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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16. 월요일

워크홀릭








298세대


386세대에서 88만 원세대를 빼면, 386-88=298세대라고 한다.

 

298세대는 70년대 생이며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로 아주 예전에 신세대, X세대라는 호칭 이후 영광스럽게도 실로 오랜만에 우리 세대에게 부여된 호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세대는 그다지 사회에서 눈여겨 볼만한 세대가 아니었다. 386세대만큼의 자긍심도, 88만 원 세대의 독기도 없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경제호황의 최정점을 마음껏 공유한 날라리 세대로 보는 시각 또한 없지 않다. 

 

이 세대는 지금 40대가 되었고, 재수 없게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재취업은 어려울 나이가 되었다. 직장에 갓 입사했거나, 대학 졸업쯤에 IMF를 겪었기에, 버티고 버티느라 지금은 흔한 만혼이 시작된 세대이고, 그러기에 이들의 아이들은 나이가 많다 해도 중3 정도일 뿐이다.

 

뭔지도 잘 모르고 엉겁결에 97IMF를 넘었고, 2008년 국제외환위기를 버텨냈지만 또 다시 같은 쓰나미가 온다면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대'라는 프레임과 가난

 

386, 298, 88, 3, 거세 세대까지…….

 

다른 시기와 문화 그리고 경제,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특정한 세대는 나름의 특징을 갖는다는 논리, 일견 간편하지만 세대 갈등을 손쉽게 유도해내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에 위험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세대 간 갈등 조장은 나누기에서 시작한다.

 

나와 남을 굳이 나눠버리는 것, 나와 같은 점은 보려 하지 않고, 나와 다름을, 특히 내가 혐오하는 다름을 갖고 있는 타인을 경멸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그러나 위정자들과 그 우산 밑에 있는 언론은 대중을 나누어 따로 떼어 놓는 것을 좋아한다마치 물고기 때를 쫓아 흩어 놓고 커다란 무리에서 흘러나온 작은 무리를 사냥하는 황새치의 사냥을 보는 듯하다.


그들은 프레임을 만들고 대중의 시각을 그 작은 프레임 하나로 끌고 가 시야를 좁게 고정 시켜 버린다대한민국 건국 이래 대중들의 공통된 교집합은 기실 가난이었으나 정부와 언론은 이 사실을 덮어버렸다.

 

대다수의 대중은 가난했음에도 인간다운 삶을 말함에 있어 비교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기아를 넘어섰다고 이제는 가난하지 않다고 대통령 각하 만세 삼창을 시켰다나는 누리지 못하고 있으나 브라운관 넘어 많은 다수가 누리고 있는 풍요를 자신에게 얼마 안 있어 올 행복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해왔고 그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386이던 88만 원이던 298이던 공평하게 가난하다.

 

그 원인을 들여다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겪고 보아온 가난은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의 얘기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돌아 봤으면 한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애플 따위는 찜 쪄 먹고, 대통령이 전 세계를 순방하며 나라 경제를 단번에 회복시킬 거라는 희망은 지난 시절의 대한민국을 돌아보면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고 그간의 삶이 국가의 성장만큼 국민의 삶도 함께 성장해왔는지 돌아보는 게 우선이 아닐까 싶다.

 

조심스럽게 내가 살아가며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이 겪었던 가난의 기억들을 되짚어 본다.

 


[1979]

 

국민학교 조회 시간에는 아이들을 쭉 줄 세워두고 선생님들이 이를 검사하고 손이 트지 않았나 살펴봤다엄마가 아이들을 씻길 따듯한 물이 없었다손등 위에 까맣게 눌러 앉은 누룽지가 하얗게 갈라졌다박정희 대통령이 연예인들과 안가에서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가 김재규의 총에 생을 마감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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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아버지가 전력 계량기를 도끼로 깨서 고장 내 버렸다엄마는 그 밑에 돌을 가져다 놓았다두 분은 한전에 누군가 돌을 던져 계량기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을 할 속셈이었나 보다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지 않자 계속 밀려버린 전기세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계책이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학교로 찾아오셨다그 자리에는 형도 따라와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조퇴시킨 후 형과 함께 남산타워를 구경시켜주고 돈가스도 사 주셨다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셋이서 폴라로이드 기념사진을 찍고백화점에 들려 공부 잘하라고 연필 한 다스를 사주셨다아버지는 볼 일이 있다고 형에게 나를 집에 데려가라고 해서 늦은 밤 형이 나를 업고 집으로 왔다그날 아버지는 자살을 시도하셨다.


