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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1. 수요일

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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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룸 (The Newsroom)


미국 HBO에서 2012년 6월 부터 방영하기 시작, 지난해 11월 9일부터 시작된 시즌3를 끝으로 종영되었다. JTBC에서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의 타이틀이 '뉴스룸'이라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 변주와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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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소킨(1961~) 웨스트 윙, 소셜네트워크, 머니볼 모두 그가 쓴 작품이다.


아론 소킨의 드라마가 재미지는 것은 김수현류의 쉴 새 없는 대사에도 있지만 갈등의 전개 방식입니다. 극의 시작과 동시에 다양한 갈등이 서로 상이한 방향으로 산개하는 것은 아론류의 특징입니다. 40분 혹은 1시간 분량의 에피소드 하나에도 2,3개의 갈등과 다양한 시점이 등장하고 이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춤을 춥니다. 개별적인 갈등과 시점이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종국에 하나의 시점과 방향성을 갖추며 정리되는 것을 보면 마치 다양한 변주로 연주되던 오케스트라의 물줄기들이 하나의 하모니로 합쳐져 물결을 이루는 것을 듣는 것 같습니다. 로마인 이야기 식으로 말하자면, 대평원의 회전에서, 엄한데로 달려 나가던 누미디아 기병이 전장을 크게 우회하여 적의 후방으로 들이닥쳐 포위 섬멸전을 펼치는 것을 보는 통쾌함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러한 각 에피소드의 변주와 합주는 전체 시즌의 하모니를 위한 또 하나의 변주일 뿐이니 말입니다.


은하영웅전의 인물평을 따른다면 아론 소킨은 피셔의 느낌에 가깝습니다. 천재 라인하트르, 질풍노도 미터마이어, 둘의 절충형인 로이엔탈 보다 함대운용의 명수인 피셔 말입니다. 광활한 우주의 바다 위에서 크기와 속도, 성능이 각기 다른 수만척의 함선을 한대의 낙오도 없이 목적지로 이끕니다.





2. 주제


뉴스룸 시즌 1의 주제는 맥커보이가 노스웨스턴대에서 친 방송 사고?에서 천명했듯, ‘외부적 현실의 인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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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질문을 받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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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시작한 윌 매커보이.


더 이상 위대하지 않은 가짜 1등 국가 미국.

보수의 탈을 쓰고 보수를 고사시키는 가짜 보수 티파티.

자본 앞에 무릎 꿇은 가짜 언론. 

그리고 문명화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민.


그렇습니다. 뉴스룸은 엘리트주의 드라맙니다. 뉴스룸 속의 시민은 값싼 저질 프로로 채널을 돌리고, 쉽게 분노하며, 우상과 실상을 구분 못하는 우민이며, 알고 싶은 정보와 알아야 하는 정보의 가치를 비교하지 못하고 자기이익에 반하여 투표를 하는 교화의 대상입니다. 매커보이와 뉴스나이트는 그들을 향하여 문명화의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하는 엘리트 기병대인 셈이죠.


뉴스룸 시즌 2는 시야를 내부로 돌립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가 민주보다 앞에 오는 이유는 민주의 전제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뤄지지 못한 민주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자유롭게 결정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이뤄진 민주주의를 우리는 장식적 민주주의이라 부릅니다. 실제 필드에선 초점하나 맞추지 못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장식장 속의 쓸모없는 필름 카메라.?


가짜 진.보수와 가짜 언론과 우민들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외부적 장애라면, 갖은 사회의 갈등과 문제들을 공공연한 논쟁을 통해 사회적 유산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몰沒자유주의적 언론환경은 언론의 내부적 장애입니다. ‘저널리즘의 당면한 문제는?’


뉴스룸 시즌 2의 결론은


“그 개자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을거야!” 란 리오나의 선포가 아니라,


“우리의 오보 때문에 아무도 우리 뉴스를 믿지 않을거라고. 리오나. 우리는 물러나야 해!” 란 찰리의 호소입니다.


