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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12. 목요일

Athom








속초에서 돌아오던 날 새벽,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집이란 거. 비빌 언덕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삶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 나는 기꺼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꺼이 집을 건사하고, 그녀를 집으로 초대할 용의가 있다.

 

 

까치설 아침, TV에서 2011년도에 했던 인간극장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조병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자로 생겼으믄 남자가 벌어서 여자 하나 건사해야 한다 말이야. 여자 하나 못 건사하면, 남자가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해. 여자 하나 못 건사하면 장가를 가지 말어야 혀."

 

즐거웠다. 내내 마음이 들쭉날쭉 했었는데, 섣달 그믐날 아침 웃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날은 엄마와 푸성귀를 들고 시장에 나갔다. 별것 아닌 야채들과 잡곡들 이었지만, 대목이 아닌가. 길가에 좌판을 깔고 마늘 사세요, 토란대 사세요, 당근 사세요, 외쳤더니 엄마 손에 짭짭한 용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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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엄마 집에 가던 날까지는 마음이 싱숭생숭 하더니, 조병만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 기분이 좋았었다. 그 사이 어찌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고, 어찌 이 집을 건사하고, 그녀와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밥을 벌어야 하는데 무슨 수로 밥을 벌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란 밥을 팔아 밥을 버는 일 뿐이었다. 그것도 일만 할 줄 안다. 장사에 소질이 없는 것 뿐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저 밥을 지어 사람들에게 먹이는 알 밖에 할 줄 모르는 거다.

 

장사. 시작은 막연함과의 싸움이었다. 막연하고 두려웠다. 돈이 중요한지, 밥의 질이 중요한지, 마케팅이 중요한지, 시간이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밥을 팔아 밥을 벌고 싶을 뿐이었다. 선배와 함께 작은 식당을 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두 집을 건사하기엔 역부족일 것 같아 포기했다. 모든 원하는 메뉴를 다 만들어주는 심야심당을 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만한 가게를 열 돈이 없다. 몫 좋은 가게와 인테리어를 포기하고 배달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배달일로 잔뼈가 굵은 후배가 함께 일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녀가 알토란처럼 모은 돈 천 만원을 덥석 내주었다. 얼굴이라곤 한 번 밖에 본 적 없는 거렁뱅이가 뭘 믿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백만원을 또 덥석 내주었다. 천 오백만원. 천 오백억 보다 더 묵직한 돈이 내 손에 쥐어졌다. 그 돈으로 보증금 300에 월 25만원을 내는 빈 가게 하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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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공사를 하고, 후배와 함께 벽지를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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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삼촌이 운영하는 중고 주방기구 가게에서, 돈 벌면 값을 치르겠다며 무턱대고 주방기구를 받아와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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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다니던 인쇄소 사장에게 평생 공짜 밥을 주겠다 하고, 간판과 창문 선텐, 홍보전단지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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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움막에 돌아가 짐을 정리해왔다. 돌아 나올 때 입이 쓰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입을 앙다물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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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었던 가게에 많은 물건들이 들어왔고, 나는 발품을 팔아 값싸고 질 좋은 식재료들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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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을 볶고, 소뼈를 구워. 소스를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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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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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를 튀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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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므라이스를 볶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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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요리가 또 한 번의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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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팔아 다시 돌아온 집과 그녀를 건사할 것이다. 그렇게 살 것이다. 그렇다고 저 깊은 주방 한 구석으로 들어가 밀려드는 주문지에 적혀있는 음식만 만들어주는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이 작고 동굴 같은 가게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지만, 이것이 또 한 번의 여행이자 탈출구가 될 것이라 나는 믿는다.

 

식당을 준비하며 갖게 된 꿈이 한 가지 있다. 다시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같은 여행을 그녀와 함께 떠나는 것이다. 그 여행 중에서 발견한 식재료를 들고 와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먹일 수 있는 식당을 여는 것이 나의 꿈이다. 그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은 메뉴를 선택할 권한이 없다. 내가 구해온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밥상머리 앞에서 받을 자격만 있다.

 

생각해 보라. 집에서 밥을 먹는데 메뉴를 주문하고 밥을 먹었었는지를. 나는 최선을 다해 식재료를 구할 것이고,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구해진 식재료를 미리 공지하고 예약을 받을 것이다. 가격은 식재료를 구하는데 들어간 비용만 받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평가받고, 평점이 좋은 음식은 아톰돈까스의 신 메뉴로 출시하겠다. 근사하지 않은가. 스티브잡스는 신제품 개발을 베일에 가려놓고 장사를 했지만, 나는 모든 신 메뉴의 개발단계를 공개하고 냉정하게 평가받는 장사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이 작은 가게를 잘 키워야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 것이다. 통조림과 간장, 고추장 등에 들어있는 인공조미료 외에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가능하다면, 언젠가는, 그 모든 식재료들도 내 손으로 만들어 사용할 생각이다. 믿지 못할 식재료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밥 한 그릇에 그녀와 내 어미를 비롯한 나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베시시 웃음이 나오는 입술을 오므려본다. 건사. 건사하련다. 누구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이렇게 건사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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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애정을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조금 부끄럽기도 합니다. 움막에서 짐을 정리해 돌아 나오는 길에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약속입니다. 3월 말까지 야만인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약속을 어겨서 주저앉아 담배 몇 대를 피워 물었지만, 결국 이것도 내 선택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허탈한 마무리겠지만 이놈의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따뜻한 응원 부탁드립니다. 다들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부 주 -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얘기해서 'Athom'의 자급자족 푸로젝투로 1년 동안 야생에서 살아남는 실전 체험 기록. 이전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쿨하게 밑에 버튼을 누질러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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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om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