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3. 09. 월요일
trexx
1. QuickTime의 가치
1997년, 애플로 돌아온 잡스는 97년 이전에 나왔던 기술들을 재검토 하였고 대부분 폐기하였다. QuickTime과 1993년 개발 된 AppleScript, 이 두 개의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빼고.
돌아온 잡스는 애플의 내세웠던 Newton MessagePad를 과감히 폐기하였다.
잡스는 NeXT가 구현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기술을 애플에 이식하기 원했다. 물론 당시 애플의 소프트웨어 기술이 NeXT에 비해 떨어지기도 했었기 때문에, 기존 맥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을 위한 기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중지하였다. 그래도 QuickTime만은 살려놓았다. 아니, 살려놓은 수준이 아니라 되려 전략상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로 내세운다.
돌아 온 잡스는 소위 '비밀주의'로 애플을 통제하였다. 내부에서 직원들을 통제하여, 현재 개발 중인 기술을 언론에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외부 언론에 기술을 누설한 직원을 해고하기도 했다. 잡스의 비밀주의는 상품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마케팅 술수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구현이 완전하지 않은, 즉, 아이디어에 머물러 있는 기술을 대중에게 공개하면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잡스 이전의 애플은 기술 유출이 심각하여 프로젝트를 제대로 완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본 잡스가 내린 특별 조치일 수도 있겠다. 잡스는 애플이 개발 중인 기술이 외부에 새는 것을 꺼렸고, 개발 기술 뿐 아니라 사업 및 신제품 전략마저 외부에 퍼지는 것을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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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9월 30일 스티브는 새로 만든 광고(Think different)를 축하하기 위해 애플 직원들과 파티를 열었다.
(중략)"애플은 현재 광고비로 1년에 1억 달러를 쓰면서도 효과는 별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스티브는 말했다."앞으로도 계속해서 1년에 1억달러 이상을 광고비로 쓰겠지만, 이제는 그 돈을 헛되이 낭비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껏 우리가 추구해온 가장 가치있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애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그 자리에는 케이트 애덤스라는 젊은 여직원이 있었다. 스티브를 가까이에서 처음 본 그녀는 매우 흥분했다. 그래서 그녀는 친구에게 이렇게 적은 e-메일을 보내기도 했다."그것은 훌륭한, 아니 대단한 연설이었어. '이것이 생각뿐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확신한다'는 말투였지."(중략)다음날 케이티는 음성 메시지 한통을 받았다."안녕하시오, 스티브 잡스요, 우리 만나서 얘기 좀 할까요?"(중략)"여기 적힌 1억 달러라는 숫자가 비밀이어야 한다는 거 몰랐어요?”"그(스티브)는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는 심각하고 공격적이었지만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방문을 나서는 그녀에게 그(스티브)가 물었다."그런데 퀵타임(QuickTime)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죠?""엔지니어링 팀에 있어요.""알았어요."그녀는 겨우 벗어났다. 마케팅 팀이라고 했다면 해고당했으리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있었다.앨런 도이치먼 - 스티브 잡스의 재림 중
이 일화에서 잡스의 비밀주의를 알 수 있지만, 잡스가 QuickTime 기술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컨텐츠 가치
잡스는 1985년 애플에서 (쫓겨) 나온 후, NeXT사를 설립했고, NeXTCube를 만들었다. 이 NeXTCube를 보더라도 90년대까지 그가 얼마나 하드웨어 광였는지 알 수 있다. NeXTCube는 정육각형 마그네슘 소재 외형과 광자기 드라이브(MO disc)를 지원하는 등 기존의 워크스테이션 컴퓨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급이 다른 하드웨어를 갖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찬사와는 반대로 NeXT는 너무 비싸서였는지 수요예측 실패로, 하드웨어 판매를 중단한다. NeXT의 대실패로 잡스는 더이상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돌아온 잡스의 애플이 iTunes를 통하여 컨텐츠 플랫폼을 완성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픽사를 조지 루카스에게서 구매할 당시만 하더라도, 하드웨어 광이었던 잡스는 '픽사 이미지 컴퓨터'의 인체 스캔 기술을 눈여겨 보고, 대형 병원에 팔길 원했으나 그마저 실패하고 만다.
