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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6. 월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가끔하는 전쟁 이야기 사랑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좋은 버릇을 들이기는 어려워도 버리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이 맞구나. 몇 가지 사정이 겹쳐진 걸 핑계로 몇 년간 띄엄띄엄해 오던 습관을 잠시 치워 두었더니 며칠 만에 버릇에 대한 기억조차 눈 녹듯 사라지는 걸 새삼 알았어. 역시 핑계는 게으름의 화장품일 뿐이야. 아무리 화장을 해도 원판이 불변하듯 본질은 게으름인 것을. 그래서 자기 전에 구한말 그 격동기에 한 치의 게으름없이 살았고 일 촌의 물러섬도 없이 거친 역사의 풍랑과 맞섰던 부부 이야기를 잠깐 적어 보려고 해.


일성 이준과 이일정 여사. 둘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부부야. 원래 이준 열사(1859년 1월 21일생)는 함경도 북청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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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청 사람들은 '덤비 기질'로 유명하다고 해. 무슨 어려운 일이든, 또는 버거운 상대든 일단 '덤비!'라며 맞서고 본다는 거지. 생활력도 강하고 괄괄하기도 한 사람들이야. 홍경래의 난보다도 먼저 북청에서 민란이 일어났었고 개항 뒤에도 병마절도사를 내쫓을 정도의 거대한 민란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니까.


이준도 그 덤비 기질의 소유자였어. 북청 향시에 응시했다가 나이가 어리다고 실격하자 북청성 남문에 올라가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자기 답안지를 들고 소리소리지르던 소년이었다고 해. 그런데 조실부모하고 길러 주던 할아버지도 세상 떠나 버린 처지에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다 말이오'를 내지르는 이 소년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어. 주만복이라고. 이준은 1차적으로 이 주만복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경제적 지원을 받게 돼. 주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얻었지만 주씨 부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이준이 서울 생활을 시작한 뒤는 거의 별거 상태였던 것 같고.


이준은 서울에 올라와서 검사시보를 비롯한 공직에도 잠깐 몸담았지만 주로 개화파의 주요 인사로서 독립협회나 보안회, 공진회 등 각종 단체에서 열혈 운동가로 활동했지. 그런데 서울 생활 초기 몸을 의탁했던 전 형조판서 김병시가 이준을 부른다. 


"자네에게 마땅한 규수가 있는데 어떤가 인연을 맺어 보는 것이." 


이준은 멀뚱멀뚱하며 '고향에 처자가 있는뎁쇼' 했겠지. 하지만 김병시는 완강했어. 자네가 지금 큰일을 하려면 북청에 있는 아내는 힘이 될 수 없다는 점 등을 운운하면서 이준을 설득했지. 모르긴 해도 나이 서른 넷의 홀아비 아닌 홀아비 이준으로서는 자그마치 열여덟 살이나 어린 처자라는 소리에 솔깃하지 않았을까. 뭐 이준 열사는 그런 분이 아니지 않겠냐고? 아서 남자는 다 똑같아.


그런데 재미있는 건 처자의 어머니였어. 이화학당을 나온 이일정이라는 규수의 어머니는 전 형조판서 김병시의 아내와 의자매를 맺을 정도로 친했는데 이 의자매가 소개한 서른 넷의 유부남을 두말 않고 오케이 한 거야. "누가 소개한 남자인데 어련하려고." 당시 결혼 풍습으로는 아버지 뻘이라고 해도 무방한 늙은 신랑을 맞이한 이일정의 심경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신통하게도 둘은 천생연분이었어. 어차피 이준도 삼종지도에 여필종부 고집하는 고리타분한 사람도 아니었고 감옥을 제 집 드나들듯 하던 처지였기에 아내가 안방에서 곱게 살도록 할 입장도 아니었지.


