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3. 05. 목요일
벨테브레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절친이라는 점과 42세의 젊은 나이(한국의 주일대사는 78세다)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상원의원 시절 오바마의 외교보좌관이었던 그는 이렇다 할 인연도 없어 보이는 한국에 자원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 생활을 즐기며, 주미대사의 일을 해왔던 것 같다.
개인 트위터(@mwlippert)와 '리퍼트 가족의 한국 이야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그는, 한국어로 된 포스팅을 하며, 한국인들과 직접 소통해왔다. 특히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거나 애견 '그릭스비'와 함께 산책을 하는 등의 일상을 거리낌 없이 공개하며, 어느 나라의 권위주의 돋는 고위 공직자들과 구별되는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지난 1월, 첫 아들을 얻고 '제임스 윌리엄 세준 리퍼트'라는 재미 교포스러운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가정적인 모습은 물론,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한 바 있다. 이처럼 리퍼트 대사는 여태까지의 주한 미국대사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사람이다.
정부 수립 때부터 미국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대한민국의 입장을 돌이켜보면, 주한 미국대사라는 지위는 신의 대리인 내지 식민지에 파견하는 총독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초대 주미대사로 6.25를 함께 겪었던 무초, 4.19 당시 이승만의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맥카나기,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측의 친위 쿠데타 기도를 무력화시킨 것으로 알려진 릴리와 같이 한국 현대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대사들도 있으나, 그린이나 글라이스틴처럼 쿠데타를 사실상 추인해 주었다고 비난받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외교사절로서 주재국 내정에 개입하는 건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전시는 물론 평시 작전통제권까지 갖고 있던 미국 정부가 5.18 당시 보여준 모호한 입장은,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에게 독재자 전두환과 미 제국주의자들을 패키지로 엮어 비난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대사관이나 미국문화원에 점거·방화·투석 등 사건이 빈발했고, 그 범인 중 한 사람이었던 정청래는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미국 비자 발급을 거절당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에 반해 박정희 정권 당시 주일공사로 근무하며, 김대중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재권 씨의 아들, 성 김은 주한 미국대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렇듯 지금 이 순간에도 돌고 도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가운데서, 주한 미국대사가 나름대로 비중 있는 존재임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며 적극적인 소통을 실천해왔던 마크 리퍼트 대사에 대한 공격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훗날 이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한 대사로 평가될지, 부정적 영향으로 비난 받을 대사로 평가될지 예상을 해보면 후자에 가까운 인물이 되리라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기본적으로 미국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미국 정부의 관료이긴 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테러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거기다 미국은 물론 한국의 여론마저 돌아선다. 지난 날 반미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에도, 미국 정부에 대한 항의 퍼포먼스는 미국대사관이나 미국문화원 같은 시설에 집중되었을 뿐 주한 미국대사 같은 특정인에 대한 테러 형태로 이루어졌던 바는 없었다. 소위 '반미'의 문제는 개인적 감정을 넘어 근본적으로 국가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문제이기에, 개개인에 대한 테러로 달성할 수 없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특히 범행동기로 제시된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은 한미합동훈련이므로, 한국 정부가 안 하겠다고 하면 할 수 없는훈련이다. 즉, 정말로 훈련을 원치 않는다면, 한국의 여론을 움직여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 대사에 대한 테러를 통해 미국 여론이나 미국 정부의 입장을 바꿔보겠다는 게 더 미국 중심적이고 사대주의적 발상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전쟁훈련 반대'라는 평화적인 목표를, 비무장 외교사절에 대한 테러라는 폭력을 통해 달성하려는 모습은 공격자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반증해 준다.
그런 가운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대통령이 있다. 현재 아랍에미리트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현지 시각으로 새벽 3시 쯤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잠이 덜 깼는지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는 논평을 남겨주셨다. 그렇다. 60년을 자랑하는 굳건한 한미동맹을 공격한 것은 핵무기가 실린 대포동 미사일이 아니라 55세 남성의 식칼 한 자루였던 것이다. 조만간 배후세력을 찾아 응징하려는 강도 높은 수사가 이루어질 것이며, BB탄 총을 개조해 내란을 일으키려던 이석기 일당 못지않은 대규모 인원이 검거될지도 모른다. 심지어 피의자는 우리마'당'이라는 곳의 대표를 맡고 있다지 않은가.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당'이란 이름을 쓸 수 있는 것 또한 이 나라엔 '새누리당' 뿐이다. 이를 무시했던 통합진보당이 해산된 이상 정의당, 노동당 등의 정당들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처럼 이름을 바꿔 '당'이란 글자를 헌납하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다.
'당'이라는 이름을 쓰는 단체에 억하심정을 가진 게 아니고서야 어찌 조사도 해보지 않고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 단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인임이 명백한 피의자가 한미동맹을 공격하기 위해 미국대사에게 칼부림을 했다고 대통령이란 자가 발표를 하면 미국 정부나 시민들이 뭐라고 생각을 하겠나. 한미동맹을 깨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진상조사도 하기 전에 단정적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게 정몽주니어가 '칼빵'이라고 표현했던 2006년 5월 20일의 피습사건 탓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범인 역시 자유 투사를 자처했지만 결국 정치적인 배경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밝혀졌었다.
이번 사건 역시 여러 정황상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 같은 거창한 목표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확신으로 인해 충동적으로 일어난 해프닝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와 애완견 Grigsby
다행히 리퍼트 대사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빠른 쾌유를 빌며 사건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때로 충돌하고 얼굴 붉히며 비판할 일도 없지 않겠지만, 직무에 충실한 공직자이자 주재국을 사랑한 외교관으로 일해온 리퍼트 대사는 한국과 한국인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를 위해서라도 이번 피습사건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삼가야 할 것이다.
벨테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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