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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본 이너뷰는 약 1년 전,
은수미 의원을 집중 조명한 기획 인터뷰다.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인 지금,
예정된 메인 기사를 모두 취소하고
밤새 고생한 그녀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본지가 곧 다시 찾아갈 테니 은수미 의원은 기둘리시라.

졸라 고생 많았다.







초선 비례, 거기다가 여성 의원. 국회에서는 정말 아무 힘도 없는 말단 구성원인 그런 사람들이다. 초선이라는 것에서 이미 절반, 비례에서 나머지 절반, 여성이라는 점에서 또 절반. 권력이라고는 남은 것 하나 없는 직책이다.


그런 직책에도 불구하고, 만만찮게 수시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유명한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 받고 강릉 교도소에서 옥살이를 6년 가량 했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가 정규 과정을 통과해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딴 뒤 노동 전문가로 재탄생 해서 의회에 진출한 은수미 의원이 바로 그 사람이다.


사실 이 이너뷰는 꽤 오래전에 시행된 것이었다. 그간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기사 자체를 정리할 시간도 부족했었다는 핑계가 있긴 하다.


이제라도 만나 보자.


참고로 은수미 의원은 통진당 해산과 헌법재판소 권한이 아닌 의원직 박탈이라는 초유의 결정으로 갑작스레 실시되는 보궐선거에서 성남 중원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내부 경선을 앞두고 있는 중이다.


만남은 국회 내, 은수미 의원의 의원 사무실에서 있었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상투적인 호구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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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 은수미, 물 : 물뚝심송)



1. 상투적인 호구조사


물 : 진부하지만 출생과 가족 이야기부터 물어 보겠다. 먼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은 : 서울에서 태어난 셈이지만 정확하게는 배가 부르신 어머니께서 친정이신 정읍으로 내려가서 저를 낳으셨어요. 어려서부터 계속 서울에서 살았고. 신림초, 신림여중, 미림여고, 서울대까지 나왔으니, 20년 이상을 반경 몇 킬로미터 이내에서 살아온 셈이죠.


신림 1동에서만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강을 혼자서 건너 본 적도 겨우 고교때에요.


물 : 고교 때에는 뭐하러 한강을 도하하셨는가?


은 : 고교 때 미팅을 했어요. 원래 저는 그런 거 안하는 얌전한 모범생이었지만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사고를 쳤죠. 덕수궁에 가느라 강을 건넜고, 세명이 가서 이미 대학입시를 끝낸 남학생 셋과 만나 각각 짝을 짓는 형식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들이 저희 커플만 남겨놓고 이미 사라진 거에요. 제가 좀 어리숙하거든요.


그래서 그 남학생하고 걸어서 덕수궁에서 용산을 지나 한강을 다시 건너 왔던 기억이 납니다.


물 : 손이라도 잡아 보셨는가?


은 : 당연히 손도 못 잡았죠. 그런 정도가 매우 큰 사건일 정도로 아주 평이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학교와 도서관을 왕복하면서..


물 : 아무리 옛날 일이라 해도 매우 측은하다. 부모님 얘기를 좀 해 달라.


은 : 저희 아버님은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해병대 장교 생활을 하셨고,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보급장교 출신으로 수입이 좋으셨다고 합니다. 어려서 집에 티비,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도 많았고 부유한 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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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아버지, 큰오빠와 함께


물 : 그 시절에 그 정도면 엄청난 부자 아닌가?


은 : 당시에는 요즘과 달라 같은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생활 수준의 격차가 심한 편이었어요. 저는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집에서 도시락을 싸달라고 해서 친구와 자연스럽게 나눠 먹기도 했던 기억이 나요. 햄과 계란말이, 땅콩 잼 등 반찬을 자주 싸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거 싸가면 반에서 난리가 났었죠.


위로 오빠, 아래로 나이 차이가 많은 여동생과 함께 꽤 행복하게 살았고, 부족함을 느끼진 못했어요.


물 : 친구들의 가난을 겪어 보지는 못했는가?


은 : 어려서 기억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장난으로 밀쳐서 넘어지며 벽에 부딪혔는데, 벽이 무너지더라구요. 무지하게 놀랐죠. 판자집이었던 거에요. 저는 사실 그런 생활 수준의 격차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중학 시절에는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집을 방문 했더니 흙벽이 있는 집에 세를 살고 있더군요. 매우 충격을 받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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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제가 정치적인 인식을 하게 된 첫번째 이유가 바로 가난한 친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렇게 격차가 큰가? 똑같은 사람들인데... 하는 질문이었죠.


공부도 잘하고 나와 똑같은 친구들이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 시절의 저에게는 풀길 없는 숙제였어요. 어려서 저는 구두를 신고 살았어요. 그 당시 이런 아이가 구두를 신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죠. 친구들은 모두 고무신이나 얇은 운동화였는데요.


이런 문제를 부모님께 여쭤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고, 그런 생각을 깊게 하는 것도 원치 않으셨죠.


물 : 그런 것은 부모님께 배우기 힘들다. 책을 읽으면 되지 않는가?


은 :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정도. 금서도 있었는데 보봐리 부인, 데카메론 등이었어요. 어머님은 절대로 읽으면 안되는 책이라고 표시를 해 놓으셨고 당연하지만 저는 몰래,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웃음)


하지만 머리 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았던 문제는 바로 빈부의 격차 문제였었죠.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물 : 종교는?


은 : 3대째 성공회 집안이에요. 지금도 성공회 신자고,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등 종교 생활을 많이 했었어요. 피아노도 치고 하니 귀엽다고 당시 오빠들이 이런 저런 모임에 데리고 다녀줬는데, 그 때 이미 그 오빠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독재는 안된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많이 들었던 같아요.


이런 것들이 나를 정치로 이끈 두번째 경험이었던 것 같네요.


물 : 세번째 이유도 있는가?


은 : 세번째 이유는 아버님.


아버님은 해병 장교였으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랑했던 분이셨어요. 71년의 그 유명한 백만이 모였다는 연설 현장에 아버님이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무척 화를 내셨죠. 당시 일곱살 정도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를 데려가신 것이니 화를 내실만도 하지만 사실 제 기억에는 사람이 무지 많아서 힘들어 죽을 뻔했던 기억밖에 안 나요.


결국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아버님은 불이익을 당했고, 결국 별을 달지 못하고 예편을 하시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지역 사무소 개소식 하며 아버님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살짝 보였는데, 이런 거에요. 부모의 입장에서는 제가 얼마나 귀여운 딸이었겠어요. 공부도 잘하고 말썽도 전혀 안 부리던 예쁘고 얌전한 딸이 대학 들어가자 마자 집을 나가고, 제적 당하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더니, 구속되고, 고문 당하고, 대수술을 해서 죽네 사네 하더니, 그리고 나서 이혼까지 하고.. 아버님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 이혼을 했어요.


스무살 이후 부터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셈이죠. 대학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스스로가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인생이 바뀌었던 거에요.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께 여쭤 본 적이 있어요. 아버님도 DJ를 사랑하셨고, 그만큼 뭔가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가는 성격이신데, 후회하지 않으시냐고.


그랬더니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살아간 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라고 답을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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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DJ가 대통령이 될 때를 기억하는데요. 아버님은 당시 몸도 아프셨는데 97년도 대선 때 그 아프신 몸을 이끌고 아예 고향에 내려가서 차로 산골 산골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셨었어요. 그 정도로 정말로 DJ를 사랑하시던 분이셨던 거죠.


노무현은 싫어하셨어요. 그 때문에 나중에 이명박을 찍으셨을 정도. 실망하신 거겠죠. 반대로 어머님은 DJ 보다는 노무현을 사랑하셨던 분. 그렇게 저희 가족이 좀 복잡합니다.


물 : 집안에서 정치적으로 그렇게 갈라지면 싸움이 날 텐데..


은 : 87년도에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버님께서 물어보신 적이 있었어요. 이번 한 번 정도는 같이 가면 안되겠냐며 DJ를 찍어 달라고 하시더군요. (웃음)


이런 이유들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아요.


물 : 그렇게 얌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정치인이 되다니, 주변에서 신기해 할 것 같다.


은 : “너는 왜 안 변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대학시절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 주로 그 질문을 하죠.


어린 시절, 초중고 시절 친구들은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나면 놀라기는 해요. 그 얌전하고 공부 잘하던 착한 여자아이가 맨날 노동 문제 얘기하고 알바생 최저임금 얘기하고 무엇보다도 정치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죠.


이건 사실상 예견된 일이었을 거에요.


제일 중요한 것은 어렸던 시절에 느꼈던 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또 운명은 성격이라고 생각해요. 아버님께 물려 받은 그 성격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낸 것이겠죠.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흔한 얘기들 뿐이다.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자라다가 좋은 학교 들어 가서 학생 운동 하다가 정치를 하게 되는 것. 우리 시대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게 전부라면 이 인터뷰는 재미없어질 것 같다.




2. 대학 시절


물 : 이제 시간 순으로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은 : 대학 들어가서는 무척 힘들었어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고민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그냥 너무나 생소한 문화적 차이.


자라면서 만났던 남자들은 모두 매우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거든요. 오빠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여동생이기도 했지만 길을 갈 때 차가 다니는 쪽 반대로 걷게 하며 보호해 주는 등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런 줄 알았고 그래야만 하는 걸로 알았어요.


하지만 막상 학교에 가니 맨 시커먼 남자들 뿐인데, 이건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어요. 한번은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는데 뒤를 돌아보니 맨 야수 같은 남학생들뿐. 막 도망가고 싶었죠.


물 : 원래 당시 서울대에서도 여학생 비율이 매우 적었으니 이해는 간다.


은 : 그 때 제가 날씨가 추워서 어머님께 물려 받은 긴 가죽부츠를 신고 다녔는데, 선배들이 음대 미대 갈 아이가 사회대 왔다고, 분위기 망친다고 욕을 하곤 했었죠. 음대 미대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기생 남학생들이 하는 농담조차 이해를 못했으니 말 다했죠. 그들로서는 친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지만, 그들이 나를 툭툭 건드리면 막 눈물이 나올 정도였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상이다. 그 시절, 운동권이건 뭐건 남학생들은 여학생이 보이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 면 따귀를 때려도 아무도 안 말리던 시절이었다. 부자집 따님께서 최초로 온실을 벗어나 사회에 나가 겪게 되는 문화충격. 과보호의 폐해일 수도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버님은 당시 반공연맹 같은 단체에 직위까지 가지셨었는데, 사실 그건 저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죠. 그게 알려지면서 학교에선 아무도 저에게 함께 운동을 하기를 권하지도 않았어요. 다른 여학생들은 모두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한테는 아무도 접근하지도 않았었죠.


