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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3. 금요일

아외로워









외국어를 잘한다는 말이 그 사람의 러시아어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잘하는 외국어가 영어일 수도 있고 일본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축구 보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국가대표 경기에도 관심을 가진다는 말과는 동의어가 아닐 수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대표팀이 아시안컵 8강에 갔는지 어땠는지도 모를 수많은 K리그 빠들이 있을 거라 믿는다. 왜냐하면 나 역시 전북현대의 선수, 한교원과 알렉스 윌킨슨이 아니었으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를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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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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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윌킨슨


이유야 어찌됐든 경기를 보다보니 이번 아시안컵은 다른 때와는 달리 상당히 재미있는 대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1. 주최측이 뭘 좀 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스포츠 강국이다. 인구는 수백만에 불과하지만 인구대비 스포츠 선수의 비율은 대단히 높다. 축구, 럭비는 물론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동네 개싸움으로 보이는 호주식 풋볼이라는 독자 스포츠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적어도 스포츠에 있어서 호주 사람들은 충분한 존중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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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식 풋볼


스포츠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드는 스포츠 이벤트는 재미있다. 주최 측이 만드는 참가팀에 관한 데이터와 홍보자료(이런 것들은 다른 아시안컵 대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었다.)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기존 아시아 팀들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아시안컵에서의 위상과 징크스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호주 스스로를 그런 훌륭한 팀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쟁하는 도전자로 포지셔닝한다. 자국민들이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켜볼 수 있을까.


호주의 선수들 역시 호주 축구협회에게는 훌륭한 마케팅 자산이다. 호주의 에이스인 팀 케이힐 같은 선수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는 선수들 역시 매우 잘 관리되고 있다. 스스로를 ‘boys’라고 부르는 호주 대표선수들은 SNS와 보도자료를 통해 딱 필요한 만큼만 노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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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윌킨슨 트위터


개념 있는 주최 측이 개념 있게 이끌어가는 대회, 여기에 더해서 경기장 분위기 역시 기존의 아시안컵 레벨을 뛰어넘고 있다. 중동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개최될 때는 볼 수 없었던 현대적인 경기장에서 만원 관중과 함께 훌륭한 분위기로 경기가 열리고 있다. 얼핏 봐서는 유럽 대회 느낌까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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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은 여전히 아시안컵이다. 지난 대회와 이번 대회의 우승이 다른 비중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처럼 제대로 치러지는 대회라면 어딘지 모르게 좀 더 영광스럽고, 남들 보기에도 뭔가 좀 더 부러운 우승이 가능할 것 같다. 




 2. 좋아하는 선수들이 나온다


이건 좀 개인적인 것이긴 하다. LA 다저스의 승패보다 류현진이 잘했나 못했나가 더 중요한 것 처럼 경기 결과보다 더 중요한 선수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당연히 한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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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에서의 한교원


이동국의 부상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뽑힌 유일한 전북 현대 모터스 선수인 한교원의 활약은 뿌듯하면서도 가슴을 졸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어찌 됐든 내가 좋아하는 팀과 K리그를 대표해서 나간 선수이니만큼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잘 하지 못하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측면에서 거칠게 달리면서 슛도 뻥뻥 쏴서 시원스럽고 투지 넘치는 한교원은 윙어 수집가로 유명한 최강희 감독 맞춤형 선수다. 차두리 같은 머신형 돌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가 막힌 테그니션도 아니지만 거칠면서도 날카로운, 최강희 감독 주변에 많은 스타일이다. 


딱히 엘리트코스랄 것도 없는 길을 걸어왔던 한교원은 인천에서 잠재력을 꽃피우더니 2014시즌에는 그 스타일을 눈여겨보고 있던 최강희 감독에게 찍혀서 전북으로 이적한다. 점점 국대급 전력이 되고 있는 전북에서도 한교원은 주전 자리를 꿰어찼다. 32경기 출전 11골 3어시스트를 기록한 한교원은 슈틸리케 감독의 마음까지 빼앗았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또다른 선수는 호주 대표팀의 윌킨슨이다. 그렇다. 또 전북 선수다. 이게 K리그 빠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때도 한국팀이 죽 쒀서 기분 나쁘기보다는 윌킨슨이 잘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고백 할 수밖에 없겠다. 아시안 컵에서도 역시 윌킨슨은 가장 관심이 가는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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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국가대표팀에서의 윌킨슨


윌킨슨 역시 딱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는 아니다. 소속팀과 국대에서 중앙수비수를 보는 윌킨슨은 187cm 정도의 큰 키에 공중볼 경합에 장점이 있는 선수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정도 장점을 가진 선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윌킨슨의 진짜 장점은 성실하고, 많이 뛰고, 겸손한 데다 온화하기까지 한 그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상대 공격을 두어 수 먼저 보고 요소요소를 끊어내는 영리한 플레이도 갖췄다. 


이렇게 소프트웨어로 축구하는 선수는 각광받는 스타가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진면목을 알아보기 마련, 프로 생활은 밋밋하게 시작했지만 호주의 강팀인 센트럴코스트 마리너스에서 수년간 주장을 했고, 최강희 감독은 그런 윌킨슨을 전북에 데려왔다. 전북에서 욕먹던 나날을 그 특유의 온화한 성품으로 이겨내더니 이제는 명실상부한 전북의 주전, 호주의 대표가 됐다. 


