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2. 16. 월요일
비정규노동
편집부 주 지난 연말 박근혜 정권은 ‘노동시장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을 내놓았다. 주요 내용을 보면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정규직 해고 요건을 완화하며, 고령자의 파견 허용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이러한 정부의 '대책'이 현실화 되었을 때 비정규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가상 인물의 삶에 적용하여 보다 이해가 쉽게 정리한 것이다. |
계약직 3년 차 김정규의 2017년 2월 어느 날
핸드폰 알람소리가 요란스레 울린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뒤척이다 핸드폰을 찾았다. 윽, 일요일이다. 젠장,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잠은 이미 저만치 달아났다. 지난밤 일이 떠올랐다. 토요일인데도 출근해 야근까지 했다. 얼마 전 들어온 후배와 늦은 밤 소주를 마셨다. 신세 한탄을 하다 집에 들어와 캔맥주를 들이키다 잠이 들었다. 머리가 띵하다.
애인도 없고, 친구들과 약속도 없다. 하지만 오후에는 싸들고 온 회사 일을 해야 한다. 돼지우리인 집구석을 치우기 시작한다. 2017년 2월 12일 서울의 한 식료품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김정규(36, 가명) 씨의 일요일 아침이다.
2009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자리를 알아봤지만 좋은 일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기업, 공기업, 은행은 해가 갈수록 신규채용을 줄였고, 경쟁률은 수백 대 일을 넘은 지 오래였다. 원서를 계속 넣었지만 서류전형을 통과하기도 어려웠다. 졸업하고서도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어 편의점, PC방, 커피전문점 알바를 했다. 대학 동창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회생활의 첫 직장이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전문점 같은 알바 직장이었다.
알바를 떠돌다 얻은 직장 2년 만에 잘리고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 2011년 한 중소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정규직이 된 선배들도 있었다. 좋아하던 담배도 끊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회사에서 살았다. 2년 동안부모님이 계신 고향에도 가지 못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비정규직과 경제민주화가 쟁점이 되면서 그는 선거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박근혜 후보는 “사회양극화의 핵심은 비정규직 문제”라며 공공부문 상시 지속적인 업무 정규직화, 비정규직 차별 해소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식 날 우체국 비정규직 차별을 해결해달라는 비정규직 집배원의 요구에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하겠”다며 “임기 내 반드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도록 최대한 관심을 갖고 힘쓰겠다”라고 약속했다.
예쁜 한복을 차려입고 '희망 복주머니' 행사 중이신 박근혜 대통령
출처: <오마이뉴스>
정권 초기 이마트에서 1만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고,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면서 기대는 더 커졌다. 하지만 불법 대선개입으로 궁지에 몰리던 국가정보원이 내란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통합진보당 의원을 구속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는 언론에서 사라졌다.
계약직 2년을 한 달 남겨놓고, 과장은 나를 불러 술을 사주며 미안하다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2년의 시간이 너무 억울해 밤새 펑펑 울었다.
무관심한 사이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통과되고
알바를 몇 개월 더 하다 2014년 지금 회사에 들어왔다. 그해 말 정부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35세 이상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린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55세 이상 파견 허용 업종을 전면 확대하고, 직무·성과급 중심으로 임금을 개편하고, 저성과자의 해고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출처: <중앙일보>
계약직에게 이직수당을 주고, 3개월 이상 근무한 노동자에게 퇴직금을 준다는 방안이 눈길을 끌었다. 정부는 4년이 되면 숙련이 높아져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비율이 높아진다고 했다. 한 언론사는 ‘장그래법’이라고 썼고, 정부도 ‘장그래 구제법’이라고 했다.
노동계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비정규직을 늘리고, 임금을 깎고, 해고를 쉽게한다는 방안이라며 파업을 불사하겠다고 했다. 인터넷 댓글도 “장그래가 정규직 시켜달라고 했지, 비정규직 연장해달라고 했냐”며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여론이 많았다. 헷갈렸다. 정규직이 양보해서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는 게 좋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고, 천신만고 끝에 정규직이 됐는데 임금도 깎이고일을 못한다고 해고시킨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계가 무슨 힘이 있을까 싶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을 정도로 회사 일이 바빴다. 민주노총이 파업을 했고, 위원장이 구속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야당이 반대했지만 기를 쓰고 막을 의지가 없었다고 했고 결국 법안이 통과돼 2016년 1월부터 시행됐다.