물 : 그러니까 학교의 동기생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지는 못한 것 같다.

 

은 : 그렇죠. 한번은 학교에서 5월에 데모를 하게 되는데, 나름대로 지식인이 되겠다고 마음 먹고 온 상태였으니 이것은 부당하고, 학교는 자유로워야 하고 정의로워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참여했었어요. 하지만, 최루탄 한 방이 터지니 백미터 달리기 하듯이 총알같이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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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어요. 정의, 자유 이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죠.


또 한번의 경험이 있는데 좀 슬픈 얘기에요. 도서관에서 선배가 투신을 한 적이 있었죠.



1983년 11월 8일 당시 도시공학과 4학년 황정하 학생은 도서관에서 투신을 한다. 이후 신림사거리에 있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8일 후 사망하게 된다.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어요.


물 : 그건 좀 무서운 얘기다.


은 : 그렇죠. 거기다가 사람이 떨어졌으면 응급조치라도 해야 했지만 저는 역시나 전경이 달려들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던 거에요. 그 때의 심정은 차마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물 : 스스로가 상황을 회피한 걸로 생각한 건가?


은 : 내 자신이 너무나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물 : 보통 그렇게 시작하긴 하지만, 너무 충격적인 경험을 하신 것 같다.


은 : 바로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저항을 해야 한다는 고민. 아무도 제가 학생운동을 할 사람이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저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더해 또 다른 사건이 터지죠. 당시 여학생 강간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마 인문대 학장으로 기억되는 분이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 운운하는 말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천박한 표현이었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고민에 빠져 있으니 집에서는 유학을 권했어요. 부모님은 제 성격을 알았고, 한 번 꽂히면 끝까지 간다는 것도 알았고,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고민을 하고 있자 그런 제안을 하신 것이겠죠.


물론 유학 갈 생각은 하지 않았고 이제 급기야 선배들을 따라 다니면서 저 좀 끼워 달라고 하소연을 할 정도가 되었죠.


물 : 그러나 문화적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았나.


은 : 그래서 노력을 했죠. 적응을 하려고 열심히 따라 다녔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도 했고 스스로 어울리려고 노력을 했는데 벽에 부딪힌 것은 오히려 유물론 그 자체였어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저런 공부를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했는데 받아 들여지지가 않았죠.


물 : 원래 그 동네에서는 질문이 잘 안 받아들여지는데.. (웃음)


은 : 그래서 어느 순간 질문을 포기하게 된 것 같아요.


어느 해인가 4.19 때 행사에 참여하려고 가다가 선배와 크게 싸운 적이 있었어요. 심하게 싸우다가 막 토하고 그럴 정도였는데 그 때 이후로 질문을 잠시 묻어 둬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에 선배들이 백태웅을 소개해 준 것 같아요. 그 이후 백태웅씨와 친구가 되는데 84년도에요. 백태웅이 4학년이고 제가 3학년일 때 백태웅을 학도호국단 단장, 저를 학도호국단 여학생부장으로 올리게 되고, 학자추라고 총학생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죠.

 


당시는 정부가 만들어 놓은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를 대신하고 있었고, 이에 각 학교별로 총학생회를 재건하 려는 시도가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군사문화의 잔재인 학도호국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각 학교에는 총학생회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운동권을 학도호국단에 투입시켰고, 저는 여학생회를 만들라는 임무를 띠게 된 것이에요.


그 결과 당시 학교에 상주하던 안기부 직원들이 제 뒷조사를 시작하는데 뜻밖에 제가 성적도 무지하게 좋고 아무런 과거 이력이 없었던 것이죠.


물 : 안기부 직원들이 당황했을 것 같다.


은 : 제가 데모를 나가면 꼭 여고 뱃지를 달고 나갔었거든요. 대학생이 아닌 걸로 위장을 한거죠.


물 : 지금 어리게 보이는 외모를 자랑 하시는 건가? (웃음)


은 : 뭐 그럴 수도. 그러고 나가면 전경들이 여고생들이 왜 여길 오냐고 야단치며 빨리 집에 가라고만 하니 얼마나 편했겠냐는 거죠. 저는 그렇게 빨리 가라는 얘기만 듣고, 얌전하게 “네~” 이러면서 다시 돌아오곤 했었어요.


그런 정도였으니 안기부 직원들도 저를 만만하게 봤던 것 같아요. 무지하게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어떻게 잘 설득해서 이용하려던 생각이었을 수도 있죠.


그러다가 어떤 시점에 예상에 없던 시위를 앞에서 선동하고 지휘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안기부 쪽에서 출신고교에도 연락을 하고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하고 공작을 시도한 거에요.


제가 열 받아서 그 얘기를 학생들에게 터트리자, 학생들이 열광적으로 흥분해서 꽤 규모가 있는 시위가 벌어진 적도 있어요.



안기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속았다고 느낄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쪽에서 보기에는 당연히 그렇게 보였지 만 사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 : 안기부 직원들을 속이신 건가?


은 : 저는 속인 적이 없어요. 내가 언제 스스로 얌전하다고 그랬나?


물 : 그 때 자신의 내부에 있던 선동가적인 기질을 발견하셨나 보다.


은 : 사실 내가 이렇게 소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도 의원 생활 하면서 마이크를 많이 잡는데 어느 정도냐면 365일 중에 현장을 320번을 가는 정도에요. 만 명 앞에서, 이 만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기도 하는데, 겁은 안 나죠.


아마 학생시절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목소리도 작고 체구도 작아서 남들처럼 당당하거나 우렁찬 연설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에 겁은 안나요. 물론 더 좋아하는 것은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는 것이죠.



이렇게 자기 안의 소질을 발견한 여학생은 당시 대다수 운동권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노동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전형적인 코스라고 할 수 있겠다.




3.노동 운동 시기


물 : 노동 운동은 어디서 시작하셨는가?


은 : 구로공단 봉제공장. 당시 사용했던 이름은 봉희에요. 그 때 유행한 봉봉 오렌지 쥬스의 이름을 따서 봉봉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었죠. 젓살도 아직 안 빠진 정도로 어리게 보여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아요.



봉봉 오렌지 쥬스. 이거 정말 히트작이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린 추억의 상품이다.



현장에서 1년 6개월 정도 있었는데..


물 : 성과는 있었는가?


은 : 성과는 무슨, 결국 구속이나 되고..



이 대목에서 살짝 놀랐다. 보통 정치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그 때 무슨 조직을 결 성하고 무슨 사건을 일으키고 이런 저런 성과를 올렸다고 자랑을 하기 마련인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성과는 무슨~ 하는 부분에서의 목소리 톤은 바로 지금 당신이 상상하는 그 톤. 특이했다.



제가 언제나 적응에 좀 문제가 있어요. 가리봉에 가서 자취를 하면서, 영등포 산선에서 미싱을 하러 간 사람들에게 미싱 교육을 시켜줘요.



영등포 산선은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준말. 당시 노동운동사를 논하기 위해서는 산업선교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는 너무 길기에 별도의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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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조금 배워서 가긴 하는데 미싱의 ‘ㅁ’자도 모르는 상태였던 거죠. 그 동네가 원래 공장에 시다로 들어가면 절대 미싱사를 안 시켜 줍니다. 그래서 메뚜기를 하게 되는데, 어떤 공장에서 시다 하던 아이들이 다른 공장에서는 미싱사로 바로 들어가는 거죠. 저도 나이 속이고 미싱사로 들어갔는데, 처음에 미싱을 한 번 시켜 보더니 바로 하는 욕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이런 개씨부랄년..”


공장에서는 바로 알아 본거죠. 나이도 어리고 생긴 것도 어리고 미싱도 시원 찮으니까 다른 공장에서 시다 조금 하다가 미싱사입네 하고 들어온 걸로 알아본 거에요.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오거나 그런 친구들이 대부분인데 평생 그런 욕을 들어온 처지이지만 저는 평생 처음 그런 욕을 들어봤어요.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물 : 원래 처음 들어본 욕은 기억에 남기 마련.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심한 욕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신 것 같다.


은 : 그러면서 하루 종일 내가 여기에서 뭐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즈음에 우리 집이 강남으로 이사를 갔는데, 삼층집이었어요. 아무리 집을 나왔어도 부모님께 미안하니까 두어달에 한 번은 집에 가거든요. 그게 너무 생소한 거에요. 그 동네에서 다녀보면 사람들이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는 거죠.


왜 이 동네는 이렇게 다를까 하는 겁니다. 그런 생소함에 적응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어요.


거기다가 학교에서는 항상 노동자는 정의롭고 항상 옳고 그런 것처럼 얘기들을 해요. 너무 모르는 얘기죠. 정의는 개뿔..



이 부분, 운동권 학생들이 사회를 접하게 되면서 겪는 중요한 충격이다. 특히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노동 자는 정의의 상징인 것처럼 묘사를 하지만 그걸 듣고 배운 사람들이 겪는 충격은 상상외로 크다. 노동자는 결코 정의의 화신 따위는 아니다. 다만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생활인들일 뿐이다. 그들의 생활환경과 그 들의 용어는 거칠고 투박하다. 노동의 정의는 그들의 말투나 습관, 외모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장에서는 항상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오시'라고 했던 것 같은데 불량을 내면 머리채 잡고 싸우고, 불량을 니가 냈냐, 내가 냈냐 하면서 싸웁니다. 그걸 또 회사가 이용을 해요. 누구는 급여를 더 주고, 누구는 급여를 덜 주고 하죠.


하루에 열두시간 이상 일을 하면서도 급여를 서로 모르게 합니다. 그렇게 차별을 해요. 제 시다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온 아이인데 무슨 일인지 무단 결근을 했어요. 그러고 다음날 나오게 되면 그냥 마구 밟아 버립니다.


물 : 때린다는 얘기인가?


은 : 그냥 때리는 정도가 아니에요. 실제로 구두발로 마구 밟아 버립니다. 그걸 나름대로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온 저도 그냥 옆에서 바라 볼 수 밖에 없어요. 말릴 힘이 없죠. 그러고 나서 또 일을 해야 해요. 저도 해야 되고 맞은 아이도 퉁퉁 부어서 또 일을 해야 됩니다. 그저 빨간약이나 좀 발라주는 거죠. 그 장시간 노동을 그렇게 맞아가며 해야 되는 거죠.


물 : 드디어 민중들 삶의 현장을 목격하시는 건가?