시즌 2는 사린가스에 대한 뉴스룸의 오보과정을 고통스럽게 되새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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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N 보도국장 찰리 스키너(좌) / 젊은 시절 영화 킬링필드에서 뉴욕타임즈 기자였던 찰리 스키너(우)


사소한 결원, 우연한 제보, 개인의 욕망, 겹치는 불운… 8개월의 사실확인과 레드팀과 블루팀으로까지 나눈 철저한 자체 검증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사실이 진실의 이름으로 시청자에게 전해질 가능성은 늘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후입니다.


“그것은 (단타나 개인의 부정’만’이 아닌) 구조적인 실패였어”


라는 맥커보이의 처연한 인정은 분, 초를 다퉈가며 진실을 전한다고 믿는 언론의 두 발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성 위를 딛고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개별 팩트의 보도와 진실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협곡 다리 말입니다. 언론이 뉴스의 가치와 보도의 신뢰를 위해 끊임없이 경주해야 하지만 동시에 오보의 가능성과 그에 따른 책임을 늘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물경제에서 화폐의 통용력이 의심받는 것 못지않게 언론보도에서 신뢰가 의심받는 상황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잃은 언론은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언론의 탈을 쓰고 언론 밖의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찰리의 호소는 더 이상 오보를 두려워하지 않는 오늘날의 세태를 곱씹게 합니다. 쏟아지는 사실들 앞에 진실은 참담해 하며 사그라져 갑니다. 작은 오보는 큰 오보에 파 묻히고 제가 낸 오보에 제 스스로 논평하는 후안무치가 만연한 요즘 누구도 오보로 인한 신뢰 상실과 그 책임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현실에 익숙해진 기자와 무감한 시민만이 남았습니다.


시즌 3에서 보스톤 마라톤 사건을 보도하며 매기는 테러용의자의 지인을 인터뷰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테러범의 친구였던 인터뷰이는 신변의 안전을 걱정해 이름을 밝히거나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윌 매커보이는 방송사의 이름으로 그 남자의 신원을 보장합니다. 익명의 제보의 신뢰성을 제고하기 위한 당연한 조처였죠.


박근혜 대통령보다 김정은이 더 많이 나오는 TV조선의 김정은 관련 보도의 단골 패널들은 탈북한지가 언젠지도 모르는 하사관이나 위관급의 전직 군인들입니다. 탈영한지 몇년이 훌쩍 넘은 하급간부가 만나본 적도 없는 군 최고통수권자의 정책결정이나 국방기조에 대해 논평을 하는 것에 얼마나 신뢰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아침프로에서 시사뉴스를 전달해주는 패널들 중 자주 접하는 변호사들은 법률전문가지 정치전문가가 아닙니다. 법률적 논점이 없는 정치적 쟁점에다 2,30대의 변호사들을 앉혀놓고 정치적 논평을 하게 하는 것은, 내과의사에게 외과수술의 집도를 맡기는 것과 무에 다를까요. 잘못된 분석과 정보에 언론의 권위를 덧칠해 시청자에게 오보를 전달할 수 있는 위험이 늘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추궁하거나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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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의 부칸사랑. 대.다.나.다


“‘예능화된’ 시사프로의 패널들의 발언까지도 방송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라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뉴스나이트의 슬로안은 단호히 질책합니다.


‘저널리즘이란 단어를 쓰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신뢰를 부여한다.’


다양한 사례와 여러 전.현직 저널리스트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란 책을 쓴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해당 책에서 저널리즘의 10가지 기본요소를 제시하면서 그 첫째에 진실에 대한 의무와 사실확인의 규율을 꼽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편집국장이었던 빌 켈러의 말처럼,


“진짜 객관성이 가능한가는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가 아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임무다."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진실(칼 번스타인)’을 제공하는 것이 기자들의 사명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뉴스나이트의 스태프들은 자신의 직업을 소명(Calling)이라 여깁니다.





