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3. 04. 수요일
cocoa
고백을 하나 할까 한다. 사실 나는 거세를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당했다. 처음엔 좀 많이 슬펐는데 지금은 이게 편하다. 욕망이 없으니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요즘엔 사람이란 게 참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뭐든 생각만 바꿔 먹으면 되는 거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던가. 왜 그거 있잖아 해골바가지. 무튼 다 마음에서 비롯되는 허상이라는 거다. 욕구를 없애니 몸도 마음도 한결 맑고 깨끗해졌다. 순수함을 되찾은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4월부터 음란물 규제(이른바 딸통법)를 시행한다고 하더라. 난 괜찮은데 뭇 사내들이 분노를 넘어 공포에 떨고 있다고 들었다. P2P, 웹하드 다 규제하겠다고 하니 무서울 만도 하다.
다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겠지만 소용없을 거다. 결국은 단통법, 아청법처럼 시행되겠지. 글타고 자료를 몇 테라바이트씩 비축해 놓는다 해도 부질없다. 그게 며칠이나 가겠냐? 결국은 고갈이다.
야동뿐만이 아니다. 그냥 먹고 사는 것도 힘들긴 매한가지다. 요즘 집값이 얼마나 비싸냐. 나 같은 사람은 150년 쯤 일해야 서울에 집 한 채 살 수 있겠더라. 글고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 하나 사먹을라치면 막 8천원, 9천 원씩 달라하는데, 이게 어디 만만하냐. 최저임금이 고작 5580원인데. 이런 시급!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다. 욕망을 제거하는 거.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욕구는 뭐든 없애면 되는 거다. 먹고 싶은 거 먹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지 마라. 꼭 가위로 거길 잘라야만 거세가 되는 게 아니다. 그냥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욕구를 없애면 거세가 된다.
무섭다고? 무섭겠지. 정신적 거세라지만 ‘거세’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가 어마어마하니까.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결국 거세불안에 대한 것이고, ‘이빨달린 그곳’을 뜻하는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a)라는 오랜 민담도 거세 공포에 대한 거다. 그러타. 남자에게 거세란 가장 근원적인 공포라는 거다.
바기나 덴타타를 상징적으로 활용한 공포영화 <죠스>
어찌 보면 우리에게 거세는 단순한 공포를 넘어서 죽음과 같다. 나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치만 걱정하지 마라. 그건 잠깐이다. 내가 해보니까, 생각했던 것 만큼 무서운 게 아니더라. 다들 본능적으로 거세를 무서워하는 건 알고 있다. 뭐 그건 당연한 거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본능은 이성으로 다스리는 법. 머리로 이해하면 공포심이 사라질거다.
앞서 말했다시피 거세란 죽음과 같다. 비슷하다는 정도가 아니고 진짜 죽음과 다름 없다. 오죽 했으면 거세당해 고자가 된 사람이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겠나.
“고자라니!”를 외치다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의 증거
그러니까 거세를 정말로 죽음에 빗대보자. 실제로 내가 거세 된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은 죽음을 받아 들이는 과정이 있다고 한다. ‘죽음의 5단계’란 거다. 이는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E. K bler Ross)가 평생 시한부 환자들을 돌본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과 죽어감>이란 저서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그녀에 따르면 죽어가는 환자들은 5단계의 감정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 순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이 과정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본인뿐만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의 지침서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환자가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면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 따라 거세 과정을 따라가 보면 거세를 해야 할 당신도, 주변 사람도 거세를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 그녀가 제시한 죽음의 단계에 따라 내 거세 과정을 서술해 보겠다. 천천히 잘 따라와서 무사히 거세의 세계로 입문하시길.
1단계: 부정과 고립
거의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때 환자가 나타내는 첫 번째 반응은 일종의 쇼크 상태이다. 초기의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 대부분의 환자들이 보여주는 첫 번째 반응은 “그럴 리가 없어.”이다.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모두 불멸의 존재이기에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처음에는 내가 거세되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돈, 여자 좋아하는 속물이고 식탐도 많으니까. 분명 사람은 모두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고, 나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막 허니버터칩도 사먹고 뷔페도 다녔다. 여친님이랑 매일 데이트도 하고. 그리고 막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장에 가서 영화도 봤다. ‘내가 욕망이 없다니, 그럴 리 없지’. 난 있는 힘껏 욕망이 없다는 걸 부정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맘껏 했다.
