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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계속 된 빈민운동


8, 90년대 빈민운동을 주도하던 천주교의 도시빈민연합회와 기독교의 빈민협의회가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단일 전선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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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를 함께 할 즈음, 나는 광명시 하안동이 완전히 철거된 후, 곧 개발이 시작될 부천 중동을 다음 활동 장소로 정하고 이사를 한 상태였다. 군인이 전장을 옮겨 다니면서 전투를 벌이듯이 빈민운동 또한 개발로 빈민들이 쫒겨나게 될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 활동을 해야 했다. 


87년 6월 항쟁으로 전국의 재야 세력이 조직화될 때 부천은 신생 도시여서 아직 대표성을 가진 인물이 없는 탓에 자연스럽게 내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부천에서 빈민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학생을 포함한 다양한 세력을 대표하는 얼굴마담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적 이유에서 빈민운동으로 시작했는데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어느새 민주화 운동 투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때 내 이미지가 어땠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호주로 와서 처녀 때 부천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던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나와 20년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났고 단체의 대표도 아니었으니 개인적으로 만날 일은 없었지만 이러 저러한 행사에서 나를 자주 보아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와 가까워진 다음에 하는 말이 내가 아주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단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그녀가 나를 볼 때는 항상 각종 투쟁에서 앞장 서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는 40대 10년을 지낸 부천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가장 많은 땀을 눈물을 흘린 시대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얘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하게 되듯 나 역시 호주에 와서도 부천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부천으로 오고 나서 경찰과의 업무 관계(?)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현장에 있어야 했고 부천 경찰서 정보과의 박 형사는 내가 굳이 연락을 해주지 않아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나와 함께 하며 개인 찍사마냥 기록과 촬영을 열심히 해주었다. (물론 그렇게 찍어댄 것을 한 번도 나에게 보여준 적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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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이미지 - 좌린)


박 형사는 항상 점잖게 양복을 입고 다녔고 나는 일 년 내내 똑같은 잠바 하나만 입고 다녔다. 박 형사는 몸집도 푸짐하고 푸근하게 생겼고 나는 바싹 마른데다 날카롭게 생겨서 같은 장소에 나타나면 그가 목사이고 내가 형사 같아 보였다. 


한 번은 철거민 촌에서 행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 진흙탕 길을 걸어 나오는데 박 형사가 차를 세우더니 "큰 길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타시죠."하는 것이었다. 차 안에서 박 형사가 인사말로 "지 목사님, 정말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 많이 하십니다."하기에 "사실 나 같은 사람 훈장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하고 농담으로 받았더니 넉살 좋게 "세상이 좋아지면 그렇게 되겠지요."했다.


조금 가다가 박 형사가 조심스럽게 "지 목사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했다. 물어보는 게 그 사람의 직업이니 당연한 일인데 태도가 너무 은근해서 오히려 내가 수상쩍었다. 그래서 신경을 바짝 세우고 그러시라 했더니,


"목사님은 도대체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전혀 의외의 질문이었다. 


"그런 것도 보고해야 하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입장에서 교회도 직업도 없이 하는 일마다 돈 안 되는 일만 하는 내 생활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모양이었다.


"저도 뜯어 먹고 삽니다."


"에이! 그럴 리가?"


"물론 경찰처럼 강제로 뜯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후원하는 돈으로 사니까 마찬가지 아닌가요?" 


박 형사가 껄껄 웃더니 "그거 말 되네요."라고 했다.


박 형사와만 이렇게 웃으며 지낸 것은 아니었다. 경찰과는 비록 입장은 다르지만, 만날 때마다 사사건건 감정을 가지고 불편하게 지낼 수만은 없어서 피차 간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경찰은 사소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우리 측에서는 쓸데없이 경계를 하고 적개심을 갖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단골인 부천 경찰서에서는 피차간에 거래실적이 많으니 서로 이해해주는 면이 있었지만 어쩌다가 서울에서 경찰에 연행이 되어 가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부천에서나 알려져 있지 서울 경찰도 알아줄 만큼 유명인사는 아니었기에 일단 경찰서에 가면 완전히 일반 잡범 취급을 받은 것이다.