은 : 미싱사 선배들은 얘길 합니다. A급 미싱사가 되려면 손톱이 세 번 빠져야 된다고. 저도 한 번 겪어 봤는데 기계식 미싱에 드르륵 하면서 바늘이 손톱을 관통한거죠. 그 때 반장이 뛰어 옵니다. 물론 그 친구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게 당연한 거죠.


반장이 오더니 하는 말이..



“야, 이 멍청아, 옷감에 피 묻잖아..”



매우 순화시킨 표현일 것이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러면서도 그냥 손가락을 싸매고 빨간약 바르고 또 일을 하는 거에요.


폭력에 익숙해 진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참는 게 아니라 그냥 저항할 생각 자체를 못하는 거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거고, 적응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회사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사람들은 참 무력하구나..


하지만 또 다른 면은 숨겨져 있어요.


물 : 어떤 면인가?


은 :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 안다는 거죠.


제가 왜 걸렸냐면, 유인물 뿌리다 걸린 거에요. 그렇게 몇몇이 모여서 얘길 하는데 이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합니다. 우리도 학출 하나면 있으면 좋겠다..



학출은 대학생 출신을 말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전태일 이후로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싸움에 운 동권 학생들이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당시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유인물을 뿌리면 바로 걷어 가고 다들 무관심 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누군가가 나섰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그러다가 작업복 입은 채로 바로 구속이 되었는데, 공장에는 소문이 돌았어요. 봉봉이는 특급 빨갱이라서 평생을 감옥에서 못 나올거라는 얘기죠. 이봉희는 가명이고 본명이 은수미고, 무슨 간첩 잡은 것처럼 회사에서 소문을 냈어요.


물 : 함께 어울렸던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경고장의 역할도..


은 : 그렇죠. 그런데 제가 6개월만에 덜렁 나와가지고 공장엘 갔어요.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죠. 인사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거에요. 그렇게 그냥 갔어요. 출근 투쟁 뭐 이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잡혀 갔으니까 그냥 인사하려고.


당연히 못 들어가게 하죠. 경비아저씨들은 기겁을 하고 난리가 나죠.


그 때가 바로 점심시간이어서 그랬는지 그 광경을 사람들이 본거죠. 그 중에 한 명이 눈치 빠르게 살짝 나와서 얘길 해 주는 거죠. 너 평생 못 나온다며, 못 나올 줄 알았는데 나왔네, 이러는 거죠.


거기다가 놀라운 것은 그래도 “네 덕분에 우리가 좋아졌어.”라는 거에요. 공장은 전동 미싱이 돌아가고 무척 덥거든요. 그런데 여름에 선풍기도 없어요. 열두시간 작업하고 나와 작업복을 벗어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죠. 그런데 선풍기를 달아 줬다는 거에요.


거기다가 아홉 시에 작업 시작인데 여덟 시부터 일을 시켰거든요. 한 시간 일당을 떼어 먹는 거죠. 유인물의 요구사항 중에 그게 있었어요. 일당을 제대로 달라.


겨울에는 너무 추운데 난로가 없어서 다리미에 손을 덥히고 했었는데, 그것도 요구했죠. 난로 놔달라.


회사가 그걸 해 줬다는 거에요. 단 한 번 유인물 뿌린 걸로. 이런 게 성과라면 성과죠.


물 : 동료들이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은 : 그렇죠. 저는 그 때 이미 동료들을 사랑하게 된 거에요. 사람을 사랑하게 된거죠.


저는 어려서부터 사람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어려서 저 친구는 왜 저렇게 가난할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 이유는 제가 그 친구를 좋아했기 때문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들어가서도 그런 경험을 한 거에요. 사회보다 먼저 그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곤 해요.


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작은 이익을 위해 서로 머리채 잡고 싸우고, 저항할 줄 모르고 폭력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 알고 있다는 것, 그걸 깨닫게 된 거에요.


물 : 확실히 새로운 경험인 것 같기는 하다. 잡혀 가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은 : 잡혀가서도 제가 참 어리고 귀엽게 생겨서 검사가 저를 쉽게 본 것 같아요. 바로 반성문 쓰고 나갈 거라고 생각을 하더라구요. 그 때는 잡혀가면 일단 다 반성문이거든요. 반성문을 쓰면 풀어준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 반성문을 끝까지 안 썼어요. 그러다 보니 별 것도 아닌 일인데도 결국 집행유예까지 갔는데 그건 좀 희귀한 일이었거든요. 보통은 반성문 쓰고 바로 나오니까요.


물 : 반성문을 안 쓴 이유는?


은 : 제가 왜 반성문을 안 썼을까요? 공장의 친구들이 떠오른 거에요. 저는 뭐 공장에 가서 노동자를 조직하고 뭐 이러려고 한 것도 아니에요. 그들과 함께, 그들과 같이 뭔가를 좀 바꿔보자는 생각이 있었고, 그렇게 옳은 일을 하자고 친구들과 약속을 했는데, 내가 반성문을 쓰면 그 약속을 깨는 것 아닌가, 그 친구들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럴 순 없었죠.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말을 한 것뿐인데 내가 왜 반성문을 써야 하는가? 결국 안 썼어요.


그렇게 6개월간 구속수감 되어 옥살이를 하면서 재판을 받고 결국 집행유예로 나온 거죠.



은수미 의원의 첫번째 옥살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저 더우니 선풍기 좀 놔달라, 일한 시간 만큼 시급을 달라, 추우니 난로를 놔달라 하는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이 날 때까지 장장 6개월을 감옥 에서 보내게 된다. 장발장이 프랑스에만 있을까?




4. 감옥살이의 추억


물 : 감옥에서는 어떻게 살만 하셨는가?


은 : 그 시절에 감옥생활이 또 기억이 많이 납니다


영등포 구치소에 있었는데, 85년도니까 시절이 참 흉흉했어요. 방이 없을 정도로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왔었죠. 그런데 거기서도 제가 어리고 귀엽게 생겨서 독방에 안 넣고 신입방에 넣어주고 나서, 나갈 때까지 계속 신입방에만 있었습니다. 미결수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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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거기 있던 아줌마들이 저를 ‘신입방 이쁜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6개월 내내 있으면서 화장실 아니 변기 청소 같은 거 다 하고 그러면서 지냈죠. 그 때 제가 집시법 위반이었었는데 거기서는 우리나라에도 짚시가 있냐고 깜짝 놀라고 그러는 분위기였어요.



감옥 내에서도 썩개가 횡행한다고 착각하지 마시라. 당시 재소자들이 집시법이라는 말을 알았을 가능성은 실제로 별로 없다.



밤마다 한 두명씩 새로 들어오면, 우리는 몇 명이 들어올까, 무슨 죄목일까 뭐 이런 걸로 내기를 합니다. 내기를 하면 건빵이나 별 사탕을 걸고 하죠.


물 : 그건 군대와 상당히 비슷하다.


은 : 웃긴 일도 많습니다. 밤에 다 누워서 자고 있는데, 신입이 한 명 들어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일어나서 “통으로 들어왔어요?” 라고 물어보니까 신입이 “네” 하는 거에요. 우리는 다 건빵을 막 던지면서 “이겼다~”고 환호를 하고 그랬죠.


물 : 통은 뭔가?


은 : 통은 간통죄를 의미하죠. 당시에는 여성 죄수들 사이에 간통죄가 열이면 일곱 여덟명 될 정도로 많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확인을 해보니 간통이 아니었던 거에요. 사기죄로 들어왔는데..


물 : 그러면 거기서 또 사기를 친 건가?


은 : 그게 아니라, 신입이 들어오면 교도관이 교육을 시켜요. 방에 들어가면 무서운 사람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 인사도 잘하고 뭐 물어보면 바로 바로 답을 해야 되고, 뭐 이런 얘기를 하면서 겁을 많이 주거든요.


그래서 이 아주머니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들어왔는데, 이 분이 원래 시장에서 새우젓 장사를 하시던 분인 거에요. 그러다가 죄목이 거창해서 사기지, 새우젓 장사가 망해서 어찌어찌 하다가 돈을 못 갚고 사기죄로 들어오게 된 건데, 사람들이 통으로 들어왔냐고 물어 보니까 새우젓 통 얘기를 하는 줄 알고 그냥 얼결에 “네”라고 답을 한거죠.


그러면서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가 새우젓 통으로 먹고 살다가 들어왔는지를 바로 아는지, 진짜 점쟁이가 따로 없구나 싶어서 놀랐다는 거에요. 통이 그 통이 아니었던 거죠.


그런 해프닝도 겪으면서 신입방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다양한 아주머니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된거죠. 집시법이 뭔지도 알려 드리고, 아줌마들이 뿔난 도깨비인 줄 알았던 운동권 학생들이 알고 보니 신입방 이쁜이처럼 그냥 착한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많이들 저에게 동조를 해 주기도 하시고..


물 : 거기서도 뭔가 과업을 수행하셨는가?


은 : 제가 한 건 아니고..


감옥 내에서도 시위가 많이 벌어지거든요. 그런데 누구나 신입방은 겪고 가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방에 계시는 분들도 저를 아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가 뭘 벌이면, 그 신입방 이쁜이가 뭘 한다고? 걔 예쁘고 착하던데? 도와줘야지~ 뭐 이런 분위기가 되는 거에요.


그 때 5.3 인천 사태가 벌어집니다. 후배 학생들이 엄청 들어와서 단식 농성하고 난리가 났었죠. 이걸 이 아주머니들이 동조를 해 준 겁니다. 그 때 최초로 구치소 내에 최루탄이 난사되고 난리가 났는데, 하필 바로 그 날 저는 재판 받고 나온 거에요.


일만 벌여놓고 저는 나와버린 셈이에요.


물 : 그 때 같이 계신 분들이 살짝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은 : 그러지는 않으셨을 거에요. 재판 절차를 너무 잘 아시니까, 갑작스레 재판 받고 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래도 교도관에게 살짝 허락 받고 비둘기라도 띄우는데 저는 그것도 못했죠.


물 : 비둘기는 또 뭔가? 전문 용어가 너무 많이 나온다.


은 : 그건 메모 같은 걸 살짝 보내는, 연통을 하는 그런 걸 말하죠. 그런 것도 못하고 나와서 나중에 전해 듣고 말았어요.


그 때 나중에 전해 듣기로 바로 그 새우젓 통 아줌마가 주동자로 몰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랑 무척 친하게 지냈었는데, 너무 죄송했죠. 지금도 어딘가 계실지 모르겠는데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나고 그래요.


물 :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 얘기를 보실 수도 있는데..


은 : 그럴 수도 있겠죠.


