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3. 17. 화요일
이즈딴지
너무 오래 서 있기만 했고, 갈증도 심하고, 끼니도 걸러 배는 고픈데 가스가 찼는지 불편하기까지 하고, 바로 앞 분식집에는 라면의 자극적인 채취와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게 만드는 떡볶이와 오뎅의 미끈한 미모로 내 자존감을 짓뭉개고 있는, 아, 말 길다. 그러니까 피곤하고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30분이 넘도록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 정류장. 종각의 좌석 버스.
다시 못 갈 곳도 아니고, 특별한 추억이나 사건도 없었고, 그저 평범한 곳인데 항상 내 머릿속에는 이 장면이 그려져 있다. 언제나 떠올리고 있지만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하는 채로. 내가 그 장면을 제대로 색칠해 가며 복원해낸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순간 미친놈처럼 혼자 아! 하고 소리칠 정도였다. 그 장면을 왜 지금까지 지우지 않고 있던 것일까.
하루 일을 마치고, 모든 불을 끄고, 스마트폰을 저 멀리 두고, 전기장판에 전원을 올리고, 참 안경도 벗어야지. 다했나? 물도 한잔 마셨고, 화장실 갈 일도 없을 것 같다. 이렇게 10분만 있으면 금세 잠들어 내일 아침이 온다. 내일 아침까지 내겐 오직 10분이 남은 셈. 그래서 최대한 늦게 잠들려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가장 잘 잠들 수 있는 준비를 해놓고 말이지. 이런 거 보면 난 좀 가학적인가 싶다. 아무튼, 이 시간이 가장 적절하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진한 생각의 배경은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데에는.
종로는 내가 중·고등학생 때 자주 가던 곳이었다. 교보문고나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 역시 지금은 없는 CD를 시중보다 조금 싸게 팔던 종로 4가의 4, 5개 연달아 붙어있던 가게들. 여기저기 구경하다보면 피곤하고 배고픈 상태로 30분 넘게 종각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다. 좌석버스를 타기 위해서.
(출처-오마이뉴스)
좌석버스는 당시 내가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허영 중 하나였다. 좌석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어서 그렇지 일단 타기만 하면 조용하고 여유가 있어 기분이 좋았다. 창가에 앉으면 해방감이, 복도 자리에 앉으면 안정감이 들어 하나 놓칠 것 없이 다 좋았다. 특히 좌석버스 안은 공상에 빠지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이기도 했다. 다만 버스비가 비싼 편이어서 자주 타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그 버스에 앉아 무슨 생각을 그리했을까. 버스에 타면 난 내가 아니었다. 어찌나 많은 상상을 해댔는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인연을 꿈꾸기도 하고, 갑자기 성적이 좋아져 근사한 외국 대학에 가서 정의로운 박사가 되는 상상도 하고, 과정이나 방법은 모르겠지만 엄청난 부자로 사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배가 고파 머리가 아플 지경임에도 이 공상이 길어지면 제발 길이 막혀주길 바랄 정도였다.
그때 나는 언제나 미래를 머릿속에 그렸다. 당시의 내가 아닐 수 있는 미래. 그렇게 될 여지가 충분할 것 같은 미래. 난 이게 정말 좋았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그 당시의 내가 싫었다는 이야기다.
이 장면이 약 10년 후에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제 학생이 아니라 백수, 아니지, 계약직 같은 아르바이트로 법원 근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내 일은 완성된 소장을 사건의 종류에 따라 정리를 한 후, 서류를 꾸려(그냥 엄청난 복사를 하는 것) 법원에 접수하는 것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이고, 그저 몇 개월 했을 뿐이지만,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내가 맡은 소송은 돈과 관련 있다는 것. 소가가 낮으면 단독사건, 높으면 합의사건으로 구분한다는 것. 따라서 단독은 좀 간단하고, 합의는 좀 복잡하고, 복사해야 하는 부수도 2부 정도 차이가 난다는 것. 원고의 99% 이상이 정리금융공사였다는 것 정도다.
일하는데 그것이 뭔지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소장을 읽어볼 시간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고, 읽어본다 한들 이해할 수도 없었다.