3. 돈 키호테


아론 소킨의 작품들을 보면 극중 인물의 죽음이나 퇴장이 부활의 모티브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전의 히트작인 웨스트 윙에서 바틀렛이 랜딩햄 여사의 죽음으로 인해 대통령 재선에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거나, Studio 60에서 총괄 프로듀서인 웨스멘델의 해고로 맷과 대니가 극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설정 등이 그러합니다.


뉴스룸 시즌 3의 찰리의 죽음은 어떨까요. 일견보면 아론 횽이 정말 쓰기 싫었나보다 싶을 정도로 시즌 3에서 찰리의 캐릭터 변화는 급작스럽습니다. 직전까지 언론인의 전범(典範)이었던 찰리가 ACN의 소유권이 랜싱가에서 프로이트로 넘어가면서 다중이로 느낄 정도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 윙의 애청자들이면 '…우리는 별을 향해 손을 뻗을 것입니다(…we reach for the stars)'란 유명한 대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극중 연설문 작가인 샘 시본이 카멜롯의 한 대사로 자주 인용하는 이 문장은 웨스트 윙의 전 시즌을 관통하며 잊을만하면 튀어나오곤 합니다. 뉴스룸에도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인물입니다. 


돈 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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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첫방에서 맥켄지는 매커보이와의 첫 재회에서 라만차의 사나이의 돈 키호테의 대사를 인용합니다. 시즌 1의 피날레에서 매커보이가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며 뱉는 말도 돈 키호테의 인용입니다. 시즌 3의 피날레에서는 찰리가 맥켄지에게 돈 키호테의 책을 권하는 장면이 나오고, 매커보이가 찰리의 추도사를 하며 하는 말도 ‘그는 돈 키호테 였다.’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돈 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동명의 명저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풍차를 향해 창을 꼬나쥐고 달려가는 망상증 환자이자 루저인, 이 시골귀족의 우스꽝스런 활극이 시공간을 거슬러 생명력을 갖는 것은 그 상대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암울한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돈 키호테의 적의는 착각으로 인한 것이었을 망정, 그 동기는 한없이 순수하고 정의로웠기에 많은 이들이 그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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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갖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시골집으로 귀가한 이 중늙은이가 맞이하는 현실은 엄혹합니다. 고향집 거실에서 망상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찾은 이 ‘루저’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었습니다. 꿈을 소진한 그에게 당면한 삶은 더없이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찰리는 ACN의 소유주가 바뀌는 시즌 3의 중반부부터 지쳤다는 대사를 자주 뱉습니다. 랜싱가와 싸웠던 것처럼 새 사주가 될 프로이트와 싸우라는 슬로안의 격려에, 찰리는 힘겹게 토로합니다.


"나는 싸우고 싶지않아. 슬로안. 나는 지쳤다고. (설사 어떤 식으로 싸운다 하더라도 결론은 똑같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올꺼라고. 상황은 더 악화되서 말이지. 나는 싸우고 싶지않아. 이길 수가 없다고!"


로시난테를 타고 산초를 호령하여 악당들을 향해 달려가던 돈 키호테가 왜 이렇게 갑작스레 지쳐버린 것일까요. 혹시 찰리는 긴 여행끝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 피곤한 몸을 누이며 정신을 찾아가는 돈 키호테의 여정을 따라간 것은 아닐까요. 무간도 같은 현실의 파고에 끝내 손을 들어버린 것입니다. 뉴스룸 시즌 1과 시즌 2의 격렬한 투쟁들에 제한된 에너지를 다 소진해 버린 것이죠. 길은 죽음으로만 향합니다.





4. The Greater Fool vs. The Great F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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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r Fool Theory는 주식투자가 이뤄지는 메카니즘을 설명하게 위해 케인즈가 만든 이론입니다. 현재의 주식시장이 유지되는 이유는 미래가치가 큰 주식을 싼 값에 파는 매도자와 현재가치보다 더 비싼 가격에 (자신의)주식을 사 줄 미래의 매수자가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죠. 미래에 생길 30불의 이익을 예상하여 20불의 시장가치가 있는 주식을 25불에 매입하는 현재의 투자자에게 헐값에 주식을 파는 매도자와 비싼가격에 주식을 사 줄 미래의 매수자는 바보인 셈입니다. 하지만 기대에 불과한 미래의 매수자를 믿고, 현재가보다 더 비싼 주식을 사서 헐값에 넘기는 이 투자가야 말로 더 멍청한 바보(The greater Fool)입니다.