경찰과의 개별적 접촉 정도면 잡범 취급 정도로 끝날 수 있었지만 집단적으로 만나면 인정사정이 없었다. 당시에는 시위라는 것이 패싸움 성격이기 때문에 재수가 없어서 잡히면 몰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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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학창시절부터 맞는 자리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줄의 앞에서 때려도 뒤에서 때려도 꼭 나까지 맞고 끝났다. 군대에서도 여전히 맞을 복이 많았다. 내무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요령껏 점호를 피해서 점호가 끝난 다음에 들어오면 그 시간에 맞고 점호에 출석하면 또 그 시간에 맞았다. 여기 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40대 들어와서도 맞고 살았다.


87년 6월 항쟁 때 거리에서 대학생을 때리는 경찰에게 항의하다 "넌 뭐야?"하면서 떼거리로 달려든 경찰들에게 뭇매를 맞은 것이다. 머리가 흰 노인 목사님과 함께 말렸는데 독이 오른 경찰들이 노인을 때릴 수가 없으니까 나만 때렸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옛날에 썼던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한 것을 찾아보았더니 기록이 전혀 없었다. 집 사람에게 "이상하다! 그 중요한 사건을 왜 기록을 안 해놓았을까?"라고 했더니 "그 때는 맞아 죽는 사람, 분신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 대단하다고 적어 놓았겠어요?" 한다.


그랬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백인 경찰에게 집단으로 두드려 맞아서 LA 폭동이 일어났던 '로드니 킹' 사건처럼 그렇게 길가에서 경찰에게 집단으로 두드려 맞았지만 그건 기록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때는. 한 가지 분명히 기억되는 일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회부에 전화를 걸었더니 조선일보에서는 "우린 그런 사건 취급 안 해요."라고 했었다. (그래도 동아일보에는 한 줄 기사로 보도가 되어서 기사를 본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 오기도 했었다.)


한 번은 경찰에서 집회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꼭 그래야겠느냐고 하니까 위법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각서를 써주면 원천봉쇄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각서를 써주고 집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는 순간에 사회자가 흥분해서 갑자기 행사 후에 계획에 없던 가두행진을 한다고 발표를 해버렸다. 


급히 사회자를 불러서 중지를 시켰지만 이미 백여 명이 집회장 밖으로 나간 뒤라서 그대로 행진이 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어김없이 일찍 경찰서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정보과장은 어제의 약속 위반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기에 나는 이렇게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과장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어제 행사를 경찰로서는 시위로 보겠지만 노동자들이 자기들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가 아닙니까? 노동자들의 문화행사로 보아줄 수는 없습니까?"


결국 내 말이 이해가 먹혔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전날 있었던 사건은 우발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로 해서 더 이상 거론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신분증을 보여달라니


이렇듯 경찰들과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서일까? 문민정부 시절에 27년간 경찰관 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개인적인 일로 우리 집에 다녀갔다. 그 분과 함께 거리를 다니다가 권위 있는 호주 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매우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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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는 경찰에게 엉겨 붙었다가는 작살이 난다. 

도로에 차를 운전하고 나갔다가도 경찰차를 보면 모두들 긴장한다. 


그분은 한국에서는 술 먹고 파출소에서 난동부리기, 근무 중인 경찰에 시비 걸기, 걸리면 왜 나만 잡느냐고 생떼 쓰기, '나 잡아 봐라?'하고 경찰 약 올리기 등등 경찰 노릇을 해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줄줄이 애로사항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경찰이 왜 그렇게 권위가 없을까? 한국 사람들이 싸가지가 없어서? 싸가지 없기로는 백인들이 몇 배는 더 될 것이고 진짜 이유는 한국인들은 지난 시기에 경찰에 너무 당하고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경우만 해도 호주로 오기 전까지 50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유감이었던 일을 기록하자면 책으로 써도 될 만큼 많았다. 이것이 모두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의 몽둥이로서 독재정권에 부역을 할 수밖에 없던 탓일 거다.


경찰관으로서 그분이 가장 기가 막혀하는 것은 노 대통령 시절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복 입은 경찰관에게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면 제시를 해야 한다는 기가 막힌 권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인권위가 대통령 직속이었다며 개탄을 했다. 


감히 정복 입은 경찰관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경찰 측 입장에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권고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내가 바로 경찰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 아마 바로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그런 권고 사항이 채택된 것인 모양이다.