대충 그냥 옆에 있다가 들은 것들을 종합해보자면, 일단 국가가 정리금융공사라는 걸 만들었다. IMF 사태 이후로 급증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정리금융공사가 샀다. 금융기관은 이런 방식으로 부실채권을 털어내서 장부를 깨끗하게 만들고는 팔리거나 없어졌다. (생각보다 당시 엄청나게 많은 금융기관이 있었음) 그렇게 사들인 부실채권 중 개인들의 채무에 대해, 해당 법률사무소에서 민사소송을 진행했다. 라는 얘기였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복사·접수만을 하는 나 같은 아르바이트가 필요할 정도로 소송 건수가 엄청났다. 이런 소송을 한 곳에서만 진행할까, 설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돈을 빌리고 돈을 못 갚고 소송까지 당하는 걸까. 뭐, 이 와중에 나라고 별 수 있나? 우리 집도 당했다. 당시 압류딱지가 붙어있는 상태였다. 고맙게도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붙여 놓고 가셨더라. 물론 그 법률사무소 건은 아니고. 인생이 그렇게까지 섬세하거나 극적이지는 않다.
어쨌든 법률사무소에서는 소를 당한 사람 주소지로 소장을 접수하게 했는데, 그게 그나마 법 테두리 안에서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춘천에서 서울, 그 복잡한 서초동으로 좋은 일도 아니고 재판 받으러 오라는 건 법원 입장에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걸까. 덕분에 서울지방 외 법원을 자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서류 더미를 왜 보자기에 싸는지도 깨달았다.
거리도 멀고, 교통편도 복잡하고, 사람들이 딱히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경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분야도 아닌, 그 곳에서 수개월 일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생각을 깊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가끔 서울 밖으로 출장을 갈 수 있었고, 사무실 내에 나만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임에도 내겐 따로 공간이 있었다. 복사기 두 대와 넓은 테이블, 각종 사무기구. 나중에 막내 변호사랑 같이 쓰기도 했지만.
다시 일 얘기로 돌아가야지. 나는 엄청나게 쌓이는 소장원본을 정신없이 분류하고 복사하고 한 부, 두 부 쌓아 올려 보자기에 싼 다음, 양손에 들고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해 가장 가까운 시간의 표를 하나 사고, 플랫폼에서 캔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캬. 생각만 해도 좋다. 내 허영이 10년이 지나 이만큼 커졌다. 좌석버스에서 고속버스로. 갈증이 나면 캔 커피를, 그리고 담배도 피울 만큼.
버스가 오면 담배 하나 더 피우고, 행운의 복권 추첨을 끝낸 아저씨가 내리는 걸 확인하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중간쯤에, 어제는 오른쪽에 앉았으니 오늘은 왼쪽에 앉으면, 버스는 바로 문을 닫고 후진을 한다. 천천히 복잡한 터미널을 빠져나와 바로 이어진 다리를 빙글 돌아 타올라 얼른 직진한다. 잠시 후 쭉 곧은 고속도로가 나오면 절로 한숨을 푹 쉬고 복잡한 마음도 잠시 놓인다.
피곤하고 졸린다. 나 말고 손님이 다섯 명은 되려나. 최대한 편안하게 등받이 각도를 조정하고 잠들기 위해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한다. 그 때부터인가. 내가 좌석버스 정류장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게. 그 생각들은 이미 보이지도 않는 배경일 뿐이었다. 생각은 너무 많은데다가 진하고 잔인했다.
압류딱지가 붙어있는 집. 집안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더 최악은 그 최악이 매일 갱신된다는 것이었다. 적응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굳이 하긴 싫었지만. 눈감으면 어두워지듯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여자 친구와도 헤어진 상태였었다. 어떤 소재건 간에 발작을 일으킬 만한 순간순간이었지만, 그나마 좀 먼 곳으로 떠나고 있다는 게 내겐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것 빼곤 어떤 위로도 없던 때였다. 그러니까 고속버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지. 거기다 10여 년 전, 좌석버스와의 인연도 있고.
당시 내 옆자리를 꽉 채웠던 보자기 두 뭉치에도 처절한 인생이 수십 개였다. 하루에 수십 개씩, 나 같은 인생을 들고 날랐다. 이들은 드라마처럼 가족이 똘똘 뭉쳐 어려움을 해결해낼까? 그럴 리가 있나. 아무튼, 그렇게 서울에서 접수하고, 대전에서, 춘천에서….