2단계: 분노
부정의 단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그 단계는 분노와 광기, 원한의 단계로 넘어간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질문은, ‘왜 하필이면 나일까?’이다. 이러한 분노의 단계는 가족이나 병원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무척 힘든 시기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분노는 종종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통장 잔고가 떨어졌다. 내가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그래서 나를 이렇게 가난하게 만든 원인을 생각했다. 등록금을 이렇게 비싸게 받는 이유, 월세가 이렇게 비싼 이유를 찾고 분노했다. 촛불도 들고 대자보도 썼다. 내 목소리를 내면 세상이 조금 바뀌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3단계: 협상
첫 단계에서 슬픈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 신에게 분노했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을 조금 미루고 싶은 일종의 협상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말하자면 ‘만약 하느님이 나를 데려가기로 하셨다면, 그리고 분노에 찬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좀 더 공손하게 부탁해보면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기이다. 사실 환자들의 ‘협상’이라는 것은 죽음을 미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결국 난 다른 방법을 택했다.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것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타협이 필요하다 느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선에 참여하고 지방선거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투표했다. 반값등록금이니 청년 실업이니 최저임금이니 하는 것들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모든 대통령 후보들이 반값등록금, 청년 실업 공약을 내걸었다.
4단계: 우울
시한부 환자가 더 이상 자신의 병을 부정할 수 없을 때, 주위에서 수술이나 입원을 강요하고 명확한 신체적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환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상황을 웃어넘길 수가 없다. 무감각, 냉정, 분노, 흥분 같은 것들은 곧바로 엄청난 상실감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을 잃으면서도 슬퍼하고 있지만 시한부 환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이들을 잃어야만 한다.
이전 대통령께서는 반값 등록금을 해준다 해놓곤 '반값이 아니라 부담을 반으로 하겠다' 따위의 드립을 날렸다. 이번 대통령은? 대선 이후 언급조차 없다. 혹시 까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울하다. 청년실업률은 9%로 12년만에 최대치란다. 되려 이전 대통령이 그리워 지려고 한다. 희망이 없다. 언론에서는 자꾸 3포 세대니 5포 세대니 한다. 자꾸 포기할 수밖에 없나 싶다. 돈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 하겠다.
5단계: 수용
죽음을 앞둔 환자는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변에 대한 관심도 차츰 잃어간다.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바깥세상의 소식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환자 주변의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난 후, 이제 영원히 눈을 감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라는 것을 환자가 알고 있을 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음을 환자에게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혼자 남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내 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욕망도 욕구도 없다고 인정했다. 거세했다고 생각해 버리기로 한 거다. 그 결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이런 걸 달관이라고 하나? 모든 욕망을 거세하고 아예 처음부터 나는 욕망이란게 없었다고 생각하기로 한거다. 한 달에 100만 원 벌어도 나는 욕심이 없으니 적게 쓰면 된다. 공짜 게임하고 영화도 싸게 다운받으면 되니까.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
머, 이렇다.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열분덜도 곧 5단계를 거쳐 달관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다른 선택지는 없으니까.
<조선일보> '달관 세대' 시리즈 (링크)
얼마 전에 나 같은 청년들을 ‘달관 세대’라 부르려는 사람들을 봤다. 우선 월수입 60만 원과 260만 원을 한 세대로 묶어 이해하려는 호방함에 박수를 보낸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달관 세대라는 단어 말고 ‘거세 세대’로 했으면 좋겠다. 어쭙잖게 달관이 뭐냐. 달고나도 아니고. 일본 사토리 세대의 '사토리(さとり·깨달음)'를 대강 번역해서 가져다 붙인 느낌도 있고.
'달관'이라 하면 여러 선택지 중 본인이 선택해서 그렇게 산다는 것 같은 뉘앙스다. 이건 마치 거세 시켜놓고는
"어라? 성욕이 없네? 욕구가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일본은 알바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되니까 정규직 안하고 적당히 벌면서 만족해 사는 건데, 우리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디 알바만 해서 먹고 살 수 있나. 먹고 살기는 커녕 아무 것도 못한다.
'적게 벌어서 조금 쓰고 즐기며 산다'
는 자세는 참 좋은데, 돈을 벌 수나 있어야 말이지. 조금 번다고 해도, 100만 원으로 만족한다고? 이건 욕심을 줄이는 수준이 아니고 거세지. 그거 벌어서 결혼할 수 있나? 못한다. 당연히 육아는 꿈도 못꾼다. 요즘 유치원 비가 30~40만원이고 많게는 70만 원이다. 그 돈으로는 주거나 연애, 결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못하면 그게 욕심이 없는거냐. 그건 그냥 거세다.
아이고, 살짝쿵 흥분할 뻔 했네. 잊을 뻔 했다. 나는 거세 되었다. 그래서 욕심도 욕망도 없다.
행복하다. 행복에 겨워 죽겠다. 끝.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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