사실 저는 노동환경에서 있었던 1년반과 구치소에 있었던 6개월의 경험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전혀 몰랐던 세계, 바닥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사람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배웠어요.


정말 열악한 상황이죠. 그런 밑바닥 상황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더럽고 잔인하게 행동하는지 모릅니다. 남자 교도소는 제가 안 가봤지만 거기서도 그렇다고 하죠. 성폭행 한 사람 들어오면 난리가 나죠. 싸움도 많이 나고.


거기다가 당시만 해도 교도소는 냉난방이 전혀 안되었잖아요. 요즘은 안 그렇겠지만. 강릉에 있을 때에는 언젠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던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저 자신의 몸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다 얼어 있더라구요. 또 여름에는 변기에서 구더기가 기어 올라와 바닥에 막 기어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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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도 서로 드잡이하고 한 사람을 나쁜 사람 만들어서 괴롭히고. 당시에는 내의 같은 것을 배급해 주는데, 그 수량이 부족해요. 그걸 얻기 위해 폭력과 위계가 난무합니다. 그걸 제가 이십대 초반의 눈으로 보게 된 거에요. 사람들이 이 작은 이권을 위해 얼마나 추해지는가를 본 겁니다.


물 : 밑바닥 인생을 제대로 경험하신 듯하다.


은 : 이런 일도 있어요. 당시 감옥에서는 커피가 자유의 다른 이름이에요. 평생 커피 한 잔도 안 마시던 사람도 감옥에 들어오면 커피를 그렇게 마시고 싶어합니다.


어떤 오십대 아주머니 한 분이 평생 노래 한 번 안 해본 분인데 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러다가 이십대 교도관이 어머니뻘 되는 이 아주머니에게 자기 앞에서 노래를 세 곡을 하면 커피를 한 잔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교도관도 장난이었죠. 그냥 노래 세곡 하면 커피를 준다고 한 것뿐인데, 이 아주머니가 진짜 똑바로 서서 노래를 하시더라구요. 천주교 신자였는지 성가를 두 곡 정도 하시고 나서 동요를 부르시더군요. 나비야, 나비야 하는 노래를 하는 겁니다.


옆에서 보는 제가 정말로 눈물이 나더라구요. 교도관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이게 너무 진지해지니까 놀란 거에요. 착한 교도관이었어요.


또, 감방에 이런 저런 물품 반입도 해 주고 청소도 해 주고 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에게 뇌물을 줍니다. 뇌물이라고 해 봐야 별 사탕 같은 거죠. 자신에게 그 작은 이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져다 달라고 청탁하는 거에요.


헝거 게임이라는 영화 있는데, 그렇게 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아주 소수만이 살아남는 게임을 시키잖아요. 그런 헝거게임이 거기서도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 게임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 : 보통 정치범들이 그런 것을 거부하지 않는가?


은 : 보통은 정치범들이 그런 걸 거부하는데, 전혀 정치범이 아닌 분들 중에서도 그런 추한 게임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을 가진 분들은 그런 룰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인격적으로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이건 아니다, 나는 가축이 아니다 라는 자긍심을 가진 경우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감옥에는 목욕실이나 세탁실이 별도로 없습니다. 문을 열어주면 조그만 세면대들이 있는 곳에 가서 3분 이내에 칫솔질, 세면, 머리감기까지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들 중에서 매일 팬티를 갈아입어야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팬티를 빨죠. 빨래 시간이라고 해야 일주일에 한 번 주는데 팬티를 일곱 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하니까 그 세면 시간에 팬티를 빠시는 겁니다.


그건 교도소 규칙상 불법이죠. 그러면 또 누군가 그걸 꼰지릅니다. 그런 곳이에요. 그렇게 되면 검방이 나오죠.


물 : 방을 검사하겠다?


은 : 네.


검방~ 하고 외치면서 교도관들이 방을 뒤집니다. 그러면 몰래 빨아서 널어둔 팬티가 나오죠. 그러면 그 주인을 찾아서 벌을 세웁니다. 오십대 육십대 되는 아주머니들을 그 팬티를 앞에 들고 복도에 서서 벌을 서게 합니다. 그나마 이삼십대라면 좀 나은데 오육십대 아주머니들을 그렇게 만드는 거에요.


그러다가 누군가 사십대 아주머니가 대신 나선 겁니다. 그 꼴을 못 보겠다는 거죠. 차라리 내가 그 벌을 서겠다면서 나서는 거에요. 그 사회에서는 그 진짜 별 거 아닌 일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생깁니다.


90%는 나쁜 꼴이에요. 거의 대부분이 추한 모습이죠. 그러나 10%의 감동적인 모습이 있다는 거에요. 사람이 사람을 보호하고 서로 아껴주고 위로하는 모습.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거죠. 어떤 조건을 만나면 그 10%가 확대되고 사회 전반으로 퍼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어요.


인간 사회가 정글이 되어 간다는 것, 인간의 본성이 나빠서일 수도 있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 속에 10% 밖에 없는 그 아름다운 내면이 발휘될 거라는 믿음이 생기죠. 누군가 손을 잡고 누군가가 나서서 그걸 확대시키자고 얘기하면, 인간 사회가 얼마든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긴 거에요. 그런 일을 정말 많이 봤습니다.



가장 밑바닥 인생들이 모이는 교도소, 구치소에서 오히려 인간에 대한 희망을 찾았다는 이야기. 어쩌면 지 나치게 낙관적인 성격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자신은 조만간 이런 곳을 나가 사회 상층부로 진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것 만도 아닌 것이, 대부분은 그런 광경을 보 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쪽일까?



나중에 강릉에 가서는 꽤 오래 감옥생활을 했는데요. 그 때도 커피가 문제였어요. 다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합니다. 저는 몸도 안 좋고 오래된 죄수고 하다 보니까, 교도관이 밖으로 불러 내서 커피도 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미안한 겁니다. 그래서 제안을 했어요.


교도소 내에서 필요한 김장을 우리가 모두 할 테니, 김장을 하고 나면 커피를 주고 하루에 한 번씩 더운 물로 목욕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였어요.


강릉도 원래 구치소와 교도소가 같이 있었는데 미결수가 많았어요. 미결수에게는 일을 시키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교도관들이 먹을 김장을 여자들에게 시키곤 했었죠. 그것도 문제긴 한데, 그래서 아예 본격적으로 그것 말고 재소자들이 먹을 김장까지 우리가 모두 해주겠다고 제안을 하고, 그 제안이 관철될 때까지는 해오던 교도관들 먹을 김장조차 안 하겠다고 나선 거죠.


아주머니들은 그나마 교도관들 먹을 김장이라도 계속 하고 싶어했어요. 왜냐면 그 시간 동안은 그래도 콧바람이라도 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나마도 못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조금만 참자, 이제 본격적으로 김장을 하게 되면 더 좋지 않냐고 설득을 한거죠. 커피도 먹을 수 있고..


이래 봬도 당시에는 복역 기간으로 따져봐도 최고 좌장급 이었으니까요.


결국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연대를 통한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성공한거죠. 그리고 전체 김장을 하게 되면서 서로 이야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함께 웃고 보듬고 그럴 수 있게 되었어요.


물 : 멋진 성과인 것 같다.


은 :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교도소 내부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자신들이 복역중인 죄수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시간.


물 : 마치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지붕 청소 후에 맥주 한 병 같은 순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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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 그런 거죠. 그런 순간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밖에서는 알기 힘들 거에요. 아주 드물기는 하죠.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이 모여 힘을 합치고 그런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이게 너무 행복하고 좋았어요. 인간에 대한 신뢰는 이런 순간에 생겨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되건 안되건 언제든지 자신이 처한 환경을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좋게 바꾸고자 노력하게 되어 먹은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바가 성공한다면 사람들은 행복해지지만, 그들이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더 큰 고통과 실망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그런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이 있다. 은수미는 그런 사람인 걸로 보인다.




5.신체적 고통


물 : 무척 심하게 아픈 적이 있으셨다고 하던데..


은 : 교도소에서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쓰러져서 대수술을 하고 죽네 사네 하다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갔었죠.


안기부에서 조사 받을 때, 보통은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것처럼 하루 한 번씩 의사가 와서 들여다 봅니다. 저는 두 번씩 와서 들여다 봤어요. 죽을 까봐.


안기부에서 걸린 병은 폐렴과 장염이었습니다. 전혀 먹지를 못하고 먹으면 바로 쏟아내고 하니까 그 쪽에서도 죽는 줄 알았을 겁니다. 물론 고문도 당했죠. 당시에는 전기고문은 없었지만 물고문은 당해봤고, 성고문에 대한 협박도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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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 일단 건강을 해쳤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은 : 거기다가 스트레스도 심했습니다.


제가 안기부에 잡혀 들어가기 전에 소련의 붕괴를 겪었어요.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냐면 제가 학질이 걸릴 정도였어요. 심한 오한을 겪고 그랬죠. 수배중에 그걸 겪어 냈습니다.


그 때까지도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었지만, 적어도 제가 바라보고 있던 사회주의적 이상이 현실에서 완전히 박살이 난 겁니다. 심하게 몸이 아팠어요. 지금은 이혼한 상대가 되었지만 당시에 남자친구가 제게 포기하라고 권하기도 했었어요.


물 : 사회주의적 이상, 이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이상을 포기하라는 권유인가?


은 : 아니에요. 조직을 포기하라는 거에요. 사노맹을 떠나라는 거죠.


제가 답변했어요. 배가 침몰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배를 떠날 수는 없다고 말을 했죠. 우리가 믿었던 이상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잡히게 된다면 잡히겠다고 결심했어요.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물 : 배와 함께 침몰하겠다는 선장의 심정?


은 : 그렇게 거창한 것 까지는 아니고..


하여간 그렇게 잡혔는데, 사노맹에서 저는 숨겨진 핵심이었습니다. 사진 한 장 찍히지도 않고 미행도 안 당하고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던 존재였거든요. 거기다가 이 외모 덕분에 안기부 조사관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었어요.



실제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를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써먹고 있다. 역시 동안의 위력이란..



뭐 어디서 따라다니다가 타자나 쳤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고문을 시작하면 바로 불 것이라면서 자기들끼리 내기를 걸더군요.


물 : 하루 안에 불 것이다?


은 : 하루가 아니라 세시간.


그러나 저는 이틀을 버텼습니다. 그 덕분에 굉장히 심각한 신체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한 순간도 똑바로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로 다쳤어요.


이틀 후에 수사관들이 제게 그러더라구요. 그냥 처음부터 불었으면 이렇게 심하게 다루진 않았을텐데 왜 그랬냐고.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고, 그냥 정책 책임자라고 처음부터 불지 왜 그랬냐고.