 

 

[1981]

 

수면제 몇 알로 마감할 인생이 아니었기에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깨어났고더 이상 집세를 내기도 힘들어 이사를 했다월세 낼 돈도 없어 산으로 들어갔다천막을 치고 살았다지붕에 나뭇잎을 덮었다흘러내리면 또 덮었다산림 감시원에게 들키면 이마저도 철거 될 것이 두려웠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산속엔 우리 집 말고도 두 집이나 더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전두환은 물가 잡는 대통령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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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돈을 번다고 형이 가출했다어느 날 학교 다녀오는 길에 형이 까만 봉지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내 옷을 사왔다고 했다앞으로 형이 돈 많이 벌어 올 테니 걱정 말라며 떠났다어린 마음에도 고등학생이 가출해서 무슨 돈을 벌까 싶었는데 3개월 만에 돌아왔고 공부를 한다고 머리를 삭발하고 눈썹을 밀었다엄마는 반가와 하셨다.

 

그러던 형은 며칠 안 있어 모자를 쓰고 엄마의 아이브로우로 눈썹을 그리고 놀러나갔다.

 

집에 혼자 있는데 형 친구들이 찾아왔다형이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참고서를 가져오라고 했다며 책들을 싸서 갔다집에 돌아온 형이 책을 도둑맞았다고 길길이 뛰었다나는 형의 책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 되어 엄마한테 지개 작대기로 두들겨 맞았다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고만날 정학 당하는 형이 무슨 공부를 한다고 엄마는 이러는지 화가 났지만 잠자코 맞았다이 일이 있은 후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는데 20년이 걸렸다.





[1983]

 

나는 학년 독서 왕이었다책 백 권을 기록할 수 있는 도서대출카드 한 장을 다 채우고 두 장 째를 쓰는 학생은 나 밖에 없었다자랑스러웠다.

 

집에는 책이 없었다종서로 쓰인 셰익스피어 전집을 몇 번이나 읽었다그러나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사랑의 묘약은 어떤 건지 알듯알듯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너덜너덜해진 첫 번째 독서카드가 없어졌다엄마한테 물어보니 태워버렸다고 한다내 자랑거리를 태워버린 엄마한테 화가 나고 억울해서 울었다엄마는 그깟거 뭐 대수냐고 했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야 알았다여자들은 남편에게 내지 못하는 화를 자식에게 낼 수도 있다는 걸




[1984]

 

아버지의 사업은 또 어려워져서 집을 옮기느라 전학을 갔다기억할 수 있는 내에서 이때가 6번째 이사였다. 5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그리웠다졸업을 하지 못하고 새 학교에서 6학년을 시작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스승의 날에 엄마는 선생님께 드리라고 봉투를 쥐어줬다. 5천 원이 들어있었다촌지를 준다는 게 부끄러워서 내가 써버렸다.

 

사업하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아버지의 주변에는 의형제도 많았다사업이 잘 될 때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지만실패의 시기에는 몇 명의 지인들만 남곤 했는데 언제나 함께 한 사람들 중 하나가 현수 삼촌이었다.

