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3. 18. 수요일
컵케익
흔하고 능숙한 친절이 몸에 밴 은행원이 티백 녹차와 반 조금 넘게 뜨거운 물을 부은 종이컵을 홀더에 넣어 건넸다.
"날이 좀 추워졌네요?"
한겨울에도 겉옷 없이 얇은 와이셔츠로 충분한 후덥지근한 은행 안에서 한 모금 차로 추위를 녹이라는 의미야 아니겠지만 접대하느라 어제 늦게까지 마신 술 탓에 마실 것이 궁하던 차였다. 찬물을 조금 더 넣어 달라고 해 미지근해진 아직 다 우러나지도 않은 녹차를 단숨에 넘겼다.
잠이 많이 부족했던지 몸은 시간이 남으면 늘 들여다보던 핸드폰 안의 가십 기사도 읽기 힘든 상태였다. 은행원의 일처리가 끝나기를 기우뚱한 채로 멍하니 앉아 보고 있으니, 손님과 직원자리를 구분하는 넓은 테이블의 경계선 즈음에 얇은 나무로 된 그릇에 네모난 갈색 밀크캬라멜이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부터 사탕이든 아이스크림이든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 주위 사람들이 치과라는 곳을 다녀와 병원에 결제해야했던 수백만 원의 목돈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마다 난 나의 이 바람직한 습관으로 인한 아직 충치하나 없는 내 치아 상태를 밝히는 것으로 그들의 고통이 그들의 습관 탓임을 티 나게 훈계하곤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은 진한 갈색 사각형 밀크캬라멜에 손이 갔다. 캬라멜 하나를 집었고 은행 일을 마치고 일어서 문으로 향하며 캬라멜 투명한 봉지를 풀어 입에 넣었다. 그 색만큼이나 걸쭉한 한 줄기 물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그 순간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공포.
등줄기가 불같이 타올랐다. 주변 사람들은 덤덤했지만 내 공간은 온통 찌그러졌고, 다른 사람의 시간은 평온한데 반해 내 시간은 저 멀리 소실점을 향하여 쏠리기 시작했다. 만화영화에서 곧 잘 나오는 사차원으로 가는 장면을 겪기 시작했다. 다만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은 용감하게 다른 차원으로 뛰어들지만 나는 다른 차원이 무섭게 덮쳐와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죽음 같은 공포’라는 말이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생각할 수 없는,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비로소 경험했다.
"괜찮으세요?"
‘손 좀 잡아주세요’라는 말이 입에서만 맴돌 뿐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쪼그려 앉은 지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이 지나니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다.
"체를 했나 봐요..."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운전을 하는 동안 좀 전의 그 익숙하지 않은 느낌은 좀 더 가셨지만, 몸속 어딘가부터 계속 올라오려하는 그 방금 전 경험에 대한 두려움은 좌우 백미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몸을 경직시켰다. 병원에 도착하여 잠시 대기하는 동안 물 한 모금을 머금으니 다시 그 느낌이 올듯하여 화장실로 달려가 뱉었다.
"체를 했나 봐요. 제가 방금 캬라멜을 하나 먹었는데 쓰러질 뻔 했거든요."
의사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캬라멜 먹었다고 체를 하지는 않는데요? 이상하네. 일단 약을 드릴게요."
집에 와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단 것 뿐 아니라 어떤 음식을 입에 대어도 그 때 그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특별히 몸 어딘가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몸을 지배할 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처방받은 약이 남았음에도 다음날 다시 병원으로 갔다. 상태를 얘기하니 의사가 다른 약을 처방해 주겠다며 먹어보고 3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 몇 번 먹으니 저 깊은 구덩이에서 조금 올라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심하게 체를 했었나?
"조금 나아지셨나요?"
"네. 저번 약보다 잘 듣는 것 같아요."
"근래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사람 있나요. 다 비슷하죠."
"제가 두 번째 드린 약이 위장약이 아니라 진정제 종류거든요. 제 생각에 체한 게 아닌 거 같은데 혹시 계속 그런 느낌으로 불편하시면 시간 내서 정신과에 한번 들려보세요. 그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소개해 드릴게 요."
"정신과요?"
차로 한 시간 정도 운전해서 간 병원은 인천에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병원하고는 좀 달랐다. 일단 보통 병원하면 떠오르는 단색 종류의 깔끔한 인테리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란하지도 않았다. 차분한 색조의 좀 오래된 커피숍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할 까?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병원을 방문한 사람끼리 얼굴을 마주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병원 동선에도 세심한 신경을 썼던 거 같다.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혈액형 테스트 같은 질문지를 받아들고 수십 문항에 답을 채운 다음에야 볼 수 있었던 의사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영화를 보면 나오는 말 짧고 옳은 말 툭툭 던지는 할아버지가 아닌-많아봐야 내 나이 정도의 젊어 보이는 여자였다.
