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1. 15. 목요일
김현진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나를 스쳐 간 당신의 몸, 당신의 이마를 한때 어루만졌던 누군가의 손, 아스팔트 위에서 사정없이 깎여나가던 누군가의 피와 살, 철탑에서 얼거나 타들어 가는 몸들, 당신이 나를 낚아채 주길 바라면서 숨죽여 뺨을 대 보았던 당신의 쇄골. 몸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은밀한 삶을 알고 있다. 이것은 그 '몸'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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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타이틀을 이렇게 지어서 바로 탈이 났다며, 몸살이 난 줄 알고 며칠을 드러누워 지냈다. 겨울 감기 조심하라는 인사도 몇 번을 들었다. 꼼짝할 때마다 옆구리가 자꾸 아파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몸살이 왜 이렇게 오래가, 하면서 얼굴을 찡그린 채 옷을 갈아입는데 엄마가 툭 던졌다.
"너, 갈비뼈 있는 데 완전 멍들었어."
거울을 보니 과연, 토성의 띠 같은 시퍼런 게 몸통을 절반쯤 두르고 있다. 몸살인 줄 알았더니 이건 부상이었다.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 기억을 아무리 돌이켜 봐도 이럴 일이 없다. 술 먹고 많이 나자빠지던 시절에야 친근한 일이었지만 마지막으로 취한 건 작년이고 마지막 오토바이를 누가 훔쳐간 건 2년쯤 되어 가고 마지막으로 남자를 정리한 것도 일 년이 되어 가니 나에게 물리적이든 정서적이든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존재를 곁에 둔 건 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지? 누구한테 맞을 짓을 한 것도 오래 전이다. 맞을 짓을 아주 안 하고 사는 거야 아니겠지만, 누구에게 맞거나 누구를 내게 맞게 하거나 안 하기 위해서 아예 물리적으로 나를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멀리 놔 두었기 때문에 내 본의와 상관없이 맞을 짓할 시간과 공간이 어렵게끔 여건을 구축한지도 일 년이 넘었다. 그동안 이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왜?
멍자국에 바셀린을 문지르면서 지난 일주일간 다칠 일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일 없어서 일 년을 돌아봤다. 다칠 일 없게 하는데 온 신경을 쓴 일 년이었다. 나도, 남도. 앞에 썼듯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다칠 건덕지가 있는 곳에 나를 놔두지 않았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 인근 소도시에 나를 매설하듯 잘 숨겨두었다.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곳이었으므로 모두가 안전했다. 숨만 쉬면서 나대지 않으려고 애썼다. SNS는 원래 안 했고, 매체에 쓰던 것도 실밥이 끊어지듯 투드득, 하고 거래가 끊기도록 다 놔뒀다. 휴대폰도 한동안 요금을 체납해 끊긴 채 뒀다. 내가 누구를 다치게 하지 않거나, 누구에게 다치지 않는 방법은 봉사활동하는 곳과 도서관만 왔다갔다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면 국자나 법전 같은 걸로 누굴 갈기거나 맞지 않는 이상 다치게 할 일도, 다칠 일도 없었다.
32년간 누군가를 오래 생각했을 때 일어난 일이라곤 번번이 누가 다친 것뿐이었다. 지난 일 년을 더해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야 내가 다쳤지만, 아마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술을 피하려고 계속 애썼지만 가끔 집 근처 순대국집에서 깜빡 졸다가 일어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핸드폰 대신 오 헨리나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책장이 막걸리에 젖는 정도의 손해밖에 입지 않았다. 그 정도면 양호했다. 젖어서 구겨진 책장을 펴면서 나는 작게 사과했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남자들이었으므로 인내가 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좋아해도 결코 다치게 하거나 성가시게 할 염려가 없는 남자들. 그러고 보면,
좋은 남자는 죽은 남자뿐이었다.
좋은 남자는 죽은남자 뿐이었다.
서부개척시대라고 부르며 마음대로 남의 땅에 들어가 놓고 인디언에게 호된 맛을 본 백인들도 툭하면 이랬다고 한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라고. 죽은 여자보다 더 비참한 건 잊혀진 여자라고 한다. 나는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좋은 여자 축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멀리 사는 여자'기 때문에. 내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는, 자기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여자한테 한 번은 이랬다고 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착각이에요.