 

현수 삼촌은 먼 친척뻘이라고 했는데실제로 친척은 아니었고 그냥 성이 같고 본도 같은데아버지보다는 나이가 어리니 그렇게 삼촌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수 삼촌은 한 마디로 생활력의 화신이었다가장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돈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적법한 범위 내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 않는 분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카페테리아에서 다른 직원들이 모두 잔뜩 음식을 집어들 때 밥 두 그릇과 국김치만을 들고 온다며 '이사'까지 단 사람이 지독하다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머니가 집안의 생계를 위해 경치 좋고 물 좋은 유원지에서 음식점을 열었다유원지라는 곳이 여름에는 물건이 동이 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지만겨울이 되면 며칠을 공칠 정도로 그 많던 사람의 발길이 거짓말처럼 뚝 끊기고 만다.

 

유원지의 여러 식당들이 잠시 문을 닫기도 하고다른 집들은 공치는 날이 많았지만우리 식당에는 항상 두세 팀의 손님이 식사를 하곤 했다우리 식당에만 손님들이 드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현수삼촌이 손님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시외로 무작정 드라이브를 나와서 주변지리를 잘 모르는 여행객들유원지라는 소문을 듣고 오긴 했는데 계절을 잘못 맞춰와서 뻘춤한 커플들모두 현수 삼촌의 소개에 이끌려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다현수 삼촌은 항상 8시 막차를 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어머니는 언제나 음식 팔아 받은 돈을 나눠서 쥐어 주시곤 했다.

 

나눠진 밥값이 우리 집의 생활비여고 또 현수 삼촌 식구들의 저녁 반찬이었고 생활비였을 것이다과묵하게 묵묵히 일 하는 모습만 보이던 현수 삼촌은 말빨이 좋지도 않고 나서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사업 뿐 아니라 형님 집 짓는 일 돕겠다고 살이 빨갛게 타도록 러닝셔츠 바람으로 여름 내내 공사장을 떠나지 않던 소 같은 일꾼이었다.

 

삐끼라니……어린 내 눈에도 놀랍고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1985]

 

아버지는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이번에는 엄마도 가세했다아버지가 날려버린 재산과 지게 되는 빚을 장사로 다시 메워내던 엄마였기에 이번엔 잘 될 거라고 내심 기대했다엄마와 아버지는 아침마다 기사가 끄는 로얄 살롱을 타고 출근했다.




[1986]

 

수학여행 가는 나를 불러 엄마는 네가 여행에 돌아올 쯤이면 엄마아버지가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여행에 돌아와보니 엄마와 아버지는 야반도주를 했고나는 형과 함께 살게 되었다형은 빠찡꼬에 빠져 집에 있는 돈 될 거라는 건 모두 팔아버렸다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라면을 끓여 먹는다고 김치를 가져오라 했다형수에게 얘기했더니 선생새끼들이라며 쌍소리를 했다내가 퍼다 주고 나니 집에 김치는 반 남았다.




[1987]

 

형과 함께 이사를 했다.

 

변두리에 구한 지하 방은 습하고 추웠다여름엔 천장 구석에 검은 곰팡이가 피고겨울에는 그 위에 다시 하얗게 서리가 앉았다이불을 3겹쯤 머리까지 덮으면 춥지는 않은데 숨쉬기가 힘들었다머리 위로 이불을 덮었다 걷었다 하며 밤을 보냈다.




[1988]

 

고등학교를 갔다부모님과 살기 위해서 중학교 친구들이 하나 없는 도시로 지망을 했다입학해보니 친구들은 수학의 정석이니 성문 기초 영어니 하는 이상한 책을 들고 왔다.

 

수업시간 외에는 숙제하는 거 빼곤 공부를 해본 적 없던 촌놈에겐 낯선 풍경이었다.

 

엄마는 위암으로 수술을 했고 위의 대부분을 잘라냈다.

 

그 해 88올림픽이 열렸고혐오 식품이라며 보신탕집들은 영양탕으로 이름을 바꿔 후미진 곳을 찾아 들어갔다.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보통사람이라고 소개하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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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7일자 경향신문



 

[1989]

 

아버지는 사업하는 동안 친했던 사람들과 인맥을 동원해 하우스를 차렸다.

 

마작과 고스톱 판을 열어서 받은 개평으로 생활을 했다.