그것도 제가 불어서 안 것도 아니에요. 같이 들어갔던 친구들이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을 해 준거죠.


거기서 폐렴 걸리고 장염 걸리고 협심증 비슷하게 혈압과 맥박이 같이 떨어지는 증상을 얻었어요. 병원의 진단은 '심장판막 일탈증'이라고 하더군요. 심장이 박동할 때 피가 약간씩 새는 겁니다. 그 증상은 지금도 약간 남았는데 많이 좋아지긴 했죠.


그러나 그 통증은 대단합니다. 어느 순간 심장을 도끼로 찍는 것 같은 고통이 와요. 그러면서 혈압과 맥박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혀 아래에 이만한 주사기로 니트로글리세린을 주사해서 혈압과 맥박을 올려야 합니다. 매번 증상이 올 때마다 그 조치를 해야 되죠.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어요.


그러다가 강릉으로 옮겨진 뒤에는 결핵까지 발견이 되었습니다. 아마 안기부에 있으면서 잘 먹지도 못하고 병에 시달리다가 발병하고 악화된 거겠죠. 폐결핵과 폐외결핵을 같이 앓게 되는데, 머리카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체부위에 결핵이 생긴 거죠. 그 폐외 결핵 때문에 내장에 종양이 생겨서 소장하고 대장 부위 수십 센티를 잘라 내게 되죠.


그걸로 쓰러져서 병원에 가자 맹장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맹장 수술을 하려고 배를 열었는데, 내장 부위에 종양이 생겨 뭉그러진 걸 보고 다시 그냥 덮었다는 거에요. 그 때 가족들은 강릉까지 쫓아오고 있던 중이죠.


그 와중에 강릉에 꽤 유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 분이 이건 여기서는 수술이 안된다고 판단을 했지만, 교도소장이 직권으로 여기서 수술 하라고 결정을 했고, 그냥 수술을 하고 났는데 제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질 못했다는 겁니다.


그 땐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폐렴 환자는 마취를 하게 되면 잘 깨어나질 못한다고 하더군요. 죽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데 가족들이 오니까, 제 오빠가 의사, 삼촌도 의사, 병원을 완전히 발칵 뒤집어 놓은 거죠. 개 돼지도 이런 식으로 수술 안 한다고, 하도 난리를 치니까 병원 측에서 오빠를 중환자실로 들여 보내 줬다고 합니다.


깨어났더니 오빠 얼굴이 눈에 딱 보이더라구요. 살아난 거죠.


그 때부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겠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더라도 나가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 : 생사의 기로를 넘어 오신 것 같다.


은 : 그런 셈이죠.


그런 상태에서 교도소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너무 잘해주는 거에요. 불쌍했겠죠. 거기서 저는 정말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교도소 교도관들도 그렇지만 다른 재소자들도 그랬어요.


그렇게 아프고 힘들 때, 내 자신이 너무 약해졌을 때 받았던 사랑과 혜택은 사람에게 정말 큰 영향을 주거든요. 저 자신이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게 된 것에 이 경험도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이건 이념과도 관계없고 그저 사람에 관한 얘기에요. 교도소 측에서는 제가 나으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으니까 조그만 상추밭을 만들어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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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하라는 거죠. 거기서 상추를 기르고 그 상추를 뽑아서 방마다 배달을 하고, 제가 있는 동안 그걸 계속 했어요.


아주머니들도 너무 좋아하셨죠. 밭에서 일을 하고 지렁이, 제가 지렁이를 귀여워해요. 밭이 비옥하니까 지렁이도 많았어요. 지렁이가 발견되면 들고 “어머~ 너 예쁘다~ “하고 놀고 그랬습니다.


그 때 성공회 신부님들도 많이 도와주셨고, 교도관들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오죽하면 나중에 제가 결혼할 때 당시의 교도관님도 오셨겠어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법과 이념을 넘어서 함께 고통의 순간을 겪어낸 사람들, 그리고 지쳐 쓰러져 있는 사 람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작은 도움이나마 주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시간이 지나면 생겨나 는 끈끈한 유대감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유대 감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를 바라보는 제대로 된 관점을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6.사노맹 이야기


물 : 사노맹 당시에는 어떤 생각으로 일을 했었는가?


은 : 당시도 그렇지만 지나고 나서 후회하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저는 뭔가를 하면 끝까지 하는 성격을 물려 받았거든요. 그냥 끝까지 한 거에요. 비록 실패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당시의 목표는 참 지금 얘기하면 우습지만 '복지국가'였던 것 같아요. 최대한으로 나가 봤자 기껏 유럽 사민주의 정도.



겨우 이런 얘기를 하던 사람들이 사노맹이라는 거창한 반국가단체 결성의 혐의를 갖게 되는 것이 당시의 우리 사회였다.



생각을 해 보면, 말을 굉장히 강경하고 살벌하게 했지만 내용은 별거 없습니다. 말을 너무 강경하게 했던 것은 그래야 언론이 받아 써주고 그래야 사회가 우리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 내용은 지금 제가 의원으로서 하는 얘기와 별로 다르지 않아요. 박근혜 대통령이 하는 얘기와도 거의 같은 수준입니다.


그저 무단 결근했다고 때리지 말자는 거에요. 당시에는 급여는 그냥 주는 대로 받는 거에요. 그러나 급여를 결정하는 데에 나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에요. 협상이라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거에요.


지금도 그렇지 않나요? 최저임금 만원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잖아요.


그 단순한 것이 어떤 절벽을 뛰어 넘어야 하는 것 같은 거대한 이야기로 느껴졌어요. 거대한 벽 앞에 서서 돌을 깨는 느낌. 그러기 위해서 돌을 깨는 심정으로 강렬한 언어의 전투가 필요했던 거죠.


단지 그것을 그렇게 강경한 표현으로 얘기했던 것뿐이에요.


물 : 좀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은 : 잘 모르겠어요.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던 것 같긴 한데요.


사실 마지막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한 적은 있었습니다. 그게 적절했는가 하는 거죠.


사노맹 동료들이 일제히 잡혀 들어갔습니다. 한꺼번에 오백여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그 후에 2기 사노맹이 또 생겼습니다. 그 때 감옥 내에서 사노맹 해산 선언을 하자는 얘기가 나온 거에요. 우리가 십자가를 지자는 거죠.


우리가 옳다고 생각을 했고, 단지 그 이유로 누구는 무기징역을 받고 누구는 십년 형을 받고 하는 와중에 해산 선언을 한다는 것, 이것은 약간은 반성문 같은 느낌도 들어서 싫긴 했었어요. 그렇지만 약간 비장하게, 우리가 모든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들이라도 자유롭게 만들자는 주장을 했었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가자고 주장을 했죠. 여기서 멈추는 것은 패배하는 거라는 입장이었을 거에요. 결국 다수결을 했는데, 저는 해산 선언을 하자는 쪽이었지만 다수결에 의해 밀리고 말았죠. 결국 이 사건은 2기 사노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아직도 당시에 옥중에서 해산 선언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쉬운 부분이죠.



사노맹 이야기는 이 곳 저 곳에서 너무 많이 다루어진 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끝맺음을 하는 과정을 고민했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7. 사노맹에 대한 지적


물 : 당시 사노맹은 대한민국의 깃털도 건드릴 힘이 없었고, 말의 인플레만 있었다는 지적을 고종석씨가 내놓은 적이 있다.


은 : 말의 인플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어요.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들이 격앙되면 말의 인플레가 생깁니다. 행동하는 사람들은 격앙될 수 밖에 없죠. 우리가 파티에서 찻잔을 들고 대화하면 품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부딪히며 행동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그걸 요구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에요.


물론 품위 있는 언어를 쓰면 좋죠. 하지만 그렇게 우아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말의 인플레를 지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거기다가 우리는 이십대였어요. 격앙될 수 밖에 없는 세대였죠. 오히려 저는 우리 세대가 이제 뒤이어 오는 세대에게 품위 있는 언어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거기다가 깃털도 건드릴 실력도 없었다는 지적, 동의합니다.


국가에서 우리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면 정말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깃털도 건드리지 못했을 거에요. 그러나 국가는 우리를 반국가 반체제 세력으로 잡아들여 전시하고 체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건을 구성해 준 거죠.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일종의 나비효과의 시발점이 될 수는 있었을 거에요.


사람이나 집단의 능력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이 그만한 개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그런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었을까요? 역사는 많은 우연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와 다른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효과가 발생했을 때 그 여파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에요. 어떤 방향으로 갔을 때 태풍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가 태풍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실력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사노맹은 정부의 발표에 비해 정말로 터무니없이 무력한 조직이었다. 그들이 마치 금방이라도 사회 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설레발 친 혐의는 있다. 그런 표현을 담은 언어들은 그야말로 인플레가 맞았다. 하지만 기껏해야 대학생 몇 백명이 흔들 정도로 대한민국은 취약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고종석의 지적은 매우 적나라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은수미의 답변 역시 적절했다. 그들이 그렇게 허황된, 인플레 끼가 다분한 언어를 사용했 던 이유, 그들은 젊었고 행동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들 스스로는 전혀 실제적 능력이 없었지 만 그들은 이미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에 기록된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게 정부가 도와준 일이건, 그들 자신의 능력이건 역사는 우연에 의해 진행된다는 말과 연결이 된다면 정말로 그들은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는 점,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각자가 찾아야 할 것이다.




8. 공백기 또는 성장기


물 : 그 뒤로는 무엇을 하셨는지?


은 : 7년간 공부했어요. 학부 졸업하고, 석사 학사 했습니다.


그 시절 별명이 전교1등이었어요. 굉장히 빠르게 했습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라꾸라꾸 침대 사다 놓고 김밥 먹어 가면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나이가 많이 들었잖아요. 제 지도교수님이 저하고 7년 차이 밖에 안 나는 송호근 선생님이었어요. 그분이 저보고 그랬어요. 고3 수험생 보다 더 공부를 하는 친구.


김수행 교수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대학교 4학년에 들어갔는데 바로 그 때 김수행 교수님이 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안 한다고 개탄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그 분 스타일이 문제를 한 두개 내고 8절지에 두 시간 동안 아는 만큼 쓰라고 내는 겁니다. 이 분은 이렇게 시험 문제를 내고 그 답안을 받아서 빨간펜 선생님을 하십니다. 직접 다 읽고 직접 다 교정하고 채점을 하십니다. 그거 엄청나게 힘든 일인데요. 그걸 직접 다 하십니다. 몇 백명의 학생 전부를요.