내가 하는 일이 모르는 사람 만나 상담하는 일이라 나는 평소 사람 얼굴만 봐도-물론 점쟁이만큼 아닐지라도- 이 사람이 어떻게 자라왔나 지레 짐작해왔는데, 내 판단으론 잘 자란 여자였다. 지금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어렸을 적 고생을 한 사람은 절대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의 여유 있는 얼굴은 흉내 낼 수 없다.
"우울증이 좀 심하시네요.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두껍게 따뜻한 목소리였다. 파스텔 톤. 우울증이라니. 아이큐 테스트 같은 시험지 몇 문항으로 우을증을 어떻게 판단하지? 괜히 젊은 여자에게 속내를 내보이기도 싫었고스스로 뭐 하러 여기까지 왔나 하는 자책감에 굳이 과장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뭉크가 절규를 그린 것이 자기 경험일 수 있겠구나 하는 경험을 했어요."
의사가 웃었다.
"그래요? 그 때 어떻게 하셨나요 그림의 그 사람처럼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나요?"
"한 5분 즈음?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그냥 주저앉았어요. 다음에 물을 마시려고 했는데 물도 못 마시겠더 라고요. 잠바를 벗고 찬바람을 쐬려 했는데 찬바람이 느껴지지가 않고요. 더웠어요. 떨리고. 무섭고."
"그 후는 어떻던가요?"
"계속 무섭죠 뭐. 그 공포감이 뒷주머니 지갑처럼 잊을만하면 문득문득 계속 생각이 난다고할까요."
"무엇이 무섭던가요?"
"선생님은 모르실거예요. 그냥 말 그대로 공포예요. 설명하기 힘든. 머리는 멀쩡한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고나 할까... 아니요. 말로는 설명을 못 하겠어요."
"네. 불편한 경험이죠. 하지만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에요. 음식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거 있으세요?"
"술?"
다시 그녀가 웃었다. 그 질문으로 인해 평생 처음으로 내가 남한테 얘기할 만한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 빼고는 딱히 음식 탐을 내본 기억이 없었다.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좀 신기했고 갑자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혹시 남과 좀 다른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특이한 경험요?"
"네. 가령 부모님한테 맞았다던가 아니면 죽을 고비를 넘겼다던가 뭐 그런."
"가난은 했지만 평생 부모님한테 맞은 적은 없는 거 같아요. 아주 어릴 적에 동생과 싸우다 엄마한테 혼난 거 빼고는요."
"가난했어요?"
"네."
"어느 정도로요?"
"밥 먹기 힘들 정도로요. 말 그대로 밥이요. 쌀. 집에 쌀이 없었던 기억이 꽤 있거든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까지도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았으니까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겠네요."
"부모님을 원망해본 적은 없는 거 같아요."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으세요?"
"없어요. 아니요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워했었나? 그런 기억이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싶어요. 지금으로선."
"어렸을 때 쌀이 없을 정도면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도 못 가지고 다른 아이들처럼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었었을 텐데도 다른 친구를 부럽다거나 부모님이 원망스럽다거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세 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하는 거 다 사치였던 거 같아요.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냥 시간이 어서 흐르기만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시간요?"
"네. 어서 커서 군대 갔다 와 집을 나가는 것이요."
"시간이 흐르면 뭐가 달라진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달라지거나 그대로거나 아무 상관없었어요. 그냥 그 당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 는 것뿐 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군대를 갔다 와서 집을 나왔나요."
"정확하게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왔어요."
"기분이 어땠어요?"
"그냥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 그 정도."
"사춘기는 어땠나요?"
"사춘기요?"
"네. 사춘기요."
이번에는 내가 웃음이 났다. 이 젊은 의사 선생님은 인생에 대하여 잘 모르는 듯싶었다.
"아니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사춘기요."
"그래도 여자 친구를 사귄다든 포르노를 본다든가 도색잡지를 본다든가 그 나이 때 많이 하는 행동들 있잖 아요."
"......"
"그런 경험이 없으세요?"
"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뭐 그런 생각 빼고는 이성에 대한 경험은 생각해보니 없네요."
"진짜요? 자위를 해본 기억도 없으세요?"
"네.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거 같아요. 나만의 공간도 없었고. 6집이 화장실 하나를 같이 쓰던 그런 집에 살았거든요."
"자랄 때 친구들이 없었나요? 보통 그 나이 때는 그런 이야기 많이 했을 텐데요."