 

경찰서에 신고도 들어갔지만이웃사촌 간에 점백원 고스톱 치는 거 가지고 뭔소리냐고 호통을 쳐서 꽤 오래 이 수입원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90]

 

엄마와 형은 돈을 벌어온다고 일본 이모부 집으로 떠났다.

 

한국에 비해 환율이 좋아 1년만 일해도 한국에서 일한 거 10년 치는 된다며 떠난 형과 엄마는 몇 달 만에 돌아왔다엄마의 위암이 재발한 것이다.




[1991]

 

대학에 입학했다.

 

하향지원했으니 장학금을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나 같은 생각을 했던 놈들 중에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놈이 두 놈이나 더 있었다장학금은 타지 못했지만 재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재수에는 많은 돈이 든다는 걸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그 해 엄마가 돌아가셨다병원비 때문에 진 빚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아버지는 일수를 찍으며 항상 엄마를 기억했을 것이다.




[1992]

 

이론만 파고드는 학부 과정은 현실적 공학과 괴리가 컸다.


나는 교수들이 가르치지 않는 현실의 기술 분야를 택했다대회에도 출품하고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암기식 이론공부는 하지 않았기에 학점은 나빠졌다근로 장학금을 신청했다한 달에 8만 원에서 12만 원의 돈을 받았다컵라면 수백 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돈을 번다는 게 행복했다방학 때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계속 근로 장학금을 탔다.




[1995]

 

군대를 다녀온 사이 아버지는 이사를 했고형과 형수는 이혼을 했다조카는 아버지가 키우게 됐다.

 

손녀까지 맡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손 벌릴 수 없어 아르바이트 수를 늘렸다.

 

학과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근로 장학생도 겹쳐서 할 수 있었다그래도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감당하기에 빠듯했고 시간이 나지 않아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내게 유리한 과목으로 수강신청을 하고 간신히 학점을 4.0에 맞췄다염치도 없이 교수님을 찾아가 장학금을 읍소했다총학생회 자판기 수익 장학금도 신청했다공부를 해서 장학금을 타는 게 아니라 장학금 벌이를 하는 느낌이었지만 덕분에 학비를 해결했다.




[1996년 ]

 

1학기를 마치고 인턴 공채 시험을 봤다합격 후 2개월간의 인턴기간이 끝나자 회사는 두 가지 선택권을 줬다첫 번째는 대학으로 돌아가되 졸업 후 재입사를 조건으로 소정의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것두 번째는 이대로 계속 회사를 다니면 바로 수습기간을 마친 것으로 인정하고 정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것.

 

오래 생각할 것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학과 교수님들이 서운해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간 얻어먹은 게 많은데 염치도 없고대학원에 간다고 해서 학자금과 생활비가 장학금과 원생 품위유지비로 해결될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할 때마다 그간 엄두도 못 냈던 것들을 사 먹었다수박치킨 반마리삼겹살 한 근… 너무 행복했다.


 

 

[1997]

 

월급은 50%를 적금에 넣고 나머지 50%로 생활을 했다사글세 100만 원짜리 방에 사는 내게 월급의 50%나 되는 생활비는 과했다월말에 가계부를 정리해보면 대략 70~80%를 저금하고 있었다이대로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하던 사업이 안 돼 조카를 다시 형에게 돌려주고 아버지는 야반도주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모셨다.

 

그간 모은 적금을 다 털고대출까지 받아 겨우 조그만 식당을 하나 내 드렸다.

 

이대로 부모님 모시고 살면 되리라 생각했다.

 

12월 IMF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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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사태 당시 MBC 뉴스




[1998]

 

200명이던 직원이 80명으로 줄었다사내커플이라고 한 사람은 내보내고군대를 안 갔다 왔다고 내보내고도대체 해고의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난 후 회사는 해고자들의 책상과 컴퓨터를 남은 직원들에게 팔았다좋은 컴퓨터와 책상은 직급이 높은 사람들 차지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있지 못했다나는 엄마가 남긴 유품 중 하나 남은 반지를 금모으기 운동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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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해고로 상사들이 사라지자 맡아야 할 일은 늘어났다그룹 내의 타 사업부 일까지 맡아야 했다힘들다는 생각은 가끔어느 새 시야가 넓어지고 실력이 늘었다회사는 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회사에 사표를 내고 벤처기업 창업에 합류했다.