일을 하다보면, 그러니까 소에 관련된 서류를 복사하다보면, 그 양이 너무 많아서 사무장 이하 직원들이 총출동할 때도 있다. 어마어마한 양의 어설픈 서류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복사해낸다. 정말 미친놈처럼. 그러다 점심 먹으러 가고, 겨우 담배 하나 피우고, 또 복사한다. 그렇게 일이 끝나면 저녁을 겸해 술을 마신다.
한구석에서 숙련된 미친놈처럼 복사를 하다 보면, 사무실 직원들이 보인다. 그곳은 언제나 채권팀. 한 사람이 컴퓨터로 바둑을 두고 있다. 그러다 수가 막힌다 싶으면 전화를 든다. 내용은 언제까지 갚으면 이자 면제 원금만 상환 가능. 그보다 상환기간이 짧다면 원금도 일정부분 면제다. 통화가 만족스러웠는지 점심 먹은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물려있는 이쑤시개를 맛있게 씹으며 다음 수를 둔다. 그러다 또 수가 막힌다 싶으면 전화를 들고 통화를 시작한다. 나는 그 아저씨가 바둑에서 이기길 바랐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 밤 10시~11시다. 기진맥진하다. 직원 자가용에 끼다시피 하며 꽤 긴 시간 올라온 데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술도 몇 잔 마셨으니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로 바쁘게 향하는 사무소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침 한 번 삼키고 사람이 드문 근처 골목을 찾아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피우는 담배는 항상 맛이 없었다. 지하철 탈 생각 하니 답답하기도 했고.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대충 앉아 담배를 하나, 둘 피고 좀 쉬었다 지하철로 들어간다. 어차피 난 있으나 없으나. 배경인데 뭐 신경을 쓰나. 나도 내가 신경 쓰이지 않아.
한 2개월 정도 지났을 때, 사무장이 복사하느라 바쁜 내게 썰렁한 농담을 하나 했다.
"법에서 점 하나만 바꾸면 밥이다."
아이씨. 웃어주기엔 이미 시간이 묘하게 흘렀다. 이 말을 괜찮게 받을만한 센스 따위 내겐 없다. 복사기만이 조용하고 뜨겁게 소장을 뱉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법 조금만 공부해서 나랑 같이 일하자. 이거 정말 밥 먹고 살만하다. 봐서 알죠?"
흠. 정말 밥이 되긴 되더라. 그곳을 계속 다녔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나. 그렇게 몇 개월을 덕분에 밥 벌어 먹으며 살다 또 10여 년이 흘러 지금은 회사에 정말 질리도록 다니고 있다. 그렇게 불행은 끝이 나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 이 글을 쓰는 나도 편하고 얼마나 좋을까!
하긴, 신데렐라도 아니고.
(출처-디즈니)
가계부를 열어보자. 수입란에 무엇이 쓰여 있는가. '월급' 끝. 가끔 이자와 신용카드 캐쉬백이 억울하게 들어가 있긴 하지만, 수입 항목은 하나. 월급이다. 생계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 월급이 되면 이것도 나름 지옥이다. 뭐, 이렇게 말해도 나도 지금 젊은이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이 지옥을 맛보기도 힘든 요즘 애들은 어쩌지. 아, 정말 억울해. 나 진짜 뭐지 그거, 그래, 나 가난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더하다네? 참나.
가난해지는 방법은 뜻밖에 단순하다. 그냥 살면 된다. 자연스럽게 가난해진다. 부자 되는 건 잘 모르겠다. 그런 게 정말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가난해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 돈이 없다는 걸 경험해보면 돈이 얼마나 프레셔스한지 깨닫게 된다. 다들 속물은 안 되고 싶어 하지만, 마이 프레셔스가 눈앞에 있으면 저도 모르게 손이가요, 손이 가.
하나만 더 이야기 해보자면,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가장 가난할 때, 그러니까 제대하고서, 유일하게 사랑을 했었다. 이십대 초반이니까 당시 내가 완전히 '나'이지 않을 수 있던 때여서 가능했던 것 같다.