 

어느 날 역곡에 있는 성심여대에서 하는 행사에서 강연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보니까 이미 전투경찰 중대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는 나라의 분위기 상 집회라고 해봐야 가두 진출은 생각도 못 하는, 얌전한 가톨릭계 여대생들의 교내, 그것도 실내 집회에 혹시나 노심초사하며 경찰이 출동해서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한가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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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끝나고, 산으로 난 옆문으로 나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총학생회 간부 몇 명이 내가 염려가 되어 정문까지 배웅을 나왔다. 정문에서 지휘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잡더니 주민등록증을 좀 보자고 했다. 나로서는 '옳다구나'하고 배웅을 하러 나온 총학생회 간부들에게 경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현장 교육을 시킬 기회라는 좋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신분증 좀 보여 주시죠?"


"뭐야? 감히 경찰 보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


"가짜 경찰인지 어떻게 압니까?"


몇 시간 동안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상황의 변화가 생겨서 긴장하게 된 전경들은 나와 지휘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중대 병력 앞에서 이런 질문을 당하고 보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 앞에서, 지휘관은 부하들 앞에서 벌리는 기싸움이기에 피차 밀릴 수 없는 처지였다. 표정을 보아 생전 처음으로 말도 안 되는(?) 반박을 당한 것 같았던 지휘관을 눈을 부라리며 "당신 지금 누굴 놀리는 거야?"하고 언성을 높였다. 내친김에 나는 '억지가 사촌 보다 낫다'는 원칙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댁들이 가짜 경찰인줄 어떻게 압니까? 이런 장비들은 청계천에 가면 다 살 수 있어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경 중에서 몇 명이 감히 자기 지휘관을 모욕하는 듯한 건방진 나의 태도에 대해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뒤에서 욕을 했다. 이에 질세라 여학생들이 전경들을 향해서 대거리를 했다. 


나는 더욱 냉정하게 "주민등록법에 범죄 혐의가 없이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시겠지요?"라고 했다. 경찰 지휘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 자주 볼 거요. 어디 두고 봅시다."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 지휘관은 내 나와바리에서 나를 모르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새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협박을 당하면 두렵다. "이렇게 하시면 좋지 않습니다.", "지금 그림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 목사님 가는 곳에는 바람이 붑니다." 등등 협박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어 갔던 그 시절에 그런 협박(그쪽에서는 권고라고 표현한다)을 받을 때마다 겁이 나는 것 보다 오히려 더 마음이 굳어졌었다.




YMCA 활동을 하며 만난 경찰들


요즘 벙커1에서 여러 가지 기발한 행사를 많이 하지만 8, 90 년대에는 YMCA가 그런 일을 많이 했었다. 물론 전국적으로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 선진적인 곳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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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부천 YMCA는 깃발을 날리는 곳이라 할 만했다. 그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황주석이라는 탁월한 인물 때문이었다.


그는 87년 당시 부천에는 전 YH 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민노당 국회의원을 했던 최순영 의원의 남편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부천 YMCA의 총무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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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황주석 씨(왼쪽)와 민노당 최순영 의원(오른쪽)


YMCA는 무늬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약식으로 예배를 드릴 때가 많은데 황 총무가 나에게 설교를 많이 시켜서 보수적인 교회 목사나 장로들로부터 부천에서 가장 과격한 인물을 왜 자주 내세우느냐고 비난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설교를 많이 시킨 것은 내 설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설교 시간이 5분인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5분 동안에 설교를 끝내지 못 해서 항상 행사가 예정 보다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아가리 부대 출신이기 때문에 시간 하나는 칼같이 지킬 줄 알았다. 원래 웅변은 시간이 7분이고 시간이 길거나 짧으면 감점을 당하기 때문에 1초도 안 어기고 시간을 정확히 맞추는 것 하나만은 훈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결국 황 총무의 제안으로 YMCA 이사까지 맡게 되었다.


그렇게 이사직을 수행하던 시절에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했다. 그중 하나는 당시 대규모로 운영하고 있던 부천 YMCA 아기스포츠단에 대한 것이다. 아기스포츠단은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에만 의존하고 있는 YMCA 운영에 재정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어서 나는 돈만 벌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황 총무가 아이들 중에는 장학생도 있다고 해서 "유치원에 장학생이라니?" 했더니 김근태 형이 부천에 살 때 근태 형의 애들을 장학생으로 받아주었고 그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었는데 돈 안 받고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민주 장학생이네?" 했더니 "맞아! 아기스포츠단 민주 장학생." 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 애들은 훌륭한 아버지들 덕에 유치원 때부터 장학생이었다는 자랑스러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천에 사는 내내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던 경찰들과의 악연 또한 이 시기에도 이어졌다.