3. 퀵타임 탄생
오늘날 HD영상은 스마트폰으로 쉽게 볼 수 있지만, QuickTime 기술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불가능했다. 1990년대 초반 가정용 컴퓨터에서는 동영상 재생을 할 수 없었다. 동영상을 보기 위해서 고가의 그래픽 하드웨어가 별도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1년 5월 WWDC(애플 세계 개발자 회의)에서 브루스 릭(Bruce Leak)은 QuickTime으로 우표크기의 작은 동영상을 시연해 보였다. 그 유명한 1984년 매킨토시 광고를 틀었는데, 별도의 장비 도움 없이 컴퓨터에서 동영상을 재생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보통 동영상이나 음성 미디어 파일은 codec에 따라 속성이 정해진다.(갑자기 어려워졌다. 금방 지나가겠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음성 코덱은 mp3 파일이다. 이는 mpeg layer 3 코덱으로, 저장된 음성 파일을 가리킨다. 최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영상 코덱은 H.264으로 MPEG-4 동영상 코덱의 일종이다. 만약 가지고 있는 동영상 파일이 mov, avi, mkv, mp4로 되어 있으면, 이는 동영상 코덱과 음성 코덱 파일이 포함된 컨테이너 파일이다. (위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컨테이너 안에 코덱 파일들이 들어가 있다.)
퀵타임이 가진 독특한 컨테이너 설계는 미디어 파일 제작에 있어서 일대 혁신을 이뤘다. 바로 비선형(nonlinear) 편집이 가능해 진 것이다. 선형과 비선형은 수동식 타자기와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이해할 수 있다. 수동식 타자기는 종이를 넣고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는 클립보드를 통하여 작성한 글들을 어디든 가져다 붙여 놓을 수 있다. 애플은 독특한 컨테이너 설계로 비선형 편집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미디어 제작자는 mov 컨테이너 파일을 생성하여 외부 동영상을 원하는 위치에 삽입하고 편집할 수 있으며, 컨테이너 파일에서는 연결된(혹은 컨테이너에 포함된) 파일들을 구조화하여 시간(Timecode) 등을 지정하여 만들 수 있다.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으로 퀵타임 컨테이너 파일을 이용하여 손쉽게 비선형 편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 퀵타임 발전사
퀵타임은 1991년 애플 전성기 때 태어났지만, 웹이 활성화 된 1990년대 중후반에는 모기업 애플이 곤경에 처함에 따라 많은 부침을 겪는다. 그래도 고유의 기술은 계속 발전해 21세기를 맞을 수 있었다. 퀵타임이 최고의 기업인 애플의 기반이라고 해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 것이다.
(1) 1.X 버전
1991년에 나온 1.0 버전은 Classic OS 6.0 이상에서 오로지 소프트웨어로 동영상을 재생하였다. 물론 지금 보면 우표만한 크기로, 장난 수준이었지만 하드웨어 가속 없이 동영상을 재생하는 최초의 프로그램이었다. 1992년 1.5버전에서는 수퍼맥(SuperMac)사에서 개발한 Cinepak 코덱을 추가하였다. 시네팩은 320X240 해상도, 초당 30프레임을 지원하였고, 컨테이너 파일에 자막(혹은 가사)을 삽입할 수 있었다. 지금 보면 형편 없는 해상도 이지만, 1.0이 재생할 수 있었던 우표 크기에서 비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동시에 캐넌사를 통하여 Windows용 퀵타임 1.0 버전을 발표한다.
(2) 2.X 버전
1994년 2월 나온 2.0버전은 유료 프로그램으로, MIDI 기능을 추가하였다. 그 해 11월, 윈도우즈용 퀵타임 2.0을발표한다. 2.1과 2.5에서 다시 공짜가 되고, 음악 재생 기능 개선, 고속 연속 재생 기능 등을 추가한다. 2.5 버전에서는 가상현실 3D 이미지를 생성하고 시연하는 QuickTime VR 기능을 추가하였다. Adobe Flash가 출현하기 전까지 웹브라우저에서 멀티미디어 구현은 퀵타임이 하였다.