(영화 'Nina takes a lover'의 한 장면)
한참 연애하던 때, 몹시 더운 여름이었다. 5일짜리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기증받은 컴퓨터를 또 어딘가로 기부하는 곳이었다. 나의 일은 기증 받은 컴퓨터를 깨끗하게 닦는 것이었다. 육중한 브라운관 모니터와 투박한 본체와 키보드들을 말이다. 용산 근처의 꽤 넓은 창고에서 했는데, 바로 옆은 목공소 였던 거 같다.
먼지도 많고, 더운 건 말도 못한다. 세제를 묻혀 닦고, 날랐다. 조금만 힘을 잘못 줘 닦으면 무거운 브라운관을 못 버티고 오래된 모니터 받침대가 부러지기 일쑤였다. 닦다 보면 플라스틱이 녹기도 했고. 그렇게 짜증도 못 내면서 3일 정도 했을 때, 목공소 사장님이 너무 덥다며 점심을 사주셨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아주 간단한 열무 국수였는데 정말 시원하고 양도 많고 맛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애인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보자고.
그 때 내 꼴을 묘사하자면, 먼지는 말할 것도 없고, 검은색 윗도리는 땀이 젖었다 말랐다 해서 소금이 굳어 무늬가 졌다. 거기다 이 땀 냄새는…. 정말 보고 싶고, 웃고 떠들고 하고 싶긴 한데, 나도 보고 싶어 차마 못 만나겠다는 말은 못하고, 겨우 변명으로 '나 지금 꼴이 엉망인데, 나한테서 바다 냄새 나는 것 같아.'라고 했다. 그녀는 상관없단다. 그냥 만나잔다. 자기도 엉망이라며.
일을 마치고 수압 하나는 끝내주는 수돗가에서 등목을 하고, 머리도 감고, 그녀를 만나러 뛰어갔다. 만나자마자 그녀는 내 옷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괜찮은데?'라고 했다.
그리고 3, 4년 후에 그녀와 헤어졌다. 껍데기 같은 내가 뭐가 좋았겠어. 한시도 돈 문제가 떠났던 적은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하는 공상에 빠지며 살아남았다. 하루에 수십 건, 한 달에 수백 건 씩, 가난한 자들에게 소를 거는 일을 도우며 돈을 벌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가난했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직장을 꾸준하게 끈질기게 다닌 결과, 통장잔액이 드디어 0을 깨고 차오르기 시작했다. 배고프고 피곤하게 서 있던 버스정류장을 지금은 편안하게 무려 98년 식 중고차로 운전을 해가며 도도하게 지나다닌다. 좋은 가죽가방을 장만하기도 하고, 최신 스마트폰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내 삶은 전과 크게 바뀌지 않았다. 머릿속의 장면은 아직도 공상을 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인 버스정류장에 머물러 있다. 좌석버스를 기다리던 고등학생은 가난하지 않을 수 있는 친구였지만, 난 지금 가난하다.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내 삶은 바뀌지 않았다.
작년 일본 출장 중에 캄보디아 출신의 박사 한 분을 만났다.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며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재산 차이가 크더라도 삶의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야 정상적인 선진국이라고. 그가 일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가족에게 필요한 병원 때문이었다. 가난하다고 생명이 위태로우면 그건 어떤 국가냐. 그런 나라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뭐, 이런 경험을 하며 이렇게 살아왔다. 내게 가난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기회가 없는 상태'
라고 답해주겠다. 이 한 문장을 위해 참 길게도 썼다. 여전히 못한 말이 많지만 이제 마무리 하자.
"애인 있어요?", "돈 많아요?"
어떤 것이 쉬운 질문일까. 애인 있느냐는 질문은 대부분 상황에서 마땅치 않은 것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묻지 못할 것은 아니다. 돈 많으냐는 질문은 어떨까. 명확하게 기분 나쁘다. 묻기도, 답하기도. 애인은 보통 한 사람당 한 사람이다. 둘 혹은 그 이상도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제한적이다. 애인의 숫자는 대부분 2진법이면 된다. 있거나 없거나. 돈은 보통 유무보다는 많다 적다로 표현하는데 이 ‘많고 적음’의 범위가 너무 넓다. 더 문제는 그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보다 돈이 더 사생활이 되었고, 어쩌면 사람보다 더 돈이 더 중요해져 버렸고, 어쩌면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렸다.
이즈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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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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