아내 이일정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이준이 구속됐을 때 회원들의 앞에 서서 일장연설을 한다거나 시위에 앞장선다거나 하는 건 기본. 이일정이 선보인 파격적인 행동은 바로 가게를 여는 것이었어.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연하던 시절, 시장 보는 것도 하인들이 주로 맡아 하던 시절, 하물며 반가의 여자가, 그것도 유부녀가 상점을 열고 장사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는 일이었지. 상호는 인현부인상점.


전면을 유리로 장식해서 더없이 현대적인 풍모를 자랑했던 이 가게에서는 빗, 단추, 바늘 등 여성 용품을 팔았는데 주위의 비난과 손가락질이 자심했던 모양이야. 때로 이일정이 힘들어 하면 이준은 이렇게 그 어깨를 두드렸다고 해. "비웃는 자들 이야말로 어리석은 무리라니까는. 앞으로 십년이 못 되어 오늘 코웃음치던 무리들이 당신더러 우리 부녀계의 선각자요, 모범이라 칭송할 것이오다. 두고 보기요."


그녀는 상점 수익금을 일본 유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으로 내놓는가 하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어. 대한매일신보에 그녀는 이렇게 기고하며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주창하지. '슬프다, 우리 대한 나라 체재 어떠한가. 남의 굴레 못 면하고 대접은 어찌 받나. 남의 노예 되었도다. 노예 문권 찾으려면 무엇이 양책인가. 지식 없인 무가내하요, 지식을 구하려면 교육이 근본이요, 교육을 하려 하면 정신 배양 주장이오. 그 정신을 길러줌은 우리 일반 동포로세...... 여보시오 여보시오 여자 사회 형님네들, 우리 비록 여자로되 나라 관계 지중하니 형세대로 얼마씩을 기쁘게 내게 되면 하늘이 감응키는 남자보다 나을지라......'


부창부수. 하지만 그렇게 죽을 맞추고 손뼉을 마주치며 사는 생활도 그렇게 길지 않았어. 이준이 헤이그 밀사로 떠나 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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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준은 헤이그에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부산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길을 떠났다고 해. 그리고는 영영 이별이 돼 버렸지. 그렇게 떠난 몇 달 뒤 이일정은 이준의 일행이었던 이상설로부터 이준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아. 이 충격으로 이후 평생을 심장병에 시달렸다 할만큼 청천벽력같은 소리였겠지만 가장 슬픈 건 도대체 남편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겠지.


그녀는 이준의 전처 소생인 아들 이용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외손녀의 증언에 따르면 모스크바까지 갔다고도 해. 동료 밀사들을 만나 이준의 장지나마 알고 싶은 이유였지만 별 소득이 없었지. 그때 그녀가 남긴 한시 한 구절은 그녀의 애틋한 마음을 절절히 드러내 주고 있어. 


해는 장사에 머물고 추색은 깊은데

日落長沙秋色遠 

어디 가서 낭군님을 조상해야 한단 말인가

不知何處弔喪君


남편의 성품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그 운명을 짐작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겠으나 그렇게 생이별을 하고 갑자기 영영이별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겠지. 그 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면서 그녀가 일제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뻔한 일이고. 그녀의 한 인터뷰에 보면 여장부이자 이준 열사의 아내로서보다는 한 평범한 여자로서의 아픔이 물씬 느껴져서 애잔한 마음이 들어.


"나는 내 생활을 생각할 때 늘 준치라는 생선처럼 생각합니다. 

준치가 가시가 많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내 몸과 마음에도 너무 많은 가시를 꽂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편소설을 한 편 써 보았던 일이 있지요. 

그 뒤에 다 찢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가시가 그녀 가슴에 박혀 있었을까.


북한산 둘레길의 두 번째 코스 순례길 어귀에 이준 묘역이 있어.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이장했고 부인 이일정의 묘도 함께 조성했지. 거기 가 보면 이준의 어록이 적혀 있어.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라 위대한 사람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아마 이일정은 그 비석 앞에서 이렇게 쓸쓸히 대답했는지도 모르지. "맞아요. 하지만 위대한 사람들 때문에 가시 박힌 사람들도 많아요. 그래도 그 가시가 밉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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