하루는 황 총무가 전화를 해서 낮은 목소리로 "당분간 조심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내용을 알고 보니 형사들이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지성수 목사! 이놈 이번에 한번 혼을 내주자."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음식점 주인이 형사들의 입에서 내 이름을 듣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하다가 YMCA 생각이 나서 혹시나 하고 황 총무에게 전화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식당 주인이 아들을 아기스포츠단에 보내고 있어서 YMCA를 들락거리다가 YMCA의 이사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내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 총무에게 전화를 받은 다음 날 나는 즉시 기동 타격을 목적으로 부천경찰서장을 찾아갔다. (전투에서는 방어만 하지 말고 기회가 있으면 공격도 해야 한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서장님! 부하들 입조심 좀 시키셔야 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서장님 부하가 몇 명입니까? 기껏해야 400명밖에 더 됩니까? 정보는 경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천에 노동자 청년 학생 빈민이 몇 명인 줄 아십니까? 우리가 만일에 부천에 있는 모든 경찰들을 감시하려고 결정을 내리면 눈이 몇 개가 되겠어요? 아마 경찰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일단 이쪽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다는 표시로 엄포를 놓고 사태를 처음부터 설명을 했다. 서장은 알았다고 하면서 대신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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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황 총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지 목사님 경찰서장 되었다가는 큰일 나겠네. 공갈까지 치고." 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는 그 사건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타고 있던 봉고차가 좌회전에서 꼬리 물기를 하다가 애매하게 교통 위반을 했다. 의경이 차를 세우더니 운전사에게 목에 깁스라도 한 듯한 목소리로 면허증을 내라고 했다. 죄를 지은(?) 운전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면허증을 내주었는데 옆에 있던 내가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래? 앞 차 따라가느라고 좌회전 신호등이 바뀐 것을 못 본 건데 그런 것까지 딱지를 떼면 가난한 서민들이 어떻게 살겠어?" 하고 거들었다. 각 잡고 엄숙한 표정으로 공무를 집행하던 의경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아저씨는 뭐요? 신분증 좀 내봐요!" 하고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전경이 떫은 표정으로 내 주민등록증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지... 성수?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혹시 목사님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요? 어떻게 알아요?"라고 물어보니까 "언젠가 조회 시간에 서장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더니 "에이! 그냥 가세요. 다음부터 조심하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민주경찰(?)이었다.


나중에 잘 아는 형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서장이 내가 다녀가고 난 다음에 직원 조회 시간에 "어떤 놈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고 다니느냐?"고 성질을 부렸다는 것이다.


나는 흔하지 않은 성을 물려주신 조상님께 감사를 드렸다.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 이상 유명해지려면 희귀한 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훨씬 유리한 법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된 순간이었다.




빈들의 소리


내가 부천 사람들과 모임을 자주 갖던 카페 3층에 민자당 국회의원의 사무실이 있었다. 하루는 카페에 들렸더니 주인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경들이 민자당 사무실을 지키느라고 건물 입구에 버티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으니 카페에 손님이 들어오지 않아 장사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카페 주인 부부는 속이 있는데도 상했지만 꾹꾹 참으면서 오히려 전경들에게 커피도 타다 주고 담배도 사다 주면서 장사에 지장이 없게 해달라고 호소도 해보고 항의도 해보는 등 별 짓을 다해 보았지만 전경들의 무례하고 거칠고 방자한 태도에는 백약이 무효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민자당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들 때문에 장사 망하게 생겼으니 전경을 철수 시키든지 카페를 인수해라. 그렇게 안 하면 건물 앞에서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고 그 모습을 사진을 찍어 각 신문사로 보내겠다."라고 했더니 그 다음날 당장 경찰을 철수시켰다.


카페의 주인 쪽에서 애초부터 문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의 본질은 카페 주인과 국회의원이나 경찰서장과의 개인적인 싸움이 아니고 집권세력과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생존권의 대결이라는 구조적 싸움이었던 것이다.