(3) 3.X 버전
1995년, 애플이 시장에서 힘을 못쓰자 QuickTime 개발도 지지부진해졌다. 잡스가 복귀한 지 8개월이 지난 1998년 3월, 퀵타임 3.0을 발표한다. 유료버전은 'Pro'라고 하여 추가 기능을 넣었고, 무료 버전은 2.5버전과 동일했다. 퀵타임은 1.5에서 도입한 동영상 코덱 씨네팩에서 소렌슨(Sorenson)으로 이전한다. 3.0버전에서 많은 기능 추가한다. 그림 파일(GIF, JPEG, TIFF 등) 지원했고, Firewire를 이용하여 캠코더에서 영상을 바로 출력할 수 있었다. (표준 DV 파일 변환)
퀵타임 4.0은 1999년 6월에 발표했다. iTunes과 Final Cut Pro 핵심 기술을 다수 포함했고, mp3 음성 코덱을 지원했다. 또, 인터넷을 위한 스트리밍 기술을 도입하였다.
2001년 4월에는 5.0버전을 냈다. (생명이 가장 짧은 버전이다.) DV파일을 실시간 변환 할 수 있게 되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애플이 모바일 환경에서 내쫓았던 어도비 Flash 4 파일을 정식 지원하였다.
(5) 6.X 버전
2005년 4월 29일, 7.0 버전을 세상에 내놓는다. 애플 오디오 인터페이스 CoreAudio를 지원하였다. 2006년 1월 10일 7.0.4버전에서는 인텔 맥을 지원하였고, 7.2버전에서는 공짜 버전에서 전체화면을 지원하였다.(기존 Pro에서만 지원) 그리고 7.3에서 Flash 지원을 끊는다. 7.X 버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H.264/MPEG-4 AVC다. 이 코덱은 기본적으로 HD를 지원하여 Blu-ray 뿐아니라 Youtube 등 인터넷 스트리밍, 아이튠즈 스토어 그리고 무엇보다 모바일에 최적화된 코덱이었다.
(7) X 버전
애플은 퀵타임을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 한다. 7.X 까지 퀵타임 기술은 OS X에 최적화하여 설계된 기술이 아니었다. iPhone이 2007년에 나오고, 애플은 퀵타임 기술을 OS X와 iOS에 최적화 할 필요가 있었다. OS X의 최적화, 64bit 지원 등 혁신적인 기술을 포함한 것처럼 보이지만 2009년 발표한 퀵타임 X 버전 프로그램은 기능적으로 완전히 퇴보한 프로그램이었다. QuickTime 7.X까지 지원했던 편집기능 및 MIDI, QTVR 등 포맷지원을 다수 누락하는 등 매우 허술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그 속은 조금 다르다. 보기와 달리 애플이 미디어 환경에서 MS를 상대로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하편에서 다룰 주 내용이다.)
10.1에 이르러 7.X에서 지원하는 파일 통합 기능을 살려놓았고, Audio 파일을 출력한다. 이제 QuickTime은 더이상 QuickTime이 아니다. 미디어 제작에 대한 모든 기능은 OS 안으로 들어왔다.
6. 퀵타임으로 구원 받은 애플
QuickTime이 없었다면 지금의 애플이 가능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잡스가 애플을 재건함에 있어서 퀵타임은 매우 효자 노릇을 했다. 아마 퀵타임이 없었다면 상당히 곤욕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잡스 자신이 만든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상을 가장 잘 담은 프로젝트가 QuickTime 이었다. QuickTime은 iTunes 기반 기술이 되었고, iPod에 이어 iPhone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미디어 제작 프로그램인 프로용 Final Cut Pro와 초보자용 iMovie는 QuickTime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었을 것이다.
애플은 미디어 포맷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중추적인 역할을 한 기술이 바로 QuickTime이다. 그리고 이제는 독자적인 미디어 플랫폼 자리에서 내려와 OS 기본 기능으로 혼연일체가 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MS의 Video for Windows에 대해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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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 @trexxcom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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