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9. 07. 월요일

물뚝심송









게임의 룰


공정한 승부는 멋지다.


referee-336906_640.jpg


공정한 룰에 의해 사력을 다해 승리를 다툰 후 승자에게는 영광이, 패자에게는 격려가 이어지는 장면은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회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사회라는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승부는 결코 공정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환상 속에서라도 공정한 경기가 벌어지길 갈망하지만, 현실의 경기장에 적용되는 기울어진 게임의 룰을 고칠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기울어진 경기장에서만 싸워왔기 때문에 생겨난 습관적 패자의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아젠다, 대연정


사회적으로 다수에 의해 인정되는 결과에 언제나 동의가 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대연정에 대한 평가가 그러하다. 


VNN894355599.JPG

2005년 9월 7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와의 회담.

이 무렵 노무현 전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해주면

대통령 권력 일부를 넘겨주겠다는 파격적 제안으로 대연정 추진 의지를 표명 중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사랑했고, 그 후예들을 지금도 지지하는 사람들마저도 대연정은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힐난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차갑게 외면당한 정책제안이었으니 그런 평이 나와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던 함의까지도 무시되는 현실에는 동의하기가 무척 힘들다.


어떤 정치인의 제안이나 주장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그 제안에 담긴 가치, 또 하나는 그 제안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전자는 추상적인 가치이며 후자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대연정이라는 제안은 충분한 가치를 담고 있었으나 성사될 가능성이 너무 낮은 것이 문제였다. 이 경우, 우리가 성사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불쑥 내미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심지어 그 제안에 담긴 가치는 여태껏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이제라도 해결해보자는 최초의 실험 시도였다는 바로 그 지점에 담겨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대연정이라는 제안이 추구하는 그 가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의 정치판은 분명히 잘못된 게임의 룰이 지배하는 경기장이며 언젠가는 고쳐야 하는 것이라는 점,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선거제도만 고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정한 게임의 룰이 없이는 절대 이 사회는 바른 방향으로 개선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심지어 대연정 제안 자체를 비난하는 수많은 의견들 중에 뭔가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경우도 보지 못 했다. 대연정이 추구하려는 선거제도 개혁은 이렇게 하면 가능하다는 솔루션을 제시하는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니까 아예 포기하자는 것일까? 대연정이고 뭐고 무슨 짓을 해도 고쳐지지 않을 텐데, 그걸 무리하게 주장을 했기 때문에 대연정이 나쁜 거라는 소리였을까?


사실은 그 대연정이 주장하는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인해 자신의 이익이 침해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야 모두를 포함한 유력 정치인들의 주판질 때문에 대연정이 외면당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 됐거나 대연정은 실패했고, 노무현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선거제도는 아직도 엉망이다. 즉, 우리 사회는 여전히 기울어진 경기장이다.




다시 돌아온 기회


선거법에 대한 위헌심판 청구가 있었고, 헌재가 받아들였다. 현재의 선거법이 위헌이라는 것이며, 2015년 12월 31일까지 시한까지 정해 선거법을 개정할 것을 명령했다. 문제는 한 지역구의 유권자 수가 지나치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다. 이는 모든 유권자들의 한 표는 동등한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겨레선거법기사.JPG

기사 원문 - 한겨레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 제기였고, 문제 제기가 받아들여졌다. 시한까지 정해졌다. 이제 우리 사회의 정치인들이나 유권자들은 현재의 선거법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논의하고, 헌재에 의해 위헌으로 판결 난 부분 이외에도 고칠 부분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따져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게 작년 말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을 걸고서라도 선거제도를 고치려 했던 노무현의 대연정조차 휴지조각으로 돌아가버린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권위에 의해 다시 한 번 개선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 자체가 무산되려고 하는 중이다. 아니 무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왜냐고? 그 법 개정을 추진해야 할 직접적인 당사자들인 여야 유력 정치인 모두가 이게 고쳐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저 제3당, 조무래기 정당들에서나 이러면 안 된다고 얘기를 좀 할 뿐이다.


전체 의석 수를 늘리는 것은 여론이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지역구를 줄이고 비례대표라도 늘려 표의 등가성을 확보하면 어떻겠냐는 선관위의 제안에 대해선 지역구를 줄이는 것은 그냥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변을 한다. 왜 불가능한지 진짜 불가능한지 묻지도 않는다. 그냥 불가능하단다. 결국 헌재의 위헌판결을 회피하기 위해 인구수가 급격히 늘어난 몇 개 지역구를 쪼개 숫자를 맞추고, 그러다 보니 늘어나게 되는 지역구 수만큼 비례의석을 줄이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거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모든 지역구 의원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점 이해한다. 모든 기득권 정치인들이 한결같이 거부하는 선거제도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지금 행동으로 보여주고들 계시는 거다.


노무현의 대연정 제안이 그렇게 나빴나? 그 제안에 가져올 변화를 여야의 정치인들이 모두 두려워 했기 때문에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고 서둘러 가져다 버린 거 아닐까? 그 제안을 앞장서서 홍보하고 설득했어야 하는 당시 집권당 열린우리당 의원들 마저도 이게 현실화되면 나한테도 안 좋은데, 하는 마음으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닐까?


그 때와 지금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비록 옳지만 나한테는 손해가 되는 일이 있다면, 대놓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시간 속에 묻어 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 활발하게 논의해도 시간이 부족한 선거제도 개혁의 논의는 의도적으로 파묻히고 사람들의 이목에서 제거되고 시간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연말이 되면 "시일이 촉박하여 서둘러 합의"를 하고 "다음번에는 제대로 고칠 수 있게 되기를 기약한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익은 지속되고, 우리의 손해 역시 지속될 것이다.




뭔가를 고치려면


기업의 회계의 정확성을 유지하려면 담당자와 분리된 감사팀이 있어야 한다. 행정부를 감시하기 위해 감사원이 따로 있다. 중은 제 머리를 못 깍는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문제를 자신들이 직접 다루고 법제화하는 곳이 있다. 그 곳이 바로 국회다. 국회의원들의 처우에 관한 법률, 쉽게 말해 자신들의 임금, 혜택, 권리, 예우, 이런 것들 모두를 의원들 본인이 정한다. 심지어 자신들을 선출하는 방법, 선거법마저도 자신들이 직접 정한다.


1339456574.jpg


뭔가를 고치려면 그 변화로 인해 이해득실이 발생하는 사람들에게 맡겨 두면 안 된다는 너무나 단순한 원칙이 여기에서만 깨진다. 국회의원들은 무슨 공자님에 석가모니라도 되는가? 그렇다고 또 국회의원들의 처우나 당락을 결정하는 법안을 다루기 위한 별도의 위원회를 만드는 것도 우습다.


결국 의원들을 압박하고 그들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지시하고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유권자들이 나서야 하는데...


그 유권자들은 목함지뢰 터지는 소리에 놀라고 중국 전승절 구경이나 하기에 바빠서 이런 문제는 도통 신경을 쓰질 않는다. 기울어진 경기장의 폐해를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이 정작 게임의 룰을 고치는 문제에 대해선 너무나도 무관심하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운명을 걸고 매 순간 경기가 열리는 이 경기장의 룰, 게임의 룰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선거법 개정에 대한 얘기였다.


끝.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