그건 그냥 당신의 식욕에 불과합니다."
그 말을 주워들은 후 나는 뭘 먹고 싶다고 말하는 걸 엄청 조심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그냥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남자 중에 단순히 비중으로 보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라는 것이지, 정념과는 관계없다. 안 그래도 여자의 식욕은 남자의 성욕에 준한다던데, 농담같지가 않았다. 그 다음에 누구와 사랑 비슷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본 건, 누가 나를 엄청 한심하게 보면서 이렇게 물은 때였다.
"아직도 연애 같은 게 하고 싶어요?"
"당연히 하고 싶죠,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해요? 한 100살?"
이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진짜 식욕인가?
너 뭐 하고 싶니?
연애? 아니면 연애 '같은' 거?
연애? 연애 '같은' 거?
보통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걸 제일 많이 생각하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종일 이명박 생각만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내가 기절할 뻔했던 것처럼. 이제 어른인지 그런 건 편해졌다. 생각 안 하려고 신경 좀 쓰면 평화롭게 안 할 수 있는데, 그 질문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거기 대답하려면 일단 내가 알고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좋은 남자는 죽은 남자, 하고 실없는 농담을 늘어놓고 다치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살면서도 나는 연애가 뭔지 알기는커녕 '연애 같은 게' 뭔지도 몰랐던 것이다. 너무 어려워서 꿀꺽 삼키고 한참 잊어버린 채 두었더니 아무래도 그게 안에서 뻥 터진 모양이었다. 내상이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누구하고도 부딪히지 않도록 매끈하게 살면서 멍들 리 없었다. 병원에서는 갈비뼈를 왜 다쳤느냐고 묻더니 골프나 테니스 같은 거 치느냐고 했다. 그럴 리가. 내가 가본 건 3년 전 끌려간 스크린 골프 한 번뿐이고, 골프나 테니스를 치는 건 '식욕' 발언의 주인공이었다.
언젠가 나 인생에 별것 바라지 않는다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했더니 그는 그렇게 교만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연애하고 싶을 뿐이라고 해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범함이란 그냥 내가 누굴 죽이거나 그 반대거나 하지 않으면 되는 정도였는데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다 당신의 할리우드적 환상이에요."
누가 누굴 죽이지 않는 것도 너무 많이 바란 건지도 몰랐다. 사랑이란 건 평범하지 않을지 몰라도 단순하긴 한 거였다. 한때 누구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준 적이 있는데 구구절절 다 쓰고 보니 내용은 그냥 이랬다.
1. 제가 다음과 같이 연애를 하고자 하오니 협조 바랍니다.
2. 다음
연애인지 연애 '같은' 건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핵심 사항은 협조였다. 그걸 깨닫기 싫어서 내 몸이 친절하게 헐리우드 액션을 벌인 모양이었다. 꼭 어디 갖다 처박힌 양, 내상이 아니라 외상인 척. 다 알아버리면 너무 돌이킬 수 없이 모조리 어른이 되는 것 같아서 모른 체하고, 나 이외에 나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도 어딘가 남아 있는 것처럼. 나에게 타인 때문에 다칠 수 있는 부분이 아직 순정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처럼. 아직 어디 크게 다칠 수 있을 만큼 순진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자꾸 그 생각을 하게 되던 옛날과 달리 언제부턴가 스위치를 끄면 달칵 꺼지는데, 그 노회한 스마트함이 슬퍼져서 모른 척해 버린 때 따윈 아예 없었던 듯이. 고통을 자꾸 삼키면 꿀꺽 넘어가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속으로는 친숙한 어둠을 떠나보내기 싫어서 안 넘어가는 척하니 몸이 연기를 해 줬던 것이다. 다친 척, 아픈 척. 이젠 나아졌고 나는 다 크다 못해 늙어가던 것도 오래되었으며 그에 더해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 생각을 하자마자 어느새 멍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약이 듣기 시작해서 훨씬 편해졌다. 몸은 어리석은 나에게 앞으로 무슨 말을 더 해줄까. 나는 그걸 지금 정도만큼이나 제때 알아듣기나 할까.
김현진
편집: 딴지일보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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