김수행.jpg


거기다가 예전에는 안 그러셨는데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안 하니까, 그 답안지를 직접 한 명 한 명 불러 내서 다 직접 나눠 줍니다. 얼마나 창피합니까? 출석부 부르듯이..


나이도 있고 얼마나 창피한지, 동기들은 다 진짜 4학년, 스물 두셋 하는 친구들이고 저는 서른 여섯 일곱 하는 나이잖아요. 십년 십오년 차이가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은수미" 하고 부르더라구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나가서 답안지를 받아 들자 마자 탁 접어서 돌아서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 분께서는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지금 나한테 답안지를 받아간 은수미라는 사람을 아는가? 자네들 선배였고, 아주 극렬한 운동권이었다가 감옥 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돌아와서 어떻게 이렇게 공부를 하는지, 정말 죽어라 공부를 했는지, 이번에 최고점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99점을 주셨더군요. 교실이 아주 조용해 졌습니다. 제가 얼마나 얼굴이 빨개졌던지..


물 : 굉장히 감동적인 얘기다.


은 :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부끄러웠어요.


또 한편으로는 너무 고마웠어요. 엄청난 격려를 해 주신 거죠.


실제로 당시에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공부를 잘해요. 영어도 잘하고 스펙도 좋고 정말 부러울 정도였죠. 너무 잘해요. 저와는 완전히 다르더라구요. 저는 그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정말 다른 아무것도 안하고 공부만 했어요.


학생들이 저보고 전교1등이라고 별명을 지어준 게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공부만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면도 있었거든요. 저는 정말 그들을 따라가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들은 영어 원서도 쉽게 읽고 하는데 저는 떠듬떠듬 읽어야 되고 정말 공부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던 거죠.


그걸 교수님이 대놓고 인정을 해 주신 거죠.


거기에 돌아가신 김진균 선생님, 그 분은 저를 보자마자 하신 말씀이 “사노맹 같이 안 생겼는데..” 라고 하셨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선생님이셨는데 도대체 사노맹처럼 생긴 게 뭐야? 그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얌전하게 생기긴 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 분이 나중에 약간 친해지고 나서 제게 말씀을 해 주시더라구요. 이제 와서 얘기지만 자네가 사노맹 핵심 멤버였다니까 하시면서 얘길 하시길..


“우리 몇 사람이 안기부 조사를 받았는데, 자네들에게 후원금을 냈다는 이유였다네.. “


그 이유로 해직 당하고 고초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죄송한거죠. 그러면서 제게 끊임없이 사노맹처럼 생기지 않은 나의 제자라고 하시면서 조교를 시켜 주시고, 이런 저런 도움을 주시더라구요.


지도교수이셨던 송호근 교수님은 박사학위 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이 도와주셨죠.


물 : 그런 분들 덕분에 더 빨리 학위를 따게 되신 건가?


은 : 당연히 그렇죠. 그런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학위 못 땄을 거에요.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신 분들이죠. 그게 끝이 아니에요.


나중에 2004년에 제가 학위를 받게 되어 있던 시점에서 제가 급하게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도와주신 분들도 많아요. 나이도 마흔이 넘었고, 빨간 줄도 가 있는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 때 총리실 산하 한국노동연구원이라고 국내 유일의 노동문제 연구소였는데 거기서 공고가 떴어요. 연구원 공채였어요. 저는 그 때 이미 보따리 장사, 지방대학 시간 강사라도 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정말 좋은 기회였으니 당연히 원서를 넣었죠.


물론 이 연구소가 관변단체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죠. 주로 미국 경제학 박사들이 많이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그 분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당시로서는 조금 생소한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했어요. 그들을 상대로 사회학과 출신인 제가 거대 담론을 얘기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죠. 그래서 전문적인 느낌을 주려고 프리젠테이션까지 열심히 준비를 했어요. 자리를 얻고 싶었던 거죠.


결국 공채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이 안 나는 거에요. 아마도 제 전과 경력이 문제가 되었겠죠. 보통 다음날 결정이 나는데 한달을 끄는 거에요.


제가 그 곳에 처음 원서를 내고 나서 바로 송호근 선생님께 서류 심사 통과했다고만 말씀을 드렸어요. 그리고 나서 여섯명이 있었는데 당연히 되어야 할 미국 박사 한 분이 있었고, 저는 다크호스 였던 거죠. 갑자기 튀어나온. 그 상황에서 연구원에서는 프리젠테이션에서 감동을 주고, 참신한 네트워크 분석 같은 것을 해서 신기하게 받아들여졌는데 제 경력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거죠.


그 때 송호근 선생님이 거길 직접 방문 하셨다는 겁니다. 가서 백태웅 박노해는 다 잘나가는데 왜 내 제자는 이래야 되는가, 내가 모든 걸 보증한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아주 강력하게 어필을 하신 거죠.


정말 성실하고 정말 뛰어나고 훌륭한 친구라고, 당신께서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제자라고 하신 겁니다. 정말 보수적이고 정말 깐깐한 학자가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보증을 해 주신 겁니다.


내 제자가 여기에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면서 그 쪽에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쳐들어가서 그렇게 단호하게 부탁을 하셨다는 거에요.


당시 최영기 원장께서 그걸 받아들이신 거죠. 그리고 제가 합격한 뒤에 송호근 선생님께서 원장님께 밥까지 사셨다고 합니다. 원장님께서 나중에 그러시더군요. 서울대 교수에게 밥을 얻어 먹은 것이 그 때가 난생 처음이었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2007년까지 잘 살았습니다.



보기 드문 경우다. 보통 운동권 출신으로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걸로 공 부를 갈음하기 마련이다. 물론 게으른 탓도 있고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 한 부작용은 결코 적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정치인들 역시 지속적인 학습과 연구가 없다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 게 된다. 학습과 연구 부족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결국 자신들만의 이권에만 몰두하게 되어 있고,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오히려 사회변화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무식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라는 비난이 전혀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학교 때 조차 공부를 게을리 하던 운동권들이 정치를 시작한 이후에 더욱 공부를 안하고 그저 권력만 따라다니는 모습에서 우리는 얼마 나 많은 좌절과 실망을 경험했던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은수미의 진가는 이 부분에서 나온다. 그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남들보다 훨씬 더, 자신보다 훨씬 젊은 학생들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경력을 팔아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경력 위에 진짜 경력을 더 얹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이건 감동이다.



물 : 그 뒤에는 뭘 하셨는가?


은 : 학교에서 연구소에서 공부하면서 현장 다니면서 살았죠. 기륭전자, KTX 같은 곳들.


물론 당시 노무현 참여정부와는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지 기억은 못하겠는데,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도 있어요. 경향신문 같은데 쓴 칼럼에서 “표현을 조금만 바꿔 주실 수 없는가” 하는 매우 정중한 요청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받아 들였습니다. 표현을 아주 조금 바꿨죠. '너는 나쁜 놈이다" 에서 '당신은 나쁜 사람입니다.' 정도로.


그 이후 비정규직 문제로 참여정부와 씨름을 좀 했었죠. 하청 문제도 그렇고 꽤 싸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참여정부를 안 도와준 것은 아닙니다. 정부 출연기관에서 녹을 받던 입장인데요 뭐. 하지만 저는 혼자 뛰어서 노동 문제를 연구했고 사실들을 알아 낸거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몰랐던 문제들을 말이죠.


당시에는 파견이나 하청, 비정규직 같은 개념을 아는 기자조차 없었어요. 그런 말 자체를 모르는 거죠. 무조건 발로 뛰어서 사실을 가져와야 합니다. 그렇게 사실을 가져와서 바꿔달라고 해도 결국 안해 주더군요.


내부적으로도 많은 문제제기를 했었지만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너무 실망했었어요. 결국 정권 말기에는 얼굴을 붉히는 일들이 생기게 된거죠.


참여정부가 이런 새로운 노동 문제를 미처 몰랐었다는 점, 인정합니다. 노동문제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아는 사람들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저 또한 쏟아지는 사실들 속에서 입장을 정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이걸 백퍼센트 정규직화를 해야 하는 건지 부분적으로 해야 하는 건지 저도 몰랐어요. 이제 와서야 그런 사실들을 모두 이해하고 정책적 입장을 확실하게 정립한 것이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던 거죠.


솔직히 민주노총이라 해도 저보다 잘 모르실 겁니다. 제가 직접 그 분들께 자랑 한 적도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더 잘 알 겁니다, 하면서요.


물 :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은 :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저는 그대로 똑같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시피 난리가 났죠.


그 덕에 저는 완전히 좌빨이 되고 해고 1순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청와대에서 아예 경향신문 칼럼 자체를 못 쓰게 하더군요. 칼럼 짤렸죠. 거기다가 저만 문제 삼는게 아니라 연구원과 동료들을 치기 시작하더군요.


나오기 직전에는 봉급 자체가 30% 감봉 당했어요.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말이죠. 거기다가 은수미 외 몇 명을 짜르라는 직접적인 압력까지 들어왔습니다. 해고 1순위였던 셈이죠. 은수미가 그만두면 용역 주겠다는 거에요.


정말 고민 많이 했습니다. 저 혼자 당하면 모르겠는데 연구원 자체가 공격을 받으니까..


나만 떠나면 여기가 좀 더 나아질텐데, 다른 사람들도 좀 편해질텐데.. 이런 고민이죠.


물 : 그게 가장 아픈 일인데.. 고민이 많으셨겠다.


은 : 거기다가 이혼 하고, 아버님 돌아가시고..


그러다가 비례대표 제안을 받게 된 겁니다.



이제 부자집 귀한 딸에서 운동권 대학생으로, 운동권 대학생에서 죄수로, 죄수에서 다시 공부하는 학생으 로,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은수미가 급기야 국회에 진출하게 된다.



9. 국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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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 연구원에서 꽤 긴 시간 동안 발로 뛰면서 연구를 하다 보니까 슬슬 정책적 입장이 생기더군요. 이젠 피상적인 방향 수준이 아니라 디테일한 재정 추계까지, 세부 사항까지 확립되면서 이젠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 때, 대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제게 강의를 부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만나본 사람들이 김문수 전 지사, 남경필 현 지사, 정동영, 손학규, 문재인 이런 분들이었어요. 이름을 알만한 사람은 다 만나고 다닌 거죠. 그러면서 같이 의원들까지 만나게 되는 거죠. 제가 특강을 하러 가면 의원들이 와글와글 있으신 거죠.


정동영 전 장관을 만나러 갔더니 희망포럼인가 해서 의원들이 이십명 이상 앉아 계시고, 그런 장면은 처음 봤어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왔어요. 손학규 전 대표 만나러 가서 이인영, 우상호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고, 유은혜, 김현미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유시민씨도 만났습니다. 2011년도에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죠. 80년대 학교 때 보고 처음 본 거니까요.