슬로안은 경제학 이론인 The Greater Fool Theory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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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멍청한 바보(The greater Fool)는 잘 속는 사람들이에요. 나머지 사람들이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더 멍청한 바보가 필요하죠. 비싸게 사서 헐값에 넘기는 사람이 있어야 싸게 사서 비싼값에 넘기는 사람이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동안 더 멍청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가죠. 우리는 난감한 문제는 더 멍청한 바보들에게 다 떠맡기고는 기회가 나면 그 사람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요.’


하지만,


‘더 멍청한 바보는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남들이 실패한 일을 자신만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죠. 이 나라를 만든 사람들이 바로 더 멍청한 바보들이에요.’

 

 

The greater Fool. 더 멍청한 바보가 아닌, The Great Fool. ‘위대한 바보’에 대해 역설하는 것이죠. 별을 향해 손을 뻗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란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내 세상을 변화시키고야 마는 소수의 사람들 말입니다.


돈 키호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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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Me.





5. 돈 키호테거나 산초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쓸쓸이 홀로 시골집에서 죽어간 돈 키호테가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요. 찰리의 말처럼 늘 더 악화되어 되돌아오는 현실의 무한루프 앞에 끝내 무릎 끓고 패배를 인정하리라는 현실 속의 교훈일까요.


돈 키호테가 남긴 것은 산초입니다. 탐욕스럽고 식탐 많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산초는 이상주의자인 돈 키호테와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내적인 변화를 이뤄갑니다. 짓궃은 공작의 장난이었을 망정, 바라타리아 섬의 총독까지 되는 산초는 공작과 그 부하들의 끊임없는 간계 속에서도 선정을 베풀며 좋은 법들을 만들어 냅니다. 돈 키호테의 광기 넘치는 이상들이 숱한 사건들 속에서 최적화 되고 산초를 통해 현실화 된 것이죠.


뉴스룸은 선하고 헌신적인 소수의 엘리트들만으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는 아론 소킨의 웨스트 윙식의 믿음에 대한 번복입니다. 더 이상 세상은 플라톤의 철인(哲人)과 같은 몇몇의 선각자들만으로 변혁될만큼 녹록치 않다는 것이죠. 무슨 민주주의로 불리건 간에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뿌리 내린 이상 시민의 참여를 불러내지 못하는 리딩(Leading)은 무용하다는 것입니다. 산초. 산초를 불러내지 못하는 돈 키호테는 미치광이일 뿐이니까요.


마치 아론 소킨의 팬픽인양 뉴스룸을 따라다니는 JTBC의 손석희의 뉴스룸에 대한 냉혹한 시선들이 있습니다. 단물이 다 빠지면 쫓겨날 것이라는 정청래의 악담 같은 예견이나, 소유 구조로 전환된 미디어 시스템 속에서 JTBC는 삼성 미디어 제국의 전진기지에 불과하다는 김춘호 박사의 분석은 적확하겠지요. 화무십일홍이며 권불십년인데 손석희라고 천세, 만세 영원할까요. 노추로 매도당하는 김지하처럼,위대한 바보에서 멍청한 바보로 내려앉는 그 순간이 손석희에게도 올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온다 해서 그 허물이 온전히 손석희만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과오는 돈 키호테를 외면한 산초에게도 돌아가야 마땅하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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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나비넥타이가 있습니다. 나비넥타이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은유하는 하나의 상징도구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앞선 자와 따라오는 자를 이어주는 유지(遺志)이기도 합니다. 바통을 이어 받으며 달리는 릴레이 계주처럼 찰리의 나비넥타이는 시청자에게로 전달되었습니다. 바보는 확산되어야 합니다. 이제 놓인 것은 남은 자의 선택입니다.



돈 키호테거나 산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무천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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