비정규직 사용 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면서 회사도 지난해 계약 기간을 1년 연장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4년까지 다니게 된다고 했다. 한 상사는 술자리에서 정규직 전환도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학교를 졸업한 지 8년 만에 정규직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꿈이 생기기도 했다.
현대차 정년퇴직한 아빠는 파견직으로
설 연휴였던 지난 1월 27일 모처럼 시간을 내서 고향인 울산에 다녀왔다. 아빠는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 다니다 2년 전 정년퇴직을 하셨다. 현대차 연봉이 1억 원에 가까워 나는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았고, 알바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을 다녔다. 아빠는 대학 그만두고 현대차 사내하청으로 들어오면 정규직으로 될 수 있다고 제안하시기도 했다.
지난 가을부터 아빠는 현대차에 '다시' 다니신다고 했다. 100세 시대에 60대 초반은 청춘이고, 몇 년은 더 일을 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회사도 엔진 공장에서 30년 넘게 일한 아빠의 손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전해준 얘기는 이상했다. 아빠의 월급이 200만 원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현대차 촉탁직이 아니고, ‘좋은 인력’이라는 파견 회사 소속이라고 했다. 파견 회사가 30%를 떼먹고 월급을 주는데,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준다고 했다. 월급이 적다고 하면 일할 사람 많으니까 그만두라고 한다고 했다. 아빠는 아픈 곳도 없는데 놀면 뭐하냐며,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 까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빠 얘기에 따르면 현대차 공장 안에 고숙련이 필요한 업무는 신규채용을 하지 않고 정년퇴직자들이 파견직으로 들어와 일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양정동에만 파견 회사가 10개 넘게 생겼다. 제조업에는 파견 노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2015년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55세 이상 노동자에게는 모든 업종에서 파견이 허용되고, 기간도 제한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정년퇴직자 자리에 계약직만
차례를 지내고 고등학교 동창 녀석들과 명촌에서 만났다. 대부분 아빠가 현대차 정규직이거나 정년퇴직한 친구들이다. 그 중 한 녀석은 대학을 중퇴하고 사내하청 노동자로 들어갔다. 친구는 여전히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현대차가 일부를 정규직으로 채용했지만, 사회적 관심이 시들해지자 지난해 하반기부터 더 이상 하청업체를 대상으로 신규채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친구의 얘기에 따르면 회사는 촉탁계약직이라고 부르는 계약직을 계속 늘리고 있다고 했다. 해마다 정년퇴직으로 1,000명 이상이 회사를 떠나는데 그 자리를 계약직이나 파견직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자동차의 조립 일은 반나절만 배우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법이 바뀌어 4년까지 일을 시킬 수 있으니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계약을 맺어 4년이 되기 전에 그만두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른다는 것이었다.
2015년 운 좋게 정규직이 된 녀석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회사가 호봉제를 없애고 성과급을 중심으로 한 연봉제를 도입해 숙련도, 불량률, 시간당 생산 대수 등 각종 생산성 지표가 떨어지는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차등 지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성과가 낮은 노동자는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지만 노동조합이 아직 힘이 있어 이를 막고 있다고 했다. 공장 안에서 저성과자로 찍힌 사무직들이 조만간 대규모로 해고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동창 녀석들 중에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연봉 4~5천만 원 정도 버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나는 어디로
어느새 6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3년 8개월 동안 발로 뛴 보람이 있었는지 영업망도 꽤 늘었다. 큰 실적도 여러 번 올렸다.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한 걸 보니 조만간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다. 연봉이 센 선배들이 나가면 정규직이 될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회사 입장에서도 고임금자 내보내고 임금이 낮은 젊은사람들을 쓰면 더 좋을 것이다. 연봉 3천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몸이부서져라 버텨온 보람이 오는 걸까? 계약 기간 4년이 4개월 남았지만, 이 정도 경력과 실력을 갖춘 사람을 그냥 버리기엔 회사에게도 손실이 크지 않을까?
어젯밤 영업부장을 만났다. 그는 이달 말로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아직 아이들이 대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퇴직금 받아서 편의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미안하다고 했다. 이번 인사이동 과정에서 계약을 해지할 것이고, 내 자리는 올 초에 들어온 후배가 맡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계약직 3년 8개월, 이직수당을 받고 회사를 떠나면 난 어디로 가야 할까?
비정규노동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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