결국 2011년도에 정치계에서 이름이 난 노동 및 복지 전문가가 된 거에요. 경제와 복지 파트를 얘기할 수 있는 여성전문가인데 굉장히 똑소리 나는 사람이라고 인식이 되기 시작한거죠. 우선은 그랬습니다.


업계에도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비정규직 문제로 많이 싸우고 심포지움 같은 것도 하고, 사업자들은 별로 안 좋아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겁니다. 그들에게 평가를 받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면, “쟤 싫어.” 라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싫고 좋음도 없죠. 눈에 띄고 뭔가 합리적인 얘기를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하면 쟤 싫어, 쟤 좋아, 하는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기자들도 만나기 시작했죠. 당시에는 기자들하고 통화하느라 거의 오전 시간을 다 보낼 정도였어요. 기자들에게는 이제 용어 설명부터 새로 해야 되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문제니까.


결국 저는 논쟁적인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결국 비례대표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물 : 최초 영입 제안은 누구에게 받았는가? 항간에는 조국 교수의 추천으로 문재인 대표가 영입했다는 소문도 있다.


은 : 조국 교수와 문재인 대표의 추천으로 비례를 받았다는 얘기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제게 제안을 하신 분은 김연명 교수님이에요.


김연명 교수님께서 자정이 넘어서 제게 전화를 하신 겁니다. 비례공천 심사위원을 하시면서 전화를 한거죠.


“우리가 담배를 피면서 얘기를 했어~” 이러면서요. (웃음)


여성 후보들 중에 모 여대 출신이 너무 많다는 거에요. 그래서 경제와 복지를 얘기할 수 있는 여성 중에 모 여대 아닌 사람을 찾은 거죠. 그런데 저는 평소에 정치 안 한다고 공언 하면서 다닌 덕분에 아무도 떠올리지 않았던 거죠.


고집도 세고 논쟁적이고 정치 안 하겠다고 해서 아무도 떠올리지를 않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은수미 어때?” 하고 얘기를 꺼내니까 잠시 조용해지다가, “걔 밖에 없네.” 라는 반응이 나오게 된 거죠. 담배피면서 말이죠.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거네요.


이렇게 된 거에요.


물 : 그런데 왜 하필 자정이 넘어 전화를 하는가?


은 : 일정이 급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정 넘어서 전화를 한 거죠. '왜 자정 넘어서 전화하지? 받지 말까?' 하다가 '에휴~' 하면서 전화를 받았더니, 대뜸 “이대 아니지?” 라고 묻는 겁니다. 장난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울대라고 답을 했죠. 사적으로 모르는 사이이고 사회에서만 만났으니까 이런 질문이 나왔겠죠.


그랬더니 “잘 되었다~” 하면서 이제부터 하는 얘기에 절대 “노”를 하면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당신을 비례 대표에 넣으려고 하는데 절대 거절하지 말라는 거죠. 저는 지원한 적이 없는데 그걸 그 쪽에서 넣겠다는 거였죠.


저는 처음에 농담인 줄 알았고 농담이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막 난리가 났어요. “우리가 다 찾아 봤는데 너 밖에 없다.” 뭐 이러시는 거에요.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 '우리'가 뭔지도 몰랐어요. 공천을 하는지 비례를 뽑는지, 저는 그냥 선거 때 되면 투표나 해야지 이러고 있던 사람인데 그런 소릴 들으니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정당 구조나 이런 것을 알 리가 없잖아요.


결국 우리가 네 이름을 넣을 거고, 그러면 아침에 당에서 너를 찾아갈 거다, 당에서 가면 그 때 예스를 해라, 이러고서는 전화를 끊는 거에요. (웃음)



예나 지금이나 정당 사람들은 참으로 일을 이상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정도 되면 한 사람의 인생 경로 를 바꾸는 문제다. 최소한 한 두달 전에 언질을 주고, 몇 주전에는 직접 회의에 불러 물어도 보고, 생각할 시간도 주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주먹구구로 일을 하는 습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과연 변할까?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곳에 오백원을 걸도록 하겠다.



은 : 저는 이 분들이 미친 줄 알았어요. 그 때 한명숙 대표의 비서실장이던 홍영표 의원이 연구원으로 정말로 찾아 오더라구요. 그러더니 다섯시간 내에 답을 하라는 거에요. (웃음)


그래서 제가 살아오면서 사노맹 이후 만난 친구들을 여섯명을 모았습니다. 사실 사노맹 당시 친구들은 만나기가 좀 어렵거든요. 그렇게 정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신뢰하는 친구들을 여섯을 모아서 물어 본 겁니다.


이런 제안이 왔는데, 어쩌면 좋겠는가, 너희들 중에 단 한명이라도 노를 한다면 안 할 생각이라고 물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올케, 저보다 나이 적은 올케에게 물었어요. 한 다리 건넌 사람이지만 그래서 더욱 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 같아서 물어봤죠.


그랬더니, “과연 이게 어거지 일까요?“ 라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제가 젊었을 때 어거지를 부린 적이 있다는 것을 알거든요. 저는 어거지를 부리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어거지를 부린 탓에 남들에게도 수많은 피해를 주었다는 것, 가슴 아픈 일이잖아요.


그러면서 “언니, 이게 어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올게 온 것 같아요. 편안하게 결정 하세요.” 라고 하더군요. 알고 있었던 거에요.


제가 노동 문제를 연구한다고 뛰어다닐 때부터 이걸 하게 되면 결국 정치를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제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거에요. 저만 모르고.


제 친구들 역시 모두 찬성을 하더군요. 너를 절벽으로 밀어 떨어트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대선에서 진다면 최소한 너 하나라도 국회에는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얘기까지 나오더군요.


상처받고 힘들겠지만, 우리를 위해서 네가 절벽에서 떨어지라고 밀더군요.


물 : 나쁜 친구들이다. 그런 친구들은 사귀지 마시라.


은 : (웃음) 그러고 나서 문재인 의원을 만나게 된 거에요. 비례 당선 뒤에 5월이나 되어서야 만났으니 문 대표가 저를 추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거죠.


그 전에는 그냥 단 한번 특강을 한 것뿐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게 전부입니다.



말 그대로 얼결에 비례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례 순서 3번이었으니 매우 높은 순번이기도 했다. 사회란 것이 그런 측면이 있다. 복잡한 힘들이 묘하게 움직이면서 그 균형 속에서 어떤 사람은 인생이 송두 리째 바뀌기도 한다.


평생을 학자로, 연구자로 살아갈 뻔 했던 은수미라는 개인은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사회 변혁 운동이라는 틀 안에서 정치 권력에 대항하던 한 대학생은 이렇게 제1야당의 의원이 된다. 아니 당시에 는 어쩌면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 될 수도 있었던 정당에 의원 배지를 달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10. 의원 생활


물 : 막상 배지를 달고 들어간 국회에 대한 소감은?


은 : 다른 건 모르겠고, 제가 6개월 정도 좌절을 했었어요.


물 : 의원 취임 직후?


은 : 취임 이후가 아니라 대선 이후였어요. 선거 당일 날, 아홉 시 반에 불을 꺼버렸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잤죠. 어떻게 박근혜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도 과연 이게 현실인가 싶더군요. 그러고 나서 전화를 켰더니 처음 들어온 소식이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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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레시안


그랬다. 우리는 대선 패배 이후 실망을 했을 뿐이다. 다들 패닉에 빠져 과음과 숙취로 시달렸겠지만, 누군 가에게 그 패배는 삶의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끔찍한 패배였다.


나 또한 그 기억을 다시 되살리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우리 사회의 변두리 끝에 몰려 있던 사람 들을 절벽으로 벼랑으로 떠 밀어 버렸었기 때문이다.



은 : 기억 하실 거에요. 그 때 줄줄이 자살을 하셨어요. 쫓아 다니면서 사람들 자살하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제일 걱정된 것, 쌍용차였어요. 자살할까봐.


저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대선 후유증을 제대로 앓지도 못했어요. 한 두달을 장례식장 쫓아 다니면서 멱살 잡히고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고.. 제 자신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던 거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고 자살자들은 속출하고..


물 :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은 : 그렇죠. 사실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꽤 했다고 생각했어요. 전문가로서 정책적인 일을 할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많이 바꿨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하나도 안 바뀌는 거에요. 당도 바꾸지 못하고 정치도 바꾸지 못하고, 정말로 말 그대로 하나도 안 바뀌는 거에요.


저는 진짜 하나 잡으면 끝을 봐야 되거든요. 고민을 하려면 동굴에 들어가 지구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라도 고민을 끝내야 동굴에서 나오는 성격이거든요.


그 때 처음으로 재선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2014년 초. 여기서 그만둘 건가, 더 할 건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고민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죽고 싶었고.. 의원직을 던지고 싶었는데, 정말 창피해서 의원직도 못 던졌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면 지는 것 같았어요.


물 : 국민 모두에게 절망의 순간이었던..


은 : 우습게도 정말 유명해지고 싶었어요.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싶었어요. 알려져 있기로는 국회의원이라면 힘이 많은 줄 아시거든요. 그런데 내가 죽을 정도로 노력을 해서 바꾸고 싶어서 진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안 바뀌고, 내가 의원직을 던져도 아무도 모를 거고, 내가 죽어 버려도 이 사회는 하나도 안 바뀌겠다는 생각, 끝 모를 무력감이 드는 거에요. 국회의원이 다 뭐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뭐라도 할 수 있을까 해서 세월호 현장을 찾아 가려면 오지 말라고 하세요. 실제로 제가 가도 뭘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안 들더군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거기다가, 세월호 사건의 그늘에서 노동 현장은 더욱 더 잊혀져 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죽어 나가는데,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고..



실제로 이 대목에서 은수미 의원은 살짝 격앙되었고, 목소리는 살짝 떨렸으며 살짝 울먹 거렸다. 지켜보는 나도 뭔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었다.



은 : 세월호는 세월호대로 점점 더 비극이 되어가고 있었고, 노동 현장은 현장대로 점점 더 아무런 관심도 못 받고 춥고 외로워 지고 있었어요. 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죽는 사람도 잊혀져 가고, 산 사람도 잊혀져 가고.