[2000]

 

내가 합류한 벤처기업은 대박이 났다사장님은 창업공신에 대한 신뢰가 컸다사업의 특성상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그도 모자라 해외 어디든 날아가야 했고명절에도 일해야 했다남들 연봉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단번에 탔고월급은 해가 아니라 달마다 올랐다.

 

형이 돈을 꿔갔고아버지가 가게를 옮긴다고 도와달라고 했다쓸 시간도 없는 돈또 벌면 된다고 가족들에게 쏟아 부었다테헤란벨리의 전도유망한 벤처기업의 팀장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월세 반지하에 살고 있었고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어 라면은 유통기한을 지나고 있었다.




[2002]

 

벤처버블은 꺼졌고회사도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연매출 500억 원의 기업이 급속하게 쇠락하는 과정은 인정하기 조차 어려웠고 결국 사표를 냈다.

 

여러 기업에 입사 서류를 냈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많은 성과를 낸 사람이 있겠냐며 오히려 스펙 부풀리기로 의심받았다헤드헌터를 통해서 연락이 오는 곳은 하나같이 경쟁사들뿐이었다.

 

결국 예전에 같이 일했던 상사가 창업한 회사에 들어갔다.




[2003]

 

입사했던 기업의 내부 비리가 회계사가 감사를 거부할 정도였다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헤드헌터를 통해 다시 전년까지 몸담았던 직장의 경쟁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서 참석했다임원들은 하나같이 예스맨들이고 사장은 조폭보스 같았다입사할 수 없음을 밝혔다훗날 그 사장은 벤처기업협회회장이 되어 있었다.

 

천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으로 창업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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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형이 찾아와 조카의 대학 등록금을 내 달라고 했다내 형편이 예전 같지 않으니 정 어려우면 휴학을 시키라고 했다의외의 반응에 형이 서운해 하며 돌아갔다.




[2005]

 

조카에게 전화가 왔다다행히 국립대라서 등록금이 백만 원 수준이어서 간신히 마련해 주었다.




[2006]

 

조카가 장학금을 탔다고 전화가 왔다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2008]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KIKO사태와 엔화대출로 직격타를 맞은 중소기업들이 쓰러져갔다. 그 여파로 협력사,하도급사들이 또 무너졌다.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의 협력사와 공급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더 이상 제품을 만들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17대 대통령 이명박은 스스로를 경제 대통령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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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살고 있던 동네가 신도시 개발지로 선정되어 다시 집을 옮겨야 했다. 나라에서는 천만 원의 이주보상금을 줬는데 기존의 보증금과 합쳐도 서울 인근에서는 집을 구하기 힘들었다. 8천만 원까지 대출을 해준다고 하지만 이미 사업 때문에 지고 있는 빚도 큰데 그 빚마저 감당할 수는 없어 집값은 싸지만 서울에서 먼 오산으로 집을 구했다.


살면서 18번째 이사를 했다.




[2011]

 

1리터당 휘발유 가격은 2,000원을 넘어섰고원화대비 달러 환율은 1,000원대를 지키기 힘겨웠다.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해 차를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후배 집에서 2~3일씩 얹혀 지내며 일을 했다환율이 좋지 않아 영국 수출 대금을 파운드로 받았다.

 

거래처 사장들의 도와달라는 전화도 뜸해졌다그대신 야반도주했다는 기업들의 소문은 계속 들려왔다.




[2012]

 

집 보증금을 빼서 빚을 갚고 19번째 이사를 했다.

 

잡철공사 사장한테 부탁해서 창고 건물에 EPS판넬로 방을 만들어 거처를 정했다.

