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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9. 목요일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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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온 명대사가 떠오른다.


"여기가 콩밭이냐? 강간의 왕국이야!?"


지난 27일, 모 육군부대 여단장인 모 대령(남성)이 부하인 모 하사(여성)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어떻게 생겨먹은 부대인지 같은 부대 다른 소령(남성)도 부하인 다른 하사(여성)를 성추행한 혐의로 같은 달 중순에 이미 체포된 바 있다. 두 사건의 피해자들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말하자면 소령의 하사 성추행 사건을 조사하던 중, 피해자의 진술에 룸메이트 하사가 수차례 성폭행 당했다는 내용이 있어 긴급체포를 한 그림. 참으로 가관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되려나'라는 류의 탄식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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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근이 왼손을 들고 있는 사진

출처 - 송영근 홈페이지


29일인 오늘 열린 군인권개선특위 회의에서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은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조언성격의 말씀을 드리겠다'며 이런 말을 한다.



"여군 하사를 성폭행한 여단장이 들리는 얘기로 

지난해 거의 외박을 안 나갔다고 한다. 

가족도 거의 면회를 안 왔다. (여단장이) 40대 중반인데, 

성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측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인용문 출처 - 뉴스1


고매하신 구케으원이시다보니 젊잖은 어투를 쓰셨으나, 이를 미개한 일반인의 언어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40대 중반 남자가 떡을 못치면 반드시 어떻게든 풀고야 만다.'


이 말은 참으로 오묘한 깊이를 지닌 말이다. 일단 일정 기준 이상 성행위를 하지 못한 40대 남성에 대해, 자신의 성욕을 제대로 컨트롤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게다가 이미 상황 자체를 배우자와의 부부생활이 불가능한 것으로 가정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단정을 더한다.


결국 주말부부, 기러기아빠, 야근과 출장이 잦은 회사원, 늦둥이를 임신한 아내의 남편 등등, 수많은 40대 남성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 또는 불법 성매매 이용자로 낙인 찍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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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40대 남성임? 그럼 일단 낙인!


뭐 사람이 한 말의 한부분만 잘라서 보면 아무래도 왜곡이란게 생길 수 있으므로, 문맥을 살펴보자. 인용한 기사의 원문을 보면 송의원이 말한 의도는 대충 이렇다. 부대 내에서 외박 안 하는게 일을 잘하는 걸로 받아들여지다보니, 간부들 사이에서 외박하기 눈치보이는 문화가 정착되었다는 것. 쉴 때는 쉬면서 합리적으로 일을 해야지 이렇게 밤새고 외박도 안 쓰고 하는 게 일 잘하는 것의 상징처럼 되는 문화는 개선돼야하지 않겠냐는 식이다.


이 말만 떼어놓고 보면 참 맞는 말이다. 회사에서 무조건 야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게 일을 잘하는 것 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구시대적이라는 시각은 이미 보편적이다. 오히려 칼출근에 칼퇴도 하고, 자기계발도 하고, 운동도 하고, 게다가 일도 안밀리고 잘하는 게 매일 밤새워 회사에 박혀있는 것 보다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된 건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물론 퇴근 20분 전에 일거리 주는 상사가 있는 현실에선 벌어지긴 힘든 일이지만 말이다.


현실에서 벌어지기 힘들든 말든, 어쨌든 이 부분의 말만 놓고 보면 내용은 옳다. 일터에 짱박혀있는 게 무조건 일 잘하는 게 아니라는 시각의 도입.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아니라 성과를 보고 평가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태도. 이 부분만 똑 떼어놓고 보면 3성 장군 출신 국회의원이 현직 국방장관에게 건네볼만 한 얘기다. 앞 부분에 뭔 개소리를 했든, 그 개소리가 뒷부분의 내용까지 개소리로 만들진 않는다.


허나 반대로, 뒷부분에 아무리 좋은 얘기를 숨겨놓고 있다 한들, 앞에서 한 개소리는 개소리다. 마치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를 웃는 얼굴로 쓰다듬으며, '아유 우리 좆같이 생긴 새끼 참 이쁘고 귀엽다'고 했다 할 때, 이쁘고 귀엽다는 말을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앞에 말한 욕설을 무마시킬 수는 없다는 거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이거다. 혹시라도 이런 말을 한 인간이, '선의를 갖고 귀엽다는 표현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일부 말실수를 곡해해선 안된다'는 식의 변명을 하는 상황 말이다. 이게 더 문제인 이유는, '선한 의도'라는 걸로 다른 모든 것을 무마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드러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가슴을 만져놓고 '딸 같아서 그랬다'는 말이 핑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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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선의'라는 걸 가진 상태로 어떤 말을 하는데에 그 과정에서 폭력적이거나 차별적인 표현을 썼다면, 대체로 그 사람은 그 표현의 폭력성과 차별성에 대해 인지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야한 의상을 입고 출근한 여직원에게 '그럴거면 벗고 다녀라'라고 말하는 것이, 직장 상사의 따끔한 충고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이 상황의 대표적인 예. 이 경우, 이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유사한 폭력적, 차별적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송의원은 깨알 같게도, 위 발언을 하는 도중 '하사 아가씨'라는 표현을 써서 지적을 받기도 했다. 좋은 의도를 갖고 발언을 하는 과정에서 40대 남성의 성욕 제어 능력 무시와 성차별적 인식을 동시에 내비친 셈이다.


보도가 나오는 빈도를 보니 분명 당차원에서든 의원차원에서든 반응을 하긴 할 거 같다. 한번 지켜보자. 잘못된 발언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지. 아니면 '좋은 의도로 한 발언의 일부 발언만을 인용하여 왜곡한 언론의 책임'을 묻는지.


필자는 후자에 가깝게 갈 거라는 데에 500원 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한 번씩들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게 필요하겠다. 일상에서, 별 생각없이 이런 송영근스러운 짓을 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끝.

 

 

 





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