 거부당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모친 겸 ‘어머니 은행’ 은행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어머니 은행 파산했다!”


아, 어머니 은행은 정녕 먹튀 론스타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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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의 흔한 예


이후 나는 부모 형제도 믿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앞서 말한 신발 모양의 저금통에 꼬박꼬박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군것질 하나 안 하고 꼭꼭 모아 8만 원 정도를 모았는데, 90년대에 그만한 돈은 꽤 큰돈이었어요. 2년은 걸렸던 것 같아요.


돈을 가진 저의 꿈은 날이 갈수록 커졌습니다. 부모님이 장난감에 귀신이 깃든다는 좀 이상한 기독교 신앙을 (일종의 츠쿠모가미를 믿으셨던 건지) 갖고 계시던 터라 장난감이 없던 나는 무얼살까 고민하고 매일 빨간 신발 저금통을 확인해 보며 흐뭇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저금통이 온데간데없지 뭐예요. 엄마에게 달려가 저금통이 없다고, 큰일이라고 헐떡대는데 엄마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내가 학교에 간 사이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거예요. 다른 건 아무 것도 안 없어졌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픽 웃었습니다.


“우리집에 돈 될 만한 게 어디 있냐?”


하긴 그랬어요. 제일 비싼 게 인켈 오디오였는데 도둑이 들고 가기에는 좀 컸고 아버지 신학 서적 전집은 헌책방에서 돈을 줘도 안 가져간다던 걸요. 전에도 오르골이 나오는 목걸이를 만 원 주고 사려던 제게 ‘남대문시장 수입상가에 가면 반값에 살 수 있으니 내가 사다 주마’하고 돈을 가져가셨던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다시는 그 돈이 나오지 않았던 게 의심스럽긴 했지만, 집에 도둑이 들었다니 이런 무서운 일이! 게다가 어린애 저금통이나 슬쩍해 가는 도둑이라니요. 천벌이나 받아라, 하고 며칠 간 상당히 속이 쓰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일찍 돌아오신 아빠에게 장난을 치려고 책장 뒤에 숨어서 나 어디 있게, 하고 외치려는 찰나 발에 찰랑, 하고 뭔가 채였어요. 무언가 보니 아주 낯익은 나의 빨간 신발 저금통이 아니겠습니까! 들어서 뚜껑을 열어 보니 십 원짜리와 오십 원짜리만 몇 개 짤랑거릴 뿐 지폐라곤 천 원짜리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금통을 들고 책장 뒤에서 나와 말문이 막힌 나를 본 아빠는 난감한 눈치를 감추지 못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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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을 본다)


“그게 말이다, 엄마가... ”


그러니까, 내가 학교 간 동안 든 도둑은 바로 엄마였던 거였습니다. 아니, 목사 사모가 그렇게 거짓말에 능해서야. 나갔다 돌아온 엄마를 붙들고 왜 내 저금통을 훔쳐 갔냐고 울음을 터뜨리자 울긴 왜 우냐고 하며 철썩, 매부터 돌아왔습니다.


“내가 그거 갖고 내 화장품 샀냐? 내 과자 사먹었냐? 다 네 입에 들어간 반찬 사고 쌀 산 거야! 네가 오죽 안 내놓으니까 그랬겠냐!”


그 다음부터 나는 어머니 은행에 저금하기 전의 철수처럼 되었습니다. 돈 따위 뭐야, 칠렐레 팔렐레... 그래도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잔돈이라도 잘 모아 놓는 버릇은 쉽게 없어지질 않아서 어쩌다 천 원짜리 오백 원짜리가 생기면 모으곤 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저금통 따위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런 의자 아세요? 모래시계 모양으로 생겼는데 뚜껑을 벗길 수 있는 플라스틱으로 된 의자 말이에요. 그 뚜껑을 벗기고 절대 소리가 나지 않게 잔돈은 모두 지폐로 바꿔서 넣어 두었어요. 어쩌다 그렇게 음험한 초등학생으로 커버렸는지!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그만 실직하셨어요. 제 방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바로 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진지하게 물으셨어요.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부임할 교회가 정해지지 않아서 형편이 정말 안 좋단다. 조금이라도 네가 모아 놓은 돈이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혹시 없니?”


아버지 말투가 워낙 간절해서 마음이 움직였어요.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드려야지.


“아빠 일어나 보세요.”


아버지는 어리둥절하며 일어나셨고, 나는 아버지가 앉아 있던, 아직도 온기가 남은 따끈따끈한 의자 뚜껑을 벗기고 지폐 몇 장을 내밀었죠. 아버지는 낄낄 웃으며 내 이마를 톡 쳤습니다.


“이제 보니까 네가 완전히 크레믈린이구나!”


크레믈린이 뭔진 몰랐지만 좋은 뉘앙스는 아닌 것 같았어요. 며칠 후 학교에 다녀와 제 방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마침 그 플라스틱 의자의 뚜껑을 열어 보시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미소가 어찌나 머쓱하던지, 내가 다 땅으로 꺼지고 싶었어요. 아니, 내가 화수분도 아니고 며칠이나 지났다고요. 어쨌거나 그놈의 정이 뭔지, 이후로도 성경책 갈피에 모으고 소설책 갈피에 모으고 해 봤자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한 나는 베이비 호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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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베이비 호구는 자라서 주니어 호구가 되고, 드디어 남자한테 별 꼴 다 본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그럼 다음 주까지 잠시만 안녕.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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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벙커깊수키 통합10호 : 호구 특집1(15년 7월호)>에 실린 

김현진의 <남자 복 지지리 없는 년>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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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