"친구는 항상 많았어요. 그런데 그냥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거 같아요. 일부러 흘렸던가. 잘 모르겠어요."
"성 경험은 언제 처음 했나요?"
"대학교 때요."
"그때까지 그럼 이성에 대하여 생각을 안 하고 살았어요?"
"잘 모르겠어요. 정말 기억이 없어요.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
답답하지만 정말 기억이 없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싶다.
"특별히 싫어하는 거 있으세요?"
"음식?"
"아뇨. 행동이라든가 어떤 상황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이요."
"뒤로 가는 거 싫어해요. 전화벨 소리도 싫고요."
"뒤로 간다는 게 무슨 말이죠?"
"음.. 예를 들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신촌에서 강남을 가려면 이쪽에서 타도되고 건너서 타도되잖아요? 순환선이니까요. 갈 때 타고 온 쪽으로는 절대 안타요. 반대편으로 타죠. 어떤 길을 갈 때도 보통은 온 길은 되돌아가지 않아요. 조금 돌더라도 다른 길로 가려고 하죠."
다시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거 같아요?"
"지루하잖아요. 같은 것을 또 본다는 게. 지겨운 거 싫거든요."
"전화벨은 왜 싫죠?"
"아, 그건 확실히 알아요. 전화벨 울리면 엄마 아빠가 많이 싸웠던 거 같아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했는데 그럼 부모님께 제일 미안했던 거 딱 한 가지만 지금 생각나는 거 말해보 세요."
"그건 명확하게 잘 기억해요. 정말 미안했던 거 있거든요. 엄마한테.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프라모델을 사 오라고 한 적이 있어요. 미술시간이었나 조립식 탱크나 비행기요. 그 나이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겨울이었 는데 아침에 일 나가는 엄마를 한참 따라가서 그것을 사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엄마가 돈이 없었게 뻔한 데. 그때 길거리에서 내 앞에서 울던 엄마 얼굴이 지금도 너무 뚜렷이 생각나요."
"그 뒤로 또 그런 적 있어요?"
"아뇨. 그 뒤로 엄마한테 뭐 사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냥 없으면 없는 대로 학교를 갔어요."
"그게 미안해요? 애들이면 당연한 행동인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한참을 말없이 쉬었다.
"착한 아들이었네요."
"저 착하다는 말 되게 싫어해요. 그런 말 쓰지 마세요. 착하다는 거 바보 같다는 소리로 들리거든요. 하여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되나요? 약을 먹으면 되나요?"
"어린 당신과 어른이 된 큰 당신 두 명이 있네요. 그런데 그 중 한명이 다른 한명을 잊으려고 해요. 그러지 마시고 어린 당신과 계속 대화를 하세요."
"대화요? 아니 미친놈도 아니고 자기랑 대화를 해요?"
또 웃는다.
"네. 그냥 미쳤다고 생각하고 대화를 하세요. 아이한테 너무 걱정 말라고 계속 안심을 시켜주세요. 괜찮아. 괜찮아. 이제는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 있고 사고 싶은 것도 살 수 있잖아?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 고 그 아이를 잊으려 하지도 말고 이젠 괜찮아' 하고 계속 안심을 시켜주세요. 여전히 그 아이가 불안해하 고 있거든요. 계속 억지로 잊으려하고요. '이제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안 흘러도 너는 안전해 그러니 불안해 하지 마' 그렇게 다독여 주세요. 가엽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괜찮아 하고 다독여만 주고 '힘들었지?' 하고 얘기해 주고 그러면 되요."
"그것만 하면 되요? 그럼 이런 증상이 없어지나요?"
"아마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지 몰라요. 그래도 좋아질 거예요. 조그만 당신이 불안감에서 벗어나면 많이 좋아질 거예요. 그리고 대화한 것을 글로 써보실래요?"
"글이요? 살면서 일기도 몇 번 써본 적 없는데요. 글 같은 거 별로인데..."
"아무 글이나 좋아요. 그냥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자신한테 쓴다고 생각하고 써보세요. 가급적이면 다음 에는 그 글을 저한테 보여줬으면 좋겠고요. 약을 조금만 드릴 테니 거르지 마시고 드시고요. 술은 가급적 드시지 마세요. 별로 안 좋아요. 술 대신 좋아하는 먹을 것을 찾아보세요. 좋아하는 놀이도 찾아보세요. 지 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꼭 하세요. 이젠 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정말 늙어서 못하잖아요. 아참. 가실 때 돌아서 가지 마시고 왔던 길로 꼭 가세요. 그런 거부터 하나하나 차근히 해봅시다."
"네."
평소 같으면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갔으니 돌아올 때는 아마 강변북로로 왔을 것이다. 조금 언짢지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컵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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