 

10평쯤 되는 공간에 서재까지 만들고 가구를 놓으니 꽤 아늑해 보였다.

 

화물차가 도로 옆을 지나갈 때비가 올 때마다 진동이 전해졌다.




[2013]

 

더 이상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기 싫어 시골로 내려왔다이것으로 20번째 이사를 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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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Y형에게 전화가 왔다정리해고를 준비하며 회사에서 사직을 종용한단다. Y형의 직장은 한때는 철밥통 소리를 들으면서도 고액연봉으로 누구나 알만한 회사였다다른 건 몰라도 능력 있는 사람이 그저 나이 50이라는 이유로 해고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건 웃긴 일이다버틸 수 있을 대로 버티는 게 최선이 아니겠냐는 말을 끝으로 Y형과 전화를 끊고 업계 인맥들을 통해 알아보니 정리해고는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이 사회의 자본들은 베이비부머 세대에 이어 기다림 없이 386세대마저 숙청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2015]

 

O와 간단하게 점심과 반주를 했다. O는 낮은 연봉과 가혹한 업무량에 시달리는 IT엔지니어이다지금의 월급으로는 하루하루 사는 것 빼고는 달리 사치를 부릴 수도 재테크를 할 수도 없는 33살의 전형적인 88만 원 세대이다.

 

과거의 나와 같이 그도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가족을 도와야 하는 걱정을 지고 살고오랜 기간 빚도 해결되지 않는 모양이다.

 

담배를 하지 않아 푼 돈마저 쓰지 않고일에 치여 잠자는 시간도 빠듯하니 취미생활이나 연애조차도 하지 못한다쓸 돈도 없지만쓸 여력도 없다.

 

이직을 준비한다지만 한국의 기업들은 다 도토리 키 재기 하는 수준의 업무환경과 급여체계인지라 그 또한 쉽지 않다.

 

꼰대의 훈장질로 들릴 것 같아 내 과거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 동안 부유와 풍요를 만끽해 본 적은 없다. 어찌 보면 가난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처절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고, 그저 그때그때의 환경과 상황으로 보았을 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겠지만 최근에는 내가 노력한 만큼의 응당한, 아니 최소한의 댓가도 받지 못하는 사회로 고착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많이 느낀다.


Y형은 앞으로 어떨까?

 

수십 년의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접고 이제 남은 반평생을 새롭게 살아야 한다. 아마 가난해질 것이다. 자식들이 Y형을 봉양할 수 있는 직업이나 돈벌이를 갖지 못하게 된다면, 그나마 남은 재산과 벌이도 자식들에게 나누어줘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학식과 인품이 있는 사람이니 그 가난을 덤덤하고 여유롭게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O는 어떨까?

 

어떻게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결국 형제와 가족의 연을 끊을 수는 없기에 얼마 안 되는 벌이도 나누어야 할 것이다. 빚은 쉽사리 갚아지지 않을 것이고, 행여 과로로 건강이라도 나빠지면 지금까지 잘 버텨왔던 마음을 추스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스스로 운동도 챙겨서 하려 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수년 전 어느 술집 아가씨가 내게 물었다.

 

자기는 행복해지려고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 돈도 열심히 모으고 인문학 책도 많이 보는데 왜 행복해지지 않느냐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지냐고

 


그러게 말이다. 나도 오래 살아봤지만 크고 긴 행복은 없더라. 아가씨나 나나 다르겠나? 그때 그때의 그냥 작고 짧은 행복을 잡고 살아야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수중에 돈이 없어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먹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면 그거로도 몇 시간은 기분 좋잖아. 그런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말고 이어서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앞으로도 Y형과 자주 만나 과거의 추억을 함께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O와도 시간 나는 데로 만나 이 개 같은 현실과 망해버려야 할 사회와 산업을 욕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아야겠다.

 

 

혹 이 글을 읽은 그대도 나와 같다면, 행복하길 기원한다.







워크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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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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