최근 세대교체를 시도하는 호주 대표팀에서 윌킨슨은 더 젊은 매튜 스피라노비치와 포지션 경쟁을 해야 할 상황이지만 아시안컵 8강에서는 풀타임으로 출전, 호주의 무실점에 기여했다.


또하나의 선수는 우즈베키스탄의 박지성, 세르베르 제파로프다. 제파로프는 우즈베키스탄 축구의 핵심이자, 이젠 거의 한국인처럼 느껴지는 K리그의 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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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베르 제파로프


원래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명문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에서 활약하던 제파로프는 2008년 무렵, 한창 돈으로 아시아 무대에 도전하던 라이벌팀 FC 부뇨드코르로 이적했다. 파흐타코르와 부뇨도코르는 우즈베키스탄 최대의 라이벌 더비인 타슈켄트 더비의 상대팀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뇨드코르가 맛이 가면서 드디어 2010년, FC서울의 아시아 쿼터 선수로 한국에 들어온다. 우즈벡 최고의 선수가 아시아 최고의 무대인 한국에 오자 우즈벡의 축구팬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마침 제파로프의 한국 데뷔전이 관중이 들어찬 상암 구장에서 치러지는 바람에 우즈벡 사람들은 한국을 잉글랜드 못지 않은 축구 선진국으로 오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중동을 한번 거치고 성남으로 이적한 제파로프는 2014시즌, 시민구단 성남의 첫 감독이었던 박종환 감독에게 '선수도 아니다'라는 맹비난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활약, 클래스 불변의 법칙을 입증했다. 물론 이번 아시안컵에도 우즈벡을 대표하는 선수로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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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AFC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제파로프


올해 우리 나이로 34살이 되는 제파로프에게는 이번이 아시안컵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이 삽질을 하는 바람에 월드컵 진출이 좌절됐던 제파로프의 조국은 이번 아시안 컵에서도 한국에 막혀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조별리그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한 제파로프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와 한국과의 8강전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단지 경기장 옆에서 몸을 푸는 모습이 카메라에 한 번 잡혔을 뿐이다. '선수도 아니'지만 한-우즈벡 양국의 레전드인 이 선수의 쓸쓸한 퇴장은 우즈베키스탄 국민과 K리그 팬들에게는 서글픈 장면이었다.




 3. 한국이 잘한다


이번 대회가 재미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한국은 8강전까지 5득점 무실점으로 4전 전승을 기록 중이다. 김신욱도, 이동국도 부상으로 빠지고 애증의 박주영은 따봉맨으로 대표팀에서 탈락하면서 한국 대표팀은 골 넣을 사람이 없는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을 깜짝 발탁했다. 그렇지 않아도 안 유명한데 원래 '이정기'였던 이름을 개명까지 해서 완전 듣보잡이 된 이정협은 역시나 부산 출신에 '이정호'에서 개명을 한 '이원영'과 혼동되면서 깜짝 발탁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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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협


결과는 나쁘지 않다. 우려했던 바와 같이 공격력은 딱히 좋지 않다. 경기 자체도 재미있지는 않다. 김정남 감독 시절 울산현대의 경기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딱 필요한 만큼의 골만 넣고, 상대의 공격을 철저히 틀어막고 있다. 내가 봤던 아시안컵 경기중에 한국이 가장 우승팀에 가까운 전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욕을 있는 대로 먹었던 지난 브라질 월드컵의 국가대표와 비교해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역시나 감독에 의한 것이다. 슈틸리케는 지난 몇년간 우리나라 대표팀을 맡았던 감독들 중에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것 같다. 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감독은 역시나 전북의 최강희 감독이지만 그는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자질은 뛰어나지 않았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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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감독


한국이 남은 두 경기에서 모두 이겨서 우승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속 시원한 대승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공격 위주의 선수들을 많이 기용하는 것도 아니고, 기용된 선수들도 소속팀에서보다 훨씬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늪축구'로 불리는 지금 스타일은 옛날에 한국이 구사하던 진흙탕 피지컬 축구를 조직화한 거라고 볼 수 있다. 패스축구가 뭔지 모르던 옛날에 하던 그런 축구 말이다. 


그러나 훨씬 희망적인 것은 우리나라 선수들보다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만나면 힘을 쓰지 못했던 옛날 스타일과 달리 지금의 늪축구는 체격이 좋은 중동과 호주 선수들을 만나도 그 위력이 똑같이 발휘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청용과 구자철이 빠진 상황에서도 얼핏 경기력에 지장이 없어 보인다. 슈틸리케의 팀이 선수 몇몇에 의존하기 보다는 구조적으로 완성도를 가지고 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시안컵은 재미있기 참 어려운 대회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떤 대회가 재미 없겠냐만은, 전체적으로 어설프게 돌아가는 모냥이 몰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이 대회가 '아시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부끄럼 없이 쓸 수 있는 명분을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다르다. 뭔가를 아는 주최측이,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로 괜찮은 대회를 만들고 있으며, 내 나라의 팀이 우승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덕분에 2015년 프리시즌은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아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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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