그래서 도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뭔가 정 안되면 이 사회에, 저 커다란 장벽에 흠집이라도 내고 싶어졌어요. 힘을 갖고 싶어졌어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저 잘 알아요. 어려서 운동권 시절에 파워, 권력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권력은 언제나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 힘을 얻은 사람이 본인은 절대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리 맹세를 해도 결국은 그 권력이 칼이 되어 사람들을 다치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한 것이고, 그게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힘을 갖고 싶어졌어요. 진짜 솔직히 말해서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한 힘을 가지고 싶어서 재도전을 하는 거에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세월호 가족들의 고통, 비정규직들의 고통, 그런 고통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고통, 이런 고통들이 가득 차 있는 현실을 이제는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거에요. 너무 불합리하고, 너무 부조리 하거든요. 이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고, 그 소리에 반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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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 정치인으로서 주변인을 떠나 권력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은 : 맞아요.


그래서 어떤 지역구를 골라 재도전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자 중원이 보이더군요. 성남시 중원구.


사람들은 저에게 화이트 컬러의 입장으로 선거를 치르기를 요구했죠. 학위도 있고 전문가이니 그 이미지를 쓰라고 권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공단으로, 중산층과 서민이 모여 사는 곳, 일하는 노동자들을 찾아 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중원이 떠오른 거에요. 사실 성남 중원하고는 아주 오래된 인연도 있어요. 80년대에 서노련 활동을 할 때 그 쪽을 자주 방문했었어요. 유일한 휴식처였고, 워크샵도 하고 그랬었죠. 친구들도 아직도 많이 있고, 또 백기완 선대본 시절 제가 안양,성남 책임자 역할을 했었거드요. 그 때도 자주 갔었고..


또 중원에서 몇몇 분이 저를 직접 부르기도 했고, 그 부름에 응답을 한거죠.


아~ 중원이 나를 부르는구나. (웃음)


물 : 그 중원은 무협지에 나오는 그 중원은 아닌데..


은 : 하여간 그런 이유로 중원으로 결정을 했어요.


물 : 그러나 비례 임기를 마치지도 않고 왜 지역구에 가겠다고 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의심하고 있다.


은 : 그건 순서가 달라요. 제가 중원 지역구에 나가겠다고 결정을 한 것은 2014년10월 경. 가서 사무실 내고 지역위원장 선거도 준비하면서 활동을 이미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무엇부터 준비해야 되나, 앞으로 지역 활동을 어떤 식으로 해야 되나,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는 중에 갑자기 헌재 결정이 난 거에요.


사무실을 오픈 한 것이 11월 19일, 헌재 판결에 의해 보궐 선거가 결정된 것이 12월 19일, 이제 막 시작하려는데 겨우 한달 만에 갑자기 보궐선거 결정이 난 거죠. 오히려 제가 황당했죠. 그 발표를 티비에서 보는데 갑자기 멍 해지면서 현실감을 잃어 버릴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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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은수미 의원 트위터


원래는 2016년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물 : 그걸 진짜 예측을 못 했나?


은 :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왜 안 했겠어요? 다양한 법 전문가들이 모두 당 해산이 말이 안되지만 최악의 경우 어찌어찌 해산 결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었어요. 사실 헌재에서 통진당 해산을 할 것이라는 예측은 했죠. 하지만 의원직 박탈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 중론이었어요. 아니 중론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어요. 통진당 지역구 의원들의 의원직 박탈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잖아요.


저는 당연히 중원에 와서 지역 활동을 개시하고, 비례 임기 마치고 2016년 총선에 출마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다가 날벼락처럼 갑자기 보궐이 결정되자 저는 오히려 당황했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저는 일단 결정을 한 거고, 상황이 바뀐다고 해서 고민을 다시 하거나 계획을 바꾸거나 하지는 않아요. 지역에 별다른 근거도 없고, 직접적인 후원자도 없죠. 그걸 키울 시간도 없어진 거지만 그래도 바꿀 생각은 없어요.


물 : 굳이 지역구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은 : 사실 비례 대표 생활을 하다 보면 지역구 의원들이 많이 부러울 때가 있죠. 당내에서 의회에서 심하게 당하면 지역구 의원들은 자신의 지역구로 내려갑니다. 그러면 지역의 후원자들이 모여서 격려를 하죠. 왜 그랬냐고 나무라면서도 다시 힘내고 올라가서 싸우라고 토닥여줍니다. 저는 그게 부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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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 사람을 키우고, 지역구 의원은 지역에서 힘을 얻는다, 지역 대표성 같은 복잡한 얘기까지 할 필요 없이 저도 그런 정치를 하고 싶어졌어요.


저는 지역구에서 정치를 하기로 결정을 했고 그렇게 할 겁니다.


물 : 이번 보선에서 실패한다면?


은 : 그럼 예정대로 2016년 총선으로 가는 거죠.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묘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은수미가 비례 초선의 의원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해 산 결정에 의해 중원구 지역구가 빈 틈을 타 임기도 마치지 않고 출마하려고 한다고 힐난의 눈초리를 던지 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본인의 해명은 일단은 조리가 있다. 먼저 지역구를 결정했고, 그 뒤에 헌재의 판결이 있었다. 그리 고 실제로 헌재가 통진당 지역구 의원들의 의원직까지 날려 버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공교로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은수미에게는 보궐 선거 본선 이전에 당내 공천을 받아야 한 다는 장벽이 먼저 다가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도 은수미 의원의 태도는 생각보 다 매우 단호했다. 진짜 화가 많이 난 것으로 보였다.




11. 당내 정치의 어려움


은 : 사실 비례 초선은 당내에서 무척 힘들어요.


새누리당과 싸우는 것은 맷집도 생기고 보람도 있고 좋죠. 하지만 당내정치는 너무 어려워요.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아주 곪고 터져 죽을 지경이죠.


제가 아무리 말조심을 하고 언론들과 인터뷰 할 때 조심하고 해 봐야 소용 없어요. 정말 심한 말까지 듣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다 뭐 이런 얘기죠. 아무런 직책도 맡을 수 없고 그래요.


지금 종편 채널A와 동아일보와 법정에서 다투고 있는 중이에요. 벌써 두번째인데 사실이 아닌 보도를 한거죠. 제가 막말을 했다는 거에요. 저는 전혀 한 적이 없는 말을 제가 한 말이라고 보도를 합니다. 지랄 운운 하는 말을 제가 했을리가 없잖아요.


그 보도가 나간 뒤 기자에게 질의를 했죠. 그랬더니 동료 의원들이 그렇게 얘기해줬다는 거에요. 물론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죠. 하지만 평소에 안 좋은 얘기들을 동료의원들에게 직접 듣는 것도 아니고 기자들을 통해서 듣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서로 하지도 않은 말을 옮기기도 하고, 실제로 동료를 해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문제, 그렇게 맨날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말 가지고 싸우는 것. 아무 것도 아닌 말 한마디로 꼬투리 잡고 그 발언을 가지고 싸우다가 실제 일은 하지도 못하는 것, 저는 이걸 바꾸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잘못이 많을 거에요.


이제 저는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스스로 진보라고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제는 이겨야 진보고, 바꿔야 개혁이고, 행동해야 의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열을 많이 받았어요. 화도 많이 났고요. 무력감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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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정말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지역에서 느낍니다. 하루 한 여덟 시간, 천오백 명 정도를 만나 뵙고 다니는데, 지역 내에 가게들을 방문하면 가게 주인 분들이 너무 반갑게 맞아들이죠. 손님인 줄 알고..


그러다가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얼굴에 실망이 진하게 떠오릅니다. IMF 때 보다 더 힘들다, 못살겠다, 정치 좀 잘 해라 하는 거에요. 이래가지고 선거가 될 수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뽑아줬더니 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이젠 투표하기도 싫다고 얘길 하세요.


물 : 그건 매우 당연한 일반인들의 반응일텐데.


은 : 어떤 가게를 갔더니, 홍삼차를 타 주시더라구요. 그 넓은 가게에 휑하니 주인 부부 두 분만 앉아 있어요. 의원이라고 홍삼차를 타 주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많이 돌아 다닐 텐데 몸 상하겠다고 하면서, 보기에 몸도 가녀린 것 같고 약해 보인다고 얘길 하시는 거죠.


그러면서 “왜 제가 홍삼차를 타 드리는지 아시겠어요?” 하면서 물어보시는 거에요. “우린 죽어가고 있어요.”라고 하시는 거에요. 당신들이 잘못해서 우린 죽어간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저는 이걸 바꾸고 싶어요. 중원에서 시작해서 정치를 바꾸고 싶어요.


저는 다시는 이런 무력감에 빠지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죽어가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이런 상황을 정말로 바꾸고 싶어요.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앉아 있지 않을 거에요.




미괄식 인터뷰였다.


운동권 활동으로 인해 꽤 긴 시간, 6년 동안이나 실제로 감옥살이를 했던 한 여학생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에서 박사까지 일사천리로 마감을 한다.


그 뒤로 국무총리실 산하 노동연구원에 들어가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최전선 현장에서 직 접 발로 뛰며 수행을 했고, 아무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던 비정규직 문제, 파견, 하청, 하도급 문제 등을 학술적으로 개념 정립까지 이룩해내고 나아가 정책적 대안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그러던 그녀가 얼결에 야당에 비례대표 초선으로 끌려 들어가 해오던 대로 전문적인 관점에서 노동 정책 관련 일을 수행하다가, 대선 패배를 겪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슬픔을 온 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그 고통들을 모아 권력의지로 환원시켜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있는 중이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불태워 봤자 하얗게 재만 남게 될 뿐, 우리 사회의 정치권에서 성공하 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당장 당내 역학 관계로 봐서도 바로 이번 주 말로 다가온 당내 경선에서 은수미가 승리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쌓여 있는 부조리의 두께는 그리 녹록치 않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도 이제는 이런 고단위 전문성과 함께, 순수한 권력의지, 즉 개혁과 변화의 의 지로 무장한 정치인을 최소한 몇 명은 가져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약한 기대가 든다는 것이다. 특히 그 전문성이 우리의 삶에 직결되는 노동문제라면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희망은 멀기만 하다.


또한 이 무한정 길기만 한 인터뷰는 내가 진행했던 딴지 이너뷰 중 가장 짧은 마무리 인사와 함께 끝이 나 게 된다. 다행이다.


긴 글 읽어주신 딴지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마무리 인사

 

물 : 언제나 그렇듯이 끝으로 딴지일보 독자들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린다. 길이 제한은 없다. 너무 길지만 않게 해달라.

 

은 : 알았습니다.

 

 

 

딴지일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은수미입니다.

 

긴 말은 안하겠고요. 저 이기고 나서 다시 한 번 인터뷰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대 딴지 이너뷰 중, 가장 인상적인 마무리 인사였다는 것은 기록해 두기로 하자.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