90년도에 역곡역 앞 경인 국도변 사거리 코너에 있는 역곡 한의원 송봉길 원장이 한의원의 일부를 내주어 '나눔터'라는 지역 도서관과 주민상담실을 개설했다. 이때 알게 된 사실은 역곡역 땅이 모두 조선일보 직원들의 땅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미 역곡에 전철역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세워지는 단계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근처의 땅을 모조리 사두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부자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경험들을 하다 보니 부천에서 최우선적으로 한 것은 글을 써서 매월 '빈들의 소리'를 발행하는 일이었다. 10년 동안 새로운 성서 해석, 교회개혁, 빈민운동, 민주화 운동, 지역운동, 시민운동 등등 다양한 글을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빈들의 소리'는 뉴스가 빈곤했던 당시로서는 주류 언론에서 접할 수 없었던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불온문서여서 지하 유통망(?)을 통해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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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인쇄소에서 인쇄를 거절해서 이 곳 저곳을 헤매기도 했고 겨우 인쇄를 끝내서 발송을 했는데 배달이 안 될 때도 있었고 그런 일을 피해 보기 위해서 여러 곳의 우체국으로 나누어서 발송을 했던 적도 있었다. 군대에서 '빈들의 소리'를 받아 보던 이들이 보안대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빈들의 소리'라는 작은 책자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고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만난 사람 중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지는 사람이 있다. 160 cm에 50 kg이나 될까 말까한 왜소한 체격에 골샌님 같은 윤인성 목사는 77년도에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졸업을 한 다음에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은 다음에 84년에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 전혀 없던 부천에 노동자들을 위한 최초의 민중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때로는 예배를 볼 공간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끈질기게 민중교회의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부천의 다른 두 곳의 민중교회가 그랬듯이 목회자들이 아직 젊기 때문에 교인들의 결혼식 이 있으면 주례를 나에게 부탁해서 나는 그 교회 교인들을 잘 알았다. 대부분의 민중교회가 그렇듯이 가난한 노동자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어도 자기들 살림을 꾸려가기도 힘겨워 교회 살림까지 책임을 지기가 어렵기 때문에 교회 살림은 목회자 혼자서 꾸려가야 했다.


늘 몸이 허약해서 원기 있게 활동을 하지 못하던 윤 목사가 시름시름 앓다가 심하게 아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단 결과 위암이 척수암으로 번져서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퇴원 후 2개월 동안 의학적인 치료를 포기하고 기도와 식이요법, 지압을 받으면서 몸을 돌보았으나 93년 5월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유명을 달리 했다. 다행히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잠이 들듯 운명을 한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는 소식이었다. 윤 목사는 숨지기 전 마지막 한 달간을 재천의 박달재에 살고 있던 있는 이현주 목사님의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영적, 육적으로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의 생애에 마지막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운명 소식을 듣고 우리가 달려갔을 때 윤 목사의 운명을 지켜본 이현주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인성이가 좋은 교훈을 남기고 갔다'면서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때 알았다.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사랑 받지 못했던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더욱 값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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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전날 아침에 밥을 먹으면서 아내가 아이들에게 "도일이 아빠가 돌아 가셔서 엄마와 아빠는 오늘 못 들어오니까 학교 갔다 와서 너희들끼리 밥을 차려 먹어야 한다."고 했다. 큰 애가 깜작 놀라면서 "그 분이 벌써 돌아가셨어요?" 하기에 무심코 나 혼자말로 "참 고생만 하다가 갔어."라고 했더니 아이가 내 말을 받아서 "고생 밖에 한 것이 없지." 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까 내 표현보다는 아이의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였지만 안락한 길을 걷지 않고 결연한 결단이 요구되는 민중교회 목회자의 길을 걷느라고 고생만 하다가 갔다. 윤 목사는 세상을 떠나면서 처자식이 몸을 의탁할 월세 방 한 칸도 남기지 못했다. 장지에서 꽁꽁 얼어붙은 날씨에 땅이 제대로 파지지 않아서 고생을 했지만 아내가 노천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끓였던 곰국으로 몸을 따듯하게 할 수 있었다.


윤 목사를 충주부근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고 돌아오는 내 가슴 속에는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나는 네가 겪은 환난과 궁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요하다'는 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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